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2 장

5


박원작은 아침일찍 병마도감에 나왔다. 돌아볼수록 마음이 흐뭇해짐을 금할수 없다.

대소한의 맵짠 추위속에서도 병마도감의 어느 장이나 막론하고 군사들에게 더 좋은 병기를 만들어보내려는 열의가 넘쳐나보였다. 뭐니뭐니해도 련장의 철덕에서 놋쇠를 녹이는 연기가 세차게 뿜어나오는것이 마음에 들었다.

염초장에서도 불이 붙었다. 워낙 승벽이 센 돌석이 남들에게 뒤질세라 기세를 부리니 그 열성이면 설전으로 몇천근의 화약을 무져놓을것 같다.

노통장에서도 저녁늦도록 수질구궁노와 불화살을 만드는데 그 기세가 이만저만 아니다.

이게 다 남권부 그 사람이 애쓴 보람이기도 하다. 달포가량 철덕이 멎긴 하였다지만 그때 못한 봉창을 하려고 남권부가 이리저리 뛰여다녔다니 과연 사람을 헛보지 않았다.

시작을 잘 뗐다고 해서 그끝을 잘 맺는다고는 할수 없다. 사람이 일하느라면 일시 타산을 잘못해서 랑패를 볼수도 있다. 독불장군이라고 남권부 그 사람이 본의아니게 장공인들을 무시하다나니 그들의 미움을 받아 한동안 병마도감이 멎게 됐을것이다. 허나 자기 잘못을 깨닫고 여러 행수들에게 의거해서 일을 펼쳐나가니 이렇게 병마도감이 움직여지는것이다.

어떻게 하나 명년가을까지는 변방의 군진들에 수질구궁노를 넉넉히 만들어 보내주어야 한다.

허나 흐뭇한 마음인데도 납덩이마냥 무겁게 매여달리는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나깨나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 천균노였다.

글을 알아야 문장을 지을수 있고 형체를 보아야 그림을 그릴수 있다고 아직은 천균노의 모습을 그려볼수 없으니 이게 근심이 아니고 뭔가.

한가지 명백한것은 고구려의 천균노에 염초를 썼다면 지금 만들자고 하는 고려의 천균노에는 화약을 써야 한다는것이다.

고심하면 고심하는 일거리가 꿈속에 나타나서 생시에 걸렸던 매듭을 풀어준다는데 어이하여 이 박원작이에게만은 그런 복이 아직도 찾아들지 않는것인지…

이런 생각을 하며 여러 장들을 다 돌아보고난 박원작은 방금전에 돌아본 련장으로 다시금 발길을 돌리였다.

비오나 눈이 오나 장공인들이 불편없이 일하도록 기와지붕을 넓게 씌운 련장칸은 사면으로 벽체가 터져있고 그 한가운데 열댓자높이의 철덕이 자리잡고있었다.

철덕우에는 2층루각인양 지붕우에 또 덧지붕을 세워 연기가 잘 빠져나갈수 있게 하였다.

박원작이 스적스적 걸어 련장에 이르니 장공인들이 모여앉아 웃고떠들고있었다. 철덕에 넣은 놋쇠가 녹기 전이니 잠시 쉬면서 한담을 하는 모양이였다.

멍석을 펴고 장공인들이 빙 둘러앉은 한켠에서 련장칸의 웃음보따리로 소문난 키꺽다리 군만이가 목청을 돋구어가며 이야기판을 펼치고있었다. 동네마실방의 오랜 이야기군처럼 우스개소리를 곧잘하는 군만이 어떻게 구수한 이야기거리를 펼쳤는지 장공인들모두가 턱을 쳐들고 그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에― 다음은 군서방질에 맛들인 계집의 못된 그 버릇을 떼주는 비방을 얘기하겠소이다.

그 비방을 털어놓고 말할것 같으면》하고 으쓱해서 자기를 지켜보는 장공인들을 빙 둘러보던 군만이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군만의 딱친구인 메득이 일어선 군만의 팔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여, 이거 귀맛이 나서 어디 참겠어? 어서 말하란 말이야.》

군만은 정색해서 메득의 손에서 팔을 뽑더니 소리쳤다.

《메득이, 병마도감사님이 오셨구만.》

그 소리에 군만이를 쳐다보던 장공인들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박원작은 팔을 내저으며 웃었다.

《다들 앉게. 내가 이야기판의 흥취를 깼는가. 넘어진김에 쉬여가랬다고 마저 이야기를 듣소.》

군만이 배를 쑥 내밀며 대꾸했다.

《병마도감사님, 그러다 소인이 가지고있는 이야기밑천이 다 빠지겠소이다. 재미나는 이야기일수록 고조되는 대목에서 딱 끊었다 해야 들을 맛이 있소이다.》

《허― 이야기하는데도 묘리가 있군 그래. 좋아, 그럼 후에 나도 듣겠네.》

박원작은 군만의 실팍한 어깨를 철썩 두드리고나서 한켠에 서있는 김충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박원작의 눈길을 느끼자 김충지는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김충지를 보는 박원작은 속이 좋지 않았다.

사실 박원작은 그를 귀빈으로 병마도감에서 제일 좋은 집인 별관에 들게 하고 놋쇠를 녹이는 일만 맡아보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김충지는 최충의 당부라면서 굳이 련장칸의 교위일을 자진했다.

어찌 그뿐이랴. 페를 끼칠수 없다면서 제가 직접 초가집을 얻어가지고 사는데 무슨 까닭이여서인지 자기가 병마도감사와 아는 사이라는것을 숨겨야 한다며 매번 모르쇠를 한다.

꼭 그렇게 해야만 천균노를 만들어내는 일을 돕는것인지…

근달이 소매속에서 종이말이를 꺼내들고 박원작에게로 다가왔다.

《병마도감사님! 이걸 좀 봐주시오이다.》

근달이 내민 종이말이를 받아든 박원작을 장공인들이 빙 둘러쌌다. 김충지도 새로 련장칸에 들어온 심국종이도 종이말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박원작은 종이속의 그림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근달이 지팽이모양의 그림을 가리켰다.

《이걸 생긴 모양대로 불막대기라고 부르기로 했소이다. 손잡이쪽은 나무를 깎아 끼우고 그외는 몽땅 놋쇠로 부어 만들자는것이오이다. 뢰등석포처럼 불막대기에도 화약통과 격목통을 만들어서 화약을 터뜨려 화살을 날리게 하자는것이오이다.》

박원작은 눈을 쪼프리고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곧 불막대기가 묘한 병기가 될수 있겠다는것을 깨달았다. 불막대기가 팔우노처럼 화약의 힘을 써서 화살을 날린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할수 있지만 개별적인 군사들이 간편하게 몸에 지니고 아무때고 쏠수 있다는 점은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것이였다.

이런 병기를 만들어서 군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준다면 그 위력은 실로 대단할것이다.

번기가 박원작을 조심스레 쳐다보며 물었다.

《저… 병마도감사님, 안되겠소이까?》

대답대신 박원작은 부지불식간에 종이말이를 움켜쥐였다.

《?!…》

놀라와하는 장공인들의 눈길을 느껴서야 박원작은 자기가 기분이 좋은김에 종이말이를 움켜쥐였다는것을 알아차리고 껄껄 웃었다.

근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병마도감사님, 그걸 바로 능산이가 궁냥해냈소이다.》

박원작은 근달에게 떠밀려서 앞으로 나서는 능산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능산이 어줍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제 혼자 궁냥해낸게 아니고 우리모두가 함께 의논해서 그린것이옵니다.》

박원작은 능산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글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장공인들이 제힘으로 묘한 병기를 궁냥해내다니…

인차 박원작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8년전 여기 병마도감으로 내려왔을적에 장공인들을 그저 소나 말처럼 부리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오랑캐들에게 불벼락을 안기는 《신기한 병기》를 만들련다는것을 안 그들이 제 집일처럼 받들어주어 모든 일을 순풍에 돛단듯 거침없이 해제낄수 있었다.

장공인들이 시키는 일이나 하려 했다면 그동안 그렇게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을것이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장공인들이 무엇때문에 그런 큰 열성을 내여 일하였겠는가.

박원작은 처음으로 백성들도 나라를 위하는 큰 마음을 안고산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벼슬아치따위들과는 도저히 비길수 없을만큼 넓고 깊다는것을 아직은 알지 못하고있었다.

박원작은 새삼스럽게 장공인들의 갸륵한 마음이 헤아려져 능산이에게 책망조로 말했다.

《이걸 왜 인제야 내놓느냐?》

번기가 그를 대신해서 대꾸했다.

《능산이가 그런 궁냥을 내놓았을 때는 온 병마도감이 숨져버렸고… 또 인차 병마도감사님이 다시 내려온다기에…》

박원작은 가슴이 쩌릿하여 새삼스레 장공인들을 둘러보았다.

《능산아, 이 불막대기는 군사들에게 큰 도움을 줄수 있겠다.》

일제히 환성이 터졌다.

박원작을 둘러싸고 장공인들이 웃고떠드는데 남권부가 나타났다.

그는 곧장 박원작에게로 다가와 귀띔했다.

《박공, 나 좀 보았으면 하오.》

장공인들과 휩쓸리기를 꺼려하는 남권부의 습성을 잘 아는 박원작은 그가 이끄는대로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남권부는 박원작을 별관으로 이끌었다.

별관의 큰 방에 들기바쁘게 박원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공!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는거요?》

남권부는 따끈한 온돌방에 자리를 잡고서야 퉁명스레 대꾸했다.

《박공! 오늘이 내 후처의 귀빠진 날이요. 고게 박공을 꼭 모셔오라고 성화를 먹이니 내 이러지 않소.》

무슨 큰일이 생겼나 했던 박원작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오. 동병상련이라고 자넨 내 처지를 잘 알지 않소. 후처가 어떤 요물인지 잘 알테니 내 말 좀 듣소. 사실 처녀로 들어온 후처는 말썽이 별로 없지만 한번 시집갔던 계집은 날이 갈수록 사내를 우습게 안단 말이요. 반대로 장가갔던 사내는 계집을 맞아들일수록 점점 더 주눅이 들기마련이고. 내 계집은 요염한 기생퇴물이라 사내 홀리기에 귀신이여서 그한테 덧나면 괄세가 말이 아니요. 그러니 저녁에 꼭 와야겠소.》

그렇지 않아도 남권부를 조용히 만나서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고싶었던 박원작은 쾌히 응했다.

《좋소. 기꺼이 가리다!》

남권부의 입이 헤벌어졌다. 이 몇달사이의 일로 박원작이 자기를 좋지 않게 보지나 않는가 해서 은근히 마음을 조이던 남권부는 그가 순순히 응해나오자 무릎을 치고싶은 정도였다.

《박공! 내 체면을 생각해주어 고맙네.》

《원 사람두, 별소릴 다 하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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