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회)


제 3 장

1


병마도감의 양지에 자리잡은 별관의 안방을 쌍초대가 환히 밝히고있었다.

세사람이 앉은 방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있었다.

판북계병마사 최충은 북계병마도감사 박원작과 그의 곁에서 고개를 떨구고있는 김충지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지그시 두눈을 내리감았다.

마음속에서는 두 제자에 대한 불만이 꿈틀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최충은 오늘 낮에 대동강을 건너왔다. 서경성에 입성하여 선참으로 찾은데가 바로 여기 병마도감이였다. 병마도감에 잠간들려 두 제자에게 집소식과 군기감에 올라와있는 번기네들이 잘 있으며 인차 조정에서 놋쇠를 해결해줄것이라는 반가운 기별을 알려주고 서경류수를 만나러 가려 했던것이다.

그런데 그만 상가집처럼 돼버린 병마도감에 발목을 잡힐줄이야.

며칠전에 부어냈다는 천균노는 겉보기엔 얼마나 웅장하고 위풍스러운가. 허나 화약통이 잘못되여 쓸수 없게 되였다니 이거야말로 큰 손실이 아닐수 없다.

그렇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만들어낸 당사자들의 정신에 박약이 든것이다. 나쁜 놈들의 작간으로 랑패를 당했다는것을 깨달았으면 더욱 의기가 충천해서 분발해야 할텐데 그쯤한 시련앞에 맥을 잃고 다시 일어나기를 두려워하니 그게 머리속에 병이 든것이 아니고 뭔가.

글쎄 박원작이 풀이 잔뜩 죽어가지고 아직은 천균노를 만들기 어려울것 같다고 제 입으로 말하는 정도이니 이런 배심으로야 무슨 일인들 바로할수 있겠는가.

김충지도 다를바가 없다. 정신이 흐리터분해진 박원작을 꾸짖는 스승에게 천균노를 다시 부어낸다고 해도 그게 제구실이나 하겠는지 하는 의향을 감히 내비친 그다.

지금이 어느때기에 그런 얼빠진 소리를 하는건가, 그래 사방의 적들이 이 땅을 호시탐탐 노리고있다는걸 잊은게 아닌가.

지난해 12월, 아두간을 위시하여 쉰여명의 동녀진사람들이 개경에 와서 조공으로 말 수십필을 바치면서 알리기를 거란이 압록강일대에 군사들 늘이고있단다, 같은 달 거란에서 발해유민 20여호가 고려로 찾아왔는데 그들도 같은 소리를 하였다.

그런데도 병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니 한심한 일이 아닐수 없다. 최충은 한시가 새로운 이때 뜻밖에 발목을 잡는 두 제자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맞춤한 방책이 떠오르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사실 최충은 요즘의 하루하루를 여느때의 며칠맞잡이로 생각하고 시간을 쪼개가며 직분을 다하고있었다.

그전같으면 오백리 서경길에 닷새를 바쳤겠는데 이번에는 사흘만에 대동강을 건넜다.

서경에서의 일정도 빠듯하게 정했는데 오후에는 황보영서경류수를 만나 장성공사를 의논할 예정이다.

그는 오랜 고심끝에 장성공사를 빨리 다그칠수 있는 묘안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서경과 북계의 백성들을 농한기에 총동원하여 성을 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나 해서는 몇해안으로 장성공사를 끝낼수 없었다.

장성공사를 몇해안으로 끝내자면 농번기철에도 성을 쌓아야 했다.

그래서 찾아낸 묘안이 바로 농한기철에는 백성들을 동원하고 년중 북계군과 서경군까지도 장성공사에 붙이는것이였다.

서경에서 이 일을 내밀수 있는 적임자로는 서경류수이상 없다. 강동, 강서, 중화, 순화현 등 4개 현이 소속되여있는 서경류수부를 관할하는 그만이 서경에 사는 백성들과 서경군을 장성공사에로 동원하는 령을 내릴수 있다.

오늘 오후 황보영을 만나보고는 곧 안북대도호부 녕주(안주)로 떠나야 한다.

안북대도호부사에게는 장성공사의 더 많은 몫이 지워져있다. 북계의 광활한 땅에 펼쳐져있는 25개의 방어군과 12개의 진, 6개의 현이 그의 관할하에 있으니 그에게도 꼭같은 령을 내려야 한다.

하루라도 더 앞당겨 군사들과 백성들을 성쌓기에 붙여야 할것이다.

방대하고 아름찬 장성공사를 다그치자면 그 공사를 주관해야 하는 병마사가 현지에 내려가 일군들을 독려하고 걸린 일감들을 그시그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고양이손이라도 빌려쓰고싶은 드바쁜 세월에 그렇게도 믿었던 두 제자가 신심을 잃고 중요한 국사를 흥정하려 하니 어떻게 마음을 놓고 돌아설수 있으랴.

봄비가 내릴 때 개울바닥을 파내지 않으면 미구에 개울물이 범람하고 서리가 내릴 때 땔감을 장만하지 않으면 곧 눈이 내린다고 하였다.

바로 그렇다. 한번의 실패에서 겁을 먹고 뒤걸음을 치려는 제자들을 지금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영영 일어나지 못할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제자들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다시 분발하게 할수 있을가?

이윽고 최충은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음… 자네들은 거푸집에서 분명 잘못한것이 없었다는걸 확신하나?》

고개를 떨구고있던 두 제자가 거의 동시에 머리를 들었다. 대답도 그렇게 흘러나왔다.

《예, 확신하오이다.》

거푸집을 만들었을 때 박원작이도 그러했지만 김충지는 몇번이나 이상이 없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 손으로 쌓은 거푸집이기에 보다 더 세밀하게 살펴보고 잘못된것이 없다는것을 확인하였다.

조금도 이상이 없다고 장담한 거푸집에서 빚어낸 천균노가 잘못되였다는것은 어느 놈이 작간질을 부렸다는 해답이 나온다.

《음… 놋쇠물을 부어넣기 전엔 이상이 없었다니 명백해. 천균노에서도 제일 중요한 화약통안에 목침 하나가 들어갈만큼 움푹 패였다니 어느 놈이 거푸집을 빚을 때 바로 거기다 목침을 슬쩍 끼워넣었다는 자네들의 생각이 옳아.》

하더니 최충은 김충지를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내가 자네를 여기에 보낸것이 잘못인가?》

그제서야 김충지는 자책감에 모대기며 고개를 떨구었다.

《사부님! 소생이 잘못했소이다. 다들 일잘한다는 기분에 들떠서 각성을 잃다보니 어떤 나쁜 놈이 거푸집을 해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소이다. 벌을 내려주소이다.》

박원작이도 고개를 떨구었다.

최충의 낮으나 엄한 목소리에 두 제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등하불명(등잔불밑이 어둡다)이라고 천균노가 그렇게 된건 분명 여기 병마도감에 나쁜 놈들이 숨어있기때문일세. 그래 우리가 강해지는걸 달가와하지 않는 오랑캐들이 우리가 마음대로 앞선병기를 만들도록 강건너 불보듯 할것 같은가. 아닐세, 천균노는 병기치고도 아주 요란한 병기지.

오랑캐들에게도 눈과 귀가 없지 않으니 우리가 천균노를 만든다는걸 알수도 있을거네. 천균노같이 위력한 병기들이 나오면 나라들간의 힘내기에서 그 형세가 어떻게 변할지는 뻔한 일이니 그것들이 가만있을상싶은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던 두 제자는 머리를 싸쥐였다.

최충은 잘못을 깨닫는 제자들을 정겨운 눈매로 바라보다가 웃음을 지었다.

《이웃나라의 격언 하날 들려줄가. 〈땅이 넓으면 쌀이 많고 나라가 크면 군사가 많으니 강한 법이다. 약한자는 강한자를 대적할수 없고 작은자는 큰자를 대항할수 없다.〉

그래, 이 말뜻이 무엇이지? 그건 바로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 이 말일세.》

별안간 최충의 주먹이 방바닥을 내리쳤다.

《천만에! 땅이 넓지 못하고 군사가 많지 못하다고 해서 약소국이 되는건 결코 아닐세. 사람들이 나라를 지켜내려는 한뜻으로 뭉쳐있고 위력한 병기를 가지고있으면 비록 땅이 작고 군사수가 적어도 강대국으로 될수 있는거네. 그런 나라는 땅이 넓고 군사가 많다고 우쭐대는 큰 나라를 얼마든지 대적할수 있고 타승할수도 있네. 선조의 나라 고구려가 바로 그런 나라였다고 말할수 있지.》

구들을 내리친 최충의 주먹소리에 깜짝 놀랐던 두 제자의 얼굴에 스승에 대한 존경과 경탄의 빛이 서서히 어려들었다.

《난 자네들이 누구보다도 우리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고싶어한다는걸 잘 아네. 하지만 전란이 멎었다고 해서 잠시나마 각성을 늦추고 살면 적에게 발붙일 틈을 주게 되고 나중엔 자기도모르게 돌이킬수 없는 손실을 당하게 된다는걸 항상 명심해야 돼. …

내 말뜻을 알겠나?》

두 제자는 정색해서 대답했다.

《사부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소이다.》

최충의 목소리가 다시 방안을 울렸다.

《이보게들, 먼길을 가는데 무슨 일인들 없겠나. 구데기 무서워 장 못담그지 않는다고 하였네. 자네들은 신심을 잃지 말고 다시 일어나 일판을 더 크게 벌려야 해. 병마도감에 기여들어서 음해를 꾀하는 나쁜 놈들도 잡아치우고.》

박원작은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스승의 신칙을 어찌 꾸중이라고만 할수 있으랴. 진심으로 제자들을 아끼고 나라를 위해 애쓰는 사람만이 이렇게 고심하고 가슴아파할수 있는 법이다. 내 스승의 가르치심을 뼈에 새기고 기어이 세운 뜻을 이루리라!

의젓이 머리를 들고 속다짐하는 제자들의 격동된 모습을 보느라니 최충은 마음이 개운해졌다.

《난 자네들을 크게 믿네. 천균노는 반드시 자네들의 손끝에서 태여날거네.》

《사부님!…》

최충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부님, 다문 하루만이라도 여기서 쉬여가시오이다.》

최충은 앞을 막는 두 제자의 손을 뜨겁게 잡고 절절하게 말했다.

《난 가야 하네. 자네들 마음은 내가 알고 내 마음은 자네들이 아니 우린 늘 함께 있는거나 마찬가지일세.》

두 제자는 스승을 만류할수 없다는것을 알았다.

눈물을 머금은 그들은 훌륭한 스승의 모습에 자신들을 비추어보며 서경류수부를 찾아가는 그를 오래도록 바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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