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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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북계병마사 최충이 서경을 향해 개경성의 오정문을 나서고있을 때 박원작은 서경병마도감의 련장칸뜨락에 우뚝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있었다.

어제같아서는 오늘도 온종일 가는비가 구질구질 내릴듯 했는데 거짓말같이 하늘이 맑게 개였다.

결단코 철덕에 불을 지피길 얼마나 잘했는가.

어제 새벽부터 가는비가 지꿎게 내리였다. 하루가 아니라 단 한시라도 천균노를 부어내는 일을 뒤로 미루고싶지 않은 박원작은 그동안 불을 때서 말린 첫번째 철덕에 불을 지피게 하였다.

며칠전 남권부는 제 말대로 놋쇠 3만근을 어김없이 실어왔다. 장부일언 중천금이라더니 남권부가 바로 그런 사내렷다. 남권부가 설도 제대로 쇠지 못하고 구해온 놋쇠로 하루빨리 천균노를 부어내는것이 이제 내가 나서 해야 할 사람의 도리이다.

만약 가는비가 아니라 대줄기같은 폭우가 쏟아진다 해도 채붕을 치고 놋쇠를 녹이리라!

이런 배심으로 그는 두개의 철덕에 각각 50섬의 숯과 만 5천근의 놋쇠를 넣었다.

오늘 새벽에 두번째 철덕에도 불을 달았더니 말썽을 부리던 하늘이 급기야 이렇게 달라진것이였다.

오늘은 온 병마도감이 놋쇠를 녹이는 일에 달라붙는다. 장공인들은 밥까지 날라다먹으며 천균노를 부어낼 때까지 철덕곁을 떠나지 않을 기세였다.

하늘까지 맑게 트인것을 보면 일이 뜻대로 되여갈 조짐이다.

장쾌하다할만치 판을 크게 펼친 일터에서 장공인들이 부르는 타령소리가 박원작의 가슴을 더욱 울렁이게 하였다.


풀무야 풀무야 불어라 딱딱 풀무야

놋쇠를 녹여서 우리 병기 부어내세

놋쇠화포 지동치면 천하가 태평하리

태평성대 이루고저 불어라 딱딱 풀무야


장공인들이 제나름대로 지어부르는 풀무타령이 고조되는데 근달이 박원작에게 다가왔다.

《병마도감사님, 놋쇠가 끓기 시작했소이다.》

《아, 그렇소이까!》

박원작은 드디여 때가 왔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채같은 두개의 철덕을 에워싸고 사람들이 병풍처럼 촘촘히 둘러섰다. 장공인들만 아니고 그들의 식솔들까지 모여들었으니 병마도감이 생겨 처음보는 사람사태가 난것이다.

철덕마다에 여러개의 풀무조가 들어붙어 바람을 일구느라 비지땀을 흘리고있다. 길이, 너비가 몇자되는 풀무마다에 힘꼴좋은 장정들이 댓명씩 달라붙어 참나무손잡이를 당겼다밀었다 하는데 구경군들까지 그들과 합세하여 풀무타령을 불러댄다.

철덕앞에는 수십명의 장공인들이 군사마냥 렬을 지어섰다. 그들은 하나같이 놋쇠물을 받아낼 긴자루가 달린 쇠바가지를 들었다.

그들앞에 서있는 거푸집은 볼수록 웅장하다. 마치 또하나의 철덕같아 보인다. 천균노란게 어방없이 큰 병기다보니 그 거푸집의 높이가 여러길이나 된다.

그 꼭대기로 사람이 오르내릴수 있도록 두터운 널로 계단을 만들어세웠다.

오늘일은 개경의 장야서에서 단번에 만여근의 놋쇠를 녹여보았다는 김충지가 주관하게 하였다.

그래서 김충지는 며칠째 철덕곁에서 침식을 하고있다.

박원작은 철덕우에 버티고서서 그안을 주의깊게 살피고있는 김충지를 미덥게 바라보았다.

스승이 보내준 사람이니 어련하겠는가.

김충지의 손이 천천히 우로 쳐들렸다.

그는 박원작쪽으로 돌아서며 소리쳤다.

《그럼 시작하겠소이다!》

박원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충지는 자기를 쳐다보는 장공인들에게 말했다.

《소금을 져올리소.》

그의 분부가 떨어지자마자 메득이와 군만이 소금자루를 하나씩 둘러메고 철덕우로 올라갔다.

소금을 철덕에 넣겠다는건 놋쇠가 잘 끓고있다는것을 의미한다.

놋쇠가 부글부글 끓을 때 소금을 뿌리면 철덕안의 나쁜 바람을 없애고 끓는 놋쇠물과 바깥을 차단시켜 놋쇠안의 구리와 석이 고르롭게 섞인다.

그래야 놋쇠(청동)의 질이 좋아지는것이다.

이 비방은 수천년전 박달임금이 대동강가에 첫 도읍을 정하였을 때 벌써 선조들이 찾아내여 자자손손 물려준것이였다.

박원작은 침착하면서도 자신만만하게 철덕안에 소금을 뿌려넣는 김충지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고려가 건국되여 오늘처럼 단번에 수만근의 놋쇠를 녹여 큰 물건을 만들어보기도 몇번 안될것이다. 고려가 삼국시기의 조상들과 달리 천하가 놀랍도록 단번에 몇십만, 지어는 몇백만근의 놋쇠로 녹여붓는 큰 물건을 만들지 않은것은 그때보다 재주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때보다 놋쇠를 써야 할데가 많아서이다.

지금 놋쇠를 쓰는데가 얼마나 많은가. 밥을 담아먹는데만 해도 도자기용구를 쓰고있다지만 가가호호 사람들마다 숟가락, 저가락은 물론 밥그릇, 국사발, 양푼에 이르기까지 놋쇠로 만든것을 즐겨쓴다.

군사들은 더하다. 광종대왕때 거란군의 침입에 대처하여 30만의 광군을 무었는데 그이후부터는 적어도 항시 10만여명의 군사들이 나라에서 번을 든다.

그들이 다 놋쇠로 만든 갖가지 기물을 쓴다. 놋쇠로 만든 그릇가지들은 가벼우면서 깨여지지 않으니 군품으로는 제격이다.

그것만 보아도 놋쇠는 날로 귀해지고 부족을 느끼게 된다.

이제 3만근의 놋쇠가 드는 천균노까지 만들면 놋쇠사정은 더더욱 어려워질것이다.

허나 온 나라사람들이 발편잠을 자게 하자니 불편을 덜어줄 놋기물은 적게 만들더라도 놋쇠화포만은 꽝꽝 부어내야 한다.

철덕안에 소금을 뿌려넣고 그안을 주시하던 김충지가 또다시 손을 쳐들었다.

그것을 본 근달이 박원작에게 귀띔했다.

《병마도감사님, 놋쇠물을 받을 때가 된 모양이오이다.》

아니나다를가 철덕우에 우뚝 선 김충지가 웨쳤다.

《병마도감사님! 놋쇠물을 받아내겠소이다.》

근달이 달려가 쇠장대를 찾아들더니 철덕아래에 붙은 구멍마개의 고리에 그것을 밀어넣었다.

김충지가 근달을 굽어보며 소리쳤다.

《이젠 터치시오이다!》

《알겠네. 자, 다들 정신을 차리게!》

근달은 철덕의 구멍마개고리에 건 쇠장대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 순간 사람들이 환성을 올렸다. 화광이 충천하며 눈부신 놋쇠물이 철덕의 구멍에서 쏟아져나온것이였다.

메득이 날파람을 일으키며 놋쇠물에 선참 쇠바가지를 들이댔다. 그의 뒤로 장공인들이 련이어 쇠바가지를 들이댔다.


받아내세 받아내세 펄펄 끓는 놋쇠물

고려화포 놋쇠화포 쇠바가질 잇대란다


타령속에 놋쇠물을 담은 쇠바가지를 꼬나든 장공인들이 꼬리를 물고 거푸집꼭대기로 올라갔다.…

해는 어느새 중천에 걸리고 병마도감의 정문으로는 음식임을 인 아낙네들이 줄을 지어 들어섰다. 그들속에는 해연이도 있었다.

손발을 착착 맞춰 놋쇠물을 받아내여 연거퍼 거푸집에 부어넣는 장공인들의 일솜씨는 보는 사람들의 흥을 부쩍 돋구어주었다.

박원작은 그것이 볼만 하여 시종 웃음을 머금었다.

김충지가 달려와 박원작에게 아뢰였다.

《이쪽켠 철덕에서도 놋쇠가 끓기 시작했소이다.》

박원작은 못내 만족하여 큰소리로 대꾸했다.

《오늘일은 전적으로 그대한테 맡겼으니 마감까지 잘해보게!》

《알겠소이다!》

박원작은 씩씩하게 철덕으로 달려가는 김충지를 바라보며 저고리를 벗어들었다.

이 뜻깊은 날 장공인들과 어울려 일하면 더 즐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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