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2 장


5


해가 서산마루에 기울어질무렵 협보는 부지런히 말을 몰았다.

말을 탄 세명의 젊은 무사들이 전통을 메고 칼을 찬채 그의 뒤를 따르고있었다.

산과 들은 하루가 다르게 산뜻한 초록빛으로 물들어가고있었다.

햇솜을 뜯어놓은듯 하늘에는 엷은 구름들이 점점이 떠있고 땅에서는 구수한 흙밥냄새와 봄눈석이로 불어난 산골물의 비릿한 향취가 풍겨왔다.

그처럼 기승을 부리던 가혹한 겨울도 어쩔수없이 연두빛너울을 쓴 따스한 봄아씨에게 자리를 내여주고있었다.

구려땅 서북쪽에 위치하고있는 모둔곡은 원래 궁벽한 산골인것으로 하여 구려의 조정은 물론 과루부나 그와 이웃하고있는 제나부의 통치가 거의 미치지 않는 곳이였다.

높은 산발로 둘러막힌 마을은 그야말로 하늘아래 첫 동네라 할만치 세상과 동떨어져있었다.

그러나 모둔곡은 지형상으로 놓고볼 때 반드시 차지하지 않으면 안될 전략적요충지였다.

서쪽은 연나부와 조선지역으로, 동쪽은 제나부, 남쪽은 과루부, 북쪽은 부여와 선비지역으로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곳이였다.

고구려의 건국후에도 수백년동안 모둔곡은 그 전략적의의로 하여 더욱 중시되였는데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또한 동명왕의 자취가 깃든 성지로 인정받아왔다.

주몽의 일행이 엄호수를 건너 맨 처음 이른것이 바로 이 모둔곡마을이였다.

모둔곡에는 대체로 세상에 얼굴을 버젓이 내놓고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 한마디로 도망친 노예들과 빚독촉에 몰려 솔가도주한 가난한 하호들, 이른바 나라에 중죄를 지고 숨어살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이 살고있었다.

주민구성을 놓고볼 때 절반이상의 사람들이 료동이나 료서지역에서 온 사람들이고 그밖에 부여, 구려 등 나라들에서 도망쳐온 노예들이였다.

이웃의 여러 나라들과 통하는 길목이여서 행인들도 번다한 고장이였다.

같은 겨레의 나라들은 물론 료하서쪽 오랑캐의 나라인 연나라와 선비족의 상인들은 자기 지방의 토산물을 가지고 이곳을 넘나들군 하였다.

남쪽 청하이남 옥저땅의 상인들도 한해에 두세차례 마을에 들렸다가 부여쪽으로 떠나군 하였는데 그들이 가져오는 물건은 주로 동해에서 나는 소금이나 물고기같은 해산물들이였다. 모둔곡사람들이 구석진 곳에 살면서도 소금부족을 모르는것은 바로 그때문이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마을은 점점 달라져갔다.

집들이 늘어나고 쇠부리터가 새로 생겨났다. 물산도 풍부해졌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때로 가슴아픈 일을 당하군 하였는데 그것은 구려와 부여의 군사들이 이 모둔곡을 노리고 군사들을 출동시키군 하는것이였다.

그때마다 마을은 불타고 사람들이 죽었으며 들은 황페화되군 하였다.

모둔곡사람들은 자체로 군사를 뭇고 병장기를 만들어 험준한 지형지세에 의거하여 침입자들을 물리쳤다.

대다수가 최하층의 가난한 사람들인 까닭에 옛 처지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는 이들의 각오는 참으로 비장한것이였다.

그리하여 십여년전부터는 그 어떤 침입자도 감히 건너다보지 못하는 곳으로 전변되였다.

주몽은 엄호수를 건너 처음 여기에 자리를 잡고 뜻을 펼쳐볼 생각도 하였으나 인간세상과 멀리 동떨어진 산간오지에서는 일을 크게 벌릴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인차 졸본지역으로 자리를 옮겨 산채를 일떠세우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여기에 이 고장 젊은이들로서 신하로 받아줄것을 자청하는 재사, 무골, 묵거를 받아들여 모둔곡을 일단 유사시 대업을 이루는데서 예리한 검이 될수 있는 후보지로 꾸릴데 대한 구상을 내놓았다.

신하로서의 충성을 맹약하는 자리에서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를, 무골에게는 《중실》씨를, 묵거에게는 《소실》씨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젊은이들을 모아 무술도 가르치고 병장기도 마련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이제 와서 모둔곡은 주몽이네와 깊은 인연을 가진 정든 고장으로 되고있었다. …

주몽은 기회가 점차 성숙되여가는 조건에서 협보를 이곳에 파견하여 준비를 더욱 다그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협보가 모둔곡마을에 와서 보니 모든 일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고있었다.

례년에 없는 흉년에 집집마다 기근이 들어 허덕이였고 마을의 첫 개척자라고도 할수 있는 이 고장 좌상늙은이가 여간만 완고하지 않은 까닭이였다.

좌상로인은 이 고장에서 절대적지배권을 가진 군주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젊은이들이 일은 게을리하면서 와- 와- 밀려다니며 사냥놀이나 벌리고 끼리끼리 모여앉아 쑥덕공론을 펴면서 마을에 세운 기강을 허무는것을 엄히 단속하였다.

하여 재사, 무골, 묵거는 완고한 좌상의 눈을 피해 소극적으로 일판을 벌려놓다보니 이렇다하게 해놓은것 없이 주몽이네가 하루빨리 돌아오길 학수고대하고있었다.

《여기서 제일 걸린것은 바로 그 좌상령감이오이다.

처음엔 우리 일에 호기심을 품고 따라나서던 젊은것들이 그 령감이 독을 쓰는 바람에 쑥 움츠러들었소이다.

쇠부리터에서 얼마간 마련해두었던 병기들도 그만에야 그 령감눈에 걸려드는통에…》

굵은 삼베천으로 짠 후렁한 옷을 입은 재사가 입을 다시며 씁쓸히 웃었다.

무골과 묵거는 눈을 내려깐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있었다.

협보는 모둔곡으로 가면 우선 좌상로인과의 일부터 풀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오이의 말이 떠올랐다.

협보는 우선 이 소식을 주몽에게 알리기로 하고 좌상로인과는 자기가 직접 만나보리라 생각했다.

한낮이 기울무렵 협보는 모둔곡의 선화당(지방행정장관이 일을 보는 곳)이 자리잡은 촌락복판의 기와집앞에 이르렀다.

《임잔 도대체 어디서 온 길손인가?》

눈섭까지 허연 백발의 늙은이가 경계심을 품은 눈길로 그를 맞아주었다.

협보는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나서 부여에서 궁실말목장에서 일하다 도망쳐왔는데 쇠부리터에서 일을 하게 해줄수 없느냐고 청을 드렸다.

그의 아래우를 유심히 살펴보던 로인이 채머리를 떨며 말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 고장 인심이 그리 박하지는 않았다네.

하지만 올해에 들어와 가물이 계속되여 이 고장 토배기들도 겨우 죽나발을 부는 판에 일손까지 빌려다쓸 형편이 못되누만.

자네 하정을 들어보면 딱하긴 하네만 사정이 이러하니 자네가 생각해보고 조처하도록 하라구.》

《그건 념려마소이다. 저도 어려서부터 노예로 여기저기 끌려다니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고 굶기를 부자집 밥먹듯 하였소이다.

사람답게만 살수 있다면 그쯤한것이 무슨 흠이겠소이까?》

《허허, 임자 보기와는 달리 식자깨나 있는 젊은이로군.

아무렴 사람을 사람으로 치지 않고 마소처럼 팔고사며 또 마음대로 죽이기까지 하는 노예주놈들의 세상에서야 비단옷에 삼시 고기로 배를 불린들 어찌 사람답게 산다고 할수 있겠나?》

로인은 수염을 내리쓸며 만족스러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러나 알아들게 하나 있네.

작년에 부여에서 도망쳤다는 젊은이 몇이 우리 고장에 들렸던적이 있는데 우리 마을젊은이들에게 아주 나쁜 물을 들여놨네.

세상을 바로잡는다는 그 의기는 장하네만 새파란것들이 쥐뿔도 모르면서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날뛰네그려.

임자도 어련하겠나마는 부여에서 왔다니 내 말을 잘 들었다가 후날 말썽이 없도록 하라구.》

이렇게 되여 협보는 손쉽게 모둔곡사람들속에 들어갈수 있었다.

그날부터 협보는 소실묵거와 함께 쇠부리터와 대장간사이를 오가며 초기에 계획하였던 병장기마련하는 사업을 밀고나갔다.

또한 극재사와 중실무골로 하여금 마을젊은이들을 데리고 산판에 올라 산짐승사냥을 본격적으로 벌려 낟알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이미 그들이 졸본산채를 세울 때 덕을 단단히 입었던 방법이였다.

무술조련은 조련대로 하면서 식량도 해결하였고 좌상로인의 경계심을 늦추어놓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잘못된것이였다.

어느날 아래도리에 거친 가죽만을 걸친 협보가 울뚝불뚝 살아오르는 힘살을 자랑하듯 바위츠렁에 드러난 광맥에 깊숙이 박아넣은 정대에 함마질을 하고있을 때 대장간에서 소실묵거와 함께 일하는 젊은이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형님, 크… 큰일났소이다. 》

《무슨 일인가? 덤비지 말고 천천히 말해보라구.》

얼굴이 숯검댕이가 되여가지고 덤벼치는 애어린 총각을 웃음을 띄우고 바라보던 협보가 말했다.

《소실묵거형님이 좌상로인한테 지금 막 졸경을 치르고있소이다.》

《뭐라구?》

끝내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야만것이다.

협보가 대장간으로 달려갔을 땐 이미 소실묵거가 묶이워져있었고 감추어든 병장기들이 모두 밖으로 내팽개쳐져있었다.

상좌에 올방자를 틀고앉은 좌상의 불호령이 마당에까지 울려나왔다.

《네 이놈! 무슨 흉심으로 이 숱한 병장기를 만들어놓았는지 어서 이실직고하지 못할가?》

굵은 삼베로 꼬은 바줄에 오라를 당한 소실묵거는 반항 한마디 없이 묵묵부답으로 고개를 외로 틀고 앉아있었다.

그의 옆에는 물푸레곤장을 쥐고 서있는 모둔곡의 군사들이 보였다.

《그만들 하소이다.》

마당 한복판에 뛰여든 협보는 소실묵거를 일으켜세우며 좌상로인을 향해 말했다.

《이 사람에겐 죄가 없소이다. 그건 제가 만들도록 한것이오이다.》

《무엇이라고? 그럼 자네가? 도대체 임잔 누구인가?》

《병장기를 만든것이 무슨 잘못이나이까?》

협보의 추상같은 물음에 좌상로인은 턱수염을 덜덜 떨며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뭣이? 무슨 잘못이냐고? 그래 이 땅을 전란에 휩싸이게 할텐고? 이게 어떻게 마련한 땅인지 알기나 하는가?》

《저도 바로 그 땅을 지키기 위해서나이다. 좌상로인께선 지금 이 자그마한 모둔곡의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계시온데 과연 몇 안되는 여기 사람들의 힘만으로 기회만을 엿보며 옛 제도를 되살리려 칼을 벼리는 숱한 노예주놈들과 싸워 이곳을 끝까지 지켜낼수 있다고 보시오이까?

이곳에 모여온 사람들의 얼굴을 좀 보소이다.

떠나온 고향과 두고온 부모처자들 생각으로 하여 늘 근심에 싸여있소이다. 비록 자기는 노예의 사슬은 벗어던졌을망정 바로 그것으로 하여 저들의 부모나 형제, 어린 자식들이 또 그 멍에를 뒤집어쓰지나 않았는지, 억울한 생죽음을 당하지나 않았는지.…

그래 과연 좌상로인장께선 이 모든것을 정녕 모르신단 말이오이까? 대답 좀 해보소이다.》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눈길을 좌상의 얼굴에 박아넣고 협보는 준렬하게 부르짖었다.

좌상로인은 슬며시 눈길을 떨구고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톺았다.

여기저기서 흑- 흑- 느끼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부모형제를 떠난 사람의 복락을 생각할수 없듯이 고국과 겨레의 품을 떠난 삶을 생각할수 있소이까?

바로 그래서… 저희들은 이 땅을 지키고 부모형제와 겨레의 운명을 건지자고 힘을 키우고 병장기를 만들었소이다.

그래 과연 이것이 엄벌을 받아야 할 일이란 말이오이까?》

협보는 두팔을 벌리고 빙 둘러선 사람들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두눈을 지그시 감고있던 좌상로인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임잔 누군가?》

《전 졸본산채의 사람으로서 주몽의 신하로소이다.》

《음, 그러니 작년에 들렸던…》

좌상로인은 괴로운듯 신음소리를 냈다. 고현놈, 아직 새파란것이 세상일을 얼마만큼이나 안다고 쓴맛, 단맛 다 보며 늙어온 이 좌상을 가르치려들다니…

바로 그때 극재사와 중실무골이 마당으로 달려들어오며 소리쳤다.

《좌상어른, 저기… 저… 벼랑골 오솔길로 수십대의 수레가 나타났소이다.》

《무엇이? 도대체 웬 수레들이란 말인가?》

《졸본산채의 주몽어른이 보내는 량곡이라 하옵니다.》

《졸본산채?!》

좌상로인을 위시한 모둔곡사람들이 벼랑골쪽으로 달려갔다.

극재사와 무골이 소실묵거의 포승을 풀어주고있는 협보에게로 달려왔다.

《협보형, 오이형님이 오셨소이다. 량곡들을 싣고 지금 막…》

《오이형님이… 그게 정말이냐?》

협보는 너무 기뻐 묵거를 그들에게 맡긴채 자개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갔다.

모둔곡의 소식을 전한지가 불과 사흘전인데 오이가 이렇게 불쑥 나타난것을 보면 소식을 듣자 그달음으로 달려온것이 분명하였다.

헌데 도대체 량곡마대는 어디서 난것일가?

졸본산채의 식량사정도 긴장할텐데…

협보가 다달았을 때는 수레를 에워싼 사람들로 하여 발들여놓을 틈도 없었다.

가까스로 사람들틈을 비집고 들어섰는데 낯익은 산채의 젊은이 둘이 들것 하나를 맞들고 걸어오고있었다.

들것에 실린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협보는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오이형님-》 창백한 낯빛으로 기척없이 누워있던 오이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다.

피기없는 그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확 어렸다가 사라지며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 사람아, 더 말을 시키지 말라구. 빨리 부락으로 내려가세.》

좌상로인이 눈을 슴벅이다가 하는 말이였다.

오이를 따스한 아래목에 눕히고 의원을 불러다 병을 보인 후에야 협보는 비로소 좌상로인과 함께 산채의 젊은 군사로부터 구체적인 사연을 들을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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