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회


제 1 장


6


텁석부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뒤일이 무서워났다.

싸움판에서 남먼저 도망친 자기를 거무나산 추장이 곱게 놔둘리 만무한것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부여의 간자인 검은 복면이나 졸본천의 오이를 비롯한 젊은 무사들이 자기의 목에 칼을 대일지 어이 알랴.

(도망쳐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해.)

텁석부리는 솔미산동굴속에 깊숙이 감추어놓은 금붙이들을 꺼내가지고 이밤으로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리라 결심하였다.

부여의 대소왕자도 거무나산 추장도 졸본천의 오이도 영영 찾아낼수 없는 그런 은신처를 찾아 멀리 도망쳐야 한다.

금붙이만 있으면야 어디 가선들 다시 일떠서지 못하랴.

텁석부리는 야밤삼경에 쥐도 새도 모르게 장막을 빠져 허겁지겁 솔미산동굴로 향하였다. 동굴입구에 이른 텁석부리는 범의 아구리같은 컴컴한 동굴벽을 짚으며 엉금엉금 무릎걸음으로 금붙이를 파묻어둔 곳을 향해 기여갔다. 희미한 불빛이 동굴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고있었다.

(엉? 저건 웬 불빛이야?)

깊은 동굴속에 금덩이를 묻어둔 곳은 텁석부리밖에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텁석부리는 무릎이 와들와들 떨리는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불빛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기여갔다.

동굴 한쪽벽에 꽂아놓은 고콜심지에서 뿌지직뿌지직 송진 타끓는 냄새가 풍겨왔다.

바위틈사이에 머리를 구겨박은 텁석부리는 주위를 살폈으나 인적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데.)

한동안이 지나자 제법 담이 커진 놈은 머리를 쳐들고 불빛이 비치는 곳을 향해 어정어정 걸어갔다.

바로 그 순간, 등뒤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동굴벽에 비쳐진 그 그림자를 본 순간 텁석부리는 악 소리를 내지르며 풀썩 주저앉았다.

《텁석부리, 뛰여야 벼룩이지. 그래 도망치면 널 못 찾아낼것 같은가.》

웅글은 사나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동굴벽을 울렸다.

《…》

《배신자는 피로 그 죄를 보상받아야 한다. 각오가 되여있는가?》

지옥의 사자가 부르는듯 한 그 목소리에 텁석부리는 펀뜩 정신이 들었다.

살아야 한다. 범한테 물려가더라도 정신만 잃지 않으면 산다는데…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된 텁석부리는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억울하오이다. 졸본천의 그 무사놈들만 아니였더라면 소서노 그년은 다 뺏은것이나 다름없었소이다. 협객께선 저더러 졸본천의 그 무사놈들은 마음놓으라 하시지 않으셨소이까. 그자들만 아니라면 어찌 이번 거사가?…》

《닥쳐!-》

성칼진 목소리가 새된 금속성을 일으키며 아츠럽게 동굴벽을 때렸다.

두사람의 검은 그림자를 안고 고콜불이 흔들거렸다.

선뜩한 그 무엇이 목에 와닿는듯 한 촉감에 텁석부리는 눈을 내리감았다.

《좋다, 그럼 이번만은 용서해주마.》

예상외로 한결 가라앉은 침착한 목소리가 울렸다.

놈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마에 흥건히 내밴 땀을 씻었다.

《텁석부리, 거무나산 추장이 래일 너에게 죄를 문책하러 올것이다.》

검은 협객의 말에 텁석부리는 또다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 소인은 어찌하면 좋소이까?》

《아마 추장이 온다고 해도 군사를 끌고 오는것은 아니니 마음을 놔도 돼. 너는 이번 기회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아예 추장을 제껴버려라.》

《추장님을요?》

놈은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는가? 너야 이미 오래전부터 추장자리를 노려오지 않았어?》

《…》

《기회란 가지에 앉은 새와 같아 제꺽 잡지 않으면 훌 날아가버리고만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여부있소이까. 알아들었소이다.》

《추장이 되면 먼저 부여에서 도망친 그 졸본산채의 놈들부터 없애치워야 한다. 이번이 마지막기회라는것을 명심해라.》

《알겠소이다. 사실 그놈들은 나의 원쑤이기도 하오이다.》

텁석부리는 이를 갈았다.

《어디서나 너를 지켜보는 눈길이 있다는것을 잊지 말아라.》

검은 복면의 협객은 이 마지막말을 야멸차게 뇌까리고 휘파람을 길게 내불었다. 귀청을 찢는 휘파람소리와 함께 가물거리던 고콜불이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텁석부리는 마치 나쁜 꿈을 꾸고난것처럼 온몸이 흠뻑 젖어 오슬오슬 몸을 떨었다. 놈은 방금전 동굴로 들어을 때처럼 네발로 엉금엉금 기여 가까스로 굴속을 벗어났다.

새날이 희붐히 밝아오고있었다.…

그날 소서노는 밤이 늦어지도록 졸본산채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잠들지 못했다. 주몽이라는 젊은이는 인물과 재주가 뛰여날뿐아니라 사리정연한 언사와 겸허한 성품으로 하여 그 녀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렇듯 이성에 대하여 생각하는것은 이즈음에 와서 처음 있는 일이였다.

그 녀자의 가슴에는 지워지지 않는 아픈 상처가 옹이처럼 깊이 자리잡고있었다.

소서노는 일찌기 어머니를 잃고 유모의 슬하에서 자라났다.

아버지 연타발은 딸을 끔찍이 사랑해주었으나 어머니의 정은 대신해줄수 없는것이여서 그는 늘 유모를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무리잃은 외기러기와 같이 그가 혼자 있기 좋아하는것도, 웃음보다 먼저 슬픈 일에 마음을 쓰는것도 어두운 유년시절이 가져다준 습관이였다.

설음과 우울속에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낸 소서노는 당시로서 세력이 당당한 고모나의 귀족출신인 우태와 가정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귀인의 상을 타고난 소서노가 천상배필을 만났다고 몹시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우태는 당시 세습에 푹 젖은 풍류남아일뿐이였다.

안일과 향락, 사치에 물젖은 그의 생활은 사냥놀이, 유흥, 식도락이 전부였다. 그리고 노예들에 한해서는 병적으로 가혹하였다.

일찌기 권세가의 가문에서 자라기는 하였으나 어머니를 여읜탓으로 다사다난한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였던 소서노는 유모를 비롯한 노예들의 생활을 적지 않게 보아오면서 그들의 처지를 깊이 동정하였다.

소서노의 이런 생각은 우태에게 있어서 조금도 리해할수 없는것이였다.

우태가 사냥에 미쳐 여러날 숲으로 돌아다닐 때면 소서노는 소중히 보관하고있던 공후를 꺼내여 타군 하였다.

그 공후로 말하면 젊어서 부중관가의 관비였던 유모가 즐겨타던것으로서 소서노가 애지중지 여기는 귀중한 악기였다.

유모가 처음 소서노에게 배워준것은 가요 《공후인》이였다.


님아 강을 건느지 마소

그예 님은 건느시네

강물에 빠져 죽으시니

어저 님을 어이하리


공후를 타면서 유모는 저도 모르게 굵은 눈물방울을 하염없이 흘렸다.

비록 권세가의 유모이지만 그 녀인 역시 일개의 녀자비로서 갈데없는 노예생활을 강요당했던것이다.

악곡을 타고 흐르는 비애의 감정은 불합리한 사회제도하에서 인간으로서의 초보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비참한 생활만을 강요당하다가 종당에는 죽음으로써 항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불우한 인생들의 당대사가 비껴져 저도 모르게 슬픔에 잠겨버리게 하였다.

소서노는 우태에게로 시집올 때 바로 그 유모를 데리고왔다.

어쩌면 어머니같기도 한 그 녀인을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한다 해도 여생을 편안히 보내도록 보살펴주고싶었던것이다.

그러나 시집온지 몇달만에 우태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우태는 장례를 크게 벌려놓고 순장할 노예들속에 소서노가 데리고온 그 유모를 밀어넣었다. 우태에게는 이미 오륙이 변변치 못한 소서노의 유모가 필요없었던것이다.

소서노는 울면서 우태에게 애원도 해보고 하소연도 해보았으나 가부장적인 세습에 물젖은 우태는 그 부탁을 무작정 거절해버렸다.

제사가 진행되던 날 소서노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우태에게 등을 밀리우며 순장터로 끌려나갔다.

이미 실성한 사람처럼 되여버린 유모는 소서노를 알아보지 못하고 어딘가 저 멀리 목화송이같은 흰구름이 점점이 떠가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있었다.

창과 몽둥이를 든 가병들이 묶어온 수십명 노예들을 무덤앞에 커다랗게 피워놓은 불무지앞으로 끌어갔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 차고 때리는 소리, 신음소리…

여기저기서 곡성이 터져나왔다.

바로 그 순간 소서노는 순장노예들 한가운데 섰던 유모의 눈에서 번쩍 발산하는 분노의 빛을 알아보았다. 어려서부터 자애와 부드러움, 인정이 마를것 같지 않던 두눈에서 처음으로 끝없는 저주와 증오로 황황 타번지는 불길을 본것이다.

그러나 유모의 눈빛은 차츰 생기를 잃었다.

소서노는 저도 모르게 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누구인가 그를 부축해주었다.

바로 그때 죽음을 앞둔 순장노예들속에서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분명 어릴적 처음 그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던 유모의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작고 가냘프게 울렸으나 이어 몸과 몸을 서로 기대인 노예들의 우렁찬 합창으로 번져졌다.


님아 강을 건느지 마소

그예 님은 건느시네


노예들의 원한에 찬 노래소리가 울려퍼지는 저녁하늘가엔 피빛의 석양이 짙게 어려있었다.

가병들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치고 차면서 노예들을 구뎅이속에 처넣으려 하였으나 서로 어깨를 결은 그들의 비통한 노래소리는 더더욱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소서노는 문을 닫아걸고 우태와 아예 상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몇달후 우태는 지은 죄로 하여 천벌을 받았는지 단명하고말았다.

《하지만 그 젊은이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야. 재주도 비상하고 가슴속엔 큰 뜻을 품은것이 분명해.》

소서노는 주몽과 그의 부하들의 름름한 모습을 그려보면서 자기의 생각을 이어나갔다.

졸본천기슭에 부여젊은이들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누가 퍼뜨린것인지는 딱히 모르나 산채가 꾸려지고 찾아드는 사람이 불어날수록 의심과 불안은 더욱 커졌다.

광대한 토지를 점유하고 많은 노예들을 거느리고있는 귀족들과 노예주들은 더욱 안절부절하였다.

여느때는 서로 물고 뜯으며 피투성이싸움만을 일삼던 그들이 언제 그랬냐싶게 얼굴을 싹 씻고 돌아앉아 주몽일행을 해칠 꿍꿍이모의판을 자주 벌려놓았다.

도래떡 안팎이 없다고 자칫하면 주몽의 세력에게 밀려 저들이 가지고있는 모든것을 잃을가 두려운 나머지 서로의 처지와 리해관계의 공통성으로 손을 맞잡은것이였다. 이들의 맨 앞장에는 바로 두로가 서있었다.

한때 연타발에게 충실했던 신하의 아들인 연고로 연타발은 그를 남달리 신임하였으며 아직 젊은 그에게 다라나의 녹살이라는 서리찬 직함까지 안겨주었다.

두로는 그 기회를 리용하여 자기의 령지를 넓히고 더 많은 재물을 그러모으기 시작하였다.

하여 연타발네 집에 얹혀살면서 빈털터리였던 두로는 녹살이 된지 불과 두해만에 과루부에서 세력있다 자처하는 귀족들의 수준에 당당히 들어설수 있게 되였다.

두로는 졸본천의 무사들을 시초에 짓뭉개버림으로써 자기의 지반을 튼튼히 다지고 력량력있는 귀족세력들을 자기 주위에 묶어세움으로써 과루부의 대인으로 될 꿈까지 꾸고있었다.

주몽이 지닌 비범한 재주와 인품 그리고 오이를 비롯한 부하들의 용맹함이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이곳 귀족들은 군사를 내여 그들의 산채를 공격하였을것이다.

소서노의 눈앞에는 호걸남아다운 주몽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떠올랐다. 여느 사람들 같으면 목숨과 명예를 구원해준 대가로 막대한 보수를 바랐을테지만 주몽은 단지 사나이로서 피를 나눈 한겨레의 운명을 지켜주는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라고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피를 나눈 한겨레의 운명을 지켜주는것이 사나이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주몽의 이 말은 오래도록 소서노의 귀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겨레…》

소서노는 조용히 입속말로 외워보았다.

비록 길지 않은 인생길이였지만 소서노는 적지 않은 남자들을 보아왔다.

우태만 놓고보아도 그는 같은 겨레임에도 불구하고 노예들에 대해서는 짐승취급을 하였다.

더우기 소서노를 키워준 유모가 나이들어 쓸모없다 하여 순장터에 서슴없이 내던져버렸다.

두로는 또 어떠한가.

아버지 연타발의 발탁으로 녹살이 되자마자 권세를 리용하여 가난한 하호들에게 막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그것을 물지 못하면 재산을 빼앗고 처자들을 노예로 끌어갔다.

하다면 그들에게는 겨레의 피가 흐르고있지 않단 말인가.

같은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런 엄청난 차이가 생겨나는것일가.

(남자는 많아도 사나이는 적다는 말이 바로 이런걸 두고 하는 소리일가? 하다면 주몽, 그이야말로 뜻이 큰 사내이다.

아이참, 내가 무슨 생각을…)

소서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였다. 또 다른 생각이 그의 머리속에 가지를 친다.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이다.

완고한 세습귀족이며 과루부의 대인인 연타발은 부여에서 탈출해왔다는 젊은 무사들을 결코 용납하려 하지 않는것이다.

떠도는 소문과 함께 두로의 충동질에 넘어간 연타발은 구려 5부귀족들의 모임인 제가평의회에서 군사를 출동시킬데 대한 건의를 하려 하고있다.

소서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그리고 행길에서 겪은 봉변을 그냥 가슴속에 품고 더이상 말을 내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며칠후 한낮무렵 소서노는 그간의 시름을 덜고싶어 산책하려고 조용한 숲속길로 말을 타고 나섰다.

어느새 촉기빠른 려송이 그의 거동을 눈치채고 말을 타고 따라나섰다.

말갈놈들에게 변을 당한 후 자기도 무예를 익힌다며 말타는 법이며 활쏘는 법을 익히더니 제법 능숙하게 말을 몰아간다.

한해전, 수자리를 떠난 오빠를 찾아 여기저기 류랑걸식하다가 소서노집대문앞에 쓰러진 려송을 바로 소서노가 구원해주었다.

눈썰미있고 여물찬 처녀는 몸이 회복되자마자 은혜를 갚는다며 소서노댁의 진일, 궂은일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이 미안하여 소서노는 로자까지 쥐여주며 려송의 등을 떠밀었다.

려송은 한달후에 수자리서던 오빠가 변방에서 그만 잘못되였다는 가슴아픈 소식을 안고 되돌아왔다. 오빠마저 잃고 혈혈단신이 된 그는 소서노의 품에 안겨 자기의 설분을 하소하며 서럽게 울었다.

마음씨 고운 소서노는 의지가지 없는 려송을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머무르게 했다. 외로운 그 처녀를 동생삼아 사랑해주며 자신의 고독을 달래고 서로 의지하고싶었던것이다.

그때부터 려송은 소서노를 친언니처럼 따랐다.…

가을을 마친 들판은 몹시 한산하게만 느껴졌다.

여기저기 채 거두어들이지 못한 곡식단이 부산스레 널려있고 들길에는 바람에 바싹 마른 수수잎새들이 이리저리 흩날린다.

유독 길섶의 들국화만이 검질기게 생명을 부지하며 마가을의 황량함을 가셔내고있을뿐이다.

소서노는 쓸쓸하게 길섶에 뿌리박고있는 들국화꽃송이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아이, 들국화!》

소서노의 등뒤에서 천천히 말을 몰아오던 려송이도 꽃을 발견한듯 호들갑을 떨며 냉큼 말에서 뛰여내렸다.

《다치지 말아!》

소서노는 혹시 려송이 꽃을 꺾을가 념려되여 저도 모르게 기겁해서 소리쳤다.

려송은 소서노를 향해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이참, 깜짝 놀랐사와요. 헌데 왜 그러시와요?》

《그 꽃마저 꺾으면 마치 이 들판이 텅 빈것처럼 느껴지누나.》

《호호, 마님, 제 말을 들어보시와요. 음- 이 들국화는 꼭 마님이시와요. 마가을들판의 황량함을 가시여주는 곱게 핀 한송이의 꽃.》

려송의 방치같은 노죽에 소서노는 씁쓸히 웃었다.

부정의와 악만이 살판치는 이 세상에서 사랑과 정으로 그 무엇인가를 얻어보고저 모지름쓰는 소서노의 모습이 바로 황량한 들판의 한송이 들국화가 아니랴.

《그래, 꽃이지… 하지만 좋은 한철 다 놓치고 뒤늦게야 피여나는 벌도 나비도 못 부르는 외롭고 고독한 꽃이란다.》

수심어린 소서노의 이 말에 려송이도 그만에야 입을 다물었다.

가을이면 항상 그러하듯이 소서노의 가슴속엔 외로운 고독감과 함께 애수와 불안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소서노는 그것이 짝을 잃은 외기러기가 고독하게 창공을 홀로 나는듯 한 심정이라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하여 소서노는 그 쓸쓸함과 고독감을 덜어보려고 이따금 말을 타고 령지를 돌아보는것으로 마음을 달래보군 하였다.

때없이 두로와 같은 젊은 귀족들이 찾아와 한담의 상대가 되여주기도 하였으나 개중에는 대부분 혼자 사는 녀인을 유혹하여 그 세력과 재산을 배경으로 부귀영달을 누릴 궁리를 꿈꾸는자들이 적지 않았다.

차라리 그런자들을 상대하기보다 미천하지만 근면하고 마음이 깨끗한 하호들과 노예들을 상대로 하는것이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럴수록 노예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성이 더욱 통절히 느껴졌으며 차츰 그것은 위구로부터 불안으로 번져져갔다.

오랜 세월 대를 물려온 노예제경리는 노예주들의 가혹한 수탈과 무지한 폭력적지배로 하여 밑뿌리채 뒤흔들리고있었다. 지난날 채찍이나 몽둥이로 다스리면 어쩔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시키는대로 묵묵히 순종하던 노예들이 이제는 자기의 운명이 삶과 죽음의 극한점에 이르렀다는것을 때늦게나마 깨달았던것이다.

처음에는 일을 태공하거나 로동도구를 파괴하고 도망치는것과 같은 단순한 항거로부터 이제는 감독들을 때려눕히고 무리를 지어 폭동을 일으켜 노예주를 죽여버리는것과 같은짓도 서슴지 않았다.

점점 고갈되여가고있는 노예원천을 메우기 위해 가난한 하호들이 빚값으로 채무노예, 형벌노예로 더 많이 굴러떨어졌다.

(사람이란 다 같고같은데 어찌하여 세상엔 귀천이라는것이 있고 노예와 주인이라는것이 생긴것일가? 정말 그것이 태여날 때부터 타고나는 팔자탓이란 말인가.)

이것은 소서노에게 있어서 정말로 풀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들국화를 내버려두고 말에 오른 려송이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소서노에게 물었다.

《마님,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이다.

철은 제 철이 아니더라도 꽃은 꽃이 아니와요. 그것도 찬서리에도 시들지 않는 억센 들국화!》

마치 시를 읊조리듯 명랑한 어조로 말하는 려송의 모습을 바라보는 소서노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참, 려송아, 너를 구원해주었다던 그 오이무사님이 언제 한번 들리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시더냐?》

《저 그런 말은 없었사와요. 하긴 산채가 몽땅 불타버렸으니 미처 여기까지 들릴 형편이 못되는가 보오이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산채가 불타다니?》

소서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사와요.

마님을 구원하러 졸본천의 무사들이 막 떠나려 했을 때 나쁜 놈들이 산채에 불을 질렀소이다. 바로 그래서…》

려송은 그날에 자기가 보고들은 사연을 자초지종 이야기했다.

《그러니 나를 구원하자고 그토록 힘들게 꾸렸던 산채를 잃었단 말이지.…》

《그렇사와요.》

소서노는 또 한번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껏 그는 아버지 연타발과 과루부귀족들의 눈과 입이 무서워 졸본산채무사들을 향해 한걸음 다가선 자기의 걸음을 저어하지 않았던가.

땀을 들여 꾸린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잃으면서도 하등에 인연도 없는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달려온 그런 의로운 젊은이들을 외면한다면 무슨 낯으로 청청푸른 하늘아래 나설수 있으랴.

소서노는 그때에야 비로소 이 며칠동안 그를 번민하고 방황하게 한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이제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그들을 도와주어야 해. 아니, 은혜를 갚아야 해.)

소서노는 은연중 머리를 뒤로 돌려 가을바람에 한들거리는 들국화꽃송이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방금전 려송의 말이 생각히운다.

마가을 찬서리에 시들줄 모르는 들국화,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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