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1 장


5


타다남은 재티가 골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터만 남은 산채앞에서 오이는 억이 막힌듯 한동안 서있었다.

바로 여기가 오늘 아침까지만 하여도 뜻을 나눈 형제들이 웃고떠들며 장차 새 나라의 기틀을 세워볼 크나큰 웅지를 펼치던 그곳이란 말인가.

죽음을 각오하고 엄호수를 건너 이곳에 당도하여 산채의 첫 기둥을 박을 때 비록 고생은 좀 했지만 그들은 그 무엇에도 비기지 못할 보람과 희열을 느꼈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어떤 놈들이 이런짓을 했어?》

마리가 철장을 움켜쥐고 분격을 터뜨리는 소리에 맞은켠 숲이 화답이나 하듯 솨솨 설레인다.

비록 싸움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산채가 불타버린것으로 하여 군사들속에서는 자연히 의기소침한 기분이 떠돌았다. 자기들의 심정이 그러할진대 장차 산채를 발판으로 하여 가슴에 품었던 원대한 뜻을 실현할 구상을 무르익혀오던 주몽의 심정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오이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주몽에게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심상치 않소이다. 싸움에서 이기자면 먼저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 하거늘 우린 자기의 적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것을 모르고있는것 같소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우리가 소서노를 구원하러 가자고 할 때 산채에 불을 지른것을 보면 우리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있는자가 있는것이 분명하네.

우린 그것이 말갈놈들인지, 부여의 대소왕자인지조차 모르고있다보니 이런 일을 당했다고보네.》

주몽의 얼굴에도 심각한 빛이 어렸다.

오이는 그러는 주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소이다.

비바람 맞지 않고서야 어찌 거목으로 자랄수 있겠소이까?

장차 단군겨레의 새 나라를 일떠세우려 결심한 우리인데 이만한 우여곡절도 없겠소이까.

지금 모두가 형님의 얼굴만 바라보고있소이다.》

《힘을 주어 고맙네.》

주몽은 오이의 어깨를 아귀센 손으로 꽉 그러잡으며 미더운 눈길을 던졌다.

오이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왜 그러나? 가만, 이게 도대체 웬 상처인가?》

오이의 옷섶을 더듬던 주몽의 손길이 한순간 굳어져버렸다.

《그럼 그때 말갈놈들의 화살에?…》

《쉬- 제발 떠들지 마소이다. 다행히 팔굽을 스쳤을뿐인걸요.》

《그런 말로 날 위안할 생각 말라구.

그러다 활촉의 독이 퍼지면 어쩔려구… 저리로 가세. 어머님이 언젠가 나에게 화살의 독을 뽑는 비방을 가르쳐준적이 있네.》

주몽은 다짜고짜로 오이의 성한 한쪽팔을 쥐고 얼마간 떨어진 수림속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타버린 산채곁에 림시로 지어놓은 초막안에서는 고콜불이 가물가물 타오르고있었다. 어룽거리는 등불아래에는 오이, 마리, 협보가 심각한 낯색을 짓고 앉아있었다.

《마리, 어서 말해보아라. 아직도 제 잘못을 모르겠다는거냐. 아무리 주몽형의 분부라 하여도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 네 잘못으로 하마트면 형님의 신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번 하였느냐.》

오이는 엄한 질책이 담긴 눈빛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기가 질린 마리는 혀아래소리로 변명하였다.

《실은 오이형님과 산채가 걱정되옵기에…

우리야 사생동고를 맹약한 사이가 아니오이까.》

《그만해라. 넌 벌써 졸본천의 둔덕에서 다진 맹약을 잊었느냐? 시종이 여일하게(시작과 끝이 같게) 충의로써 주몽형을 받들자 했던 그때의 맹세를 말이다.》

준절히 꾸짖는 오이의 이 말에 마리는 물론 협보도 머리를 떨구었다.

그들의 눈가에는 자책과 회오의 빛이 짙게 어리였다.

그러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오이의 눈앞에는 부여를 탈출하여 엄호수를 건는 뒤에 졸본천언덕에 올라 하늘에 제를 지내던 그때의 광경이 어제런듯 떠올랐다.

…그것은 말이 의식이지 의례를 주관할 신관도 제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소박한 례식이였다. 새깃을 두개 꽂은 절풍을 쓴 주몽이 제단우에 놓인 송아지만 한 사슴앞에 향불을 피우고 절을 세번 하였다.

오이, 마리, 협보 세사람도 그뒤에서 주몽이 하는대로 절을 세번 하였다.

《하늘에 계신 단군신령님께 삼가 아뢰옵니다.

주몽과 오이, 마리, 협보는 가장 어려운 때 벗으로 사귀여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단군겨레의 나라를 천하에 크게 떨쳐볼 큰 뜻을 품고 오늘에 이르렀사옵니다. 지금 선인께서 창업하셨던 겨레의 나라는 쇠진하고 사분오렬되여 부질없는 동족상잔만을 일삼고있어 산천에는 말발굽소리 그칠 날 없고 겨레의 피가 흘러들지 않는 날이 없사오니 백성은 불행과 고통속에 흐느끼고 병탄의 뜻을 품은 외세의 무리는 허실을 엿보며 칼을 갈고있으니 나라와 겨레의 운명은 도마우에 올라 생사존망의 기로에 섰다 아니할수 없나이다.

비록 재주가 없고 덕은 부족하오나 저희들도 이 땅에 태를 묻은 단군의 자손들이거늘 저 멀리 태백산의 웅건함을 기치삼아 이 하늘, 이 땅에 하나된 나라 배달겨레의 강대국을 일떠세워 우리의 후손들에게 천세토록, 만세토록 물려주겠나이다.

오늘 주몽과 오이, 마리, 협보는 사생동고를 맹약하면서 서로의 마음과 뜻을 합쳐 겨레의 념원을 반드시 실현코저 하오니 하늘에 계시는 거룩한 성인께서 부디 굽어살펴주옵소서.》

주몽은 말을 끝내고 다시금 허리를 굽혀 절을 올렸다.

주몽이 의식을 끝내려 할 때 오이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형님, 나도 한마디 하려오.》

주몽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전에 물러섰다.

《하늘에 계시는 단군성왕님께 삼가 아뢰옵니다.

자고로 만물에는 태양이 있고 인간세상에는 성인이 있어 그 따스함이 넘치고 섬기고 받드옵니다.

단군성왕의 그 은혜 만대에 끼치여 오늘은 그의 자손인 주몽으로 하여금 겨레의 념원을 천하에 펼치게 하였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할 일이옵니다.

오이, 마리, 협보는 오매불망 소원하던 이날을 맞이하여 오늘부터 군신의 례를 갖추어 주몽을 모시며 시종이 여일하게 충의로써 받들겠다는것을 하늘과 땅, 단군성왕님앞에 맹약하는바이옵니다.》

오이의 이 말에 마리와 협보는 두눈을 슴벅이며 하늘땅을 우러러 세번 크게 절을 하였다. 몸을 일으킨 그들 세사람은 다시 주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신하의 읍을 드리며 목메여 불렀다.

《주몽행수! 신하들의 절을 받아주옵소서!》

주몽은 감격하여 그들 한사람, 한사람을 일으켜세워주며 말했다.

《이러지들 말라구. 우리야 이미 의형제를 맺은 사이들이 아닌가. 자네들이 이러면 형제의 우의가 어떻게 되겠나?》

오이가 정색하여 입을 열었다.

《주몽, 이것은 하늘의 뜻이옵니다. 오늘부터 오이, 마리, 협보는 주몽형을 형제의 정으로써만이 아니라 군신의 례로써 충의로 받드는 첫 신하로 되였나이다. 부디 강대한 새 나라를 일떠세워 겨레의 념원을 풀어주사이다.》

《겨레의 념원을 풀어주사이다.》

세 신하는 주몽앞에 무릎을 끓으며 절절히 아뢰였다.

《형제들…》

주몽은 목이 꽉 메여 그들 세 신하를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오이는 천천히 일어나 허리에 찬 단검을 빼들고 제물로 바친 사슴의 목을 푹 찔렀다. 더운 김을 뿜으며 시뻘건 피가 쏟아져나왔다.

오이는 그 피를 주발에 받아 주몽에게 먼저 올리고나서 형제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주몽이 먼저 그릇을 입가에 가져갔다.

엄숙한 표정을 한 세 신하가 단숨에 그릇을 비웠다.

동쪽산마루에서 붉은 해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저걸 보오, 우리 조상들이 가장 숭상해온 성스러운 태양이요.》

주몽이 환희에 넘쳐 웨쳤다.

세 신하는 누리를 밝히며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오, 오, 태양! 수천년전부터 박달족의 수호신, 숭배신으로 겨레의 숭상의 대상으로 되여왔던 태양.

바로 그 태양이 지금 태백산에서 흘러내린 높고낮은 산발들과 강들, 울창한 수림, 드넓은 초원 그리고 졸본천둔덕우에 서있는 자기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눈부신 광채를 아낌없이 뿌려주고있는것이 아닌가.

비록 력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름없는 산기슭에서 거행된 이 의식에서 다진 맹약대로 그후 오이, 마리, 협보는 주몽을 받들어 천년강대국 고구려의 첫 신하들로서 건국위업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쳤다.

때는 기원전 279년 가을이였다.…

오이는 회상에서 깨여나 형제들을 둘러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벌써부터 그때의 맹약을 잊고 누구나 제나름의 운명부터 걱정한다면 그래 어찌되겠느냐?

매사에 주몽형부터 생각하고 형님의 안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것이 충의에 살고 충의에 죽겠다고 맹약한 신하된자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오이형, 우리들의 생각이 짧았소이다.》

협보가 다시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너희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됐다.

래일 협보는 모둔곡으로 급히 떠나야겠다.》

《모둔곡엔 어째서 말이오이까?》

협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지금이야말로 해야 할 일이 산같이 쌓인 때이다. 불타버린 산채도 다시 일떠세워야 하고 도망쳐버린 말갈놈들도 찾아내여 족쳐버려야 한다.

바로 이런 때 모둔곡으로 가다니…

《언젠가 주몽형이 말하지 않았느냐. 장차 일을 크게 벌리려면 우리가 발을 든든히 붙일수 있는 성지가 있어야 한다고…

모둔곡은 산세가 험하고 천험의 요새일뿐더러 아직 구려나 부여조정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니 더없이 유리한 곳이다.

더우기 이번 일을 당하고보니 여기엔 매일, 매 시각 우리의 일거일동을 주시해보는 눈이 있는것이 분명하다. 너는 모둔곡으로 들어가 전번에 만난적 있는 재사, 무골, 묵거와 의논하여 젊은이들을 조련시키고 병쟁기도 벼리여놓아라. 그래서 일단 군령이 내릴 때 모둔곡의 젊은 패들로 한몫 해야겠다. 전번에 우리가 모둔곡에 들렸을 때 우리를 대하는 그 고을 좌상로인의 태도가 별로 반갑지 않아하였는데 이번에 그들도 설복해야 할것 같다.

네 맡은 소임이 매우 중하니 자정으로 떠나도록 하여라.》

《알겠소이다, 형님.》

협보는 깊은 생각에 잠겨 머리를 끄덕이였다.

다음날 새벽 협보는 말에 안장을 얹어가지고 조용히 졸본천기슭을 벗어나 모둔곡으로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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