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제 4 장

1


박원작은 병마도감의 마당가에 줄맞추어있는 오얏나무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잎새가 무성한 오얏나무들에서 주렁주렁한 열매가 눈길을 끌었다.

오얏꽃이 하얗게 피였던것이 엊그저께같은데 벌써 오얏이 저렇게 컸다.

대추보다도 훨씬 커진 오얏열매를 바라보느라니 올해는 절기가 어떻게 지나는지 알지 못하고 산다는것을 다시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일에 부대끼며 시간에 쫓기다보니 언제한번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지 못했다.

박원작은 오얏열매를 손더듬하며 한숨을 내쉬였다.

련장에서 놋쇠를 녹이느라 연기가 보기 좋게 타래쳐오르고있지만 이전처럼은 즐겁지 않았다.

지금 련장에서는 근달이 장공인들을 휘동하여 밤새 불을 땐 철덕에서 뢰등석포를 부어낼 놋쇠물을 받자고 차비를 하고있을것이였다.

판북계병마사 최충은 평로진으로 돌아가면서 실패한 천균노의 부족점을 찾아내는 동안 기세를 떨구지 말고 뢰등석포를 힘차게 만들어내라는 당부를 하였다.

새로 쌓는 진성들에 뢰등석포가 많이 요구되기때문이였다.

하여 작은 철덕에 불을 지폈지만 박원작의 마음은 울적하기만 하였다.

수레를 메울 하늘소 몇마리가 말 한필을 당할수 없듯이 뢰등석포를 많이 부어낸단들 천균노 한문을 당할수 있으랴.

허리부러진 장수꼴이 된 천균노를 열흘나마 그대로 내버려두고 속수무책하고있으니 심화가 은근히 덧친다.

아, 지금의 이 신세가 숨져가는 자식을 안타까이 지켜보며 의술이 없음을 한탄하는 무기력한 아비와 무엇이 다른가. 정녕 제힘으로 화약의 부족점이 무엇인지 밝혀낼수 없단 말인가.

이 열흘나마 박원작은 수십차례 천균노를 살펴보며 천균노에서 화약이 어이하여 자기의 힘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지 그 까닭을 밝혀내려고 모지름을 썼다.

허나 누가 까마귀 암놈수놈을 알랴하듯 좀처럼 그 까닭을 밝혀낼수 없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도달한 결론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돌탄을 지금보다 작게 만들어쓰자는것이였다.

그러면 지금의 화약을 그대로 쓰면서도 돌탄을 멀리 날려보낼수 있을것이다.

박원작은 그 의견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지금보다 작은 돌탄을 쏘자고 무려 3만근이나 되는 화포를 부어낼 필요가 뭔가.

그럴바에는 뢰등석포를 더 많이 만들어쓰는게 나을것이다.

고구려때 천균노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 조상들은 오늘과 같은 화약이 아니라 염초 한가지로 화포를 쏘았을것이다.

그러니 고구려의 천균노는 위력이 약하여 오늘날 뢰등석포에서나 쏘는 그런 작은 돌탄을 날렸을것이다. 그때의 천균노는 분명 3만근짜리 화포이긴 하나 지금 만들어낸 천균노보다 포아가리 폭이 훨씬 작은 대신 동체는 썩 길었을것이다.

천균노를 조상들처럼 만들면 작은 돌탄이긴 해도 염초가 아닌 화약을 쓰는 까닭에 고구려때보다 썩 멀리로 날릴수는 있다.

이것이 여러 사람들의 주장이였다.

때로는 다수가 주장한다 해도 그 주장이 옳은것은 아니며 홀로 주장한다 해서 그른것도 아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고구려때의 천균노는 그렇다할지라도 보다 진보한 오늘날에는 그때의것보다 훨씬 더 위력한 화포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조상들을 대하는 후손들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마음은 그러한데 뚫고나갈 방책이 나지지 않으니 이게 난사가 아닌가.

맥을 모르면 침통을 꺼낼수 없다고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서는 천균노를 다칠수 없기에 박원작은 밤낮으로 고심을 이어가고있었다.

아, 이제는 심신마저 진해버렸는가.

박원작은 오얏나무에서 물러나 저 하늘로 막연한 눈길을 던졌다.

좀 있어 흰구름이 뭉게뭉게 떠도는 하늘에 옛글 몇문장이 새겨졌다.

좋은 시작을 떼는 사람은 많으나 좋은 결과를 거두는 사람은 적다. 일을 할줄 아는 사람은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에로 이어나가며 지혜로운 사람은 좋은 때를 놓쳐 공을 버리지 않는다.

박원작은 마음이 구슬퍼졌다.

옛글을 지은 사람이 자기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는것 같았다.

아, 시절도 좋고 벗들도 많은데 바퀴빠진 수레마냥 앞으로 나가지 못하니 이게 바로 일할줄 모르는게 아니고 뭔가, 룡천검도 쓸줄 알아야 하고 룡마도 탈줄 알아야 한댔다는데…

박원작이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오얏나무를 쳐다보고 섰는데 웬 로인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저… 혹시 박공이 아니신지요?》

지척에서 울리는 석쉼한 소리에 박원작은 의아한 눈길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 옳군요!》

박원작은 곧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가려보았다. 수수한 베도포를 차려입고 백발수염을 가슴에 드리운 로인은 《서경명의》였다.

《의원님!》

박원작은 반색하며 절을 차렸다.

《아아, 이러지 마시오이다.》

《서경명의》는 급히 맞절하며 바빠했다.

절을 차린 박원작은 《서경명의》의 팔을 잡으며 웃음을 지었다.

《의원님! 그간 편안하셨소이까?》

《저야 생업이 의술인데 어찌 제몸 하나야 편안케 살지 못하겠소이까.

헌데, 박공의 안색이 좋지 않소이다.》

《서경명의》는 박원작의 손목을 잡으며 맥부터 짚었다.

《의원님께 미처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가지 못했소이다. 의원님이 지어주신 약을 먹으니 배아픔이 한결 덜어지고 힘이 나오이다.》

《고맙다는 인사는 내게 아니라 댁의 부인에게 하소이다. 인정깊고 강인한 부인을 두신건 박공의 복이오이다.》

박원작은 할말이 없었다. 의원의 말대로 서경에 와서 얻은 큰복의 하나는 해연을 만난 복이다.

오복에는 부인복이란 말이 없다. 그것은 만복중의 으뜸가는 복이 안사람복인 까닭에 구태여 더 론하지 않아서일것이다.

박원작의 손목을 조심히 놓는 《서경명의》의 얼굴이 흐려졌다.

《오늘 제가 여길 찾아온것은 박공이 약을 자시는가를 알아보려고 해서요. 자고로 천하명약일지라도 한첩 약을 소홀히 해서 명을 재촉했다는 말이 있소이다. 박공은 부인의 만지성이 깃들어있는 약을 적지 않게 번졌소이다. 그래가지고서는 큰뜻을 이룰수 없소이다.》

박원작은 깜짝 놀랐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맥이나 한번 짚어보고 약을 꼭꼭 먹지 않은것을 어떻게 알아맞출수 있단 말인가.

박원작은 오늘 아침에도 약을 먹지 않았다. 배가 아파나면 먹고 아픔이 멎으면 먹지 않기가 일쑤였다.

《의원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소이다.》

《제발 그래주소이다. 박공의 건강은 나라가 바라는것이 아니겠소이까. 참, 요즘 서경장안이 들썩하오이다. 천하대포가 나왔다구요. 비록 돌탄을 멀리 날리진 못했지만 미구에 멀리 나갈거라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소리입니다.》

박원작은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은 어서 빨리 천균노가 성공하기를 바라고있는데…

《의원님, 좋은 말을 해주어서 고맙소이다. 허지만…참, 머리가 아프오이다.》

박원작은 《서경명의》가 마치 스승처럼 돋보여 기탄없이 속을 터놓았다.

《말이 짐을 끌 때 두마리로 끌게 하면 두곱을 끌수 있고 세마리를 끌게 하면 세곱을 끌수 있소이다. 헌데 어찌된 까닭인지 천균노는 뢰등석포보다 화약을 많이 먹고도 힘은 그만큼은커녕 반에반도 쓰지 못하니…》

박원작의 얼굴은 소태를 씹은듯 이그러졌다.

《서경명의》는 수염을 어루만지며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박원작을 건너다보았다.

《저도 박공이 화약때문에 고심한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보았소이다. 사방을 둘러보면 먹은만큼 힘을 쓰지 못하는것이 한둘이 아니오이다.

소에게 꼴을 두곱으로 먹였대서 두곱의 짐을 끌진 못하지요, 사람도 밥을 두그릇 먹었대서 짐을 두곱 지지 못하오이다.

약도 마찬가지지요. 산삼을 약처방에 두곱으로 넣었대서 그 효험이 두배로 늘어나진 않소이다.》

박원작은 《서경명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고 귀맛이 나는 말이였다.

《의원들에겐 적은 량의 약을 먹이고서도 많이 먹인것처럼 약효를 높이는 비방이 있소이다. 값비싸고 진귀한 약재일수록 그 비결을 알아야 하는데… 가령 인삼을 단방으로 쓰기보다는 감초나 꿀같은 약재와 섞어쓰면 보다 적은 량으로도 효험을 크게 볼수 있소이다.》

《서경명의》의 말을 귀담아듣는 박원작에게 뇌리를 치는것이 있었다.

의원들이 약처방을 짓는것처럼 지금 쓰고있는 화약에다 인삼에 섞어주는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하는 무엇인가를 넣어주면 보다 화약의 힘이 세질것이다.

《염초도 그렇소이다.》하는 《서경명의》의 말에 박원작은 바늘에 찔린듯 흠칫하였다.

《염… 염초라니요?》

《서경명의》는 놀라와하는 박원작을 바라보며 웃음을 거두었다.

《염초는 화약으로만 쓰이는것이 아니라 약재로도 귀히 쓰이고있소이다. 우리 선조들은 오래 묵은 새똥이 오줌내기약으로 좋다는것을 알고있었소이다.

날새들이 무리지어 싼 똥이 오래 묵으면 흰돌처럼 굳어지는데 그것을 불속에 넣으면 불꽃을 튕기며 잘 탑니다. 그래서 아마 조상들은 돌처럼 굳어진 새똥을 염초라고 한것 같소이다. 그후 오랜세월 흐르면서 해묵은 새똥이 바닥나게 되니 흙을 달여 염초를 얻어내게 된것 같소이다.》

박원작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서경명의》의 말을 들어보니 염초는 분명 의원들이 먼저 발견하여 약재로 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지혜롭고 슬기로운 의원들인가.

《염초를 오줌내기약으로 쓸 때 단방치기보다는 백봉령(솔뿌리혹)을 섞어주면 그 효험이 갑절 더 세지오이다.》

박원작은 마침내 눈앞이 환해지는것 같았다.

그는 기쁜 나머지 《서경명의》의 두손을 잡고 흔들었다.

《의원님! 깨달았소이다. 의원님은 저의 눈을 틔워주셨소이다.》

《원, 별말씀을 다…》

껄껄 웃어대는 박원작의 두눈은 총기를 뿜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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