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서 장


밤하늘의 먼 남쪽가장자리에서 번뜩- 한줄기 불빛이 일었다.

짧고 예리하면서도 눈부신 섬광이 날선 비수와도 같이 컴컴한 밤하늘을 북 찢어발기며 대지를 향해 내리꽂혔다. 불의의 일격에 대지는 꿈틀 모지름을 쓰더니 산이 무너져내리는듯 한 괴성으로 모진 아픔을 터치였다.

꽈꽝, 꾸르릉…

번뜩이는 여광에 사방 백리의 가섭벌(벌의 이름)과 부여국의 도읍인 예성의 화려한 궁궐과 루각들, 우불구불 뻗어간 성벽들이 일순 자태를 드러냈다가 이내 사라져버렸다.

먹장같은 어둠에 눌린 주위는 무덤속처럼 침침하고 괴괴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합각지붕을 건듯 추켜올린 예성 남문다락우에 걸린 외로운 등불 하나만이 센 바람에 금시 꺼져버릴듯 위태롭게 춤을 추며 간신히 빛을 발산할뿐이다.

희미한 그 등불아래 길게 그려진 세 그림자가 성문앞을 서성거리고있었다. 거칠게 이긴 가죽으로 대층 지은 옷을 걸치고 번뜩이는 긴 창을 거머쥔 두사람은 성문 수비군사들이고 붉은빛이 도는 관복에 검을 차지 않은 얼굴이 갱핏한 사나이는 궁성의 호위별감이였다. 어슴푸레한 등불에 비쳐진 별감의 얼굴엔 초조감과 불안이 짙게 어려있었다.

지금 그들은 미구하여 나타나게 될 누구인가를 안타깝게 기다리고있었다.

(만일 오늘 밤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별안간 떠오르는 무서운 생각에 별감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바로 그때였다.

《별감님, 나타났소이다!》

수십년을 성문지기로 늙어온탓으로 남달리 촉감이 예민한 구레나룻군사의 말이였다.

별감은 성문을 지나 가섭벌을 꿰지르고 뻗어나간 길쪽을 묵묵히 응시하며 서있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문지기의 말대로 다급히 땅을 구르는 말발굽소리와 함께 연신 배허벅에 박차를 가하는 기마수들의 거친 숨소리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그대들은 뉘시오?》

창대를 앞으로 꼬나쥔 수비군사 하나가 몇걸음 내디디며 겁기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길길이 날뛰는 말의 고삐를 힘껏 잡아채며 일행이 멈추어섰다.

《대소왕자님을 모시고 갔던 숙위대다. 빨리 성문을 열어라!》

말탄 군사 하나가 소리쳤다. 얼마나 먼길을 다우쳐왔는지 거품을 가득 문 말의 잔등이며 궁둥이에선 흰김이 피여오르고 투구를 쓴 무사들의 얼굴은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땀과 먼지로 얼룩져있었다.

뒤켠에 섰던 호위별감이 수비군사들을 밀어버리고 앞으로 나섰다.

《대소왕자님, 태자마마…》

거방진 체구에 고집스러운데가 있어보이는 두두룩한 코를 벌름거리던 무사가 투구를 벗어들고 허겁지겁 물었다.

《별감, 부왕마마의 병환이 위중하다는게 적실하냐?》

《그… 그렇소이다. 태자마마! 벌써 여러날째 침전에서 일어나지 못하셨소이다. 어서 궁성으로… 궁성으로 가시오이다.》

바로 그 순간 다시금 번개불이 일었다.

천둥소리가 별감의 마지막말을 삼켜버렸다.

《으악-》

기마군사들중 누군가 경악실색하여 말우에서 굴러떨어졌다.

놀란 말들이 공포에 휩싸여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성문앞 멀지 않은 곳에 자라던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비슬나무 한그루가 통채로 벼락을 맞아 너울너울 불길에 휩싸여버린것이다.

충천하는 화광에 얼을 뺏긴 대소왕자일행은 한동안 멍청히 그 자리에서 움직일줄 몰랐다.

(불길한 징조로구나! 불길한…)

대소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무슨 변이 생기려나보군.…》

《신령님이 노하신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불안과 공포에 싸여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에헴!》

창황중에도 먼저 정신을 차린 별감이 슬며시 헛기침을 톺으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해서야 그들은 본래의 자세를 되찾을수 있었다.

대소가 몇걸음 옮기기 시작했을 때 등뒤에서 수비군사들의 웅얼거림소리가 들려왔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부디 굽어살펴주시옵소서-》

창대를 내던진 구레나룻군사가 밤하늘을 향해 넙적 엎드리며 무릎꿇고 간절히 빌었다. 간신히 걸음발을 옮기던 대소왕자는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며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구레나릇군사의 말을 되받아외웠다.

(신령님, 부디 굽어살피시옵소서…)

이밤따라 부여의 궁성에는 여느때없이 침울한 기색이 떠돌고있었다.

등불을 추켜들고 걸음을 조심히 내딛는 야경군들이며 내시들과 궁녀들, 알싸한 약내를 풍기는 약탕관을 들고 연신 들락날락하는 어의며 편전(왕의 침실)앞에 머리를 조아린채 밤샘을 하는 조정안의 문무중신들…

그들모두의 낯색에는 식음을 전페하다싶이 한 금와왕(부여국의 국왕)의 병을 근심하는 어둑시근하고 의기소침한 기색이 떠돌았다.

편전안은 사방 초불을 켜놓아 대낮처럼 환하였다.

숨죽은듯 고요한 방안에서는 이따금 초불튀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뿐이다. 누런 금색비단휘장을 드리운 금와왕의 침상곁에 금시 피여오르는 한떨기 백합처럼 청초한 녀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 녀인의 옆에 은초대를 받쳐든 두명의 궁녀가 그린듯이 서있었다.

금비녀에 금귀걸이, 옥팔찌며 각종 치레거리들이 초불에 어룽져 빛을 발산하고 향기로운 분내가 은은히 풍겨나오는 녀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촘촘하고 긴 속눈섭아래 옹달샘마냥 맑고 정기그윽한 두눈, 앵두같이 빨간 입술에 푸른 정맥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희고 상큼한 목이며 선이 또렷하게 굴곡을 이루며 솟아오른 봉긋한 앞가슴, 한팔로 휘감아 올릴 정도로 가늘고 잘룩한 허리…

금와왕이 제일 애무해주던 다섯번째 후궁 오씨였다.

왕비와 여러 후궁들이 금와왕의 침전을 지키다 지쳐 돌아간지도 퍼그나 시간이 흘렀으나 오씨만은 돌아갈념을 않고 그냥 침상아래 무릎을 꿇고 엎드려있었다.

오씨는 지금 금와왕의 병환을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슬퍼하고있었다.

금와왕의 다섯번째 후궁으로 간택되였던 그밤.

금방 이슬을 머금고 피여난 청초한 꽃과 같은 오씨의 요염한 자태는 이미 혈기왕성했던 시절을 보내고 늦가을을 맞이한 금와왕의 정욕에 불을 달아놓은듯 했다.

술에 잠그었다 꺼낸듯 흠뻑 취한 금와왕의 총이 센 턱수염이 오씨의 연하디연한 두볼과 목, 가슴이며를 사정없이 내찌르고 온몸을 엄습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속에 소중히 가꿔온 처녀의 순정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길고도 짧았던 환락의 그밤 오씨의 머리속에는 어리석은 녀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자기의 미모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려보겠다는 허망한 생각이 떠올랐다.

왕비와 후궁들 이외에도 수백에 달하는 궁녀들속에서 사는 금와왕이였으나 오씨는 만록총중의 일점홍(우거진 록음가운데 핀 한송이의 붉은 꽃)과도 같이 그의 총애를 완전히 독차지하였다.

허나 늦가을에 피는 꽃은 서리를 피할수 없는 법이라 오씨의 때이른 허망한 생각과는 달리 금와왕은 불과 한해도 못되여 심한 중병에 걸려 이렇듯 일어서지 못하고있는것이다.

눈물을 쏟는 녀인의 배안에는 금와왕의 피를 받은 새 생명이 꿈틀대고있었다.

금와왕에게는 이미 왕비와 네명의 후궁들에게서 본 대소태자를 비롯한 일곱 아들이 있었다. 오씨는 비록 저자신은 후궁일망정 자기가 낳는 자식만은 자기처럼 불우한 운명이 아니라 천하를 호령하는 군주로 만들고싶었다.

세상을 다스리는것은 사나이들이지만 그 사내를 다스리는것은 녀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느날 밤 오씨는 남몰래 점 잘 치기로 소문난 부근의 무당할멈을 후궁안에 불러들여 굿판을 벌리고 태점을 쳐보게 하였다.

아껴오던 금, 은패물들을 뼈만 남은 로파의 앙상한 손아귀에 듬뿍 쥐여주며 뽑은 점괘가 바로 바야흐로 태여날 자식이 금와왕의 뒤를 이어 장차 부여국의 왕으로 점지된다는 길한 패쪽이였다.

가려운데를 제때에 긁어주며 재물을 옭아내는데 숙달된 무당의 《신령스러운 점괴》는 가뜩이나 분별을 잃은 후궁 오씨의 허영심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하였다.

더우기 금와왕의 온갖 총애를 독차지한 오씨의 당시의 형편에서 그것은 십분 가능한 일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바로 그러한 때 청천벽력과도 같이 금와왕이 위중한 병환에 든것이다.

《전하! 이 어인 일이나이까?

령험하신 신령이시여- 천벌은 이 죄많은 소녀에게 내려주시옵고 전하의 귀중한 옥체만은 제발… 굽어살펴주옵소서!》

오씨는 흑흑 느끼며 하염없는 눈물을 쏟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으흠-》

맥락없이 누워있던 금와왕이 문득 정신이 드는지 가늘게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더없이 가긍한 오씨의 소청이 하늘에 닿은탓인지 아니면 어의가 방금전에 쓴 태백산의 령험한 약초를 달인 탕약의 효험에 의해서였던지 어쨌든 기척없던 금와왕은 몸을 몇번 뒤채기다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의 흐리멍텅한 시선이 좌우를 일별했다.

《전하!》

오씨는 격정에 몸을 떨며 금와왕의 품에 와락 얼굴을 묻었다.

금와왕은 품에 안긴 녀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쳐 오씨의 귀밑으로 흘러내린 윤기도는 까만 머리칼을 쓸어넘겨주었다.

잔주름이 얼기설기한 그의 손은 가볍게 떨리고있었다.

기쁨의 무아경에 취한 녀인은 그 누가 덜미를 잡아채기라도 할듯 금와왕의 곁에 바싹 다가붙으며 재빨리 속살거렸다.

《전하! 소녀 전하께 기쁜 소식을 아뢰겠나이다. 소비의 몸엔 지금 새 생명이 태동하고있사와요! 전하의 피를 받은 혈붙이가…》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말았는지 불덩이마냥 달아오른 녀인의 온몸을 어루쓰다듬는 금와왕의 병색짙은 얼굴엔 그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어찌나 병이 깊이 드셨으면 장중보옥과도 같이 여기던 이 소비의 말을 들으시고도 저리도 무표정이실가? 아- 신령님, 바라옵건대 전하를 일으켜세워주시옵소서.)

허나 오씨의 생각은 너무나도 짧은것이였다.

바로 그 순간 금와왕의 얼굴에는 차디찬 한가닥 랭소가 언뜻 비꼈다 사라졌던것이다. 금와왕의 가슴속엔 왕비와 후궁들사이의 무서운 시앗싸움으로 생겨난 무수한 궁중비화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순진하다기보다 천진하기 그지없는 오씨에 대한 동정과 련민이 불쑥 솟아올랐다.

궁전홀을 성급히 내여짚는 어지러운 발소리들이 쿵쿵 들려왔다.

《부왕마마의 병환이 어떠하시냐?》

성칼진 목소리의 임자는 틀림없는 대소왕자였다.

그 소리를 듣자 오씨는 뱀에게라도 물린듯 살뜰히 금와왕을 감쌌던 손을 가드라뜨리며 왕의 침상에서 물러섰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어젖히고 투구를 벗어 한손에 쥔 대소가 성큼 편전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한켠에 초연히 서있는 후궁 오씨와 눈길이 마주치자 단박에 눈꼬리에서 불꽃이 튕겼다.

대소의 뒤를 따라 일곱 형제가 줄레줄레 들어섰다.

눈길을 내리깐 오씨는 하직인사를 고하고 총총히 물러가버렸다.

오씨가 나가버리자 대소는 동생들을 향해 슬그머니 눈짓을 보냈다.

그 눈치를 알아챈 동생들이 편전밖으로 우르르 밀려갔다.

《부왕마마, 불효막심한 소자를 용서하옵소서!

부왕께서 이토록 위중한 병환에 드신줄은 모르고…》

《괘씸한 녀석, 도대체 어딜 싸다니느뇨.》

비록 병색이 짙을망정 국왕의 존엄과 체취가 풍기는 지엄한 눈길이 대소왕자를 순식간에 얼구어버렸다.

《저, 사냥을…》

《사냥?! 그래 사슴이나 몇마리 잡으려고 수백이나 되는 왕궁숙위대를 끌고 며칠씩이나 엄호수근방에 둔치고있단 말이냐? 여직 이실직고하지 못할고…》

화가 천둥같이 치밀어오른 금와왕의 노성에 대소왕자는 간담이 서늘해져 저도 모르게 몸을 옹송그렸다.

조정의 중신들도 모르게 감쪽같이 벌려놓은 일을 부왕이 어느새 눈치챘단 말인가.

몇달전 주몽을 놓쳐버린 분을 풀기 위해 대소는 자기가 통솔하는 왕궁숙위대를 이끌고 구려땅 가까운 엄호수의 수림속에서 군사교련을 주고있었다.

장차 부여국의 화근으로 될것이 분명한 주몽과 그 잔당들이 더 힘을 키우기 전에 밑뿌리채 들어내는것은 머지않아 부여국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될 대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였던것이다.

그러나 이미전부터 주몽의 비범함을 잘 알고있는 금와왕으로서는 자기 아들 대소가 결코 주몽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는것을 뻔히 짐작하고있었다.

무릇 영웅호걸이란 하늘이 내는 법이다.

3년전, 제천행사를 앞두고 진행된 나라적인 사냥경기에서 비범한 재주와 용맹을 떨친 성장한 주몽의 모습을 보며 금와왕은 여간만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라움이라기보다 일종의 두려움으로 온몸이 졸아드는듯싶었다.

대소를 비롯한 일곱 왕자가 겨우 두세마리의 작은 짐승들을 잡은데 비해 한대의 화살밖에 가지지 못한 주몽은 무려 십여마리가 넘는 사슴이며 메돼지를 비롯한 큰 짐승들을 사냥하여가지고 의기양양하여 나타났다.

금와왕은 그때 사냥터에서 지금껏 대해오던 주몽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죽은 해모수가 다시 살아온듯 한 환각에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주몽이 만약 제 친아버지인 해모수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알게 된다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와 그의 아들 주몽.

참으로 그들의 가문은 금와왕의 아버지인 해부루왕대로부터 류다른 인연으로 얽혀져온 가문이다.

가문의 래력을 깊이 알기 위하여 잠시 력사의 기슭을 거슬러올라갈 필요가 있다.

기원전 30세기초 동방일각에 우뚝 솟아 인류문명기의 려명을 남먼저 불러온 고조선은 그 도읍을 왕검성(지금의 평양)에 정한 후 점차 그 령역을 확대하여 태백산(현재의 백두산. 일명 불함산, 개마대산이라고도 함.)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 수천리에 달하는 광활한 령토를 가지게 되였다.

기원전 15세기 중엽 왕조교체이후 고조선의 중앙집권적통치력이 약화된 반면에 지방들에서는 대노예소유자들과 할거세력들이 점차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제어할 힘이 부족했던 조선은 지방토호들의 요구를 일정하게 들어주는 방법으로 그들의 독자적인 장성을 억제하고 조선의 테두리안에 계속 얽매여두려는 목적에서 형식상의 《후국》의 수립을 승인하였다.

북쪽의 부여후국, 구려후국, 남쪽의 진국 등이 바로 이러한 시대적환경을 배경으로 생겨난것이였다.

이외에도 행인국, 개마국, 동옥저, 비류국과 같은 크고작은 소국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도 하면서 끊임없는 정복전쟁이 벌어졌다.

금와왕의 아버지 해부루왕의 통치시기에도 바로 이런 전란이 그칠새 없었다.

당시 부여에서 신흥세력으로 자라나던 젊은 해모수는 단군겨레의 나라를 크게 부흥시킬 꿈을 안고 정예한 군사들로 여러 지방을 평정하며 해부루왕의 통치지역인 수도성까지 밀고 들어왔다.

천제의 아들이라 자처하는 해모수의 예봉을 당하기 어려웠던 해부루왕은 대신 아란불의 권유를 받아들여 부여땅의 넓은 지역을 내여주고 부득불 동쪽으로 이동하여 가섭벌에 새 도읍지를 정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렇게 되여 해모수는 해부루와 그의 자식들의 깊은 원한을 사게 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 대대손손 살아온 조상의 땅에 외래침략자들이 쳐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4세기말 광활한 중원대륙에서는 전국의 패권을 쥐기 위한 전국7웅(주나라 말기 전국시대. 진, 한, 위, 조, 초, 연, 제나라.)들의 피비린 살륙전쟁이 치렬하게 벌어지고있었다.

전국7웅중에서 가장 약하였던 연나라는 소왕시기(기원전 311-279)에 들어서면서 국력을 쇄신하고 일시 강국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소왕은 당시 가장 강하였던 진나라와 강화를 맺고 조나라와 제나라와 동맹하여 중산국을 멸망시킨 후 기고만장하여 침략의 촉수를 국경을 접한 이웃나라인 고조선(조선)으로 돌리였다.

연나라의 수만 침략군이 조선의 서북쪽 국경으로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외래침략자들의 이 대규모침략은 단군성왕을 하나의 시조로 하는 단군겨레의 의분을 폭발시키는 계기로 되였다.

비록 나라는 사분오렬되였을망정 한강토안에서 하나의 피줄을 잇고 같은 언어와 꼭같은 풍속으로 살아온 단일민족인 까닭으로 겨레의 불행을 외면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연나라의 침략에 대처하여 부여왕 금와에게 함께 겨레의 나라인 조선을 도울것을 제의하였다.

해부루왕이 늙어죽고 그뒤를 이어 왕이 된 금와는 지나간 원한을 잊은듯 예상했던것과는 달리 해모수의 제의를 대범히 수락하였다.

하여 강한 군사력을 가진 해모수는 련합군의 기본주력을 내였고 금와왕은 군량과 마초, 군수물자의 모집과 조달을 맡아나섰다.

당시 해모수는 압록강류역의 토착세력이였던 하백의 딸 류화와 금방 혼례를 치른 뒤였다.

일신의 부귀와 향락에 앞서 겨레의 운명을 먼저 걱정하는 해모수의 고결한 인품앞에 류화는 승전하고 돌아올 때까지 꼭 기다리겠노라고 마음속언약을 다지고 또 다지였다.

그러나 해모수는 그때까지만 하여도 자기의 제의에 선뜻 응해나선 금와왕의 검은 속심을 미처 간파하지 못하였다.

해모수가 이끄는 련합군이 패수(료동, 료서경계의 강. 오늘의 대릉하)서쪽에서 조선의 변방군사들과 함께 연나라침략군과 힘겨운 격전을 치르고있을 때 금와왕은 장마를 구실로 약속했던 군량과 마초를 보내주지 않았다.

거기다 쇠퇴하고 부패무능한 조선군 통치배들속에서는 《화의론》이 대두하여 서북쪽변방 2천여리의 땅을 떼여주고 연나라와 화의를 맺으려는 배신적인 움직임이 벌어지고있었다.

어려운 환경과 불리한 조건속에서도 해모수련합군과 조선군사들은 여러차례에 걸쳐 연나라침략군에게 호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오게 되였던 군량과 마초도, 한명의 증원군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솨솨- 사품쳐내리는 패수를 등지고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조선변방군사들과 해모수련합군은 배수진(강을 뒤에 두고 치는 진)을 쳤다.

창검은 부러지고 갑옷은 갈가리 찢겨져 군데군데 험한 상처를 드러낸 수천명의 군사들은 비장한 얼굴로 고국땅을 향해 마지막하직인사를 보냈다.

드디여 최후결사전이 시작되였다.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 말의 울부짖음소리, 단말마적인 비명소리. 말발굽아래서 피여오르는 먼지구름에 뿌옇게 덮인 전장은 그야말로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거의 열배가 넘는 연나라침략군을 상대로 불사신처럼 싸우던 군사들은 끝내 하나 둘 기운이 진하여 쓰러져갔다.

군사들의 검붉은 피가 대지를 적시며 솨-솨 사품치는 대릉하의 물결을 피빛으로 물들였다.

해모수련합군은 불과 수십명으로 줄어들었다. 지치고 상처입어 서로 등을 마주댄채 가까스로 버티고선 그들의 손에는 부러진 장검과 깨여진 방패, 꺾어진 창대가 꽉 쥐여있었다.

수천의 무리가 몇 안 남은 군사들을 빙 둘러 에워싸고 한발자국, 한발자국 조심스럽게 조여들었다.

《항자(항복한 자)의 목은 베지 않는다. 어서 투항하라!》

피맛을 본 맹수의 살기찬 눈빛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적장이 기세등등하여 소리쳤다.

《죽어 고국의 한줌 흙이 될지언정 오랑캐의 노예로는 살지 않을것이다!》

홰를 켜단듯 증오가 황황 타는 눈빛으로 적들을 쏘아보던 해모수가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웨쳤다. 서로 의지하여 가까스로 버티고섰던 군사들은 마지막힘을 모아 원쑤의 무리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

맨 앞장에서 성난 사자마냥 싸우던 해모수는 온몸에 수십군데의 상처를 입은데다 검마저 부러져나가자 적장의 목을 그러잡고 대릉하의 거센 물결에 몸을 던졌다.

몸을 던지던 그 순간 해모수는 고국의 하늘을 우러러 《류화-》하고 큰소리로 웨쳤다고 한다.

그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련합군의 군사들을 바로 금와왕 자신이 엄호수가에서 처치해버렸다.

이로써 그는 해모수의 행적에 대한 수수께끼를 력사의 영원한 흑막속에 파묻어버리려 하였다.

금와왕은 그후 손쉽게 해모수의 땅을 통합해버리였다.

한편 부모들 모르게 자기들끼리 혼례를 치른것으로 하여 아버지의 노여움을 산 류화는 시비 하나만을 데리고 우발수가에 귀양을 가게 되였다.

후날 우발수가에 사냥을 나갔던 금와왕은 우연히 만난 한 녀인의 이름이 류화라는것과 더우기 그의 입에서 해모수라는 남편이름이 튀여나왔을 때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다.

어떻게 할것인가? 그러나 서둘러 류화를 죽여버릴수는 없었다.

그것은 단지 해모수와의 약속을 어기고 비렬한 음모적방법으로 해모수의 땅을 병합한 자신에 대한 참회와 반성의 감정때문만이 아니였다.

류화의 아버지 하백은 부여땅에서 무시할수 없는 세력이였고 또한 겨우 안정되기 시작한 해모수땅의 귀족들과 백성들의 반항이 두려웠던것이다.

금와왕은 류화를 예성의 별궁에 따로 거처를 정하게 하고 우대하도록 하였으며 그가 주몽을 낳자 《궁성》에서 키우도록 허락하였다.

주몽의 신분도 대소를 비롯한 왕자들과 대등하게 왕족의 신분으로 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도 출중한 까닭에 주몽은 왕자들의 시기를 받아 종당에는 왕실 말목장의 말몰이군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래굳힌 수리개는 높이 날아오르기마련이라 비범한 인물임이 틀림없는 주몽은 과연 뜻을 정하기 바쁘게 오이, 마리, 협보 등으로 무리를 모아 하루밤새 도망질해버렸다.

대소가 뒤늦게야 이를 발견하고 급급히 추격했으나 행차뒤 나발격이 되고말았다. 주몽과 그의 무리들은 유유히 엄호수를 건너 졸본부여라고 부르는 구려국땅으로 은신해버렸다.

금와왕은 주몽의 어머니 류화와 그의 안해 례씨가 별궁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부질없는 추격을 그만두게 하였다.

어머니와 안해가 그대로 남아있는 이상 주몽이 설사 딴맘을 먹는다 해도 감히 정면으로 부여와 맞대거리를 할수 없으리라는 타산에서였다.

주몽이 어머니 류화와 안해 례씨를 스스로 볼모로 남겨놓고 궁을 떠난것은 앞으로 부여국에 절대로 해가 되는짓을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이 아닌가싶었다. 결국 하루아침에 류화와 례씨는 《국빈》으로부터 볼모의 신세로 되여버렸다.

왕자 대소가 지금도 굳이 주몽을 죽이려는 리유는 결코 다른데 있지 않았다. 이른바 대국의 태자인 자신보다 능력과 인품이 뛰여난 주몽을 용납할수가 없기때문이였다. 하여 조정안의 중신들은 물론 부왕조차도 모르게 은밀히 거사가 추진되기 시작했다.

어디론가 멀리로 달아난줄 알았던 주몽이네가 이웃나라인 구려땅 과루부라는 곳에 은신하였다는 간자의 보고를 받은 대소는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부터 그는 왕궁숙위대의 날랜 기마군사들로 추격병을 조직하고 남몰래 엄호수가에서 군사조련을 시켰다.

때가 오면 그들을 이끌고 대소자신이 직접 구려의 지경을 넘어 주몽과 그의 무리들을 요정내리라 벼르고있던차에 궁성에서 금와왕의 중병을 알리는 급한 파발이 달려온것이다.

대소는 식은땀을 즐펀히 흘리며 무릎을 꿇고 엎드려있었다.

금와왕의 가슴속에는 미련하기 그지없는 자식에 대한 불만이 삼거웃처럼 엉켜돌았다.

(저녀석이 주몽의 절반만큼이라도 영민했더라면 내 맘편히 부여국의 왕위를 넘겨주고 눈감을수 있으련만.…)

저도 모르게 찾아드는 이런 생각에 금와왕은 천천히 도리머리를 저었다.

《내 전번에도 말한바이지만 주몽의 일로 더이상 소란을 피우지 말도록 해라! 공연히 어리석은 백성들이 떠들지 못하게…》

《부왕마마! 주몽은 천하의 영걸이오니 반드시 부여국의 후환이 될것이옵니다.》

대소는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장차 천하를 호령해야 할 네 생각이 어쩌면 그리도 경망스러우냐? 하긴 메돼지란 놈은 원체 미욱해서 앞으로 골받기질밖엔 할줄 모르느니라.…》

부왕의 로골적인 질시에 대소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때로는 정면에서 장검을 가지고 쓰러뜨릴수 없던 강한 적수를 등뒤에선 작은 비수 하나로 손쉽게 쓰러뜨릴수 있느니라!》

《…》

《주몽은 원체 비범한 인물인데다 오이와 같은 지혜와 무예가 출중한 무사들이 보필하고있은즉 결코 머리수나 헤여보고 승패를 속단하여서는 안되느니라. 예로부터 장수들중에서도 용맹한 장수보다 계책을 잘쓰는 장수를 으뜸으로 일러왔은즉…》

금와왕은 별안간 목소리를 낮추었다.

긴장한 얼굴로 부왕의 속삭임을 듣고있던 대소의 얼굴엔 저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가 비껴흘렀다.

《그러하오니 부왕마마의 뜻은…》

《쉿! 담벽에도 귀가 있는 법이니라. 우선 믿을만 한 놈들을 골라 속히 구려땅으로 떠나보내도록 해라.》

《부왕마마의 깊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경솔한 소자를 부디 용서하옵소서. 부왕마마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대소왕자는 한결 개운해진 심정으로 부왕을 향해 읍을 하고나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왕마마, 그 계책을 성사시키자면 우선 내부의 비밀이 새나가지 못하도록 하여야 하옵니다. 전번에 주몽이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칠수 있은것도 기실은 오이의 먼 친척벌인 후궁의 소행이라는것이 드러났소이다. 속히 조처해야 할줄 아오이다.》

금와왕은 그것이 터무니없는 중상임을 모르지 않았다.

비록 후궁이 이번에 주몽과 함께 달아난 오이와 먼 친척간이기는 하지만 그를 주몽이네와 련루시켜본다는것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일이였다.

그러나 적서간의 차별이 명백한 왕위계승문제에서 타협이나 양보란 결코 바랄수도 기대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오씨가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대소가 모를리 없는것이다.

한순간 금와왕의 얼굴빛은 오씨에 대한 동정과 애처로움으로 하여 흐려졌다.

《네가 알아 조처하도록 하여라.》

힘들게 말을 끝낸 금와왕은 또다시 온몸을 엄습하는 동통과 피로를 느끼며 푹신한 베개속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후 후원뒤뜰에서 후궁 오씨의 가냘프고도 애처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년, 미얄할멈의 점괘가 뭐 어쩌고어째?

흥, 배속에 있는 애새끼가 사내인지 계집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벌써 룡꿈부터 꿔?》

대소왕자의 성칼진 목소리였다.

《전하! 소비를, 소비를…》 애절한 오씨의 부르짖음…

무례한 군사들이 악을 쓰며 몸부림치는 오씨를 질질 끌고가는 소리가 금와왕의 귀전에까지 들려왔다.

그러나 그의 굳어진 표정에선 아무러한 감정변화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하많은 궁중비화를 목격해온 금와왕에게 있어서 가련한 오씨의 운명같은것은 너무나도 범상한 일이였던것이다.

지금 그의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해 줄달음치고있었다.

두눈을 꾹 감고 깊은 생각에 골똘해있던 금와왕은 저도 모르게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장차 나라를 세우려거든 비범한 인물과 함께 그를 받들줄 아는 의로운 충의지사들이 있어야 하거늘 오이, 그녀석만 돌려세우면야…》

비록 오이가 원혐을 품고 일시 주몽의 수하에 들긴 했으나 초록은 동색이라고 그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해온 귀족가문출신이였다.

그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천민놈들과 함께 어울려 달아난것을 후회하게 될것이다.

밖에서 악을 쓰는 대소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내 진짜로 네년의 점괘를 해몽해주마! 네년은 이제 그 배속의 애새끼와 함께 지옥에 가게 될것이다. 이 륙실할 년.》

《악-》

후궁뒤뜰안에서 오씨의 단말마적인 비명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짧게 울려퍼졌다.

바로 그 순간 또다시 무서운 천둥소리가 궁성안팎을 흔들어놓았다.

꽈꽝, 우르릉…

후둑후둑 비꽃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창살처럼 굵어진 비줄기가 어둠속에 파묻힌 궁성과 드넓은 가섭벌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가을의 무거운 긴긴밤 괴롭게 태질하며 몸부림치는 부여의 예성은 전에없이 우울하고 침침하게만 느껴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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