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회)


제 3 장

11


다음날 정오무렵이였다.

박원작이 천균노를 다시 부어낼 작정으로 련장에 나가 장공인들과 철덕에 불을 지필 일을 의논하고있는데 말탄 두명의 벼슬아치가 전배후배사령들을 한무리 거느리고 병마도감에 들이닥쳤다.

벼슬아치의 한사람은 금어를 찬 중추원의 승선이고 다른 한사람은 진홍색공복에 붉은 띠를 띠고 은어(6품관부터 4품관임을 의미하는 은으로 만든 물고기모양의 장식품)를 찬 어사대(현행정사를 토론하고 모든 관리를 규찰하는 일을 맡은 중앙관청)의 시어사였다.

그들은 곧장 별관으로 들어가면서 박원작과 남권부를 불러들이라는 분부를 내렸다.

개경에서 고관들이 내려왔다는 전갈을 받은 박원작은 급히 남권부와 함께 별관으로 달려갔다.

별관에서 제일 큰 방에 들어선 박원작은 아래목에 틀지게 앉아있는 두 벼슬아치에게 깍듯이 절을 차렸다.

그들은 시답지 않아하는 눈길로 박원작의 절을 건숭 받고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선 승선이 비단보자기에 꾸린 종이말이를 꺼내들며 갑자기 목에 피대를 돋구었다.

《어지를 받으라!―》

남권부가 먼저 종이말이를 펼쳐든 승선앞에 꿇어엎드렸다.

어지라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박원작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급기야 무릎을 꿇고엎드렸다.

어지라니 무슨 어지가 내려왔을가. 천균노를 성사시키지 못했다고 꾸짖는 어지일가.

이어 승선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는데 그 어조에서는 차디찬 랭기가 풍기였다.

《신 북계병마도감사 박원작은 불법무도하게 나라에서 그토록 중시하는 화약과 〈신기한 병기〉를 뽑아내여 타국과 장사를 하였다니 심히 불충불효하도다. 그대가 지은 죄 실로 엄중하기 그지없어 극형에 처함이 마땅하나 다년간 나라의 병기를 만들어낸 공적을 가상히 여기여 참형은 면케 하고 삭탈관직에 처하여 서민으로 종신 병마도감에서 쇠를 녹이는 역을 질지어다.》

박원작의 안색은 대번에 새까맣게 죽어버렸다. 이거야말로 청천벽력이 아닌가! 내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라의 재물이나 다른 사람의 물건이라면 터럭만큼도 다친적이 없는데 화약과 《신기한 병기》를 빼내여 그것도 타국에다 팔아버릴수 있는가.

아버지의 피가 스며있고 나의 땀이 바쳐진 그것들에 내 어찌 꿈에서나마 손을 댈수 있단 말인가.

하다면 이리도 엄청난 모함을 꾸며내여 어지를 내리게 한 놈은 누구일가. 내 생전 남에게 해되는 일은커녕 그런 말조차 내뱉은적 없는데 누가 과연 나를 죽일 명부를 들이밀었단 말인가.

《남공은 어지를 받으라!》하는 승선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는 어찌나도 부드러운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은근한 정을 느끼게 하였다.

《남권부는 마음이 착하고 어질뿐아니라 병기를 만드는 재주 또한 뛰여나 능히 나라의 중임을 감당할만 하다니 북계병마도감사로 봉하노라.

그대는 오로지 나라위한 충정을 안고 맡은 일을 잘해나갈지어다.》

남권부는 방바닥에 이마를 조아리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신 남권부 성상의 은혜에 꼭 보답하겠소이다.》

남권부는 지금 막 자리를 차고일어나 덩실덩실 춤추고싶은 심정이였다.

산이 평지가 되고 평지가 산이 되였다면 바로 이런걸 가리켜하는 소리일것이다. 박원작이 곁에 있는 한 벼슬길에서 물러설 때까지 그의 밑에서 잔시중이나 들줄 알았는데 도리여 그를 디디고올라 병마도감의 실권자가 되였다.

이게 다 리자연이 힘써준 덕이다. 그러고보면 리자연이 속도 깊고 도량도 넓은 큰 인물이다.

그는 분명 나를 제집에 불러들였을 때 벌써 박원작의 목에 든든한 올가미를 씌울 계책을 꾸미고있었을것이다. 그러고도 그것을 전혀 내색치 않았으니 정말 보통인물이 아니다.

하여간 리자연의 덕으로 병마도감의 주인이 되였으니 더 힘껏 재물도 모으고 그한테도 보은을 해야 한다.

또다시 승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안을 울리였다.

《남공은 일어나라.》

《황송하오이다.》

남권부는 방을 나서는 승선과 시어사의 뒤를 황급히 따랐다.

큰 방에 홀로 남은 박원작은 너무도 억울하여 몸부림을 쳤다.

책에 지은 죄로 하여 죄인이 되는 사람보다 남이 씌워준 죄아닌죄로 하여 죄인이 되는 사람이 더 많다고 씌여졌는데 오늘에야 그의미를 알겠다. 일 잘하는 충신을 시기질투하는 간신들이 조정에 도사리고있는 한 그놈들은 생사람잡이를 그만두지 않을것이다.

《아, 내가 품었던 뜻은 오늘로써 끝장났단 말인가.》

가만히 따져보니 어지에는 천균노를 빨리 만들어내라는 구절이 일언반구도 없었다. 하다면 임금은 이 박원작을 아예 역적으로 치부하다보니 천균노를 만들자던 국사마저 단념했단 말인가. 그게 사실일가.

박원작은 도리머리를 하였다.

백관을 모아놓고 어명으로 락착지은 그 일을 가볍게 줴버릴 임금이 아니다. 임금께서 천균노를 단념했다면 중죄인이 된 이 박원작을 정배지로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종신역을 살라 했겠는가.

박원작이 이런 생각으로 자기를 위안하고있는데 밖에 나갔던 남권부가 사기가 나서 들어왔다.

그는 아직도 꿇어앉아있는 박원작을 보고 비웃음을 지었다.

《이젠 편안히 앉게. 그 어른들은 서경류수부에서 쉬겠다며 그리로 가셨네. 그건 그렇고.》

남권부의 어조는 이전과 달리 오만하게 반말투였다.

《자네 오늘부터 관복을 벗고 평복차림을 해야겠어. 직첩(관리임명장)도, 타고다니던 말도 다 바치고 시비들도, 아, 그렇지. 집에 시비는 두지 않았으니 그건 일없겠고… 일은 자네가 마음에 드는 장에 가서 하게.》

《그래야지. 난 련장에서 일하겠네. 거기서 천균노를 만들어야 하니까.》

남권부는 성이 나서 소리쳤다.

《가만! 자네 그 말투부터 고쳐야겠어. 오늘까지는 그냥 내버려두겠는데 래일부턴 내앞에서 공손한 자세로써 자기를 소인이라고 해야겠어.》

박원작은 한숨을 내쉬였다.

삭탈관직을 당하고 서민이 되였으니 그렇게 처신하는것이 국법이다.

《알겠소이다.》

《좋아. 그리고 천균노는 만들수 없네.》

그 말에 박원작은 머리를 쳐들고 남권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수 있는가.

《천균노를 만들지 말라는건 내 말이 아닐세. 승선어른이 이르시기를 그건 바로 중추원의 지원사(리자연)의 뜻이고 또 성상의 뜻이기도 하다는거야.》

《아!―》

박원작은 탄식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니 나의 한가닥 기대마저 허물어져버렸구나.

팔짱을 끼고선 남권부는 조소에 찬 눈길로 박원작을 굽어보며 호령조로 말했다.

《내가 병마도감의 주인이 되고 자넨 서민이 되였은즉 화약의 비방을 내놓게.》

박원작의 가슴엔 금시 분노가 치밀었다. 물은 건너보아야 알고 사람은 지내보아야 안다더니 이제는 남권부 네가 어떤 사람인줄 똑똑히 알겠다. 그전에는 너에게 화약의 비방을 배워주고 군기감으로 올려보내려고 하였지만 이제 와서 상전에게 추종하여 천균노를 짓밟자고 하는데 내 어찌 네 요구에 굴복할수 있단 말인가?

박원작은 조소에 찬 눈길로 남권부를 쏘아보며 단호히 잘라 말했다.

《안돼. 그것만은 안된다!―》

남권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이그러졌다.

《무엇이? 감히 어따대고. 아직도 제가 병마도감사인가 해? 염초장도 내가 다스리는 한개 장이고 너도 내가 부리는 일개 장공인이야. 난 국법에 따라 화약의 비방을 넘겨받아야 해.》

박원작은 말문이 막혔다.

남권부는 제 말대로 병마도감사의 직분을 따르고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화약의 비방만은 아직 그 누구에게도 내놓을수 없다.

그게 어떤 비방인가. 그것은 박씨가문의 비방이기 전에 나라의 제일가는 비방이여서 그것을 물려받을 명분과 자질이 부족한 남권부같은 사람에게는 목에 칼이 들어온대도 넘겨줄수 없다.

박원작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자 남권부는 더럭 겁이 났다.

병마도감사의 자리까지 마련해준 리자연에게 화약의 비방을 가져다 바치지 않으면 그땐 끝장이다.

남권부는 언제 큰소리를 쳤던가싶게 약은 웃음을 짓고 박원작의 손을 잡았다.

《박공! 내가 너무한것 같소. 허지만 생각 좀 해보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니 나도 어쩔수 없어 그러는거네. 일개 장공인이 된 자네가 화약의 비방을 가지고있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나라앞에 그보다 더 큰 죄가 있겠소?

난 병마도감사이기 전에 자네의 친구로서 박씨가문의 비방을 더 잘 지키고싶어 이러는걸세. 그것만 내놓으면 내 그대를 금방석우에 앉혀놓고 아무 근심걱정없이 잘살도록 해주겠네. 이건 내 진심이야.》

박원작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곧 그의 입술에서는 시뻘건 선지피가 흘러나와 턱을 랑자하게 적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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