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회)


제 4 장

2


보름달이 구름속으로 깊이 몸을 숨겼다 다시 헤염쳐나왔다. 숨박곡질이런듯 구름속을 들며날던 보름달이 솟구쳐나오자 개경장안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지중추원사 리자연은 합각지붕의 멋스로운 루대에 차려놓은 두툼한 비단방석에 실팍한 궁둥이를 파묻고 회심속에 달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하늘중천의 보름달이 후원을 들썩케 하는 풍악소리에 끌려나온것처럼 보였다.

리자연네 집의 넓은 후원뜨락에서는 초저녁부터 이채로운 가무놀이가 벌어지고있었다. 궁중악공들이 별의별 악기들을 가지고 풍악을 울리였다. 그 곡조에 맞추어 무희(녀자무용수)들은 물찬 제비같은 날씬한 몸매를 뽐내며 굴신좋게 춤판을 펼쳐놓았다.

그 흥취에 유혹되였는지 뭇별들과 공중에 띄워놓은 등롱들이 초롱초롱한 빛을 뿜었다.

《과시 좋은 때노라.》

리자연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춤판에로 눈길을 옮겼다.

보면볼수록 무희들의 춤맵시는 심금을 치고 가기(녀성성악가)들의 노래소리는 마음을 틀어잡는다.


임금은 아비여

신하는 자애로운 어미여

백성은 어린아이라 할지


임금은 임금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할 때면

나라가 태평하리라


리자연은 가기들이 부르는 《백성가》의 구절구절을 속으로 따라부르며 곁의 호피상에 걸터앉은 태제를 슬쩍 곁눈질해보았다.

태제의 안색이 겉보기엔 태연하지만 심중은 그렇지 않을것이다.

비둘기마음은 콩밭에 있다고 태제의 마음은 이 집 미인들한테 가있을것이다.

태제는 지금 요조가인(몹시 아름다운 녀자)들이 분내를 풍기는 규방으로 데려가주기만을 애바르게 기다릴것이다.

리자연은 자기가 벌써 태제의 가시아버지가 된듯한 심정이여서 어깨가 으쓱거렸다. 이런 가무놀이를 왕족이 아닌 신하의 집에서 엄두나 낼수 있는 일이겠는가.

리자연에게는 아들 넷에 딸 셋이 있었다. 천분인듯 그 세 딸의 미모는 삐여지게 잘나서 절세가인이라고 할만 했다. 이 집에 미녀들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 지난해 태제(임금의 동생으로서 왕위계승자)인 락랑군(후에 11대 문종대왕)이 대문을 두드렸다.

태제는 첫 대면에 벌써 이 집 딸들의 미모만이 아니라 그들의 뛰여난 학식에 반해버렸다.

그때부터 태제는 이틀이 멀다하게 이 집을 드나들었다.

리자연의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물론 태제한테는 부인으로 태제비가 있었다. 하지만 태제비는 정혼한지 여러해가 지나도록 태기가 없는데 어의들의 말이 잉태하기 어렵다는것이다.

이게 바로 하늘이 리씨집에 주는 복이 아니겠는가. 이 집의 맏딸이 태제의 눈에 들었으니 머지않아 궁중에 들어갈것은 정해진 리치였다.

사실 리자연이 쉰살도 되기 전에 지중추원사라는 조정3재로 될수 있은것은 태제의 뒤받침이 있어서였다.

리자연의 꿈은 후궁자리들에 자기의 피를 받은 인주 리씨의 녀인들을 차례로 들여앉혀 임금의 외척을 이룸으로써 조정을 장악하는것이였다.

시중 서눌이 고목이 되여서도 조정의 으뜸가는 벼리를 부지할수 있는것은 아버지 서희장군의 공적뿐아니라 제 딸을 황후로 들여앉혔기때문이 아닌가.

태제는 오늘이 리자연의 생일임을 알고 임금에게 아뢰여 궁중악단을 이 집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참석함으로써 무놀이의 흥취를 돋구었다.

물론 태제는 리자연의 딸을 마음에 두고 특별히 이자리를 마련한것이지만 또 한가지 이자리를 빌어 조용히 하고싶은 말이 있었다.

허나 태제의 마음을 알리 없는 리자연은 어서 딸들을 무대에 내세워 그들의 고운 자태를 보여주고싶었다.

리자연은 태제를 모시고 가무놀이를 펼치는 자기의 위세를 최충이 보지 못하는것이 한스러웠다.

최충이 이걸 보았더라면 얼마나 배를 아파할것인가. 더우기 천균노를 망쳐놓은 그가 달밤의 온 장안을 들썩케 하는 이 집의 흥성함을 가까이에서 목격했다면 기절초풍을 할지도 모른다.

어제 오전 최충의 표문이 중추원에 올라왔다.

표문의 골자인즉 천균노의 시험사격을 하였는데 예상외로 돌탄이 멀리 나가지 못했다는것이였다.

표문을 받아본 임금은 안색이 어두워져 몇번이나 한숨을 내쉬였다.

임금앞에서 당장 일을 칠듯 천균노를 만들어야 한다고 열을 올렸던 최충이 자기 손으로 망쳐놓은 일을 쓰자니 쓰디쓴 열물깨나 삼켰을것이다.

리자연은 깨고소해하는 심정으로 되지도 않을 천균노일을 벌려놓아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최충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붉은 바위가에서

손에 잡은 이내 손 놓아두고


(엉?!…)

리자연은 문득 너무도 귀익은 노래소리에 정신이 다 떨떨해졌다.

분명 애지중지하는 딸들이 부르는 목청고운 노래소리였다.

(그럴수 없겠는데…)

무희들이 춤추는 무대를 바라보던 리자연은 《아!―》하고 경탄을 터치였다.

검은 치마저고리차림의 무희들속에서 분홍치마에 노랑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두 딸이 두손을 모아쥐고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맏딸과 둘째딸이였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리자연의 딸들은 너무나도 삐여지게 잘나서 경국지색에 비길만 하였다.

리자연은 두 딸이 다 꾀꼴새인양 목청도 곱고 자태도 닭무리속의 봉황인듯 하여 가슴을 쭉 펴고 태제를 바라보았다.

곁에 앉은 태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옷깃을 헤치고있었다.

얼마나 속이 타고 기갈이 나면 저러랴.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면

꽃을 꺾어드리오이다


리자연의 딸들은 무희들 못잖게 멋들어진 춤가락을 펼쳐보이며 《꽃을 드리는 노래》를 건드러지게 뽑았다.

그럴수록 리자연은 만만한 자부와 긍지로 해서 가슴을 들먹거렸다. 거만의 돈을 들여 딸들을 키우기 얼마나 잘했는가. 똑똑하고 생기발랄한 저애들을 어느 미녀들이 감히 당할텐가.

태제는 어쩔수없이 저 노래에 깃든 사연을 음미하며 더욱 애간장이 말라할것이다.

후기신라때 강릉태수로 부임된 어떤 사람이 아릿다운 부인을 데리고 부임지로 가고있었다. 가던 도중 바다가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깎아지른 절벽우에 핀 꽃이 부인의 눈을 끌었다.

부인은 남편에게 꽃을 꺾어달라고 청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절벽이 높아 위험하다면서 머리를 저었다.

그때 소를 끌고가던 농사군이 부인의 말을 듣고 아스라한 절벽에 기여올라가 꽃을 꺾어왔다.

농사군은 아름다운 꽃을 아릿다운 부인에게 주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바로 《꽃을 드리는 노래》였다던지…

리자연은 코웃음을 쳤다.

꽃을 꺾어달라는 아릿다운 안해의 작은 청 하나 들어주지 않은 강릉태수야말로 졸장부로다.

태제는 저 노래를 들으면서 미인들이 바란다면 절벽이 아니라 달나라에까지 가서라도 꽃을 꺾어다 주려 할것이다.

그러고보면 하많은 노래들가운데서 굳이 저 노래를 골라 부르는 딸들의 뜻을 알만하다. 그 뜻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

지금 딸들은 이 집을 찾아온 태제를 부르고있다. 꽃과 나비가 서로 그리워하면 제아무리 높이 친 울담도 소용없거늘 공연히 시간을 끌게 있는가.

리자연이 이런 생각으로 흠흠해하는데 태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리공도 천균노를 만들수 있도록 도와야겠소. 과인은 북계병마도감사였던 박원작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것을 뒤늦게야 알았소.》

리자연은 전혀 생각밖의 말에 머리가 뗑해졌다.

며칠전 태제는 서눌시중의 청대를 받아주었다.

이미 임금을 찾아가 꼭같은 말을 드린 시중은 태제에게도 박원작을 삭탈관직시키라는 어지는 리자연이 아무 근거도 없이 함부로 남을 모함하여 내려진것이라는것을 밝히고 그를 복직시키기를 청하였다.

그 일때문에 태제는 어제 임금을 만났었다. 임금은 잘못된 어지를 내려보낸 일을 후회하면서 일단 내려진 어명은 곧 철회할수 없는것이니 박원작이 뜻대로 천균노를 만들어내는 그때 가서 그를 복직시키겠다고 하였다.

《리공은 조정대신으로서 국정을 기분에 따라 처결하려 해서는 안되오. 천균노는 고려의 오늘뿐아니라 래일과도 관련되는 위력한 병기니만치 누구보다도 리공께서 그걸 만들어내도록 잘 돌봐주어야 하지 않겠소?》

리자연은 속으로 최충을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된욕을 퍼부었다.

그는 최충이 병마도감에 머물러있으면서 남권부를 눌러놓고 박원작을 내세워 천균노를 새로 부어냈다는것을 제일먼저 알고있었다.

최충이 아니였다면 골병든 박원작은 쓰러졌을것이고 화약의 비방을 가져다 군기감에 염초장을 크게 차려놓았을것이다. 그러면 병마도감에서 염초장을 없애치울수 있으니 군국대사를 처결하는데서 판북계병마사 최충을 제쳐놓고 이 리자연이 큰몫을 맡아할수 있었다.

태제의 목소리가 리자연의 귀박죽을 무겁게 후려쳤다.

《과인은 리공이 지나간 일을 잊어버리고 최공과 손잡고 하루속히 천균노를 만들어내도록 밀어주리라고 믿소.》

리자연은 최충과의 힘겨루기에서 자기가 패했다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자니 울분이 치밀었다. 생각같아서는 더 큰 험턱을 박원작에게 들씌워 최충을 골탕먹이고싶지만 태제까지 나서서 병마도감을 도우라니 이번만은 참아야 했다.

《태제전하의 하교를 충정으로 받들겠소이다.》

《공은 말씀을 낮추소.》…

다음날 중추원에 나간 리자연은 쓴입을 다시면서 천균노를 속히 만들수 있도록 박원작을 도와주라는 공문서를 남권부에게 띄우고 또 자기의 명의로 쌀과 피륙을 병마도감에 보내주라는 분부를 부하들에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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