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제 2 장


3


그 이튿날.

연타발로 하여금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한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루밤 푹 쉬고나서 심신이 거뜬해난 연타발은 이른아침부터 후원뒤 뜨락을 천천히 거닐고있었다.

《소서노마님이 찾아와 뵙자 하나이다.》

시비 하나가 발끝걸음으로 조심히 다가와 아뢰였다.

《어서 들라고 해라.》

《알겠나이다.》

단마디로 거절당할줄 알았던 소서노는 시비의 전달을 받자 잠시 어리둥절해 서있다가 후원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버님, 옥체무강하옵니까?》

다소곳이 머리숙여 절을 올리는 소서노를 이윽토록 바라보는 연타발의 눈에는 다심한 자애의 빛이 흘러넘쳤다.

《오냐, 넌 그새 별고가 없었느냐?

그러지 않아도 너를 부르자던 참이다.》

전에 없던 일이였다.

《어쩐지 오늘은 너와 이야기를 좀 나누고싶구나. 그새 이 아비가 원망스러웠을테지?》

《아버님, 전…》

《내 말을 막지 말아.

호미도 날이 있건만 낫같이 들지 않는 법이란다.

이 아비도 비록 부모란 명색은 있으나 어찌 네 어미의 정만이야 하겠느냐? 너를 우태에게 출가를 시킬 때도 네 의향같은것은 애초에 들어보려 하지 않았으니…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 후회막급하구나.》

소서노는 참고있던 울음을 터뜨리고야말았다.

《이제 와서 옛일이나 돌이켜선 무얼하겠니?

다 쓸데없는짓이지.… 다만 너를 위하는 이 아비의 정만은 예나제나 변함이 없다는것뿐이다.》

《아버님, 전 한번도 그걸 의심해본적이 없사와요.》

소서노는 격정에 치받쳐 연타발의 품에 와락 얼굴을 묻었다.

《고맙구나, 내 딸아-》

연타발은 품에 안긴 소서노의 함치르르한 머리칼을 오래도록 어루쓸었다.

문득 소서노가 어렸을적에 그의 머리를 빗겨주던 때의 일이 생각히웠다.

…그것은 젊디젊은 한창나이의 처를 먼저 보내야 했던 그 긴긴 장례식의 마지막밤이 끝난 어느날이였다. 유모가 허둥지둥 달려와 황겁히 아뢰였다.

《저 큰일이 났소이다. 아씨께서… 아씨께서…》

《무슨 일이냐? 어서 말해.》

심장이 철렁한 연타발은 버럭 소리쳤다.

유모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아뢰였다.

벌써 몇끼를 건느다싶이 한 소서노가 거의 허탈상태에 이르렀는데 하녀들은 물론 유모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면서 계속 엄마를 찾으며 울기만 한다는것이였다.

눈앞이 새하얘져 서있던 연타발이 펀뜻 제정신을 차린듯 급히 소서노의 방으로 달려갔을 때 정말 딸애는 넓다란 방 한쪽구석에서 깃잃은 어린 새마냥 잔뜩 겁에 질려 파들파들 떨고있었다.

《아가, 이리 온.》 연타발은 조용히 불렀다.

그러자 딸애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싫어싫어. 나 엄마 데려다달라. 아부지, 엄마 왜 안 오나?》

서럽게 울어대는 딸애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연타발의 가슴에 괴롭게 파고들었다. 애절한 그 울음소리가 자신의 온 육신을 갈가리 찢어놓는듯 했다.

두눈을 꾹 감아버렸건만 뜨거운 진액이 슴배여나와 어느새 입귀로 흘러들었다. 연타발은 비칠거리며 딸애에게로 다가갔다.

여보, 듣소? 소서노가 지금 당신을 찾고있구려. 당신을 닮아 그리도 예쁜 딸애의 눈가에 맺힌 저 눈물이 이 억장을 무너뜨리는데 당신은 지금 어디에 누워있소. 하늘두 무심쿠려.

천생연분, 백년가약이란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요.

당신이 좋아하던 꽃들은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고 당신이 바라보며 노래부르던 저 맑던 하늘은 먹장구름이 덮였으니 내 이제 저 어린것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리오?

아, 원망스럽소. 욕이 나가오. 으흐흑… 연타발은 발버둥치는 딸애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푹 젖은 목소리로 떠듬거렸다.

《울음을 그쳐라, 아가! 아버지가 머리를 빗겨주마. 머리를 곱게 빗고 하루밤 자고나면 엄마가 너를 보러오실게다. 어서.》

연타발은 안해가 생전에 그러하였던것처럼 작은 참빗을 찾아들고 청동거울앞에 딸애를 세웠다.

곱게 빗겨주고싶었다. 가리마를 곱게 탄 머리를 아래로 정히 빗어주며 연타발은 울음을 짓씹었다.

내 사랑도 이렇게 정히 부어주리다. 당신이 못다준 사랑도 함께 이렇게, 곱게, 밝게 자라도록 빗겨주리오. 당신은 부디 마음을 놓소.

아버지도 울고 딸도 울고…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는 연하고 까만 머리칼을 감빗겨내리는 연타발의 두팔에 몸을 맡긴 소서노는 눈물을 쿨쩍거리다가 어느새 잠들어버렸다.…

어째서 그때의 기나긴 장막같던 밤이 생각히우는것일가?

한동안 흘러서야 진정을 하고난 아버지와 딸은 후원뜨락의 정자나무아래 다정히 마주앉았다.

《네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다 안다. 주몽의 산채때문이지?》

《그렇소이다. 지금 두로오라버니는 군사들을 조련시켜 졸본천의 무사님들을 없애버리려 하나이다. 소녀의 짧은 소견에도 그것은 심히 잘못된 생각인가 하오이다.》

《너의 그 심정이 충분히 리해가 간다.

이번 서늪말에서 있은 사건을 생각해보아도 그네들의 품은 뜻이 결코 범상치 않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세상리치란 소망한다고 하여 이루어지는 그렇듯 단순한것이 아니라는거다. 이번에 두로는 또다시 그들에게 깊은 원한을 샀은즉 이 일을 장차 어찌할셈이냐?》

《그럼 아버님께서도…》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두로의 군사들은 따로 할일이 있다. 이번에 조정에서는 거무나산에 소굴을 두고있는 말갈족놈들을 엄하게 징벌할데 대한 조서를 우리 과루부에 내려보냈구나. 아무래도 이번 싸움은 헐치 않을것 같다.》

《아버님께서도 출정하셔야 하옵니까?》

소서노의 걱정어린 물음에 연타발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부녀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데 하인의 전갈이 들어왔다.

졸본산채에서 웬 젊은이가 찾아와 연타발대인을 뵙고저 한다는것이였다.

연타발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나서 오늘은 아무도 만나고싶지 않노라고 전달하라고 일렀다.

결국 오이는 문전거절을 당한셈이 되고말았다.

《이 사람아, 돌아가라구. 괜히 졸경을 치기 전에 말일세.》

주인의 엄한 분부를 전달하러나온 집사(하인우두머리)는 이렇게 말하고 대문안으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하여 순순히 돌아설 오이가 아니였다.

그는 대문앞 뜨락에 틀고앉아 다시 하인을 불러 주인이 찾을 때까지 여기서 사흘이고 열흘이고 기다리겠다는것을 여쭈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였을 때 연타발은 놀라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보나마나 주몽이 시켰을테지.)

젊은것들이란 별찮은 일에서도 곧잘 흥분하기마련인데 그 흥분이 거품처럼 잦아들고보면 산채로 돌아갈것이라고 연타발은 생각하였다.

《내버려두라구, 그러다말겠지.》

어느덧 점심때가 되였다.

연타발은 하인들에게 술과 고기도 내다주고 끼니를 번지는 일이 없도특 하라고 분부하였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산채사람들은 외동딸을 사경에서 구원해준 고마운 사람들인데 만나주지는 않는다 해도 박대만은 하고싶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대문앞 공지에서는 류다른 각저(씨름)판이 펼쳐져 뭇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오가던 사람들이 어깨성을 쌓고 흐아흐아 웃음판을 펼쳤는데 하인들도 담장너머로 그것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호미걸이를 걸라! 호미걸이를…》

《잘한다, 잘해. 》

《허참, 사람두 허깨비가 들렸나? 그렇게 맥없이 나가넘어지다니…》

체통이 큰 젊은이가 허양 들리워 나가넘어지는 모양을 아쉽게 바라보며 구경군들이 혀를 끌끌 찼다.

가볍게 상대를 제압한 오이가 모여선 사람들을 휘- 둘러보며 말했다.

《자, 여러분네들 또 나서실분들이 없으시오이까?》

그 말에 구경군들이 일시에 술렁거렸다.

《그 사람 보통이 아니군.》

《도대체 어디서 온 씨름군이요? 처음 보누만.》

《가만, 저 사람이 오룡산싸움때 소서노마님을 구원한 그 졸본천무사로구만.》

가병 한사람이 오이를 알아보고 말했다.

《아하, 글쎄 어쩐지 솜씨가 좀 다르다 했지.…》

젊어 한때 유명한 씨름군이였던 연타발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호기심을 감출수 없었다.

씨름은 이미 오래전부터 몸단련을 위한 민속오락의 한 형태로 민간에서 발전해왔는데 각저, 각력, 각희 등의 이름으로 불리워왔다.

지방에 따라 일정한 차이는 가지고있지만 한피줄을 나는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즐겨온 민속풍속의 하나로서 대체로 그 방법은 비슷하였다. 하는짓이 좀 방자한데가 있지만 연타발은 좀더 두고볼 심산으로 모르는척 하였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둡기 시작해서야 그는 자기의 기대와 아량이 전혀 부질없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집사가 뛰여오더니 젊은이가 놀음판에 모였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공지 한옆에 장막까지 지어놓았다고 아뢰는것이였다.

《뭐, 장막을?!-》

《네, 제 눈으로 보았는걸요. 막안에 등불도 켜놓았소이다.》

(그게 허튼소리는 아니였구나!)

사흘이고 열흘이고 기다리겠다고 하던 말을 상기하며 연타발은 아연해졌다.

그날 밤 연타발은 잠자리가 편안치 못했다.

다음날 동쪽산마루에 해가 한발만큼 떠올랐을 때 집사가 들어와 산채사람들이 더 내려왔다고 알리자 그는 대뜸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가 생각한것보다 판이 점점 더 크게 번져지는것 같았던것이다.

《왜 그러시와요? 어쩐지 안색이 좋아보이질 않소이다.》

소서노는 안심찮아 조용히 물었다.

《아닌게아니라 좀 몸이 말째구나.》

연타발은 마지못해 대답하였다.

어제밤에 장막을 제 눈으로 확인하였을 때 그의 머리에 제일먼저 떠오른것은 이 일을 절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것이였다.

그러나 장밤 궁리를 해도 말썽이 없이 조용히 수습할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전에 부중의 크고작은 일들을 도맡아 척척 결단하여 사람들을 경복시킨 그 수완과 결패가 갑자기 어디론가 달아나버린듯싶었다.

아침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도 그것때문에 속이 불안하였다.

그런데 산채에서 사람들이 또 내려오다니? 그는 간밤의 피곤이 눈시울에 모여드는듯 한감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소서노에게 물었다.

《뒤탈이 없어야겠는데… 아가, 네 생각엔 저 사람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소서노는 잠시 머뭇거렸다.

고모나에서 주몽의 일행과 헤여진 후 그는 남몰래 마음속으로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확신하였었다.

그 확신이 틀리지 않았다. 오이가 나타났을 때 그의 눈에는 자기에 대한 믿음을 변치 않고있는 주몽에 대한 고마움으로 눈물이 핑 돌기까지 하였다.

오이가 문전거절을 당했을 때 소서노의 머리에 떠오른것은 그를 도와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였다.

산채의 일이자 자기 일인데 강건너 불보듯 할수 없었다.

그리고 실지 그를 도와줄 사람은 자기밖에 없었다.

그래서 은근히 조바심을 하고있는데 연타발은 그 누구와도 의논한적이 없는 문제를 자기한테 물어보는것이였다. 좋은 기회였다.

그는 주저없이 대답하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지 않소이까?

아버님께선 그들을 만나보셔야 할줄 아오이다.》

《그러니?!》

연타발은 미간에 주름을 모으며 나직이 뇌이였다.

이것은 그가 아직 옳은 결심을 내리기를 주저하고있다는것을 의미하였다.

바로 이때 대문이 열리며 별안간 맑고 청아한 려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아버님, 제가 왔소이다.》

연타발은 려송의 뜻밖의 출현에 잠시 어리둥절해져 두눈만 슴벅거렸다.

소서노가 려송을 친동기처럼 사랑하듯이 연타발 역시 려송을 친딸과 같이 사랑하였다. 쾌활하고 명랑할뿐아니라 속생각이 넓고 붙임성이 좋은 려송의 성격은 그들 부녀에게 다같이 기쁨을 주었다.

하여 연타발은 늘 려송을 수양딸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던 려송이 그만 주몽의 일행을 따라 졸본산채로 들어갔다는것을 알았을 때 연타발은 천만번 락심하여마지않았다.

《네가 도대체 어인 일이냐?》

《그간 옥체무강하였사옵니까?》

려송은 눈물을 머금고 나부시 절을 드렸다.

《오냐, 그러니 너도 저 산채의 젊은이들과 함께 왔으렷다?!…》

한순간 반가움이 어렸던 연타발의 얼굴이 구름이라도 낀듯 어두워졌다.

산사람이 다된듯 거의 남복에 가까운 옷차림이며 어깨에 멘 전통과 허리춤에 매달려 달싹거리는 호신용 작은 단검이 연타발의 눈을 아프게 했다.

(이런걸 두고 아마 물은 한곬으로 모여 흐른다고 하렷다.…)

연타발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쓸쓸해져 려송이 일어서기도 전에 저먼저 돌아서버렸다. 생각에 잠겨 걷고있는 연타발의 등뒤로 소서노가 소리를 죽여가며 따라섰다.

울담밖 씨름터에서는 또다시 와- 하는 웃음이 터져올랐다.

《저 밖에 있는 산채의 젊은일 아느냐?》

연타발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알고있소이다. 주몽의 제일수장인 오이라는 무사오이다.》

《음, 저 사람이 려송이를 구원했다는 그 젊은이냐?》

《그렇사와요. 오룡산싸움때는 자기 한몸으로 행수님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 위기에서 구원하였나이다.》

《충의신하로군. 전번 서늪말에서 만나보니 사리가 분명하고 리치에 밝은것이 그들을 이끈다는 주몽이라는 젊은이의 사람됨을 알겠구나.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은 법이라 요즘세월엔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람들이 아닐수 없다. 이 애, 너 좀 날 도와주려무나.》

《무슨 일인지 분부만 하옵소서.》

소서노는 연타발의 달라진 태도에서 저도 모르게 북받쳐오르는 기쁨을 누르며 조용히 대답하였다.

잠시후 소서노의 도움으로 평장으로 복색을 차린 연타발은 초조한 기색으로 뜰안을 거닐고있던 려송이앞에 나타났다.

《큰아버님, 어인 일이시오이까?》

뜻밖에 돌변한 연타발의 행동이 놀라운듯 려송이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앞에 객을 세워두었으니 주인이라는게 어디 발편잠을 잘수가 있더냐? 네가 무정타 나를 욕하는줄 다 안다.

아마 저 사람들도 밤새 나를 욕하다 새날을 맞았을테지.…》

그 말에 소서노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소녀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말씀을 성인의 가르침으로 새겨들었사와요.

아버님께선 늘 아무리 아름차고 힘든 일이라도 옳은 일이면 해야 하고 아무리 작은것이라도 그른 일이라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나이다.》

연타발은 생각에 잠긴채 묵묵히 소서노의 말을 들었다.

확실히 소서노는 이전과 달라졌다.

더우기 그것이 옳은 주견이라는것이 점점 명백해지고 자기의 견해가 협소하고 근시안적이라는것을 느끼군 할적마다 두려움과 로약함을 동시에 느끼군 하는 연타발이였다.

연타발자신도 세상의 변천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감한 사람은 아니였다. 그자신도 자기의 마음속 변화를 똑똑히 느끼고있었다.

그로부터의 출로를 찾아 내심으로 몹시 번민하던 그는 저도 모르게 산채의 젊은이들쪽으로 마음이 쏠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나라를 평안히 하고 민심을 바로잡자면 바로 그런 젊은이들을 인재로 등용하여 쓸줄 알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옳은 일이다.

연타발은 짐짓 헛기침을 톺으며 려송에게 말했다.

《이 애, 려송아, 어서 나가보자꾸나.》

씨름터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와- 와- 열을 올리고있었다.

언제 소문이 퍼졌는지 서늪말과 주변 여러 마을에서 모여온 씨름군들과 구경군들이 넓다란 공지 한복판에 씨름판을 펼쳐놓았다.

연타발은 응원열에 흥뜬 사람들속에 슬며시 끼여들었다.

한편 씨름터복판에서 만만치 않은 상대와 맞다들린 오이는 두손에 샅바를 바싹 탈아쥐고 련속 세바퀴째나 빙글빙글 돌고있었다.

아침나절에만 해도 벌써 십여명의 상씨름군들을 멨다꽂고 기운이 진할대로 진한 그였으나 생각은 온통 연타발에게로만 쏠려있었다.

이제 이 마지막상대까지 꺼꾸러뜨리고나면 더는 씨름상대가 나설것 같지 않았다.

바로 그때 려송의 모습이 눈에 띄웠다.

처녀는 함북 웃음을 담고 오이를 향해 까딱까딱 약속된 고개짓을 하고있었다.

(그러니 성공이란 말이지.)

오이는 갑자기 힘이 용솟음치는것을 느끼며 샅바를 잡은 두손에 윽- 하고 힘을 주며 배지기를 떴다. 순간에 몸중심을 잃고 허궁 들리운 상대편선수는 미처 어쩔사이없이 모래를 한가득 입에 물고 나동그라졌다.

오이가 어쿠- 어쿠- 신음소리를 내지르는 상대편 젊은이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세우는데 누구인가 그의 등어깨를 툭 하니 내려쳤다.

《오이, 담이 있으면 어디 나와 한번 겨루어보자!》

오이가 눈길을 돌리니 뜻밖에도 두로가 얄궂은 웃음을 띄우고 서있었다.

오늘 아침에야 산채사람들이 대문밖에서 밤을 새며 버틴다는것을 알게 된 그는 즉시 날랜 군사 수십명을 거느리고 단숨에 연타발의 집으로 달려왔다. 그러지 않아도 연타발이 자기의 청을 너무도 가볍게 넘겨버린데 대해 잔뜩 불만을 가지고있던 두로는 심복으로부터 오이가 연타발의 집앞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자 저도 모르게 뒤가 켕겨났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이가 연타발을 만나게 하여서는 안된다.)

두로는 서슴없이 시합장안에 뛰여들었다.

어려서부터 무술을 익혀온 두로 역시 과루부적으로 소문난 씨름군이였다.

성난 맹수가 단숨에 먹이감의 멱을 물어제낄 절호의 기회를 노리듯 두 사나이는 샅바를 바싹 탈아잡고 수를 쓸 기회만을 엿보고있었다.

이미 여러명의 상대들을 물리치느라 많은 힘을 뽑은 오이로서는 시간을 질질 끄는것이 어느 모로 보나 결정적으로 불리했다.

오이는 먼저 수를 쓰기로 결심했다.

오이는 몸중심을 약간 높이는척 하면서 호미걸이를 하려는듯 헛다리질을 했다. 와뜰 놀란 두로는 두발을 뒤로 더욱 단단히 뻗디디고 자세를 낮추었다.

오이는 예리하게 반응하는 두로의 몸자세를 주의깊게 살피면서 자기의 수를 포기하듯 헛다리놓은 발을 뽑는척 하다가 왼궁둥이로 배지기를 떴다.

하지만 역시 로련한 씨름군인 두로는 몸중심을 잃지 않고 동가슴으로 오이를 떠박지르며 날래게 몸을 뺐다.

그통에 오이는 바싹 감아쥐였던 샅바를 그만 놓쳐버리고말았다.

《아뿔싸.》

구경군들가운데서 누군가 절망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이런 상태에서 경기결과는 불을 보듯 명백한것이였다.

두로는 마치 경기에서 다 이기기라도 한것처럼 오이가 자기 몸에 붙지 못하게 보란듯이 빙그르 한고패 돌리고나서 몸을 접었다.

바로 그 순간을 노리던 오이는 두로가 지탱하고있던 오른쪽무릎을 가볍게 툭 때렸다. 두사람은 거의 동시에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런데 밑에 깔려 버둥거리는것은 두로이고 그우에서 배심좋게 허리를 펴는것은 오이가 아닌가?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 순간에 와- 통쾌한 함성을 질러댔다.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서는 오이를 에워싸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이는 어느결에 내여미는 려송의 손수건을 받아쥐고 땀을 씻었다.

《고맙소.》

려송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그러던 려송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올랐다.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던 두로가 감발한 다리에서 짧은 비수를 뽑아들고 달려든것이다.

두로의 비수가 거의 등뒤에 꽂히려던 찰나 누군가의 억센 손이 팔을 붙잡았다.

《이걸 놓지 못해?》

연타발이였다.

《대인어른…》

연타발은 두로의 손목을 비틀어 칼을 뺏어냈다.

《죽여야 하오이다.

저놈을 살려두면 기필코 후회할 날이 있소이다.》

이를 갈며 몸부림치는 두로에게 연타발은 벌컥 화를 내였다.

《군사들을 거두고 썩 물러가지 못해! 이놈!》

비맞은 장닭처럼 후줄근해서 물러가는 두로와 그의 군사들을 쏘아보는 연타발의 온몸은 수치심으로 하여 부들부들 떨리고있었다.

신의와 도리를 생명으로 아는 이 연타발의 앞에서 이 무슨 망측스러운 추태인가? 대관절 저녀석은 왜 나타났담.

은혜는 갚지 못할망정 침뱉지 말랬는데 죽일 생각부터 하다니?!

그것은 하늘의 의사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도리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짓이였다.

초면이라고도 할수 있는 산채의 젊은이앞에서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그는 스르르 눈을 감으며 목갈린 소리로 나직이 말하였다.

《이 사람, 미안하이.

그러나 오늘의 화는 그대자신이 스스로 불러온것인즉 누구를 원망말고 어서 물러가주게. 여기에 그냥 있게 되면 또 어떤 화를 당할지 모르겠은즉 자기의 생명이 귀중하거든 돌아서라구.》

《대인어른, 저는 그냥 돌아설수 없나이다.》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전 대인어른을 꼭 만나고오라는 우리 주몽형의 분부를 받고 여기로 왔소이다. 제 어찌 목숨이 귀중타 충의를 맹약한 신하로서의 본도를 저버릴수 있겠소이까?》

《음, 충의를 맹약한 신하의 본도라?

내 알기엔 임자들이 받드는 그 젊은이에겐 아직 권세도 없고 자네들에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줄 재부도, 나누어줄 한뙈기땅도 가진것이 없는줄 아는데 어째서 임자는 목숨까지 바쳐가며 충의를 론하는것인가?

자네가 지닌 출중한 무예이면 아무데 가서도 부귀영화는 문제없을터인데 어찌하여 한갖 방랑객에 불과한 사람을 따라다니며 사서 고생을 하는것인지 도대체 리해가 가질 않누만. 이제라도 주인을 바꿀 생각이 있다면 내 주선을 해볼 의향이 있으니 어떤가?》

연타발은 오이를 대견한 눈길로 내려다보며 슬그머니 자기의 속심을 내비쳤다.

《개도 사흘을 먹이면 주인을 안다 하였소이다.

동고동락을 함께 하며 그의 뜻에 탄복하고 그의 인정에 끌리여 목숨보다 중한것이 벗들의 의리임을 깨달은 저희들이로소이다.

권세와 재부가 아무리 귀한것이라 해도 충의를 잃고나면 한갖 뜬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은것이오니 어찌 명성높으신 대인어른께서 그런 너절한짓을 하라 저를 권고하시는것이오이까?》

절절히 울리는 오이의 대답에 연타발은 꿀먹은 벙어리마냥 할말을 찾지 못하고 눈시울만 슴벅거렸다.

(아, 얼마나 기특한 젊은이인고.…)

연타발은 무릎을 끓고앉은 오이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세우며 말했다.

《뭣들 하느냐? 이 젊은일 빨리 집으로 모셔들이지 않고.》

눈시울에 촉촉히 맺힌 눈물방울을 황황히 닦으며 려송이 서둘러 대답했다.

《알겠사와요.》

오이가 연타발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자 소서노는 시비들을 불러 분주히 분부를 내렸다.

려송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주방과 뜰안을 부지런히 오고갔다.

소서노는 기쁨에 넘쳐 뛰여다니는 려송의 얼굴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애는 지금 얼마나 행복할가?)

산채의 바람을 맞아서인지 하얗던 살결은 감실감실 탔어도 보다 세련되고 건강미가 한껏 넘쳐흐르는 얼굴에는 전에는 알수 없었던 생기와 아름다움이 력력히 비껴있었다.

그러자 느닷없이 시새움과 부러움이 동시에 살아올랐다.

불쑥 주몽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금 그인 무얼하고계실가?)

연타발에게 있어서 주되는 관심사는 딸 소서노문제였다.

그는 오이가 불쑥 이렇게 나타난것이 다름아닌 졸본산채와 소서노때문일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예로부터 영웅호걸 호색호주라고 젊디나젊은 나이의 이들이라 다를텐가? 소서노로 말하면 과루부의 대인의 딸이요, 둘도 없는 세력가인데다 인물 또한 절색이여서 사내라면 누구나 건너다보지 않는이가 없을 정도이니 소위 큰뜻을 품었다 자처하는 이들의 눈에 걸려들지 않을리 만무한것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소서노가 말갈족의 습격을 받았을 때 그를 구원한것이 다름아닌 이들이였다 하니 호박을 넝쿨채 잡은셈이였다.

우려되는것은 아직은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모른다고밖에 할수 없는 소서노가 단 한번밖에 만나보지 못한 주몽이라는 그들의 행수에게 갑자기 모든것을 의탁하려는 기색을 완연히 나타낸것이다.

날랜 장수 목베이는 칼은 있어도 남녀의 정을 베이는 칼은 없다고 가만 내버려두면 장차 일이 어떻게 번져질는지 어이 알랴?

하지만 아직 과루부의 대인으로서, 소서노의 아비로서 결정권은 연타발자신에게 있는것이다.

오늘의 상면에서 연타발은 소서노에게서 손을 떼는 조건에서 그들의 산채일을 량후하게 보아줄것을 담보하리라 미리부터 마음먹고있었다.

연타발은 추연한 빛을 얼굴에 띄우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무릇 세상에 인걸은 많았어도 나라를 처음 세운이만큼 성스러운 어른은 없지. 산천이 수려한 곳에 성인이 나기마련이거늘 저 멀리 남쪽 부루나(평양)에서 천제의 아들 단군성왕께서 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다스린것은 아득한 옛날일일세그려.

한창 나라가 성할 때엔 천하가 온통 성인의 성지로 되였고 공덕과 미덕은 하늘땅에 가득찼는데 오늘도 그걸 잊지 못해 만백성모두가 가락에 담아 부르고있지 않나.》

그리고는 려송을 소리쳐부르며 말을 이었다.

《그대는 가락듣기를 즐겨하시오?》

《어르신님의 분부를 제가 어찌 마다하오리까.》

오이는 몸가짐을 정중히 하며 대답하였다.

《자네도 알테지만 려송인 내 말년에 양딸로 삼은 아이일세.

운명이 불운하여 일가친척 하나 없는 혈혈단신으로 소서노가 거두어 자매처럼 다정히 지내는것이 너무도 기특해 나도 자식처럼 사랑했다네.

그 재주와 성품이 남아못지 않고 악기 또한 능하고 소리도 참 잘하지.

자네들을 따라 산채로 들어간 이후론 그 애의 노래를 들어본지가 오래니 한번 들어보자구.》

공후를 안고 들어온 려송은 객실의 평상우에 무릎을 살풋이 끓고앉아 공후를 타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굽이치는 강물은 흘러흐르니

네끝을 어이 알수 있으랴


부드럽고 은은한 노래가락이 넓은 방안을 가득채웠다.

오이는 한순간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기의 심혼이라도 바치는듯 절절하게 노래부르는 려송의 연연한 자태는 그지없이 황홀했다.

연타발은 깊은 상념에 잠겨 바람벽 한쪽을 지그시 바라보고있었다.

마치 그 벽너머 먼곳의 하늘나라에 계시는 단군신령을 그려보는듯싶었다.


하늘에 해와 달 밝게 비치니

거룩한 님의 덕 잊지 못하네


노래는 끝났으나 여운은 그대로 남아흐르는듯 하였다.

연타발은 눈짓으로 려송을 내보내고나서 다시 정색하여 말을 이었다.

《이게 뭔고 하니 항간에서 널리 불리워지고있는 단군성왕에 대한 가락일세. 성인의 공덕과 미덕이 흐르는 물처럼 끝이 없고 해와 달처럼 영원하기를 바라는 만백성의 갸륵한 심정이 담겨져있다고 할수 있지. 세월은 멀리 흘러갔어도 옛 성인에 대한 그리움은 더해만 가는가보이. 세상이 하도 어지럽고 소란하니 그런 성인이 다시 나서 바로잡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라고 할가.》

살아온 년륜마냥 잔주름이 가득 얽히운 얼굴에는 고뇌가 짙게 어리였다.

오이는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소이까?

예로부터 하나의 강토에서 화목하게 살아온 한겨레가 오늘날에 이르러 부여니, 구려니 서로 다른 나라로 갈라져 반목질시하고있으니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소이다.》

《나뉘운지 오래면 합쳐지고 합쳐진지 오래면 나뉘워지기마련인게 세상리치인걸 어떡하겠나. 그저 성인의 옛 시대를 그리며 마음달랠밖에.》

연타발은 상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객실에 한동안 떠돌던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연타발이 입을 열었다.

《자넨 확실히 내가 보아오던 여느 젊은이들과 달라. 자네들이 형님으로 모신다는 그 주몽이란 인물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연타발은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무척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오이는 말이 여기까지 와닿자 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정색하여 말하였다.

《혹시 해모수라는 성함을 들어보셨소이까?》

연타발은 의외라는듯 눈을 크게 떴다.

《해모수라면 내 어찌 모를리 있겠나?

항간에서 전하는 소리에는 그분이 단군성왕님의 직계자손이라더군.… 일찌기 북부여땅에서 일어나 겨레의 나라를 옛시절처럼 다시 크게 일으켜 세우려던 범상치 않은 인물이였지.

20여년전 서쪽의 연나라가 십여만의 침략군을 끌고 쳐들어왔을 때 그분은 동족의 나라를 돕겠다며 련합군을 무어 출전하였다네. 부여국의 금와왕의 음모만 아니였다면 아마 지금쯤은 세상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헌데 갑자기 해모수의 성함을 거드는건 어쩐 일인가?》

《저희들이 따르는 주몽이 바로 해모수의 아들입니다.》

《뭐라구?!…》 연타발은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가 여기로 온것은 부여에 죄를 짓고 도망쳐살기를 바라서도 아니고 일신의 부귀와 영화를 탐내서도 아니오이다.

오직 해모수님의 뜻을 이어 어지러운 천하를 구원할 일념에서였소이다.》

연타발은 눈을 들어 오이를 바라보았다.

름름한 풍채와 의젓한 몸가짐, 굳센 의지와 슬기가 비낀 영채도는 두눈… 연타발은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어지러운 천하를 구원하겠단 말이지?

헌데 주몽은 어찌 부여에서 뜻을 펼 생각을 버리고 굳이 이곳으로 와서 고초를 겪는것인가?》

오이는 어두운 기색으로 낮게 말하였다.

《그동안 주몽이 겪은 고초를 어찌 한두마디로 이야기하겠소이까? 처음 왕자의 신분으로 대우받던 주몽이 말먹이군으로 지체가 떨어진것도, 타고난 재주로 하여 부여왕자들의 시기를 받아 여러번 생사기로의 길을 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도 다 해모수님이 당한 모해로부터 시작된것이오이다.… 하지만 단지 그를 피하러 이곳으로 왔다고는 생각지 말아주소이다.

주몽의 흉중엔 천하가 있고 겨레의 뜻과 념원이 있소이다.》

오이는 자기들이 남행길에 오르게 된 사연이며 겨레의 성지, 조종의 산에 기치를 꽂고 영웅남아들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태백산으로 가던 도중 뜻밖의 일로 중도에서 머무르게 된 구체적인 전말을 이야기했다.

연타발은 서둘러 그들에 대해 단정하고 곡해해온 자신이 돌이켜져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오이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주몽께서는 나에게 대인어른께 한가지 청을 수락해달라고 하였소이다.》

《무슨 청인데?》

연타발은 어떤 청이든지 다 들어줄 심산으로 량후한 미소를 떠올리며 물었다.

《거무나산의 말갈무리들을 쓸어버리자는것이옵니다.》

《말갈놈들을?!…》

산채의 지경을 더 넓혀달라거나 소서노의 문제를 꺼낼줄 알았던 연타발은 오이의 말이 너무도 놀라와 반쯤 몸을 일으켜세우기까지 했다.

《지금 말갈족의 횡포는 이미 과루부의 지경을 넘어 구려땅 곳곳으로 퍼져가고있소이다. 우리가 알아낸데 의하면 말갈족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새로 추장이 선출되였다 하나이다.

바로 그놈이 소서노마님과 려송을 해치려 했던 텁석부리놈이오이다.

천성이 잔악하고 권력욕이 강한 이놈을 그냥두면 앞으로 어떤 환난이 닥쳐올지 알수 없소이다.》

《음, 그러니 자네들은 도움을 받으러온게 아니라 도움을 주러 찾아왔군. 헌데 몇 안되는 자네네 사람들을 가지고 그게 가능한가?》

《싸움은 결코 머리수를 가지고 하는것이 아니지 않소이까?》

《음, 내 생각을 좀 해보겠네.》

연타발은 심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오이가 말하는 진정으로 보아 환심이나 낚으려는 허풍같지는 않았다.

아니, 참으로 졸본산채의 무사들이 말갈의 무리들을 평정하는 일에 나서준다면 작히나 좋을텐가?

연타발은 아무래도 과루부의 병권을 쥐고있는 두로와 이 일을 상론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저희들은 그리 알고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오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연타발은 손을 홰홰 내저으며 그를 만류했다.

《이 늙은이가 야박하다는 소문을 내고싶어 몸살인가?

려송아, 무얼하느냐? 어서 귀한 손님에게 주안상을 내오너라.

그리고 소서노에게도 어서 올라오란다고 일러라.》

문밖에서 기다리고있던 려송이 인차 대답을 하고 주방으로 들어가자 음식을 든 시비들이 연줄연줄 방으로 들어섰다.

곧 풍성한 식탁이 차려졌다.

《이 사람, 자네와 한가지 의논할 일이 있네.

자네도 알겠지만 소서노는 내 외동딸일세.

운명이 기박하여 일찌기 출가하였다가 홀몸이 된지도 삼년이 넘었다네.

요즘 그 애의 눈치를 보니 주몽에게 마음을 두고있는것 같은데 자네 보기엔 우리 애가 어떤가?》

술이 거퍼 몇잔 들어가자 거나해진 연타발이 스스럼없이 자기의 속을 털어놓았다.

오이는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여 머리를 숙이고있는 소서노에게로 눈길을 돌리였다.

문득 소서노가 보낸 갑옷을 받아들고 멀리 북쪽의 하늘가를 오래도록 바라보던 주몽의 모습이 떠올랐다.

뒤이어 부여의 궁성에서 고생하고있을 주몽의 어머니 류화와 부인 례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이는 가슴아픈 말이지만 주몽을 대신하여 사실을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연타발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고 소서노는 눈길을 내리떨군채 말없이 옷고름만을 비틀고있었다.

그러니 결국 이번에도 연타발의 의도는 빗나간것이였다.

《그럼 그 이야긴 그만두기로 하세.》

화제는 자연히 과루부의 정사를 론하는데로 이어졌다.

연타발과 오이사이에 허심탄회한 이야기가 스스럼없이 오고갔다.

《자고로 나라일의 첫째는 군사라고 나라방비는 하루도 소홀히 할수 없다고 하였소이다. 우리에겐 지금 먹을것도 입을것도 매우 부족하지만 군사를 키우고있소이다.

대인어른은 한명의 장재를 바라고있지만 사실 힘은 백성들속에 있사옵니다. 이건 바로 주몽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것이오이다.

예성에서 함께 온 마리나 협보 그리고 나자신도 모두 신분이 비천한 출신들이옵니다. 모둔곡에서 우리를 찾아온 재사와 묵거, 무골도 보기 드문 명사들이지만 그들 역시 도망친 노예이거나 가난한 하호출신들이옵니다.

허나 그들의 마음속엔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위해 몸바칠 각오가 불타고있나이다. 민심은 천심이고 민심을 얻는자 천하를 얻는다 하였소이다.

전번에 서높말에서 있은 일만 놓고보아도 낡은 관습을 버리고 민심에 맞게 정사를 뜯어고치는 일은 더는 미룰수 없는 일이옵니다.》

오이는 확신에 넘친 어조로 말하였다.

려송이 목이 긴 술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연타발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그는 지금 놀람과 의혹, 반신반의의 감정을 커다란 불안속에서 체험하고있었다. 순장터에서 노예들의 살벌한 눈빛을 보고 느닷없이 놀랐던 일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연타발은 심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로부터 주인이 있고 노예가 있었네. 수천년을 내려오며 이미 바위처럼 굳어진 관습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것 같은가?》

《묵은잎 떨어지고 새순이 돋는것이 바로 만물의 리치옵니다.

밤이 길다고 새날이 밝지 않으며 추위가 오래다 봄이 안 오겠나이까. 군자도 종시속이라는 말도 있는데 전 그 말이 군자도 시대의 풍속을 따르기마련이라는 뜻이라 생각되옵니다.》

연타발은 아무 말도 못했다.

처음에는 남의 수하에 있는 일개무부이고 말이나 치던 사람이라고 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횡설수설하였는데 응구대첩이 민첩하고 하는 말마다 리치가 분명한것이 그저 놀랍게만 여겨졌다.

《국력이 강해지면 우리는 서쪽으로 나가 외적들에게 빼앗긴 단군의 성지를 회복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작고 분렬된 나라들을 하나로 묶어세우겠소이다. 그래서 다시한번 단군성인의 나라를 크게 떨쳐 동방의 강대국으로 만들자는것이 바로 주몽의 포부올시다. 주몽의 흉중엔 천하가 있고 세상을 건질 큰뜻이 있다고 한 저의 말뜻을 이제는 알겠소이까?》

오이가 돌아간 뒤에 연타발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는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수 없는 자기자신에 대한 쓸쓸함을 느꼈다.

(부하들을 보니 주몽이 인걸임을 알겠구나!)

연타발은 몇번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사람이니 내 딸이 도와주려고 할수밖에.)

평범한 그날은 연타발의 인생에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긴 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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