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제 3 장

9


의원에게 병을 보이고 앓는 병이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최충의 당부가 적힌 공문서는 박원작에게 힘으로 되였다.

친부모와도 같이 세심하게 돌봐주는 스승의 손길이 있는데 내 어찌 기운이 나지 않겠는가!

해연은 또 그대로 즉시 《서경명의》라 이름난 대동강건너 의암마을에 사는 늙은 의원을 청해다 박원작의 병을 보게 하였다. 박원작의 몸상태를 깐깐히 살펴보고난 《서경명의》는 해연을 따로 만나 이 병은 적취(배안에 혹이 생기는 병)라는 아주 무서운 병이여서 빨리 손을 써야 하는데 자기한테 랑독(오독도기)이라는 약초가 딱 떨어져 지금 당장 약을 짓지 못하는것이 한스럽다고 하는것이였다.

알고보니 그 약초는 성주고을의 물금산(회창군)일대에서 나는것이였다.

이런 우연도 있담. 바로 물금산어방의 한 마을에 해연에게 이모되는 사람이 살고있었다.

의원은 해연에게 적취에 걸렸다는걸 본인이 알지 못하게 하고 그저 위완통(위염)을 앓으니 약을 쓰면 인차 나을거라 말해주라고 당부하였다.

위완통에 걸렸으니 의원이 지어주는 약을 쓰면 곧 병이 나을수 있다는 말을 듣고 더욱 기분이 좋아진 박원작은 아예 병마도감으로 침식을 옮기였다.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마도감으로 침식을 옮기는 박원작을 보는 해연의 가슴은 찢어지는듯 하였다.

남정네가 속탈이 생기는것은 대개 안주인이 음식대접을 잘하지 못하는때문이다. 아들이 골병에 든줄 시어머니가 안다면 땅을 치며 한탄할것이다. 한시급히 약초를 캐여다가 약을 지어야 한다.

해연은 서둘러 아들을 옆집에 맡겨두고 그길로 약초를 구하려 집을 나섰다.

한편 병마도감의 별관으로 침식을 옮겨온 박원작은 벌써 그랬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진작 그렇게 했더라면 야경도 더 빈틈없이 짜고들수 있었을것이고 지금쯤은 천균노를 다시 만들어 시험사격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병마도감으로 침식을 옮겨온지 며칠 안되여 웃고떠드는 장공인들과 함께 있어서인지 배아픔도 덜해졌다.

병들었다 근심말고 웃으며 살라는 말이 과연 맞는것 같다.

박원작은 오늘도 아침일찍 깨여일어나 병마도감을 한바퀴 돌아보고 련장으로 나갔다.

그는 많은 숯이 들어올 때까지 여기저기서 모아들인 숯으로 뢰등석포를 부어낼 놋쇠를 녹이도록 하였다. 당장 작은 철덕에서라도 연기를 내뿜어서 련장을 들끓게 하고싶어서였다.

련장이 들끓어야 온 병마도감이 들끓게 되는 법이니까.

이번에 새로 부어내는 뢰등석포들은 새로 쌓는 평로진성과 녕원진성에 보내줄것들이다.

박원작이 련장에 들어서니 벌써 장공인들이 모두 나와 뢰등석포를 부어낼 거푸집을 빚고있었다.

박원작은 인사를 차리는 장공인들에게 답례를 차리고는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손짓을 하였다.

장공인들이 다시 일에 달라붙자 박원작은 련장뜨락의 한구석에서 거푸집을 빚고있는 군만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군만은 심국종이와 한조이다. 원래는 메득이와 한조인데 그가 죽은 후 심국종이 그자리를 메웠다.

아직도 군만은 풀이 죽어 침울해있었다. 제 친구가 칼에 찔려 잘못되는것도 모르고 잠만 잤으니 죄책감도 커서였지만 그보다 많은 장공인들이 그를 외면해서였다.

하긴 그의 잘못을 누가 쉽게 용서해주자고 하겠는가.

불행중 다행이라면 재간좋은 심국종이 메득이를 대신한 그것이다.

사람은 얼굴보다 일이 고와야 곱다는 말은 심국종을 념두에 두고 생겨난듯 싶다.

일밖에 모르는 심국종은 늘 봐야 제일 일찍 나오고 제일 나중에 들어가는데 오랜 장공인들 못잖게 거푸집을 얼마나 잘 빚는지 모른다.

박원작은 일손을 잡을가봐 념려하는 장공인들의 뜨거운 마음을 생각하여 근달이 가져다놓은 평상에 걸터앉았다.

눈길은 여전히 군만이에게 가있었다.

어깨가 축 처진 군만이 손을 한번 놀릴새면 심국종은 한번 더 움직였다.

뢰등석포의 거푸집을 빚는 일은 여간 까다롭지 않다.

모장에서는 청새진에서 파온 무른 곱돌가루를 이겨 목침만 하게 빚은 다음 거기에 각이한 형태의 창날을 제 생김새대로 파낸다. 그게 곧 창날을 부어내는 거푸집으로 된다.

그런 거푸집은 한번 잘 빚어놓으면 열스무번이고 련이어 창날을 부어낼수 있다.

하지만 련장에서 부어내는 뢰등석포의 거푸집은 몇번 써보지 못하고 마사져버린다. 그것은 뢰등석포가 창날과 달리 속도 비여있고 생긴 모양도 복잡하기때문이다.

게다가 뢰등석포는 한몸이 아니고 완구와 약통으로 구별되여있어 다른 《신기한 병기》들보다도 거푸집을 만들기에 품이 많이 든다.

완구의 거푸집을 빚으려면 완구와 꼭같이 생긴 완구모형을 써야 한다. 완구모형을 넓은 포아구리가 땅바닥에 닿게 세워놓고 그속에 흙반죽을 잘 다져넣는다. 그것이 곧 완구의 속거푸집이다.

완구모형을 뽑아내서 처음과 반대로 거꾸로 세워놓고 그보다 큰상자모양의 나무틀을 넣은 그사이에 흙반죽을 다져넣으면 그게 또한 완구의 겉을 이루는 바깥거푸집으로 된다.

약통실의 거푸집도 완구의 거푸집처럼 빚으나 그보다 좀더 까다롭다.

이렇게 빚은 거푸집들은 기와처럼 해볕에 말려 거푸집가마에서 구워내야 한다.

거푸집에 뢰등석포를 부어내는 일도 헐치 않다.

완구를 붓자면 바깥거푸집안에 속거푸집을 바로 넣고 놋쇠물이 닿을 자리에 보드라운 숯가루를 물에 타서 고루 바른다. 그래야 놋쇠물이 거푸집에 달라붙지 않는다.

약통도 그렇게 붓는다.

박원작의 눈길은 오랜 장공인들처럼 능숙하게 거푸집을 빚고있는 심국종에게로 옮겨갔다.

심국종은 일만 고운게 아니라 마음씨도 그만 못지 않은것 같다.

장공인들의 말이 심국종이 자기들의 생일을 어떻게 아는지 매번 닭을 사보낸다고 했다. 그는 메득이의 장례에도 쌀 한섬이나 부조를 했다.

심국종은 잽싸게 손을 놀리며 군만이에게 말을 걸었다.

《군만이! 자네가 〈처용가〉를 곧잘 부른다는데 이런 날 한번 목청을 뽑아보게나.》

군만은 들은척도 않고 거푸집만 빚는다.

《여, 그러다 자네 입에 좀이 쓸어. 어서 부르라니까.》

그래도 군만은 대척하지 않았다.

《에라, 싱거운 일이지만 내가 대신 불러주지.》

심국종은 헛기침까지 깇더니 목청을 뽑았다.


동경 달밝은 밤에

이슥토록 돌아다니며 놀다가

돌아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해였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다마는

빼앗는걸 어찌하리


새된 청이였지만 련장의 분위기는 확 밝아졌다.

근달이 웃으며 소리쳤다.

《이 사람! 자네도 명창이군 그래. 노래를 참 잘 불렀어. 이왕이면 〈처용가〉에 깃든 사연도 구수하게 들려주게나.》

그 말에 심국종은 팔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행수어른, 저같은 막놈이 그런것까지 알턱이 있소이까. 행수어른이 한말씀 들려주소이다.》

근달은 벌씬 웃었다.

《허― 제가 춤추고싶으면 동서에게 권한다더니 실은 나도 좀 마실군노릇을 하고싶어 그랬네.

그럼 다들 손은 부지런히 놀리면서 잘들 들어보게나.》

근달은 흙을 이기면서 큰소리로 이야기를 엮어내렸다.

《옛적에 선조의 나라 고구려가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있을 때 그 남쪽에는 동족의 나라 신라가 있었다네.

신라임금은 아마 무던히 풍류를 즐긴것 같애. 글쎄 어디에 경치가 좋다는 소문만 들으면 만사 전페하고 놀러 다녔으니까.》

박원작의 귀에는 근달의 이야기소리가 흘러들지 않았다. 그대신 갖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떠오르면서 가슴에 근심이 괴여올랐다.

해소병에 걸린 스승이 약을 자시면서 성쌓기를 독려한다는데 병세는 좀 어떤지.… 아직도 북방의 바람은 맵짤터인데.

그런데도 스승이 병약한 몸으로 숯을 도맡아 보내주시겠다니 참 면목이 없는 일이다.

개경에 간 남권부는 지금쯤 놋쇠를 싣고 길을 달리고있을것이다. 놋쇠를 실으러 보낸 말들과 마차들은 내가 서경으로 올 때 나라에서 준것들이니 별일은 없을것이다.

김충지가 하는 일이 걱정된다. 그가 숯고간을 불지르고 메득이를 죽인 놈을 찾고있는데 그 일이 어느 정도 진척되였을가. 그런 일에 경험이 별로 없는 그가 스승의 뜻대로 나쁜 놈들을 밝혀낼수 있을가. 아니, 괜한 걱정, 그는 스승이 특별히 선발한 수제자가 아닌가.

그렇더라도 련장에 파수군을 더 늘여 불상사를 미리 막아내야 한다.

아, 어머니는 어떻게 살고계시는지. 스승이 개경을 떠나올 때 어머니는 앓고있다고 했었다. 늘그막에도 여전히 자식복이 없는 어머니다. 언제 가면 못다한 효도를 다해 어머니를 남부럽지 않게 모실수 있겠는지.…

개경의 군기감에 가있는 번기네들이 건강해서 맡은 일을 잘한다는데 이젠 기한이 거의다 찼으니 인차 돌아올것이다.

박원작의 생각은 어느덧 약초를 구하려고 떠난 해연에게로 이어지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요란한 박수갈채가 련장칸을 흔들었다.

근달이 《처용가》에 깃든 이야기를 마치자 그것을 재미있게 듣고있던 장공인들이 터친 박수갈채였다.

그제야 두서없는 생각에서 깨여난 박원작은 입이 귀밑까지 돌아간 군만을 띠여보고 웃음을 머금었다.

과연 구수한 이야기야말로 일판을 흥성케 하는 비방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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