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제 1 장


4


《말갈족의 군사들이 온데간데 없어졌소이다.》

《…》

《소서노부인이 이른아침 오룡산으로 행차했다 하나이다.》

숨가삐 달려온 두 젊은이의 급보를 받은 오이의 생각은 착잡해졌다.

오늘 새벽 오이는 주몽과 의논한대로 두명의 젊은이들을 말갈족이 자리잡은 거무나산과 소서노의 집이 있는 과루성으로 각각 떠나보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즉시 되돌아선것이다.

(까마귀날자 배 떨어진 격이군. 하다면 놈들이 벌써…)

오이는 가슴이 철렁하여 급히 주몽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놈들이 선손을 쓰려는것 같소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주몽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이, 순간도 지체할수 없소.

빨리 산채의 모든 군사들을 집합시켜주오!》

《알겠소이다.》

오이는 제꺽 집합신호를 알리는 뿔나팔을 불게 하였다.

잠시후 십여필의 군마에 올라탄 젊은이들이 주몽의 뒤를 따라 오룡산을 향해 질주하였다. 주몽과 그의 일행이 오룡산으로 질러가는 골짜기로 막 접어들 때였다.

《서시오이다, 잠간만 기다려주소이다.》

골안을 쩡쩡 울리는 새된 녀인의 웨침소리가 일행의 발목을 붙잡았다.

말을 멈추고 바라보니 웬 녀인 하나가 치마자락이 찢겨지는줄도 모르고 구울듯 산마루에서 뛰여내리고있었다.

《어인 녀인이 저리도…》

주몽이 의아하여 산마루를 바라보는데 문득 협보의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튀여나왔다.

《아, 오이형님, 바로 그 랑자오이다.》

오이도 그쪽을 바라보다가 그만에야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저 녀인이…》

졸본천가 너럭바위우에서 종적없이 사라졌던 녀인이 어인 일로 저토록 당황하고 허덕이는 모양으로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일행이 멎어선 코앞까지 허겁지겁 달려온 녀인이 맥이 진해버렸는지 그만 어푸러졌다. 오이가 제꺽 뛰여내려 녀인을 부축하였다.

오이의 팔에 실려 급한 숨을 다몰아쉬던 그는 안도의 빛을 띄우며 무엇이라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랑자! 도대체 어인 일이요?》

《저… 말갈… 말갈놈들이 산… 산채를 불사르겠다고 지금 막…》

갈리는듯 한 그의 목소리에 모두가 놀랐다

《뭐, 말갈놈들이 산채를?…》

《아, 저 연기…》

녀인이 방금전 그들이 떠나온 곳을 가리켰다.

울창한 소나무숲사이로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검은 연기가 눈에 띄웠다.

그곳이 산채쪽이라는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지금 그곳 산채에는 수비를 맡은 한명의 젊은이밖에 없다.

《개자식들!》

성미가 급한 마리가 말고삐를 꽉 틀어쥐고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형님들, 산채가 불에 타오이다, 산채가…》

군사들이 웅성거렸다.

(하다면 오늘 새벽 말갈놈들이 감쪽같이 사라진것은 우리의 산채를 노려서였단 말인가?)

오이는 저도 모르게 당혹해진 눈길을 허둥이다가 주몽을 바라보았다.

주몽의 눈길에도 놀란 빛이 어렸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동요와 불만이 아니라 굳세고도 담대한 배짱과 추호의 흔들림도 없는 강의한 의지가 비껴있었다.

오이는 순간이나마 당황하고 주저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가만! 덤비지들 말아!》

오이의 웨침소리에 물끓듯 일어나던 소음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모두의 눈길이 오이에게 쏠렸다. 오이는 뭇시선을 모으며 말을 몰아 주몽의 앞으로 다가갔다.

《주몽형, 내가 산채로 달려가 사태를 수습하겠으니 어서 소서노를 구원하시오이다.》

말을 마친 오이는 미처 어쩔새도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안되오이다.》

별안간 쓰러져있던 녀인이 혼신의 힘을 모아 말고삐를 틀어쥐고 애원하였다.

《놈들의 무리는 수십명이 넘소이다.

혼자서 무슨 일을 치자고 그러시와요?》

애끓는듯 한 녀인의 목소리에 마리가 주몽을 향해 돌아섰다.

《주몽형, 어서 령을 내려주시우. 우선 산채부터 구원하고 봅시다.》

그 말을 들은 오이가 벌컥 성을 내였다.

《너는 군령을 무엇으로 아느냐? 랑자, 비켜서오! 주몽형, 그럼 부탁하오이다.》

말을 마친 오이는 힘껏 고삐를 나꾸어채며 재빨리 배허벅에 박차를 가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먼지를 일구며 멀어져가는 오이를 바라보는 려송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주몽은 그러는 오이의 뒤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마리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마리, 몇사람 데리고 오이를 뒤따라주게.

오이에게서 무슨 일이 생겨선 절대로 안돼.》

방금전 오이의 험악한 기상과 군령이라는 소리에 움찔 기가 죽었던 마리가 머리를 쳐들었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몇사람 떼고나면 그의 수하에는 협보와 7~8명의 군사들뿐이라 선뜻 대답할수가 없었다.

《어서!》

주몽의 독촉을 받고서야 마리는 하는수없이 네명의 군사를 데리고 오이의 뒤를 쫓았다.

(빨리, 조금만 더…)

오이는 숲을 질러 곧추 길을 잡고 나무아지들을 부러뜨리며 산채를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산채를 떠나면서 혹시 어떤 놈들이 그 기회를 리용하여 산채를 노릴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이 못내 한스러웠다.

오이가 산채가 내려다보이는 등성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시뻘건 화광이 통채로 산채를 집어삼키고도 성차지 않은듯 긴 혀를 날름거리고있었다.

(늦었구나!) 오이는 사정없이 말을 내달았다.

충천하는 화염속에 산채의 마지막기둥이 무너져내렸다.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앞에서 오이는 억이 막힌듯 한동안 그대로 서있었다.

바로 이때 말발굽소리와 함께 훌쩍 땅에 뛰여내린 마리가 눈앞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듯 통분하여 소리쳤다.

《아, 어찌된 일이요? 어느놈이 우리 산채를…》

마리의 두눈에서는 분노의 열기가 황황 일었다.

타다남은 재티가 골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골안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제정신이 든 오이가 마리에게로 돌아섰다.

《넌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느냐?》

《주몽형이 나더러 형님을 도우라구 보냈소이다.》

《뭐라구?》 오이의 얼굴이 험상궂게 이지러졌다.

하다면 주몽의 곁에는 지금 7~8명의 군사밖에 없을텐데.…

(혹시 이것이 소서노를 도와주지 못하게 하려는 그 어떤 음모라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이는 지체없이 말에 올랐다.

《마리, 어서 말에 올라라! 주몽형이 위험하다! 빨리 오룡산으로!》

바람처럼 내달리는 오이에 뒤질세라 마리도 연신 말궁둥이에 채찍을 안기였다. 오이의 일행은 숲속에 바람을 일구며 오룡산을 향해 급히 내달렸다.


주몽이 이끄는 산채의 젊은이들이 오룡산입구의 넓다란 공지에 나타난것은 이미 싸움이 절정을 가까이하고있을 때였다.

행길 한가운데는 소서노의 화려한 수레가 멈춰서있었는데 싸움은 수레를 중심으로 벌어지고있었다. 길을 앞뒤로 가로막은 백여명의 말갈군사들이 수적우세를 믿고 기세를 올리며 점점 수레를 압박하고있었다.

들판에서는 벌써 이십여구의 시체가 너저분히 나딩굴고있었다.

《다라나성 두로》라고 쓴 청포기는 기세좋게 나붓기고있었으나 그와는 반대로 두로의 군사들은 수세에 몰려 쩔쩔 매고있었다.

워낙 수적으로 대비가 되지도 않는데다 싸움에 능한자들인지라 두로의 군사들은 겨우 대적하고있는 형편이다. 다라나성은 과루부에서 두번째로 큰 성으로서 다라나성 녹살이라고 하면 이만저만한 벼슬이 아니였다.

그러나 아무리 큰 성의 녹살이라 하더라도 일단 말갈놈들의 포위에 들었으니 함정에 빠진 범이요, 그물에 든 새였다.

불안에 잠긴 소서노는 수레안의 가림천을 제끼고 밖에서 벌어지는 치렬한 싸움을 지켜보고있었다. 두로가 비록 허세를 부리며 군사들을 다몰아대기는 하나 잔뜩 공포에 질린 군사들은 앞으로 나가는것이 아니라 한발자국, 한발자국 안으로 좁혀들고있었다.

《활을 쏴라, 활을…》

두로가 악에 차서 웨쳐댔다. 궁노수들이 어지러이 활을 내쏘았다.

그 서슬에 말갈군사들이 약간 뒤로 물러났다.

적들도 분명 활잡이들이 있을듯 한데 맞받아 쏘지 않는것으로 보면 필경 수레에 앉은 소서노가 상할가 우려하는때문인것 같았다.

군사들의 전통에는 몇대의 화살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그 화살마저 떨어지면 말갈놈들은 최후의 일격을 가해올것이다.

(이젠 마지막이란 말인가?)

수레안의 휘장을 들어 전장의 형세를 살펴보던 소서노는 품속을 더듬어 항상 차고다니는 은백색의 장도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손가락끝으로 예리하고 선뜩한 촉감이 느껴지는 칼날을 어루쓸었다.

길지 않은 한생을 살아온 그였건만 이제당장 세상을 하직한다 해도 별로 여한이 없었다.

그의 운명은 너무도 불우했다.

일찌기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고 시집을 가서는 인츰 남편을 잃었다.

살뜰한 애무와 모성의 사랑을 별로 받아보지 못하고 유년시절과 처녀시절을 보내였으며 정없는 사내와 가정을 이룬 후에도 그의 생활에선 거의나 변화가 없었다.

있다면 눈물, 고독, 한숨뿐.…

귀족의 혈통이라는 그 단순한 리유로 하여 소서노는 얼마나 많은것을 잃어야 했던가. 귀족의 명예라는것도 놓고보면 결국 과루부의 대인인 아버지 연타발의 체면을 위한것이였음을 녀인은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소서노는 장도칼의 칼집을 맞추어 도로 품속에 넣고 한쪽벽에 걸어놓은 장검을 찾아들었다.

불쑥 가림천을 들추고 황겁한 기색을 지은 두로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님, 안되겠소. 내가 앞장서 포위를 풀테니 우리끼리 빨리 빠져나갑시다.》

《하다면 저 군사들과 시비들은 어떻게 하겠사와요?》

소서노는 침울한 낯색을 지으며 물었다.

《젠장, 황천길이 눈앞에 닥쳤는데 언제 그까짓 놈들 생각할새가 있소?》

두로는 거칠게 내쏘았다.

소서노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장검을 비껴든채 가림천을 제꼈다.

《수레에서 말을 벗겨내라.》

소서노가 호령했다. 겁에 질려 수레밑에 까투리처럼 머리를 틀어박았던 시중군들이 황급히 소서노앞으로 말을 끌어왔다.

《비겁하게 살기보담 용감하게 죽기가 더 어려운 법이노라! 구려의 군사들, 강탈과 로략질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괴롭히는 저 오랑캐무리들앞에 구려의 의기남아들이 어찌 비겁할수 있으랴.》

담찬 녀인의 호걸스러운 기상앞에 힘을 얻은 군사들이 기치창검을 내흔들며 호응하였다. 두로의 군사들과 소서노의 가병들이 기세를 올리며 적들속으로 육박해들어갔다.

벌써 몇명의 말갈군사가 목없는 시체가 되여 말발굽밑에 나딩굴었다.

그러나 역전되는듯 싶었던 싸움은 중과부적으로 하여 또다시 형세가 변하였다. 워낙 싸움에 능한자들이라 노예들에게 채찍이나 휘두를줄 아는 가병이나 군기점고로 머리수나 채우는 지방군사들따위는 셈에도 넣지 않는 놈들이였다.

포위환이 또다시 수레를 중심으로 좁혀들었다.

《저, 저년이 바로 연타발의 딸 소서노다. 저년을 사로잡는자에게는 천금을 줄터이다. 사로잡아라, 잡아!》

이번 싸움에 선봉이 된 텁석부리가 승이 올라 고함을 쳤다.

(아, 이젠 정말 마지막이란 말인가.)

연약한 팔목에서 힘이 진해가는지 들고있던 검이 차츰 무거워지자 소서노는 한손으로 품속에 넣은 장도칼을 더듬어잡았다.

바야흐로 각오했던 마지막순간이 닥쳐오고야만것이다.

바로 그 순간 적진속에서 혼란이 일어나더니 포위환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였다.

《말갈놈들을 쳐라!》

하늘땅을 떨치는듯 한 우뢰같은 웨침소리와 함께 련달아 내쏘는 화살이 휘파람소리를 내며 적의 무리속으로 날아들었다. 여기저기서 검이 한번 번뜩일 때마다 말갈놈들의 머리가 비오듯 후둑후둑 떨어져내렸다.

처절한 비명소리, 말의 울부짖음소리, 사방 뿌려지는 피방울, 말발굽밑에서 피여오르는 뽀얀 먼지구름…

좌우충돌하는 산채젊은이들의 기상에 말갈무리는 전률하였다.

한순간 얼떨떨해졌던 텁석부리는 혼전속에서 자기들을 기습한것이 불과 7~8명의 기마수들뿐이라는것을 알아차렸다.

《활, 활을 잡으라! 몇놈 되지 않는다.》

텁석부리는 호기있게 소리치며 주몽을 겨누어 활에 시위를 먹이였다.

오이와 마리가 싸움터에 나타난것은 바로 이무렵이였다.

멀리서부터 주몽의 모습을 띄여본 오이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에 채찍질을 해댔다. 핑- 핑, 시위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여러개의 활에서 동시에 떠난 화살들이 주몽을 향해 날아갔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텁석부리의 얼굴도 얼핏 보인다.

《앗-》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시각 오이는 더 생각할새없이 휙- 몸을 날려 자기 몸으로 주몽을 덮고 말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놈들-》

사태를 알아차린 협보가 달리는 말아래로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바닥에 나딩구는 돌멩이들을 재빨리 움켜쥐고 궁노수들을 향해 뿌려던졌다.

돌 하나에 영낙없이 활든 놈 하나씩 들이맞았다.

재빨리 일어선 주몽도 여러개의 화살을 동시에 메워 적의 무리속에 날려보냈다. 순식간에 십여명의 궁노수들이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말우에서 공중제비로 나떨어졌다.

《딱-》 주먹만 한 차돌 하나가 텁석부리의 이마빡을 호되게 들이쳤다. 요행 깊숙이 눌러썼던 투구만 아니였다면 그 역시 공중제비를 할번 하였다.

투구가 건공중으로 날아가버리자 텁석부리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방금전에 주몽을 몸으로 덮던 그 무사는 틀림없는 오이였다.

그렇다면 졸본천의 무사들이 이번 싸움에 뛰여든것이 분명했다.

(끝장이구나. 이럴 땐 삼십륙계 줄행랑이 제일이지.)

텁석부리는 제꺽 말머리를 돌려 건너편 숲을 바라고 달아났다.

《텁석부리, 돌아서라! 돌아서…》

고래고래 웨치는 거무나산 추장의 악에 받친 고함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놈은 그냥 말궁둥이에 채찍을 안겼다.

그렇지 않아도 날고뛰는 졸본천무사들의 칼날에 겁을 먹고있던 말갈군사들이 텁석부리가 달아나자 꽁지가 빳빳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형세가 뒤바뀌여지자 언제 그랬더냐싶게 두로의 허세가 되살아났다.

《말갈놈들이 달아난다. 빨리 족쳐라!》

힘을 얻은 두로의 군사들과 소서노의 가병들이 와- 함성을 지르며 달아나는 말갈군사들의 뒤를 무섭게 쫓았다.

불과 스물안팎의 말갈군사만이 도망칠수 있었다.

《이겼다!》 승전의 환호성이 골안에 차고넘쳤다.

소서노는 수레우에 올라 졸본천무사들의 선봉에 서서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운 주몽의 모습을 온넋을 빼앗긴듯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준수한 얼굴에 새별처럼 정기가 넘쳐흐르는 두눈, 승리의 기쁨속에 벙글거리는 수하군사들을 격려해주는 영웅남아의 호걸스러운 웃음.…

바로 저 젊은이가 이내 몸을 구원해주었구나.

순간 소서노의 가슴은 봄바람에 하느적거리는 꽃잎마냥 끝없이 설레였다.

사나이의 자태는 녀인의 온넋을 깡그리 빼앗아버렸다.

주몽은 천천히 말을 몰아 소서노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척 놀라셨겠소이다. 어디 상하지는 않으셨소이까?》

우렁우렁 울리는 주몽의 목소리에 소서노는 얼굴을 붉히며 가볍게 머리를 숙여 례의를 표시하였다.

《구원해주어 정말 고맙소이다. 그 은혜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지 않으리오이다.》

눈을 내리깐 소서노의 가슴은 마냥 울렁이고 목소리는 저으기 떨렸다.

주몽은 이 고장에서 가장 큰 유력자의 한사람인 소서노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살펴보았다.

흰 명주수건을 쓰고 자주빛무늬가 점점이 박힌 덧저고리우에 흰 띠를 둘렀는데 그것은 당시 귀족녀성들이 나들이할 때의 흔한 몸차림이였다. 출가한 녀인들이 그러하듯 쌍고리로 머리를 틀어올리고 붉은 끈으로 머리를 동인 가운데 금비녀를 꽂은것으로 보아 녀인의 신분이 매우 귀하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귀밑에서는 순금으로 만든 귀걸이가 아침해살을 받아 어룽거리고있었다. 녀인의 의젓한 몸가짐에는 초연하고 현숙한 인품이 느껴졌다.

그때 전장을 수습한 두로가 싸늘한 눈빛을 하고 거들먹거리며 말을 몰아 다가왔다.

《도와주어 고맙소. 헌데 그대들은 뉘시오?》

《우리들은 졸본산채의 무사들이오이다.》

협보가 대답했다.

《아, 그렇소? 마침 잘 만났구만. 소문에 듣자하니 그대들이 소서노마님의 시비를 붙들어갔다 하는데 그래, 시비 려송을 어떻게 했소?》

두로의 이 말에 화가 난 마리가 눈을 치뜨며 툭 내쏘았다.

《뭐요? 소에 빠진 년 끄댕이 당겨 건져내니까 옥비녀 내란다더니 이런 인사불성이 어디 있소?

당신은 례의도 모르오?》

따지고 드는품이 록록치 않은 마리를 말우에서 흘겨보며 두로가 어성을 높였다.

《례의?! 당치않은 수작. 그렇게 놓고보면 말갈족이 여기서 우릴 습격한것도 이상한 일이란 말이야.

혹시 당신들이 끌어온건 아닌지?…》

《무엇이라고?》

성정이 급한 마리가 저도 모르게 칼집에 손이 갔다.

두로도 제꺽 삼지창을 앞으로 내뻗치며 금시 달려들듯 한 태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만들 두시와요.》 하고 웨치는 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시 불찌가 튕겨날듯 한 험악한 눈길사이를 가로막으며 불쑥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듯 려송이 나타났다.

《아니, 려송아! 네가 어떻게?》

수레에 앉았던 소서노가 놀란듯 소리쳤다.

그토록 총애하고 아끼던 시비 려송이 틀림없었다.

두로도 얼떨떨하여 저도 모르게 삼지창을 내려뜨렸다.

《주인마님, 이분들은 고마운분들이와요.

말갈놈들이 저를 끌어가는것을 바로 이 무사님들이…》

려송은 소서노앞에 차분히 무릎을 끓고앉아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자초지종 이야기하였다.

《정말 고맙소이다. 저의 시비를 살려주시고 이번엔 또 저를 구원해주셨으니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할지.…》

소서노의 목소리는 진정 고마움에 젖어있었다.

주몽이 겸양의 뜻을 표하며 점잖게 말했다.

《인사는 또 무슨 인사오이까.

길흉에 서로 구하고 환난에 서로 돕는다 하였소이다. 피를 나눈 한겨레로서 동족의 불행을 외면할수 없어 이렇게 나선 길이오니 너무도 가당한 일인가 하나이다.》

소서노는 감심한 어조로 말하였다.

《목숨을 걸고 저를 구원해주신 그네들의 은혜를 꼭 잊지 않겠소이다. 우리 집이 멀지 않사오니 아무때든 사양치 마시고 한번 다녀가시도록 하여주사이다.》

소서노의 청아한 목소리로 하여 긴장되였던 분위기는 갑자기 온화하게 흘러갔다. 녀인은 그윽한 눈길로 주몽과 그 주위에 둘러선 젊은이들에게 가볍게 머리숙여 인사하고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겁쟁이녀석들같으니. 그깐놈들이 뭐라고, 한갖 좀도적무리들 가지고…》

오룡산을 향해 다시금 굴러가기 시작한 수레의 량편에서 허우룩한 몰골로 걸어가는 군사들을 향해 두로는 거친 욕설을 아끼지 않고 퍼부어댔다.

지금껏 두로는 소서노앞에 자기의 재주와 용력을 보여줄 기회를 얻지 못해 안달아했다. 그런데 모처럼 차례진 기회앞에 무능하고 비겁한 자기의 모습을 보여준것이 스스로도 노엽고 화가 치밀어올라 애꿎은 자기의 부하들에게 그 분풀이를 하고있는것이다.

두로의 속심을 잘 알고있는 소서노는 얼굴에 경멸의 빛을 띄우며 조소하듯 말했다.

《오라버니가 그토록 적을 우습게 보니 랑패를 당할수밖에요.》

《두고보오. 내 이제 말갈놈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도륙을 내지 않나.》

두로는 허공에 채찍을 획 두르고나서 먼지를 일으키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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