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3 장

5


놋쇠를 받아가려고 개경에 당도한 남권부는 이튿날 리자연이 부른다는 기별을 받고 서둘러 그의 집을 찾아갔다. 수창궁 앞동네에 들어앉은 그의 집 대문앞에 이른 남권부는 마치 궁성을 찾아온듯 한 감이 들었다.

서경에 내려간 후로 리자연의 집에 와보기는 처음이다.

그런데 그사이에 이렇게 궁궐같이 황홀한 집을 꾸렸단 말인가! 보통 백성집같으면 수십채나 들어앉을만한 넓은 부지에 기와를 얹은 길길이 높은 담장을 빙 둘렀는데 본채와 행랑채를 내놓고 동채, 서채 하는 격으로 새로 지은 별채들도 다 으리으리했다.

본채앞의 멋스러운 정각을 떠인 새로 판 련못에는 물고기들이 노닐고 그 둘레에서 기이한 나무며 기묘한 바위들이 눈뿌리를 뺀다.

이거야 대궐이지 어디 일개 신하가 사는 집이란 말인가. 하긴 병마도감에서 한갖 소감벼슬따위나 해먹는 나만 보더라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쓰고 사는데 신라때부터 귀족살이를 해온다는 리자연이고보면 그럴만도 한 일이다. 벼슬아치치고 떵떵대며 못사는게 부실하지.

이렇게 생각하며 남권부는 하인의 길안내를 받아 후원에 있는 어떤 집으로 이끌려갔다. 하인은 주인어른이 오늘 찾아오는 손님을 이 방에 들이라고 했다면서 방문을 열어주었다. 하인이 열어준 방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는 빈방인데 훈훈했다. 손님맞이로 쓰는 방인것 같았다.

방가운데는 숯불이 담긴 청동화로가 놓여있고 아래목에는 화려한 보료를 깔았으며 벽에는 화초를 그린 병풍이 둘러치여있었다.

아직 정오가 못되였으니 중추원에 출근한 리자연이 돌아올 때가 아니다.

방안을 둘러보고난 남권부는 폭신한 보료우에서 한잠자고싶어 그우에 벌렁 나가누웠다.

눈을 감았으나 잠은커녕 엄기가 내배인 리자연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불안했다.

리자연이 왜 불렀을가. 기껏 동생 리자봉이나 내세워 이래라 저래라 훈시나 하던 그가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제 집에까지 불러들여 만나자고 할가?

남권부는 눈을 크게 뜨고 오늘 일이 길할지 흥할지 점을 쳐보았다.

이렇다할 조짐이 나타나지 않아 제풀에 짜증을 내는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거 허리띠를 끄르고앉아 주인을 기다리라고 주안상을 챙그려오는가.

팔베개를 하고 모로 누운채 눈길을 돌리던 남권부는 덴겁해서 후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천만뜻밖에도 자삼우에 시누런 금어를 찬 리자연이 들어서는것이였다.

남권부는 금시 비굴해져서 리자연의 발치앞에 꼬꾸라지듯 무릎을 꿇었다.

《령공! 그간 옥체만강하셨소이까? 오매불망 령공을 그리며 이렇게 뵈올 날을 기다렸소이다.》

리자연은 남권부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금방석에 다가가 털썩 앉았다.

《일어나앉게.》

쓴오이대하듯 반기는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리자연이였지만 남권부는 굽신대며 아첨을 떨었다.

《황송하오이다.》

남권부는 기신기신 허리를 폈으나 무릎을 꿇고앉았다.

《학우사이에 웬 내우인가? 편안히 앉게.》

좀 누그러진 목소리에 남권부는 엉치를 깔고앉았으나 여전히 쩔쩔맸다.

《자네 서경물이 맞는다며?》

생각밖의 물음에 남권부는 어리뻥뻥해졌다.

《예―에?!…》

《자네 얼굴이 보동보동 살이 오른 규방계집처럼 뿌유스름하고 개기름이 잘잘 도는구먼.》

리자연의 조롱소리에 남권부는 은근히 부아가 나서 얼굴을 쳐들고 그를 마주보았다.

리자연을 마주보는 남권부의 눈이 금시 올롱해졌다. 방금전까지는 너무 어려워 방바닥만 내려다보다나니 몰랐는데 이제 보니 리자연의 얼굴이 어디 40대중년의 상판같으냐 하는 불만이 솟았다. 리자연 자기의 얼굴이 바로 제가 한 롱말대로 보동보동 살이 오른 규방계집의 얼굴과 흡사했던것이다.

젊었을 때에는 흰얼굴이 여위여서 칼칼해보인 그였다. 그때 그가 말하기를 강파른 몸매에 옥같이 흰 살결은 명문가인 인주 리씨네의 래력이라고 하였다.

8년전에만 하여도 칼칼한 얼굴이였는데 지금은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주름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다. 그래서인지 가뜩이나 잘 생긴 얼굴이 더욱 돋보여 미남중의 미남이라 할만 했다.

과연 저 량반팔자는 어떻게 돼먹었기에 날로 부유해지고 귀해지고 용모마저 허여멀쑥해지는걸가.

남권부를 조롱하던 리자연이 갑자기 쌀쌀해졌다.

《자네 귀밝은 사람은 소리없는 소리를 듣고 눈밝은 사람은 형체없는 형체를 본다는 말 아나?》

가시가 돋힌듯한 물음에 남권부는 더럭 겁이 났다.

그러니 문초를 하자고 불렀구나.

《자네가 천금을 뿌리면서 놋쇠를 구해와서 천균노를 만들게 했다면서?》

귀뺨을 치는듯한 맵짠 소리에 남권부는 금시 자라목이 되였다.

하면서도 의문이 가득했다.

어떻게 개경땅에 있으면서 서경일에 그다지도 환할가.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빨리 서경소식을 알수 없겠는데… 혹시 이 사람이 그동안 도술이란걸 닦아서 소리없는 소리를 듣고 형체없는 형체를 본다는 그런 기인이 된것이나 아닐가. 아니, 그럴수 없지. 이건 분명 쥐상판같은 심국종 그놈이 고해바쳤을것이다.

남권부는 혀가 문드러진 놈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을수 없어 기여드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 사실이오이다.》

《허― 충신이 났군, 충신이 났어. 이제 곧 큰상이 내릴거네.》

리자연의 빈정질에 남권부는 그가 무엇때문에 불렀는지 짐작이 갔다.

《옛 성현들이 이런 말을 남겼지. 남의 마차에 탄 사람은 마차를 태워준 주인과 같은 걱정을 하게 되고 남이 준 옷을 받아입은 사람은 옷을 준 사람과 같은 걱정을 한다는 말. 그래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나?》

리자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잡아먹을듯 날칠줄 알았는데 고담풀이를 하며 제 속심을 암시하려드니 남권부는 안도의 숨이 나갔다.

《령공! 제가 어찌 령공에게서 받은 은덕을 잊겠소이까. 령공이 아니였던들 몰락해버린 선비집자식인 제가 어떻게 국자감을 나오고 과거급제까지 하며 벼슬길에 오를수 있었겠소이까. 계집이 자기를 좋아하는 사내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몸치장을 한다면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어른을 위하여 한몸을 바친다고 하였소이다.》

리자연의 입가에 가는 웃음이 비꼈다.

《알긴 아누만. 그런데도 나와 수화상극인 최충의 패당과 동침할수 있는가?》

남권부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령공! 전 몸은 비록 다른 무리속에 끼여있어도 그네들과 뜻을 함께 한적은 한번도 없소이다. 이건 하늘이 다 아는것이오이다. 장부일언이 천년불개라고 전 령공을 따르는 한마음 천년이 지난다 해도 고치지 않겠소이다.》

리자연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는 노복같은 남권부따위에게 자기본색을 지내 드러낸것 같아 변명투로 말했다.

《자네 말이 진심이라면… 이보게 내가 왜 최충을 미워하는지 아는가? 그건 노비와 전장을 사들인 내 부친을 무슨 큰 도적인듯 과장해서 임금에게 고소한 그때문만은 아니야. 그런 일로 평생 앙숙하는건 소인배들이나 할짓이야.

난 그와 뜻이 맞지 않아. 뜻이 다르기때문에 난 그를 좋아하지 않는걸세.》

남권부는 화제거리가 최충에게로 번져가자 숨이 크게 나갔다.

《자네도 생각을 좀 깊이해보게.

그래 최충이나 박원작이 마음먹었대서 천균노를 만들어낼상싶은가? 형체도 모르는걸 만들겠다고 임금의 어지까지 받아놓았으니 이게 어디 애들놀음인가 말일세. 그걸 만들수 없다는건 뻔한 리치인데 어지가 내렸으니 임금의 위엄이 뭐가 되겠는가.》

리자연은 정녕 가슴이 아픈지 방바닥을 두드렸다.

남권부는 제가 마치 어전회의에 참가한듯한 기분이여서 가슴이 활랑거렸다.

리자연의 한마디한마디 말은 그의 귀에 무겁게 들려왔다.

《정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하나 하려고 하기 전에 그일로 하여 생길수 있는 후환을 심중히 타산해야 하는거야. 천균노를 만들라는 어지가 내려가고 신하들이 그것을 실행하느라 올리뛰고 내리뛰고있으니 이젠 이웃나라들까지 다 그 일을 알거네.

우리가 천균노를 만든다는걸 이웃나라들이 알면 어떻게 나올것 같은가? 우리가 천균노같은 큰 병기로 저희들을 치련다고 걸고들건 뻔하단 말이야.

남들에게 없는 화약과 뢰등석포 같은 병기를 가졌으면 만족해야지 형체도 모르는 천균노를 빚겠다고 억지공사를 벌려놓았으니 이거야 화를 청해오는게 아니고 뭔가. 자업자박(자기가 저지른 일의 후과를 자기가 받는다는 뜻)이지.》

남권부는 그냥 듣고있기가 무안하여 《지당하신 말씀이오이다.》하고 입을 열었다.

리자연은 제 말을 막지 말라는듯 손을 내저었다.

《옛 성현들이 이르기를 국력이 미치지 못하면 도전하지 말라고 했네. 이 말은 약소국이 나라를 보존하려면 강대국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뜻이야. 숙인 고개는 버이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난 우리 고려가 큰 나라들의 눈치나 보며 살아가자는건 아니야. 우린 마땅히 고구려를 이은 나라답게 존엄을 지켜 당당하게 처신해야 돼.》

리자연의 능청스러운 언변에 남권부는 감동된듯 머리를 조아렸다.

《허― 이번에 부은 천균노가 잘못되였다지? 거보라구, 하늘도 그걸 바라지 않아.》

리자연은 애초에 천균노를 만들수 없다고 한 자기의 생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것을 다시금 굳히였다.

그는 넌지시 남권부를 건너다보며 저놈의 몸값이 도대체 얼마나 나갈것인가 하고 되박질을 해보았다. 남권부같이 재주가 박한자를 부하로 두면 크게 덕볼것은 없다지만 세력을 늘이는데서는 몇사람 맞잡이가 될상싶었다. 남권부의 성품이 본래 남이 잘되는것을 보면 배를 아파하는 위인인지라 최충이같은 정적을 물고늘어지는 일에서 사납게 날뛸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리자연은 제법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얼마전에 북계병마도감사로 되도록 힘써달라고 한 자네의 글월을 받아보았네. 나라를 근심하여 나라에 도움이 되고저 하는 큰 일감을 맡겨달라는 자네의 마음이 갸륵해.

좋아, 자넨 되지도 않을 천균노일엔 너무 나서지 말고 박원작이 밑에서 한두해만 더 성근하고 꾸준하게 병기를 만드는 재주를 닦게. 그러면 내 자네를 중히 써주겠네.》

남권부는 감지덕지하여 코가 구들에 닿아라 절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의문이 들었다.

리자봉은 화약의 비방을 뽑아오는 즉시로 군기감의 주인자리를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도 그의 형은 한두해씩이나 더 박원작의 밑에서 일하라는건 뭔가.

남권부는 리자봉의 속심을 알수 없었다.

사실 외국장사치들과 거래하며 어벌이 커진 리자봉은 큼직하게 묵돈을 벌어서 형인 리자연의 뒤받침을 하기 위해 그도모르게 화약의 비방까지 다른 나라 장사군들에게 팔기로 마음먹고있었다.

하여 리자봉은 남권부만 믿을수 없어 군기감에 심복으로 박아넣었던 심국종을 서경에 내려보냈던것이다.

그런 내막을 남권부나 리자연이 알리 없었다.

만일 리자연이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무리 한피줄을 나눈 친동생이라도 용서하지 않았을것이다.

리자연은 자기 뒤를 대주고있는 리자봉이 화약이며 《신기한 병기》를 밀매하여 돈을 벌어들이는것은 눈감아주고있지만 화약의 비방만은 타국에 새여나가지 못하게 엄중경계하고있었다.

남권부는 리자연이 자기를 불러들인 까닭을 깨닫자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이 어떻게 하나 되지도 않을 천균노를 다시 부으려고 하는 박원작을 눌러놓겠소이다.》

《좋아.》

리자연은 눈을 치뜨고 능청스럽게 남권부를 건너다보았다.

《이 사람, 혹시 그쪽에서 화약이라든가 〈신기한 병기〉를 빼내여 장사하는건 없나?》

그 말에 남권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그것까지도 알고있단 말인가?! 그게 참말이라면 이 목숨은 저 리자연의 줌안에 송두리채 들어있다는게로구나.

리자연은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는 남권부를 보고 그도 리자봉이처럼 그런것을 일삼고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하긴 돈맛을 들인 놈이 돈냥깨나 나가는 그런 물건을 보고 어찌 곱게 앉아있을텐가. 이젠 됐다.

박원작이 정 시끄럽게 굴면 남권부가 한짓을 그에게 넘겨씌워 엄한 벌을 내릴테다. 그러면 제까짓게 꼼짝 못하고 망했지 별수가 있을라구.

리자연은 남권부를 안심시키느라고 부드럽게 일렀다.

《됐네, 내 더 따지지 않겠으니 앞으로 채심하게.》

기분이 좋아진 리자연은 밖에 대고 소리쳤다.

《게 누구 없느냐?―》

곧 방문이 열리고 곱게 생긴 젊은 하녀가 들어와 절을 차렸다.

《소녀 대령했사옵니다.》

리자연은 남권부를 가리키며 분부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주안상을 잘 챙그려오너라.》

《예, 알겠사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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