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3 장

6


점점 어두워지던 하늘에 시꺼먼 먹장구름이 한벌 뒤덮이더니 이어 폭우가 무섭게 쏟아졌다. 이내 강물은 범람하고 바다에서는 집채같은 파도가 룡트림을 해댄다.

가랑잎마냥 집채같은 파도에 휘말려 정처없이 떠밀려가는 돛배에서 박원작은 필사의 힘을 다해 키를 잡고있었다.

련이어 집채같은 파도가 배전을 덮친다. 그때마다 배는 금시 뒤집혀질듯 위태롭게 태질한다.

심술궂은 파도가 또다시 달려들었다. 파도는 돛천을 짓부시고 사나운 기세로 키를 잡은 박원작을 삼킨다.

아이구, 끝장이로구나 했는데 어찌된 조화인지 배는 고요한 바다기슭으로 떠밀려나온것이 아닌가.

허나 그것은 잠시 잠간, 이번에는 세찬 눈보라가 미친듯이 달려든다. 그속을 뚫고 박원작은 간신히 앞으로 나아간다.

얼마나 왔는지…

귀뺨을 얼구는 맵짠 눈보라속을 헤치고나가자 이번에는 아스라한 칼벼랑이 앞을 막는다.

박원작은 젖먹은 힘까지 다해 한치한치 칼벼랑을 톺아오른다. 손은 얼어터지고 피가 흐르건만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그 한생각으로 벼랑을 이악하게 기여오른다.

천신만고하여 마침내 벼랑우에 두손을 올려놓았는데 누군가가 그우에서 소리쳤다.

《내가 구원해주지!》

참말 누군가의 억센 손이 점점 맥이 진해가고있는 박원작의 손목을 꽉 움켜잡는다.

아, 살았구나!

그 손에 이끌린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려는데 갑자기 자기 손목을 놓아버렸다.

아, 아! 제발… 제발…

벼랑틈에 붙인 두발에 간신히 의지한 몸이 점점 뒤로 기울어진다.

《날 살려줘!―》하는 비명이 터질 때 몸은 허공으로 던져졌다.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박원작은 벌떡 자리를 차고 몸을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부드러운 팔이 벌벌 떠는 그의 몸을 감싸안았다.

《이보세요! 진정하시오이다.》

박원작은 공포로 벌벌 떨며 소리쳤다.

《그… 그댄 누군가? 귀신인가, 사… 사람인가?》

《이보세요! 저예요. 저!》

《임자가?!…》

박원작은 와락 해연을 부둥켜안고 몸을 떨었다.

《후유― 꿈이였구나. 아, 무섭기란…》

이윽고 해연은 박원작을 부축하여 자리에 눕혔다.

《흉한 꿈을 꾼건 몸이 허약해졌기때문이예요. 하루이틀 일할것도 아닌데 몸을 돌보셔야겠소이다.》

《숯이 해결됐는데 난 병석에 들었으니… 아!》

며칠전부터 박원작은 오한이 나고 명치부위가 아파나면서 먹은것이 내려가지 않았다.

체기를 만났으니 하루이틀 지나면 낫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의원에게 병을 보였더니 맥을 짚어보고나서 탄식하여 말하였다.

《과로에 과로가 겹쳤은즉 어찌 허손증이 생겨나 몸을 망치지 않으리요.》

박원작은 그날 처음으로 자기가 지금껏 과로속에서 살아왔다는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때부터였을것이다. 나라에 소용되는 병기를 만들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유언을 가슴에 새긴 그날부터 밤낮이 따로없이 박원작은 그 뜻을 지키려 애써왔다. 그길이 어렵고 힘겨웠지만 효도를 지키는 길이였기에 과로에 과로가 잇닿고있음을 느끼거나 돌이켜볼 일각의 여분도 없이 오직 당연한것으로 여기며 일에만 몰두해왔던것이다.

아픔을 참고 일한때문에서인지 박원작은 눈앞에서 별찌까지 일고 온배가 다 아파나 끝내 그제 저녁부터는 아예 몸져눕고말았었다.

어제오후에는 김충지가 홀로 병문안을 와서 서경류수부에서 백수십섬의 강동숯을 실어왔다는 희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때 너무 기뻐 일어서려 했으나 머리가 휭하고 배도 몹시 아파 병마도감에 나가지 못했다.

오늘아침에는 남권부의 안해 마씨가 웅담을 가져와 배아픔을 한결 덜고 머리도 맑아져 해연이 떠주는 잣죽을 퍼그나 받아먹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처 잤는데 그만 흉한 꿈이 달려든것이였다.

《아, 남공도 개경에 가고 없으니… 안타깝구나.》

해연의 따스한 손이 박원작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이보시와요, 근심엔 병이 더해진다고 했으니 제발 마음을 늦추고 몸을 추세워야 천균노를 만들수 있사이다.》

박원작은 자기 얼굴에 무엇이 떨어지는것을 감촉했다. 해연이 떨구는 눈물이였다.

《임자, 우는구만. 내 임자 말을 듣겠으니 눈물을 거두게.》


×


박원작이 침상에 누워있는 이밤, 병마도감은 여느날보다 더 고요했다. 그믐밤이여서 사방이 칠흑같은데 이따금 바람부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다.

천균노의 거푸집곁에서 파수를 서는 메득이는 자꾸만 몰려드는 졸음을 쫓느라 오락가락하였다. 다시는 천균노를 망치지 앉자면 거푸집에 나쁜 놈의 검은 손이 닿지 못하게 해야 한다.

며칠전 박원작과 김충지의 주관하에 련장에서는 천균노의 거푸집을 다시 빚어냈다.

인차 숯도 해결될수 있고 잘못된 천균노를 깨여놓은 놋으로 다시 천균노를 부어낼수 있다는것으로 하여 장공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았었다.

그들이 나무잎 하나라도 들어갈세라 정성다해 빚은 거푸집에 그날부터 주야로 파수가 세워졌다.

이밤의 파수는 메득이와 군만이였다. 그런데 군만은 이미 천근만근으로 눈시울을 내리누르는 졸음에 견디지 못하고 거푸집앞에서 네활개를 펴버렸다.

익살쟁이 군만이에게 장점이랄지 단점이랄지 꼭 짚어말하기 힘든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해만 떨어지면 단잠에 곯아떨어지는것이다. 그때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지경이다. 그러다가 오경(4시를 전후한 때)이면 영낙없이 깨여일어나 바지런을 피우는데 늙은이로 말하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조침조기의 본보기라 할수 있었다.

메득은 초저녁잠에 꼼짝 못하는 군만의 사정을 생각하여 그가 굳잠에 든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까짓것, 하루밤을 꼬박 밝혔대서 큰일날게 없지.

사방이 캄캄한데다 고요하니 메득은 고독감이 더해났다.

이럴줄 알았다면 따라가겠다고 칭얼대던 애녀석을 안고오는건데…

메득이에게는 아들만 둘이였다. 큰 아이는 올해 세살인데 제법 말을 번진다.

그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그려보고있는데 어데선가 알릴가말가한 기척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일가?!…

온 정신을 모아 귀를 도사리는데 또다시 인기척이 났다. 분명 누구인가 숯고간의 문을 여는 소리였다.

숯고간은 련장뜨락 한쪽에 있는데 메득이 선 자리에서 불과 쉰나문보 떨어져있었다.

재밤중에 숯고간을 열수는 없는데?… 이상하다. 혹시 나쁜 놈이 숯을 훔쳐가려는것이 아닐가. 어떻게 구해온 숯인데 훔쳐간단 말인가. 진짜 숯을 훔쳐가는 놈이 있다면 정갱일 분질러놓고말테다.

메득이는 어둠속에서 발소리가 날세라 발볌발볌 걸음을 옮기며 숯고간으로 다가갔다. 숯고간을 가까이했는데 돌연 눈앞에서 화광이 충천하더니 이어 꽝!― 하는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그 순간 세찬 폭풍에 메득은 《앗!―》소리를 지르며 뒤로 날아넘어졌다.

인차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니 삼단같은 불길이 숯고간을 휘감고있었다.

《불, 불이야!―》

땅을 박차고일어난 메득은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사람을 보았다.

불길에 그자의 얼굴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네… 네놈이?! 네놈이였구나! 이놈아!―》

메득은 다짜고짜 낯판에 살기가 가득한 그놈의 멱살을 잡으려 두손을 내밀었다.

그찰나 놈은 옆으로 비켜서며 손에 든 비수를 휘둘렀다.

《헉―》

비수에 면바로 가슴을 찔린 메득은 땅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놈은 메득의 가슴에서 비수를 뽑아 다시 그의 숨통을 정통으로 찔렀다.

메득은 마지막힘을 모아 《저놈… 잡아라.―》하고는 그대로 절명하고말았다.

요란한 폭음소리에 깨여난 군만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는 세찬 불길이 숯고간을 완전히 삼켜버린 뒤였다.

그 불길에 땅바닥에 쓰러진 메득이가 눈에 띄였다.

군만은 정신없이 달려가 메득이를 부둥켜안았다.

《야! 메득아! 이 어찌된 일이냐? 누가 널 찔렀어?》

허나 메득은 눈을 뜨고있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메득아, 야! 넌 죽어선 안돼. 메득아!―》

군만이의 처절한 곡성이 련장뜨락에 메아리쳤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는 숯고간이 깡그리 타서 주저앉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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