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 2 장


1


구려왕이 주관한 귀족모임에 참가하고 돌아온 연타발의 심정은 번거롭기 그지없었다.

구려조정에서는 이번에 과루부땅에서 득세하고있는 말갈족들의 횡포한 행위에 속수무책인 연타발을 엄하게 추궁하고 하루빨리 결정적인 대책을 강구할것을 요구하였다.

텁석부리가 새로 추장이 된 후 말갈족은 그 세력을 점차 강화하면서 과루부일대는 물론 연나부와 환나부, 제나부일대의 말갈촌락들까지 흡수하여 로략질을 끊임없이 감행하였다.

말갈족의 통수권을 쥔 텁석부리는 소서노의 치마자락을 움켜쥐는 방법으로 과루부땅을 타고앉으려던 이전 추장과는 달리 구려땅전체에 대한 략탈과 로략질로 구려조정을 부단히 약화시키고 강한 군사력을 키워 단숨에 구려의 5부땅을 집어삼키려는 어리석은 꿈을 꾸고있었다.

말갈족의 로략질로 어떤 마을은 완전히 황페화되고 인적기가 끊기였으며 어떤 고을의 관장은 고을을 옮기게 해달라고 상소까지 하는 형편이였다.

게다가 연나성까지 자기를 마중나온 두로로부터 소서노의 뜻밖의 행동을 알게 되자 천둥같이 노했다.

《당장 군사를 풀어 졸본산채의 놈들을 조처하게 하여주옵소서.》

두로의 간절한 청에 입을 꾹 다물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연타발은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자네도 강빈불압주라는 말뜻을 알테지? 손의 위력이 아무리 강해도 결코 주인을 위압하지 못한다는 말일세. 물론 산채의것들이 괘씸한것은 사실이네만 아직 그 세력이라는게 보잘것 없는데다가 더우기 우리 딸을 구원했다는것을 세상이 다 아는터인데 공연히 사람들의 웃음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네. 그리고 이제 자네는 보다 큰일을 해야 하네!》

연타발은 어정쩡해서 서있는 두로를 뒤에 남기고 과루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자기를 마중나온 하인들뿐아니라 소서노도 본체만체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다음에는 문을 꾹 닫고 아무도 찾지 않았다.

이날처럼 엄엄하고 쌀쌀한 주인을 본 일이 없었던 하인들이 그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것 같아 속으로 은근히 걱정하였다.

한낮이 좀 지나 아버지가 부른다는 기별을 받고 소서노가 급히 달려왔다.

《아버님께서 대노했사와요.》

그를 안내하던 시비 하나가 주위를 살피다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것을 미리 짐작하고있던것만큼 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방금전 소서노는 아버지를 모시고 연나성을 다녀온 하인으로부터 두로가 연나성입구까지 마중갔댔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였다.

소서노가 침실로 들어갔을 때 연타발은 생각에 잠긴듯 한 표정으로 침상우에 앉아있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머리에 청라관(푸른 비단관)을 쓰고 허리에 숫돌과 오자도를 그냥 차고있었는데 이번처럼 집안에서 나들이옷차림 그대로인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였다.

딸을 맞이하는 그의 태도는 엄엄하기 그지없었다.

소서노는 다소곳이 머리숙여 절을 하고 아버님께서 먼길을 무사히 다녀오신것이 기쁘다고 인사말을 하였다.

연타발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것으로 대답하였다.

나이탓인지 허우대는 커도 어딘가 후줄근해보이는 체구다.

하관이 기름한 푸수한 얼굴에선 가벼운 경련이 흘러가고있었다.

그가 흔히 극도로 지치고 흥분했을 때 있군 하는 표정이였다.

연타발은 사람들을 대할 때 점잖고 너그러우면서도 아주 과묵한 성격이였다. 자기의 흥분이나 속생각을 좀처럼 내비치지 않았고 군말이 많은것을 싫어하였다.

로련한 장수는 병담(군사에 관한 이야기)을 허투로 하지 않고 로회한 장사군은 물건을 깊숙이 감출줄 안다고 그의 이런 성격은 과루부안의 크고작은 일을 다 맡아안고 처리해야 하는 대인으로서의 연타발의 인품을 돋구어주는 하나의 장점이라고 볼수 있었다.

권세도 권세거니와 그의 이러한 심중하고도 엄엄한 태도에 눌리워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군 하였다.

오직 소서노만이 례외로 되였다.

연타발은 일찌기 저세상사람이 되여버린 그의 어머니를 대신하여 자기 딸에게 정성을 다하려 애썼다.

어머니를 닮아 점점 더 곱게 번져가는 딸의 성장을 지켜보는 연타발의 마음속엔 저도 모르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하여 노상 흥그러운 기분이였다.

그는 자기의 기쁨을 감추려 하지 않았으며 자주 딸과 마주앉아 이것저것 생활과 관련한 문제들을 가지고 정답게 말을 건늬는 때가 더없이 좋았다.

그러나 오늘은 이전과 전혀 달랐다.

소서노는 싸늘한 눈빛으로 방으로 들어서는 자기를 맞아주는 아버지의 안색을 보자 은근히 당황해났다.

시비 하나가 더운물을 떠가지고 들어왔다.

연타발은 웬일인지 어험- 하고 기침을 하고는 불편한듯 자리를 고쳐앉았다.

더운물을 마시고난 그는 그릇을 돌려주며 시비에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모두 물러들 가라. 내 방앞에 한놈도 얼씬 못하게 하라고 이르거라.》

(아버지가 정말 성이 났구나!)

소서노는 혼자 남게 되자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는 두손을 꼭 모아쥐고 방금 붙들린 가엾은 새처럼 떨리는 온몸을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이윽고 연타발은 심중한 기색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내 미리 말해둔다마는 구태여 변명할 생각을 말아라.

죽을 고비에 들었던 너를 산채사람들이 구원해준것도 그리고 은혜를 갚고저 그들을 초청하여 대접한 네가 얼마간의 군량미를 보내준것도 다 알고있다. 그걸 탓하자는건 아니로다.》

소서노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채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연타발은 여전히 엄숙한 태도로 말을 계속하였다.

《…사람은 자기의 명분을 귀중히 여기고 그에 맞게 처신할줄 알아야 한다. 너도 알다싶이 우리 집은 대대로 명문가여서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고있다. 그런데 너의 경솔한 행동이 가문은 물론이고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 땅속에 누워있는 너의 어머니를 욕되게 한다는걸 생각이나 해보았느냐. 응?》

《아버지, 소녀가 어찌…》

연타발은 손을 홰홰 내저었다.

《나는 아직 할 말을 다 못했다.

너나 이 아비에게 있어서 산채의 젊은이들은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목숨을 구원해준 은인들이니까.

그런데 알아보니 산채를 꾸린다, 사냥한 짐승들을 가지고 주변고을들에 나가 군량미를 장만한다 어쩐다 하면서 소란을 피운다는거다.

그자들의 속심을 누가 안다더냐?

너로 말하면 무슨 까닭으로 그것들과 상종한단 말이냐?

그게 자기 신세를 망치는 어리석은 행동이란걸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았느냐?

사람은 무슨 일에서나 심사숙고하고 자중할줄 알아야 하느니라.》

연타발은 할 말을 다한듯 또다시 어험- 하고 기침을 하였다.

소서노는 송구스러우면서도 한쪽으로는 가슴이 후더워졌다.

애지중지하며 키운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진정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누르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소녀가 죄를 지었나이다.》

《너의 그 말을 그자들과 다시 상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어도 되겠느냐?》

연타발은 딸의 침묵을 긍정하는 뜻으로 알고 손으로 수염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애비의 말을 따르거라. 부여것들과는 상종하지 않는것이 좋아. 천길물속은 알아도 한길사람속은 알수 없다고 소문에는 그들이 부여에서 죄를 짓고 여기로 도망쳐왔다고 하는데 혹시 권력이 탐나 내란을 기도한자들이라면 더더욱 위험하느니라…》

연타발이 말을 미처 끝내지도 못했는데 소서노가 번쩍 고개를 들고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버진 그들을 무뢰배들처럼 단정하시온데… 한번 만나보고 결심하는것이 좋을가 하나이다.

길이 멀면 말의 힘을 알고 날이 오래면 사람의 마음을 안다 하였거늘 소녀도 부여사람이라면 그리 좋은 감정이 아닌고로 처음엔 그들을 경계했었는데 실지 상종해보니 전혀 다른 사람들이였소이다.》

《뭐, 뭐… 다른 사람들이라구?》

《네. 전혀 다른 사람들이오이다.》

소서노는 고집스럽게 제 말을 되풀이했다.

연타발은 어이가 없는듯 눈을 치뜨고 힐끗 딸을 바라보았다.

《허, 난 그래도 내 질책이 너의 어리석음을 깨우칠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한두번 만나본자들의 속을 네가 어찌 그리 잘 알수 있느냐?》

《바다물이 짜다는것을 어찌 다 마셔봐야 안다 하겠소이까?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소녀는 그처럼 훌륭하고 의젓한 사나이들을 처음 보았사옵니다. 아버님은 늘 나라가 흥하려면 인걸이 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외우지 않으셨소이까?

그분들은 세상에 드문 재사들로 소녀의 생각으로는 아버님이 찾는 인재들이라 사려되옵니다.》

연타발은 어이가 없는듯 한동안 입을 다물줄 모르더니 갑자기 두눈을 부릅뜨고 엄하게 소리쳤다.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를?!… 그래 아무리 이 나라에 인재가 바닥이 났다 한들 부여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온자들에게 의지하란 말이냐?》

《아바마마, 제가 목숨을 걸고 장담할수 있는것은 결코 그들이 아버님이 단정하는 무뢰배나 죄인이 아니며 오직 뜻을 이루기 위해 여기로 들어온 사람들이라는것입니다.》

소서노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리워 목이 메였다.

연타발은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듯 한감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도리머리를 저었다.

확실히 소서노는 이전과 딴판으로 달라졌다.

아니, 며칠사이에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항상 얼굴에 고독과 슬픔이 실렸던 딸이 부여에서 온자들을 한사코 두둔해나서는 뒤에 과연 무엇이 있을것인가?

단순히 생명이나 구해주었다고 해서 딸이 저렇게까지 나올수 있겠는가?

연타발은 놀랍고 의아한 기색을 별로 숨김이 없이 직방 이렇게 물었다.

《너 혹시 그자들중에 누군가를 마음에 둔것은 아니냐?》

소서노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한점 불꽃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강렬한 열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듯 했다.

《만일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소서노는 나직하면서도 싸늘한 기운이 풍기는 어조로 대답했다.

《이담에 반드시 후회하게 되오리다.》

연타발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세우며 추상같이 딸을 꾸짖었다.

《후회? 발칙한지고- 흉환에는 주소가 따로 없다는 말을 내 많이 들어왔어도 과루부의 오랜 명문가의 체모가 어리석은 딸 하나로 일조에 망조가 들줄 몰랐구나. 기껏 키워주었더니 이젠 감히 이 애비를 가르치려들어?…》

연타발은 성이 독같이 올라 옷을 떨치고 방안을 오락가락하였다.

애지중지 키워놓은 딸에게서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어떻게 키워왔기에 딸년이란게 저 꼴이란 말인가.

그야말로 눈동자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만큼 애지중지 키워오지 않았더란 말인가.

그런데 이제 와서는 다 자랐다고 아비의 말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이니 화가 치밀어 분통이 터질것만 같았다.

방안을 한참이나 비좁게 오락가락하여서야 간신히 마음을 진정한 연타발은 엄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하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장은 집안에서 결정적인 권한을 가지고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재산은 주인이 물려준것이니 산채로 보내건말건 상관하지 않겠다. 그러나 넌 내 딸이다. 내 딸인것만큼 너 혼자서 장래문제를 결심할수 없다는걸 알아둬라.》

소서노는 흐윽- 하고 쏟아지는 눈물을 훔쳤다.

이제는 절을 하고 일어설수밖에 없었다.

더 있어본댔자 아버지를 노엽힐뿐이고 성미가 워낙 곧은박이여서 한두마디 말로써는 리해시킬수 없기때문이였다.

소서노가 물러가자 연타발은 불시에 고독을 느꼈다.

자기한테서 딸이 영영 떨어져나간듯 싶어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에 안해의 죽음이라는(안해는 산후병으로 사망했었다.) 참기 어려운 아픔을 겪었으나 어머니와 꼭같이 생긴 딸로 하여 슬픔을 이겨나갈수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그의 인생의 락이였고 여생을 지탱해온 지팽이였다.

그 딸이 자기곁에 있으면 한생을 시름없이 살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딸의 운명은 너무도 불우했다.

막대한 재산과 노예를 가진 고모나의 젊은 귀족 우태에게 시집갔던 딸이 불과 한해도 못되여 청상과부로 되여버린것이다.

산천도망은 해도 팔자도망은 못한다고 아마도 그것이 딸의 운명이런듯 싶었다. 그가 자주 하인을 고모나에 보내 소서노를 집으로 불러들이는것도 짝을 잃고 홀로 외로워할 가엾은 딸의 시름을 덜어주고 자기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는것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연타발은 심혼을 다 바쳐 키워온 딸자식이 자기말 같은건 애당초 귀등으로도 듣지 않는것이 무엇보다 분하고 섭섭하였다.

그는 괴로움을 덜어보려는듯 다시 방안을 거닐기 시작하였다.

그때 집사노릇을 하는 하인 하나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연타발은 마뜩지 않게 물었다.

《서늪말에서 온 사람이 아까부터 기다리옵니다. 언제쯤 내려오시겠는지 주인님의 대답을 들으려구…》

《서늪말?!》

연타발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연나부까지 마중을 나왔던 다라나 녹살인 두로가 아버지의 조상을 하는겸 서늪말로 꼭 내려와달라고 당부하던 일이 생각히웠다.

한때 연타발의 충실한 신하였던 그의 아버지묘자리를 이번에 새로 풍수가 좋은 명당자리인 서늪말로 이관하려는데 도망치다 잡힌 노예들을 처형하는겸 묘곁에 순장하여 외로운 혼을 위로하겠다는것이였다.

예로부터 노예주가 죽으면 부리던 노예들을 함께 껴묻는 유습이 있는것은 사실이나 연타발은 이미 죽은지 오랜 사람을 위해 또 산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것이 어쩐지 마음에 꺼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다 하여 차마 거절할수 없었다.

어쨌든 세상은 노예주의 세상이고 노예는 한갖 마소나 물건짝같이 취급되는 세월이여서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였다.

더구나 두로의 아버지는 생전에 자기에게 더없이 충실했던 수하장수였던것이다.

연타발은 소서노 일로 하여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고싶었다.

그는 집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에게 이르게. 내가 래일 서늪말로 가겠노라고.》

《알겠소이다. 》

집사는 허리굽혀 절을 하고 뒤걸음으로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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