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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19일

평양시간


제 15 회


제 2 장


6


협보가 보낸 전갈을 받은 주몽은 즉시 졸본천주변에서 거두어들인 곡식전부를 모둔곡으로 보낼 결심을 내렸다.

천하를 얻으려면 먼저 민심부터 보살필줄 알아야 한다는것이 어머니로부터 간곡하게 넘겨받은 당부였던것이다.

류화어머니가 손수 싸주었던 곡식종자들로 거두어들인 첫 수확이였다.

주몽의 결심을 알게 된 오이는 즉석에서 수레의 호송을 자기가 맡겠다고 자청해나섰다.

말갈족과의 싸움이 박두한 때여서 많은 군사들을 호송인원으로 뗄수 없기도 하거니와 호송도중 혹간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되는 그들의 피와 땀이 어린 귀중한 곡식이였다.

이렇게 되여 여섯명의 군사와 오이는 십여채의 수레를 끌고 모둔곡으로 향하는 산협길에 들어섰다.

모둔곡으로 가는 길은 골짜기를 따라 뻗었는데 가면 갈수록 골이 깊고 숲이 무성해 저도 모르게 숨이 컥컥 막히였다.

사람이고 말이고 온통 땀범벅이 되고말았다.

다행히도 수레를 끄는 토종말은 비록 키가 작달막하지만 힘이 세고 동작이 민첩해서 수렁판이든 비탈길이든 거침없이 잘 달렸다.

길은 여간만 험하지 않았다.

한낮에 녹아내린 눈석이물이 길바닥에 쌓인 락엽무지속에 츠렁츠렁 고여 질쩍이는데다가 인적이 드물다보니 다래덩굴이나 이름모를 잡관목들이 엉켜져있어 언제 사람이 다녀봤는지 도무지 분간할수가 없었다.

울창한 수림을 벗어날무렵 또다시 좁고 긴 골짜기가 나타났다.

제일 우려했던 수림속을 무사히 빠져나오자 오이는 지친 군사들에게 잠시 쉬다가 떠나자고 이르고 주변의 지세를 주의깊게 살폈다.

말갈놈들이 수시로 싸다니군 하는 원시림속을 아무 정황없이 지나온것이 아무래도 꺼림직했다.

무덕무덕한 떨기나무사이로 작은 시내가 바라보였다.

산협길은 그 시내를 끼고 서북쪽골짜기를 따라 활등처럼 굽어들었고 산비탈 여기저기엔 해묵은 가랑잎들과 떨기나무숲이 무연히 펼쳐져있었다.

골짜기우를 이윽토록 바라보던 오이는 산중턱에 칡줄로 동여맨 떨기나무단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무군의 소행인듯 싶은 그 나무단들은 금시 굴러내릴듯 경사받이에 위태롭게 세워져있었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수상했다.

(만약 놈들이 저기에 매복하고있다가 화공을 들이댄다면.…)

오이는 재빨리 군사들을 일으켜세우고 수레들을 작은 시내가 흘러내리는 건너편쪽으로 은밀히 뽑도록 했다.

워낙 좁고 경사가 급한 골짜기인지라 십여대의 마차를 단번에 다 뽑을수가 없었다.

마지막 두대의 수레를 뽑아내려 할 때였다.

방금전에 지나온 울창한 수림속에서 와- 함성을 지르며 말을 탄 말갈놈들이 짓쳐나왔다. 멀리서부터 조용히 뒤를 몰래 따라온 놈들이였다.

오이는 주저없이 칼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내가 저놈들을 맡을테니 자네들은 빨리 량곡들을 이 골안에서 뽑아 놓으라구. 꾸물거리다간 곧 저우에서 불덩이들이 쏟아져내릴걸세.》

미처 누구도 말릴새없이 달려나간 오이는 놈들의 무리복판에서 쌍검을 바람개비돌리듯 하였다. 좌우충돌하며 이리치고 저리치는 오이의 용맹한 모습앞에서 적들은 넋을 잃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놈들은 저들의 머리수를 믿고 검질기게 달라붙었다.

펀뜩 오이의 머리속에는 놈들을 저들의 함정에 몰아넣어 불태워버려야겠다는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앞으로 달려드는 두놈의 말갈기병놈들을 쳐갈기고 적들이 매복하고있는 좁고 긴 골짜기를 바라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말갈놈들은 오이가 진짜로 달아나는줄로 알고 다급히 말을 몰아 뒤쫓았다.

산우에 매복하고있던 적들이 때를 기다린듯 어지러이 불화살을 내쏘았다. 이어 불을 단 나무단들이 와당탕퉁탕소리를 내며 골짜기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화약에 불이 당긴듯 바짝 마른 떨기나무들이 삽시에 불길을 치솟구었다.

뱀의 긴 혀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불길앞에 당황한 말갈놈들은 서로 먼저 빠져나가겠다고 저들끼리 치고받으며 허둥거렸다.

앞에도 불, 옆에도 불, 뒤에도 불이였다.

길길이 날뛰는 말우에서 떨어지는 놈, 저들끼리 맞부딪쳐 상하는 놈, 연기에 질식되여 땅바닥에서 버둥거리는 놈, 정신이상이 생겨 그대로 불길속에 뛰여드는 놈, 하여간 별놈들이 다 있었다.

오이는 잽싸게 말을 몰아 연기속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리고는 숨어있던 군사들과 함께 산을 에돌아 등성이로 올라 활을 내려쏘기에 여념이 없는 매복한 말갈군사놈들을 족쳐버렸다.

아래골짜기에선 아직도 놈들의 비명소리가 그칠새없이 울려나오고있었다.

《하하하, 꼴 좋군. 굼벵이, 무숙이, 바구미, 떡정이, 거저리, 오사리 다 모여들었군.》

군사들이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였다.

군사들중의 하나가 손으로 수레들을 은페시켜놓은 장소를 가리키며 다급히 부르짖었다.

《앗, 오이무사님, 저기 수레가…》

너울거리는 불길이 점차 수레쪽으로 번져가고있었다.

《수레가 위험하다, 군사들 빨리!》

오이가 이렇게 웨치며 앞장서 내달렸다.

그들이 달려갔을 땐 벌써 두채의 수레가 화염속에 휩싸여버렸을 때였다.

《위험하오이다.》

《비켜라!》

막아선 군사들을 힘껏 밀쳐버리고 오이는 서슴없이 화광이 충천하는 불길속에 뛰여들었다. 화염이 눈앞을 가리우고 뜨거운 열기가 금시 온몸을 바늘로 찔러대는듯 하였다.

(구원해야 한다, 이게 어떤 곡식이라고…)

오이의 머리속에는 이 한가지 생각만이 꽉 차있었다.

흐리마리해지는 의식속에 가까스로 수레를 찾아냈을 땐 불속에서 지랄발광 요동치던 말들이 멍에를 끊어버리고 어디론가 달아나버렸을 때였다.

불길에 온몸이 그슬리고 몸에 걸친 가죽옷은 점점 졸아들어 숨조차 내쉬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을 조였다.

《쓰러져선 안된다, 안돼!》

오이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며 수레채를 들어올리려 안깐힘을 썼다.

끄떡도 하지 않는다. 숨이 점점 가빠났다.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가. 이러다 내가 정말 죽는것이 아닐가? 문득 오이를 떠나보내며 당부하던 주몽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이, 이 량곡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모둔곡마을까지 가닿아야 하네!》

근심을 가득 실은 협보의 얼굴도 어려온다.

《형님, 주저앉아선 안되오. 모둔곡사람들이 지금 량곡을 기다리고있소. 어서 일어나라요!》

웅글은 마리의 목소리도 합쳐진다.

《사생동고를 맹약하던 때의 일을 벌써 잊었소? 난 형님이 그렇게 나약한 사내인줄 정말 몰랐소.》

오이는 이를 악물고 수레채에 어깨를 들이밀었다.

수레가 조금 들리였다. 불길이 옷자락에 당기기 시작했으나 오이는 이미 그것을 감각하지 못하였다.

어깨를 파고드는 아픔도, 군사들이 웨치는 소리도 전혀 듣지 못한채 그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내짚었다.

한걸음, 또 한걸음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웠고 불길너머 군사들이 소리치는 몇발자국밖에 안되는 그곳까지의 거리가 천리인듯, 만리인듯 아득히 멀어보였다.

오이는 지금 불길속이 아니라 아득한 저 멀리 추억의 솔대문을 지나 비참한 왕실목장의 말몰이군으로 노예의 생활을 강요당하여야 했던 그시절을 다시 밟고있었다.

…중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창을 거머쥔 시위군사들이 우르르 오이의 집으로 쓸어들었다.

《역적 대장군 원충을 잡아들이라는 상감마마의 어명이 내렸다.

원충은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험상궂은 칼자리가 난 수장이 마당이 떠나갈듯 악청을 내질렀다.

모든것을 각오하고있은듯 오이의 아버지 원충은 갑옷을 입은채로 태연히 그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 어인 일이시오이까? 장군께서 무슨 죄가 있으시다고.…》

두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녀인이 역적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깜짝 놀라 버선발로 달려나오며 매여달렸다.

《부인, 내 잠간 다녀올테니 걱정일랑 마오.》

원충은 녀인을 일으켜세우고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였다.

《아버지-》 밖에 나가 뛰여놀던 오이가 금방 잡은듯 싶은 물오리 한마리를 손에 쥐고 달려들어오며 기쁨에 넘쳐 소리쳤다.

《단살에 꿰였소이다, 아버님.》

그러는 아들을 닁큼 품안은 원충은 부서져라 아들을 껴안으며 수염이 꺼칠한 볼로 아들의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그리고는 전에 없던 아버지의 그 미쳐버린듯 한 행동에 겁기가 가득 실린 아들의 두눈을 똑똑히 들여다보며 뜨거운 입김을 내쏟았다.

《용타. 내 아들아! 앞으로 무술을 잘 닦아 꼭 훌륭한 사내대장부가 되여야 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소이다.》

숱진 장미를 꿈틀거리던 아버지의 크고 검은 두눈에서 피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럼 잘있거라.》

원충은 오이를 내려놓고 뒤도 돌아봄이 없이 창대를 꼬나들고 서있는 시위군사들앞으로 걸어갔다.

하인과 시녀들, 유모가 터치는 울음소리에 마당은 불시에 통곡바다가 되였다.

그제서야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차린 오이는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그의 두발에 매달려 파들파들 떨며 울음을 터뜨렸다.

원충은 자기의 발목에 매여달린 아들을 무섭게 노려보며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울음을 썩 그치지 못해? 이제 크거들랑 이 아비가 어째서 이 길을 걸어갔는지 알게 될거다.》

피터지는 그 웨침을 오이는 멍해서 듣기만 했다. 아직 그렇게 노성을 터치는 아버지의 호령을 난생처음 들어보는 오이였다.

그 원성을 오이의 가슴에, 바람부는 황토길에 그리고 노을타는 하늘에 뿌린 원충은 시위군사들속에 에워싸여 부여의 궁성으로 향했다.

후날 들은데 의하면 대장군 원충은 해모수, 조선국 련합군의 군량조달을 질질 끄는 금와왕의 속심을 간파하고 상소를 올려 그것이 겨레의 리익을 해치는 정당치 못한 처사임을 간하고 자기가 이끄는 군사들로 위험에 처한 그들을 구원할 의향을 내비쳤다.

바로 이것이 간신들과 금와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였던것이다.

바르지 못한 임금밑에서 충의란 오히려 화를 불러오는 법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그날 아침 원충은 단두대우에서 이렇게 웨쳤다고 한다.

《아, 절통하구나! 내 한생 나라와 임금앞에 충의에 살다 충의로 죽겠다고 맹세다졌건만… 이 땅의 충신들을 알아줄 그런 임금은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고-》

그 웨침은 산천초목도 비분에 떨게 하였으니 아, 신하된 충의를 다하고저 심신을 바쳤건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이들 과연 백이였더냐, 천이였더냐.

금와왕은 오랜 문무중신들의 눈이 무서워 비록 원충은 죽였을망정 그의 삼대를 멸하는 형벌은 취소하는 《은사》를 베풀었다.

하여 그의 일가는 하루아침에 신분을 박탈당하고 어머니는 관노로, 오이자신은 궁실말목장의 말먹이군으로 굴러떨어졌다.

화는 언제나 쌍으로 오는 법이라 관노로 끌려가던 어머니가 도중에 강물에 뛰여들어 자살하였다는 비통한 소식이 또다시 오이를 쓰러뜨렸다.

아! 어머니, 아버지없이 어머니마저 그렇게 가면 난 어찌 살란 말이오이까? 나도 데려가주사이다, 데려가주사이다.

한많은 이 세상, 어쩌면 이다지도 모질단 말인가.

삼일낮, 삼일밤을 식음을 전페한채 기진해 누워있던 오이는 이를 악물고 뛰쳐일어났다.

자기 일가에게 크나큰 불행만을 들씌운 가문의 원쑤들을 기어이 복수하리라는 일념만을 가지고 이악하게 무술을 닦았다.

그해 여름이였다.

한낮부터 세찬 바람이 불고 하늘이 시꺼멓게 변하더니 대줄기같은 소낙비가 쏟아졌다. 번개불은 장검을 휘둘러 연방 하늘을 가르고 초원은 넋을 잃은듯 태질하며 아우성쳤다.

기겁한 말떼는 저마다 놀란 소리를 지르며 광활한 초원의 사방으로 흩어졌다.

《서라!》

《이놈들아 돌아서라!》

궁실말몰이군인 그들 세사람- 오이, 마리, 협보는 소리소리 지르며 채찍을 휘둘렀다.

꽈르릉!- 또다시 우뢰가 터진다.

말들은 공포에 휩싸여 무섭게 울부짖으며 어쩔줄 몰라 마구 들구뛰였다.

몰풍스러운 비바람은 초원을 휩쓸며 사람과 짐승들을 어디론가 말끔히 걷어갈듯 휘몰아쳤다.

《수림쪽으로!… 수림쪽으로 몰아라!》

너무도 소리를 질러 목이 다 쉬여버린 오이가 천방지축으로 달아나는 말무리에 채찍을 안기며 안타깝게 소리쳤다.

자칫하면 온몸이 그대로 굴러떨어져 광란하는 말무리의 말발굽밑에 짓밟혀버릴수도 있었다. 그러나 겁먹은 미련한 말무리를 돌려세우지 못한다면 그 후과는 더욱더 치명적이다.

온 무리가 천길벼랑아래로 떨어져 몰살되여버릴수도 있는것이다.

겨우 말떼들을 수림속으로 몰아넣었을 때는 저녁무렵이였다.

그런데 말을 세여보니 새끼말 하나가 없었다.

그들은 다시 말을 찾으려고 초원을 헤맸다.

기복을 이룬 구릉들과 물이 괴여 질쩍거리는 진펄들, 시뻘건 흙탕물이 콸콸 쏟아져내리는 산골짜기… 그 어디나 샅샅이 다 뒤졌으나 망아지는 종내 찾지 못하였다.

화가 들이닥쳤다는 생각에 셋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아니나다를가 목장관리놈들은 노발대발하여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지독한 욕설과 함께 채찍이 윙윙 소리를 내며 온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말들을 길들이던, 말들을 때리던 그 채찍을 사정없이 휘둘러댔다.

《야, 이새끼들아! 그래 네놈들의 몸값이 망아지값에나 가는줄 알아? 이 말보다도 못한 노예새끼들아!》

그들은 죽도록 매를 맞았다. 형구실을 하느라 마리, 협보를 막으며 오이는 날아드는 채찍을 더 많이 맞았다. 노예로서는 피치 못할 운명이였다.

옷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된 그들 셋은 끝내 정신을 잃고말았다.

오이가 정신을 차리고보니 새벽녘이였다.

주룩주룩!…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있었다.

싸늘한 랭기, 배고픔 아니, 그보다도 매맞은 온몸이 쑤시고 아파 견딜수 없었다.

뒤늦게야 그는 어둠속에서 자기를 지켜보는 마리와 협보를 알아보았다.

마리는 눈물을 씻으며 씩 웃었다.

《형이 죽을가봐 난 겁이 났댔어.》

《여긴 어디야?》

오이가 묻자 협보는 울분을 터뜨렸다.

《마구간이야. 그놈들이 글쎄… 우릴 마구간에 처넣었어.》

오이는 그제야 자기가 마구간에 누워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말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물을 씹고있었다.

그 모양을 무심히 지켜보는 오이의 눈에서 별안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리가 오이의 손을 더듬어잡으며 울먹이였다.

《오이형, 아프나?》

울음을 삼키느라 제 팔목을 꽉 깨물었지만 오이의 앙다문 이발새로 듣기에도 가슴을 저미는 소리가 새여나왔다.

상처의 아픔보다도 말보다도 못한 인생이 저주스러워 눈물은 그냥 거침없이 쏟아져내렸다.

하늘이 설사 깨지고 땅이 몽땅 꺼져내린대도 절대로 울지 않으리라 마음을 도슬러먹고 살아오던 오이였다.

울어선 뭘해, 운다고 노예의 운명이 달라질수 있단 말이야? 하는 생각에 배고파도 울음을 참았고 추워도 입술을 앙다물었었다.

허나 이때만은, 이때만은 아무리 울지 않으려고 해도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꺽꺽 울음을 삼키며 검불속에 얼굴을 틀어박고있던 오이는 끝내 온 내장을 몽땅 토해내는듯 한 피울음을 터치고야말았다.

《아버지! 어머니! 말보다도 못한 날 왜 낳았어요?》

오이는 태질을 하며 울었다.

그들은 다시 부둥켜안고 흐느껴울었다.

매맞은 아픔보다도 버림받는 인생이 분하고 한스러워 울었다.

마리는 가난한 하호의 아들이였다.

아버지가 수자리살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후 어머니마저 밭고랑에 쓰러지자 불쌍한 그들 오누이는 빚값에 노예로 팔려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 마리는 일곱살, 누이동생은 다섯살이였다.

생활처지가 가까운것만큼 사람들을 가깝게 하는것은 없다.

얼굴이 여위고 세상만사에 랭담해진듯 말이 적어진 그들은 친구로 되였다.

세상살이가 하도 어려워 조숙해진탓인지 생활의 고통도 가슴아픔도 묵묵히 감수하고 이겨낼줄 알았다.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할 때마다 그들은 슬픔을 함께 나누며 불공평한 세상을 저주하군 하였다. 때로는 도망쳐볼 생각도 하였다.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자유롭게 살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싶은 갈망이 그들의 마음속에 움트고있었던것이다.

바로 그무렵, 그들의 생활속에 주몽이 뛰여들었다.

그것은 그들의 생활에 새로운 활기와 희망을 북돋아준 사변이였다.

처음에 그들은 초원이나 산비탈에서 사냥을 하는 주몽의 모습을 여러번 보게 되였다.

그의 활쏘는 재주에 입을 딱 벌리며 놀라군 했지만 자기네와는 하늘땅만큼이나 차이나는 왕자대우를 받고있는 주몽인지라 멀찌감치에서 구경을 하고 풀덤불에 몸을 숨기군 하였다.

말꼬리나 따라다니는 그들에게 있어서 부여왕실의 별궁에서 호강하는 주몽은 아득히 높고 어마어마한 존재였던것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일컫는 어느 가을날 아침이였다.

말들이 한창 살이 오르는 시기에 우정 늦장을 부린다고 새벽부터 다몰아대는 목장관리놈들의 채찍에 쫓기워 변변치 못한 귀밀죽마저 건늬고 말방목에 나선 그들은 허기를 이기지 못하여 따뜻한 가을볕이 내려쪼이는 안침한 바위등에서 새우잠에 들었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말발굽소리에 선잠에서 깨여난 오이는 절풍을 눌러쓰고 어깨엔 활과 전통을 멘 주몽의 모습을 보게 되였다.

《너희들 어디 아프니?》

새별같은 눈정기가 빛나는 소년의 목소리에는 동정의 빛이 짙게 어려있었다. 오이는 대답대신 도리머리를 저었다.

누렇게 황이 든 오이의 얼굴과 아직도 잠에서 깨여나지 못한 마리와 협보를 잠간 바라보던 주몽은 말안장에 데룽데룽 매달려있는 사냥물중에서 큰 토끼 두마리를 끌어내여 내여밀었다.

《난 매일 아침 이 등판에서 말을 방목하는 너희들을 지켜보군 한단다.

말을 참 잘 타더구나. 너희들 아침을 굶었지? 이걸 구워먹어.》

말먹이노예로 굴러떨어진 이후 처음 들어보는 인정어린 말이였다.

두눈을 내려깐채 주몽의 말을 듣고있던 오이는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싫소이다!》

비록 노예의 사슬을 걸머졌을망정 권세있는 놈들의 동정의 대상이 되는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듯 주몽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용서해. 난 다만 너희들과 친하고싶었을따름이야.》

주몽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고삐를 쥐고 돌아섰다.

친하고싶다고? 우리같이 천한 노예들과?

오이는 착잡한 심경에 휩싸여 멀어져가는 주몽과 발치에 놓인 두마리의 토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음날 아침 말방목을 나가려던 오이네는 마구간뜨락에서 꿩 두마리를 발견하게 되였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여서 어리벙벙해있던 마리와 협보는 방목지에서 그 꿩을 구워먹기로 작정을 하고 품속에 넣었다.

그런데 과연 기이한것은 다음날 아침에는 메토끼 두마리가 뜨락에 늘어져있었고 또 다음날에는 메비둘기 세마리가 떨어져있었다.

메돼지나 노루같은 큰 짐승은 아니였어도 그런 작은 짐승고기들은 오이네의 굶주린 배를 채우는데 다소나마 도움을 주었다.

《야, 오이형, 이건 분명 산신령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내려보내는 고기일거야.》

영문을 모르는 마리가 그런 짐승들을 주어들고 기뻐 소리칠 때 협보는 제 성미그대로 깜찍한 궁리를 해냈다.

《우리 오늘 밤에 자지 않고 지켜보자. 신령님이 어떻게 생겼나보게. 혹시 알겠니? 누구도 못 본 신령님을 우리가 보게 될지.…》

마리가 덴겁을 하며 협보를 말렸다.

《야, 너 정신있니? 신령님을 보려다가 천벌을 받자 그래?》

오이는 첫날부터 무엇인가 짚이는것이 있었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좋아라 웃고 떠드는 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산판에 방목을 올라와서는 꿩이며 메비둘기, 산토끼를 구워먹군 했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처럼 그들이 불을 피워놓고 산토끼를 구워먹고있는데 사냥을 나왔던 대소왕자네 형제가 그것을 보게 되였다.

《아하, 이 자식들… 그 토끼가 어디서 났지? 내가 쏘아맞히는걸 몰래 지켜보다가 훔쳤구나. 도둑놈의 새끼들.…》

대소왕자가 그들을 아니꼽게 쏘아보며 소리쳤다.

《우린 훔치지 않았소이다.》

성미급한 마리가 한발자국 나서며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물어볼것이나 있소이까! 형님, 이래서 늘 우리 사냥물이 잡은것보다 적어지군 했군요. 이 노예새끼들이 감히 우리 사냥물로 배를 채워? 더러운것들.…》

구워낸 토끼고기를 발로 짓뭉개놓고 대소왕자형제들은 피맛에 주린 승냥이들처럼 달려들어 오이네를 마구 치고 차고 때렸다.

바로 그때 주몽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내가 애들에게 사냥한 짐승들을 주어 구워먹는데 웬 행패질이요?》

주몽은 마파람을 일구며 사정없이 내려지는 채찍을 휙 나꾸어채며 소리질렀다. 서리발같은 그 기상앞에 감히 어쩌지는 못하고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며 씨근거리던 대소가 별안간 랭소를 하며 침을 탁 뱉았다.

《흥, 그러니 노예놈들과 단짝이 됐단 말이지. 그게 정 소원이라면 내가 풀어줄가?》

대소는 동생왕자들을 끌고 가버렸다.

부걱부걱 괴여오르는 분노를 참듯 멀어져가는 그들의 뒤등을 오래도록 쏘아보던 주몽이 한풀꺾인 목소리로 오이에게 사죄했다.

《정말 미안하구나. 내 잘못으로 그만…》

그것이 어찌 주몽의 잘못이랴?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모든 수치와 모욕이 정말로 주몽의 값눅은 동정이 초래한 재앙으로만 여겨질뿐이였다.

《썩 물러가라. 다신 여기에 얼씬거리지도 말아. 우린 비록 노예지만 거지는 아니란 말이야. 으흐흑.…》

셋중에서 제일 나이어린 협보가 설분을 터뜨리며 소리내여 울었다.

대꾸 한마디없이 우두커니 서있던 주몽이 그만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석양빛이 어우러지는 등판을 홀로 걸어갔다.

오이는 그날 밤 주몽에 대하여 오래동안 생각해보았다.

귀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제나름의 괴로움이 있다고 한 주몽의 말이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궁궐에서 천대도 굶주림도 모르고 사는 주몽과 같은 사람에게도 괴로움이 있다는것을 도저히 믿을수 없었다.

며칠후 오이는 마음속에 그려진 의혹을 풀게 되였다.

저녁무렵이였다.

말떼를 끌고 목장으로 돌아가던 오이는 초원어귀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름드리 황철나무에 묶이운 웬 소년이 바줄에서 벗어나보려고 모지름을 쓰고있었던것이다. 주몽이였다.

《아니, 네가?!…》

깜짝 놀란 오이는 친구들을 소리쳐불렀다.

뒤이어 달려온 마리와 협보는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들은 다급히 허리에 차고다니던 패검을 뽑아들고 바줄을 끊어버렸다.

오이는 격한 어조로 물었다.

《어… 어떤 놈이 이따위짓을 했는가요?》

주몽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푹 수그리며 애써 대답을 피했다.

한참만에야 주몽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꺼내였다.

《…오늘 사냥에서 대소를 비롯한 왕자들은 겨우 노루 한마리를 잡았는데 나는 다섯마리의 노루를 잡았단다.

그러자 대소는 다짜고짜 내가 잡은 노루들을 빼앗더니 동생들을 시켜 날 이렇게 비끄러매놓았어.…》

오이는 기가 막혔다.

한지붕아래에서 살면서 어쩌면 이리도 모질수 있단 말인가.

사연은 어떻든 주몽은 엄연히 부여의 왕족으로서 다른 왕자들과 형제지간이라고도 할수 있지 않는가.

그러고보면 주몽이 그전날 자기와 만나 나눈 이야기가 죄다 진실임을 잘 알수 있었다.

얼마나 벗을 그리워했으면 비천한 신분인 자기들에게 속마음을 터놓으려 했을가?

애달픈 련민의 감정으로 주몽과 헤여진 그들 셋은 며칠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사건과 또다시 부딪치게 되였다.

주몽이 그만에야 부여궁에서 쫓겨난것이다.

그의 비범함과 재주를 시기한 부여왕자들의 모해로 하루아침에 왕자의 신분으로부터 천하고천한 말몰이군으로 지체가 떨어지고만것이였다.

이 사실에 접한 그들의 가슴엔 부여왕실에 대한 극도의 반감이 끓어올랐다.

그날부터 오이는 주몽과 함께 초원에서 말을 방목하였다.

부여궁에서 나서자란 주몽은 노예들이나 하는 잡역에 서툴고 습관되지 않았지만 오이의 도움을 받아가며 차차 익숙되여갔다.

어느날 방목지에 올랐던 마리가 독사한테 그만 발목을 물렸다.

순식간에 시퍼런 독을 쓰며 부어오르는 다리로 하여 마리는 그만 정신을 잃고말았다. 당황한 오이와 협보가 금방 숨이 질것만 같은 마리를 붙안고 울고불고 할 때 뜻밖에도 한무리의 말떼를 몰고 다른 산등성이에 올랐던 주몽이 말을 짓쳐몰아 달려왔다.

사연을 알아챈 주몽은 말에서 뛰여내리자바람으로 서슴없이 시퍼렇게 독을 쓰는 마리의 상처에 입을 대고 피를 빨아 뱉아냈다.

온몸이 물주머니가 되도록 그냥 입으로 상처의 죽은 피를 빨아 뱉아버리던 주몽은 마리의 숨소리가 고르로와지자 지체없이 그를 말안장에 올려태우고 채찍을 휘둘렀다.

어머니 류화를 찾아 산을 내렸다.

류화는 즉시 별궁에서 애지중지 기르던 한마리밖에 안되는 자기 집 하릅송아지의 배를 갈라 더운 김을 피워올리는 간을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장도칼로 그 한가운데를 갈라 방금전 주몽이 입으로 빨아낸 독뱀의 이발자리에 가져다붙이였다.

시뻘겋던 생간이 순식간에 꺼멓게 죽어갔다. 조금 남아있던 독이 마저 뽑혀나온것이였다.

마리는 이렇게 살아날수 있었다.

주몽은 아직 몸이 채 추서지 못한 그를 위해 날마다 그의 말떼까지 방목하느라 허리 한번 펴볼새없이 바삐 돌아갔다.

하면서도 틈틈이 약초들을 캐여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다.

류화는 그것으로 초약을 달여 마리의 상처를 돌봐주었고 자주 별식을 마련하여가지고 방목지로 올라오군 하였다.

그때부터 그들 셋은 주몽에 대하여 새로운 눈길로 보지 않을수 없었다.

생활은 심술궂은 이붓어미마냥 그들을 못살게 굴었으나 그속에서 그들과 주몽의 우정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불행하다는 점에서 볼 때 그들이나 주몽은 별로 차이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의 가슴속에 신분으로 하여 생겨났던 구속감의 차이를 줄이게 했고 모진 고통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과정에 피를 나눈 형제들사이에만 있을수 있는 혈연의 정이 생겨나게 하였다.

그들이 가슴속의 울분을 털어버리고 인생의 즐거움을 느낄수 있는 곳은 말없는 자연이였다.

자연은 그들의 집이고 보금자리였으며 마음놓고 살수 있는 세상이였다.

산으로, 들로!

이른아침이면 오이는 벗들과 함께 말떼를 끌고 목장을 나서군 하였다.

가없이 푸른 하늘, 다심한 어머니마냥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따스한 해빛, 맑고 깨끗한 대기, 끝없이 펼쳐진 수림과 초원…

자연의 아름답고 너그러운 품속에서 그들은 웃기도 하고 왁작 떠들기도 했으며 신나게 휘파람도 불었다.

장난세찬 아이들처럼 서로 붙안고 딩굴기도 하였다.

강기슭의 모래불우에 씨름판을 벌려놓고 승벽내기를 하는것은 또 얼마나 유쾌한 일이였던가.

그들중에서 협보는 몸집이 제일 체소하였다.

하지만 씨름판에서는 안걸이, 바깥낚시, 덜미잡기와 같은 수에 능해서 씨름군으로 소문난 마리조차 곤경에 빠뜨린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는 가운데 또 한해가 흘렀다.

화창한 봄날, 거치른 북방의 초원에도 따스한 봄빛이 넘쳐흘렀다.

봄이 왔다고 좋아라 종다리는 하늘가에서 우짖었다.

찬바람은 꽃샘을 하며 발버둥쳤으나 여기저기엔 개나리와 민들레같은 봄꽃들이 수집은듯 피여났다.

그해 봄, 초원에도 기쁜 일이 자주 생겼다.

류화가 제 손으로 장만한 여러벌의 새옷과 머리수건을 가지고 방목장에 찾아왔던것이다. 그들 네사람은 새옷을 갈아입고 머리수건을 질끈 동인 차림으로 어머니앞에 나섰다.

《이걸 좀 보지! 옷이 날개라더니 이렇게 멋쟁이총각들인줄은 정말 몰랐구나.》

류화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조용히 말했다.

《봄은 사람들에게 꿈을 주는 계절이란다.

난 이 봄날에 너희들의 우정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란다.

아무리 세월이 험해도 진실한 벗만 있으면 외롭지 않은 법이란다.》

(아, 아, 어머니!-)

오이는 졸지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왔다.

봄! 봄!… 해마다 봄은 그에게도 찾아왔다.

그러나 짐승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봄이 무슨 소용이였던가.

종다리는 울어도 구성진 봄노래를 듣지 못했고 진달래는 피여도 생신한 그 향기를 맡지 못했으며 초원에 살아도 따스한 봄의 온기를 느끼지 못한 인생이였다.

그런데 주몽과 그의 어머니와 더불어 자기도 이 땅의 생을 지닌 사람임을 깨닫게 된것이다.

그들은 해종일 말떼를 몰고다니며 웃고 떠들었다.

드넓은 풀판에 말떼들을 풀어놓은채 활도 쏘고 마상재도 펼쳐놓았다.

휘파람을 휙 불면서 서로 앞을 다투어 광활한 초원을 달리는것이야말로 즐겁고도 유쾌한 일이였다.

안장우에 높이 앉아 채찍을 후리며 쩌어!- 하고 웨치는 짤막한 고함소리와 휘익!- 하는 날카로운 휘파람소리에 놀란 새떼마냥 말들이 일시에 흩어지기도 하고 모여들기도 하는 광경을 보는것만큼 통쾌한 일은 없었다.

마치 백만대병을 거느린 장군이라도 된듯 그들은 머리를 젖히고 호호탕탕한 웃음을 터뜨리군 하였다.

《좋구나! 우리야말로 초원의 주인들이다.》

《그래그래, 우리가 주인이다.》

어디나 초목이 무성하고 연두색봄빛이 흐르는 초원에는 그들을 압박하는 사람도 괴롭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의 세상이였다.

드넓은 초원으로 그들이 즐겨부르는 노래소리가 울려퍼졌다.


저기나 등판은

풀맛이 좋더란다


풀맛이 좋다면

나도야 먹으련다


어서 가자 저기 저 동트는 풀판으로

너도 가고 나도 가고


휘익! 휘익! 휘익!

나도 가고 너도 가고


한바탕 달리고난 그들은 햇솜마냥 푸근한 풀밭에 네활개를 쭉 폈다.

들꽃이 만발한 풀밭우에는 싱그러운 풀향기가 숨길을 파고들며 표표히 감돌고 가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엔 이름모를 고운 새가 자유로이 날아예며 지저귀고있었다.

귀가를 간지럽히는 풀대를 뽑아 질근질근 짓씹던 오이가 별안간 몸을 제치며 물었다.

《주몽, 넌 커서 뭐가 될래?》

펀뜩 떠오른 호기심에 무심중 던진 물음이였다.

《나?-》

주몽이 머리를 들었다.

호기심어린 마리와 협보의 눈길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맑은 눈동자엔 륜곽이 선명치 않은 얼레구름이 비끼고 선이 정교한 도톰한 입술우에는 금방 사춘기를 벗어난 청년의 특유의 열정과 흥분, 진중감이 비낀 따뜻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난 지금껏 높다란 돌담에 들어앉은 구중궁궐속에서 살다보니 세상을 다는 알수 없었어.》

낮으나 심각한 어조로 주몽은 말을 이었다.

《허나 너희들과 함께 살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공평치 못한가를 알게 되였어. 생각해보렴. 노예들은 모두 집과 가정을 가지고 농사일하기를 바라고있지. 하지만 권세있다는 귀족들은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법도만을 고집하면서 더 많은 땅과 노예를 차지하려고 날뛰고있지 않니? 그들은 지금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아.

난 장차 겨레의 성지 태백산이 자리잡은 남쪽으로 내려가 큰일을 하려고 해. 그 큰일이란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거다.…》

오이네는 시종 놀라운 표정으로 주몽의 말을 듣고있었다.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말이 너무나도 엄청나 저도 모르게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다.

허나 생각해보면 그 길이야말로 자기와 같은 노예들이 불우한 처지에서 벗어날수 있는 유일한 출로였다.

십년 왕가물에 단비 만난듯 오이의 심장은 세차게 높뛰기 시작하였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면 자기도 한목숨을 걸고 나서고싶었다.

오이는 마음속깊이 우러나오는 숭배의 감정을 느끼며 조용히 물었다.

《주몽, 그게 대체 어떤 나라니?》

《단군성인의 후손들이 하나된 강대한 나라이다. 보아라. 세상은 얼마나 란장판이냐. 저마다 나라를 세우고 싸우는바람에 녹아나는건 우리 겨레들뿐이다. 이대로 그냥 두면 우리 겨레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외적의 노예가 되여버릴게다. 너희들도 때가 오면 나와 함께 태백산이 있는 남쪽으로 가자. 그곳에서 사분오렬된 겨레의 나라들을 통합하고 다시는 이 땅에 겨레의 피와 눈물이 흐르지 못하게 하자.》

주몽의 눈에는 끝없는 열정이 불줄기마냥 넘쳐흘렀다.

그는 벗들에게 자기 손을 내밀며 다정히 물었다.

《어때,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갈걸 약속하지?》

순간적인 침묵이 흘렀다.

주몽의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목장의 말몰이노릇을 그만두고 모든것을 새롭게 시작하여야 할것이였다.

《얘들아, 지금은 작고 연약한것같은 이 어린 나무도 모진 비바람과 사나운 추위를 이겨내고 종당엔 거목으로 자란단다.

지금은 말을 먹이고있지만 마음먹고 노력하면 우리들도 력사에 남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될수 있다.》

오이는 주몽의 말을 믿고싶었다.

그는 결코 빈말을 하지 않을것이다. 주몽은 진실한 벗이다. 뜻이 큰 인걸이다. 그와 함께라면 하늘땅끝 어디인들 못 가랴!…

오이는 주몽의 손우에 자기 손을 얹으며 목청을 돋구었다.

《약속한다!》

마리와 협보도 오이를 따라 손을 덧놓으며 부르짖었다.

《약속한다!》

《약속한다!》

그날, 황혼이 깃들기 시작한 초원의 둔덕에서 주몽은 그들에게 벗들의 의리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먼 옛날 어느 한 마을에 의형제를 맺은 소현이와 무달이라는 두 소년이 살고있었다. 말이 의형제지 그들은 친형제나 다름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소현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고 공부를 열심히 한 무달이는 도성에 올라가 큰 벼슬을 하게 되였다.

두사람의 신분은 하늘땅처럼 차이났지만 그들의 우정과 의리에는 자그마한 틈도 생기지 않았다.

어느날 소현은 무달의 어머니가 급병으로 마지막숨을 톺고있다는 비통한 소식을 가지고 도성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무달은 억울한 루명을 뒤집어쓰고 의금부에 갇힌 사형수의 몸이였다. 소현은 왕궁앞의 등문고를 두드려 임금에게 자기의 하정을 들어줄것을 청원하였다.

때마침 궁전앞을 거닐던 왕이 소현을 불러들이였다.

《…너의 말을 듣고보니 그 정상이 가긍하나 무달은 지금 역적죄로 갇혀있는 몸이라 쉬이 놓아줄수 없노라.》

왕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상감마마, 부모의 림종을 지켜드리는것은 자식의 마땅한 도리인데 부디 은총을 베풀어주사이다.》

《그대가 잘 몰라서 그러노라. 무달은 나흘후에 사형을 당해야 하는 몸인데 그래 다시 돌아올상싶으냐?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네가 대신 죽을텐고.…》

왕의 물음에 소현은 주저없이 그러마하고 약속하였다.

하여 옥사안에는 소현이가 대신 들어가게 되였다.

무달을 내보내면서 왕은 거듭 강조하였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이 사형집행날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사흘째되는 날 저녁까지는 돌아와야 한다.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다음날 아침 네 친구가 대신 사형장에 나가게 되느니라.》

무달은 왕앞에, 소현이앞에 그때까지 꼭 돌아오겠노라고 약속하고 고향으로 떠나갔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저녁까지 무달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밤, 왕이 소현이 갇혀있는 옥사를 찾아왔다.

《봐라. 네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영영 다시 나타나지 않을게다.》

《상감마마, 내 친구는 반드시 올것이오이다.》

소현은 조금도 의심치 않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까지도 무달은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왕은 또다시 옥사앞에 나타나 소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도 너의 그 친구를 믿느냐?》

《믿사옵니다. 》

《음, 친구를 끝까지 믿는 너의 그 마음이 갸륵하기 그지없구나. 하지만 짐은 너의 친구가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리기적인 존재라고 할수 있거던. 과인이 목격했던 어느 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겠노라. 한 부자간이 끓는 물에 넣어죽이는 형을 받고 커다란 무쇠가마안에 들어가있었다. 가마에 불을 때기 시작하자 처음 자식은 늙은 아비를 등에 업었노라. 가마가 점점 달아오르고 물이 뜨거워나기 시작하자 일은 정반대로 되였지. 자식이 살겠다고 아우성치며 늙은 아비를 밑에 깔고 올라서는게 아니겠느냐. 죽음앞에 서고보면 의리나 도리라는것은 한갖 위선에 불과한것이니라.》

왕의 이 말에 소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나는 친구를 저자신처럼 믿소이다.

그가 지금까지 나타나지 못하고있는것은 필시 까닭이 있을것이오이다. 설사 이제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난 친구만은 의심하지 않겠나이다.》

소현의 얼굴에는 그 어떤 후회나 실망의 그림자도 비끼지 않았다.

바야흐로 소현이 단두대우에 나서 칼을 받아야 할 시각이 다가왔다.

바로 그때였다.

《중지하소이다.》하는 웨침과 함께 무달이 단두대우에 뛰여올랐다.

가쁜숨을 몰아쉬며 단두대우에 오른 무달의 형색은 참으로 말이 아니였다. 옷은 갈가리 찢겨지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다가 발가락사이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있었다. 그 모양을 보고 왕은 물론 사형장에 모였던 문무백관들과 백성들 지어 도부수들까지 깜짝 놀랐다.

사실 무달은 어머니의 삼일제사를 치르자마자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런데 일이 안될 때라 장마로 불어난 물때문에 강을 건늘수가 없었다.

무달은 친구생각에 강물이 줄 때까지 기다릴수 없어 백리 먼길을 에돌아 쉬지 않고 달렸다. 령 하나만 넘으면 도성에 이를수 있는 곳에 다달았을 때 또다시 뜻하지 않던 정황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제 넘어야 할 령으로 말하면 호환의 피해를 자주 입는 곳으로서 대낮에도 십여명이상의 장정들이 패를 짓고서야 넘나들수 있는 그런 위험한 곳이였다. 무달이 령밑에 이른것은 어스름이 깃을 펴기 시작하던 저녁무렵이였던것이다. 그는 주저없이 홰를 켜달고 령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시각을 지체하면 자기대신 소현이 목숨을 잃을것같아…

무달이 늦어진 사연을 다 듣고난 왕의 얼굴엔 이름할수 없는 감심의 빛이 어렸다.

《그대들의 의리는 참으로 죽음을 초월한것이로다.

그처럼 의리깊은 사람은 역적이 될수 없거늘 무달의 죄는 분명 간신들의 모함이 분명토다. 짐은 무달이 무죄임을 선포하노라.》

주몽은 이야기를 끝내고나서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하였다.

사람은 의리로 하여 아름다와지고 굳세여지는 법이라고…

아, 주몽!- 오이는 저 멀리 산발들이 흘러간 남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 순간 주몽의 모습이 후덥게 안겨왔다.

그에게 정과 의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귀중한 벗!

그것은 자기의 길지 않은 한생에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기고 새롭게 출발하도록 일깨워준 고마운 은인에 대한 그리움이였다.

오이는 마음속의 격정을 지그시 누르며 중얼거렸다.

(주몽, 나를 믿어주오.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기꺼이 소현이가 되고 무달이가 되겠소.)

사람과 수레가 온통 불도가니가 되여 불길속을 서서히 빠져나왔다.

군사들의 품에 안긴 오이의 얼굴은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험상했으나 그의 입가엔 한줄기 미소가 비껴흐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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