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2 장

3


반달은커녕 초생달도 없는 밤이였다. 사위는 코를 베여가도 모를만큼 어두운데 고리문근처의 남권부네 집대문앞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좀 있어 집안에서 불이 켜지더니 초롱불을 든 사람이 뜨락으로 나섰다. 이 집의 하인이였다.

《게 누구요?》

대문을 두드리던 사내가 낮으나 위협적인 목소리로 재촉했다.

《빨리 문을 열기나 해!》

초롱불을 든 하인이 짜증이 나서 대꾸했다.

《어떤 턱 떨어진자인데 반말이야?》

대문을 두드리던 사내가 언성을 돋구었다.

《빨리 열지 못하겠어?》

《흥! 누군지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문을 열지 않겠다!》

그제서야 대문을 두드리던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사정했다.

《이보게, 서경류수댁에서 보내는 급한 전갈을 가져왔네. 어서 집주인을 나오시라고 이르게.》

《흥! 류수댁이면 단가.》

대문을 두드리던 사내가 왈칵 성을 내며 대문을 흔들었다.

《너 자꾸 약을 올리겠어? 너 이놈! 어디 물고를 내야 정신이 들겠니?》

《흥! 네가 물고를 내면 난 불고를 낼테다.》

《뭐야? 너 정 이러겠니?》

《흥!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이야. 너 떡떡거리며 큰소릴 잘도 치는데 어디 밤새껏 문앞에서 두덜대봐라.》

밸이 뒤틀린 하인은 대문빗장을 열기는커녕 그대로 돌아서버렸다.

이때 방문을 열고 대청마루에 나선 남권부가 소리쳤다.

《밤중에 누군데 소란스레 떠드는거냐?》

하인이 재빨리 퇴돌로 다가가 대꾸했다.

《주인님, 서경류수댁에서 왔다는 놈인데 제놈이 감히 대문을 열라고 호령질이올시다.》

《류수댁에서?!… 거 모를 일인데. 하여간 열어주게.》

《알겠소이다.》

하인은 일부러 느린 걸음을 치며 대문으로 갔다. 그리고 느릿느릿 빗장을 끄당겼다.

찌―쿠웅―

하인은 느릿이 대문을 열며 마깝지 않은 투로 소리쳤다.

《들어오게.》

그 순간 대문밖에서 작달막한 사나이가 비호같이 달려들어 하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놈! 너 정말 죽어보겠어?》

어찌나 멱살을 드세게 조였던지 하인은 당장 숨이 넘어갈듯 해서 쩔쩔맸다.

《다시한번 맞섰다간 아예 죽여버리고말테다. 난 들어가지 않겠으니 너의 주인을 잠간 나오랜다고 일러라. 어서!》

멱살을 놓인 하인은 숨을 게걸스레 마시고서야 주춤주춤 뒤걸음을 쳤다.

《주… 주인님! 밖에 잠간 나오랍십니다.》

《허― 별 싱거운 놈 다 있군.》

남권부는 속이 발끈했지만 상대가 류수댁이라니 애써 마음을 누르고 뜨락에 내려섰다. 하인이 그의 앞에 초롱불을 비쳐댔다.

대문밖에까지 환하게 비쳐지는 불빛에 대문을 두드리던 작달막한 사내의 모습이 얼핏 드러났다.

남권부가 대문앞에 이르자 놀란 도적고양이마냥 날쌔게 대문뒤에 붙어섰던 사내가 소리를 죽여가며 말했다.

《주인님, 좌우를 물리쳐주소이다.》

남권부는 화가 치밀었으나 어쩌는가 두고보자는 심산에서 초롱불을 제가 들며 하인을 물러가게 하였다.

그제서야 대문뒤에 붙어섰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남권부는 하마트면 고함을 지를번 하였다. 앞에 나선 사내는 뜻밖에도 복면을 썼는데 초롱불에 드러난 그의 두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번뜩이고있었다.

남권부는 속이 떨렸지만 위세를 돋구어 《으험―》하고 기척을 냈다.

《넌 도대체 누군데 그 모양이냐?》

복면쓴 사내는 작달막한 몸집을 크게 불구고싶었던지 가슴을 한껏 내밀었다.

《소인은 사실 길복이라고 하는데 심국종어른의 심부름군올시다. 그 어른이 보내는 물건을 가져왔소이다.》

《뭐라구? 심국종의 심부름군이라구? 그럼 류수댁이란건 뭐야?》

《그건 댁의 종놈이 문을 냉큼 열어주려 하지 않기에 일부러 주어댄 거짓소리올시다.》

복면의 사내는 남권부가 미처 꾸짖을 사이없이 재빨리 혀를 놀려댔다.

《소인은 원래 리공 큰집 하인이올시다. 심국종어른을 도우라는 분부를 받고 얼마전에 여기로 내려왔소이다.》

리공 큰집이라면 리자봉의 형 리자연공을 가리키는 소리가 아닌가!

남권부는 잡친 기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정신이 펄쩍 들었다.

이거 일이 간단하게 번져지지 않는가부다. 화약의 비방을 알아내서 개경군기감에다 염초장을 차려놓는 일을 리자연이 직접 주관하는 모양이다. 하긴 나라의 군국대사를 맡아보는 리자연이니 그량반 어벌에 십분 타당한 일이다. 그 사람이 뒤에서 떠밀어준다면 무엇을 두려워할손가.

《헌데 자넨 왜 낯을 가리웠나?》

《예, 심어른이 훈시하기를 소인의 얼굴을 남들이 보면 좋지 않다고 하였소이다. 소인이 자주 이 집에 심부름을 와야 하는데 종들이 보면…》

남권부는 은근히 놀라왔다. 심국종 그녀석이 하는 품이 여간 간특하지 않았다. 그자식 속이 우뭉한 놈이야.

심국종은 남권부에게 자기 거처지도 알려주지 않았고 개경에서 부하 몇을 달고왔는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요즘 그는 련장칸에서 일하고있는데 어느 장공인들처럼 허줄한 옷을 입고 우스개소리도 곧잘했다. 그러다가도 남권부가 나타나면 전혀 모르쇠를 하는데 그의 속을 짐작하기란 미궁속을 들여다보기보다 더 캄캄했다.

《음… 자네 상전이 그렇게 하란다면 별수가 없지. 가져온 물건이 있으면 이리 내게.》

길복은 손에 쥔것을 내밀었다.

남권부는 자기에게 와닿는 지팽이를 보자 흠칫하며 소리쳤다.

《이건 뭐야?》

《주인님, 이 지팽이를 받으시오이다.》

길복은 남권부에게 또하나의 물건을 들려주었다. 목침 절반만한 나무궤였다.

《주인님! 이 두 물건을 잘 건사해야 하오이다. 심어른이 이르시기를 벽엔 남의 귀가 붙어있고 문엔 또 남의 눈이 걸려있다고 했소이다.

그럼 소인은 물러가겠소이다.》

길복은 말을 마치기바쁘게 바람같이 사라져버렸다.

남권부는 꿈이 아니면 도깨비에 홀린듯한 기분이여서 한동안 그자리에 서있었다.

안에서 《이보세요, 밖에서 뭘해요?》 하는 마씨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남권부는 부랴부랴 대문을 닫고 나무궤를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 한손으로 지팽이를 잡고 뜨락을 꿰질렀다.

그가 대청마루에 올라서니 언제 방을 나왔는지 룡뇌향을 풍기며 마씨가 캐물었다.

《웬놈인데 이밤중에 나오라말라 해요?》

남권부는 심국종이 당부했다는 말이 생각나서 딴전을 부렸다.

《어, 별놈 아니야. 류수댁에서 종놈을 보냈는데 섣달그믐날에 주연을 베풀겠으니 나를 오라누만.》

《원, 그따위나 알리자고 한밤중에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야단법석이예요?》

《그… 그러게나 말이요.》

마씨는 입을 샐쭉거렸다.

《그런데 손에 쥔 지팽이는 어데서 난거예요?》

《지팽이?… 어, 한밤중에 떠든다고 꾸짖었더니… 글쎄 종놈이 이걸 떨구고 똥줄이 빠지게 도망치더군.》

《흥! 잘은 둘러치는군요.》

마씨는 입술이 뾰로통해서 치마바람을 일으키며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남권부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손에 쥔 지팽이를 굽어보았다.

도대체 이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가.

그는 안방에 들어가 마씨의 치마벗는 모습을 달콤한 기분으로 눈요기하려던걸 걷어치우고 외헌(사랑방)문을 잡아당겼다.

외헌에 들어선 그는 누가 엿보지나 않나 해서 두리번거리다가 방문고리를 걸었다. 그리고 옆에 꼈던 나무궤부터 초불아래 내려놓았다.

귀중품을 넣어두는 자개박이함이였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가.

가슴을 울렁대며 자개박이함의 뚜껑을 여니 그안에 또 그보다 작은 자개박이함이 들어있었다.

대관절 무엇이기에 이런 값진 보물함에 담았을가. 금덩이가 들어있는게 아닐가. 그렇다면 작히나 좋겠는가.

남권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작은 보물함의 뚜껑을 열었다.

《히야!―》

대번에 그의 입에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보물함에는 연분홍빛이 번쩍이는 보물이 반나마 차있었다.

《아니, 이게 야광주가 아니야?…》

남권부는 목이 터져라고 웨치고싶은 탄성을 가까스로 삼키고 보물함에서 령롱하게 반짝거리는 진주보석을 욕심나게 들여다보았다.

이만한 진주보석이면 한해쯤은 넉근히 뚱땅거리며 잘살수 있을것이다!

불현듯 서발짜리 왕구렝이가 목을 칭칭 휘감는듯한 으쓱한 느낌이 들었다. 남권부는 다급히 보물함의 뚜껑을 덮고 그것을 이불속에 감추었다.

문에도 남의 눈이 걸려있다는데 혹시 이걸 누가 훔쳐보진 않았을가?

남권부는 날래게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그는 한동안 바깥의 동정을 두리두리 살폈다. 마씨는 이미 잠에 들었는지 안방은 어둠속에 묻혀버렸고 하인들이 든 행랑채도 괴괴하였다.

《후유― 노루가 제 방귀에 놀란다더니…》

급히 방문을 닫은 그는 누가 빼앗기라도 하는듯 보물함을 장농속에 깊숙이 감추었다.

마음을 눅잦히며 남권부는 참대지팽이를 집었다. 그러자 두근거리며 마음이 또다시 산란해졌다.

옛적에 강조의 늙은 아버지가 역적 김치양의 못된짓을 일일이 적어넣은 글쪽지를 이런 참대지팽이속에 감춰가지고 서경에 가있던 자기 아들에게 보냈다고 하지 않았는가. 수만의 북계군을 거느린 도순검사 강조는 참대지팽이속에 든 글월을 꺼내보고는 그길로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쳐들어가 김치양을 쳐죽이고 현종을 등극시켰다고 했다.

그렇다면 심국종은 무슨 급한 사정을 알리자고 강조의 아버지처럼 이런 지팽이를 보냈을가.

남권부는 겁먹은 눈길로 지팽이를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손잡이쪽을 좌우로 비틀며 잡아당겼다. 생각했던대로 손잡이가 쑥 뽑아져나왔다. 구멍이 뚫린 참대속에 돌돌 만 종이말이가 끼여있었다.

그것을 뽑아든 남권부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해댔다. 도대체 어떤 불길한 소식을 적었기에 지팽이속에 넣어보내지 않으면 안되였을가.

남권부는 조심스레 종이쪽지를 펼쳤다. 두세번 보아나서 낯이 익은 심국종의 글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소감나리에게 전하오이다. 인차 박원작이 서경에 당도하겠는데도 나리의 마음이 편하오이까? 장공인들에게 내주어야 할 료미는 왜 아직도 움켜쥐고있소이까? 그 료미를 다 없애치웠다면 야광주로 쌀을 사서 하루이틀내로 장공인들에게 내주도록 하소이다. 이건 〈개경어른〉의 뜻인줄 아시오이다.》

남권부는 두눈을 감았다. 불의에 한몽둥이 얻어맞은듯 했다.

아, 이게 무슨 랑패란 말인가? 왜 그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렸을가.

그는 머리를 싸쥐고 몸부림을 쳤다. 내가 이렇게까지 한치앞도 내다 못보는 청맹과니가 되여버렸단 말인가.

남권부는 박원작이 떠나가자 장공인들에게 내주어야 할 두달분의 료미를 내주지 않았다.

다른 관청들에서도 벼슬아치들이 저마다 백성들을 등쳐먹는데 나라고 왜 그런 놀음을 하지 못하겠는가.

그래서 료미를 팔아 은덩이를 사들였다. 장차 운수가 막혀 벼슬자리에서 떨어진대도 떵떵대며 잘살아가자면 손에 관직을 쥐고있을 때 묵돈을 챙겨놓아야 한다는것이 벼슬아치들의 너나없는 마음이였다.

이런 생각에서 속이 뜬뜬해있었는데 난데없이 개경에서 심국종이 찾아들었다.

그가 가져온 리자봉의 글월을 받아본 남권부는 그동안 자기가 망쳐놓은 일을 바로잡으려고 서둘러 뛰여다녔다. 비싸게 팔아먹으려고 두었던 놋쇠를 내놓아 철덕에 다시 불을 지펴 뢰등석포도 부어냈고 수질구궁노도 만들게 하였다.

이로서 숨죽은듯 하였던 병마도감이 이전처럼 활기를 띠였다. 이젠 됐다 하고 한숨을 돌렸는데 알고보니 료미생각은 감감 잊고있었다. 하마트면 엉치를 깨칠번 하였다.

남권부는 궁지에서 건져준 심국종이 고맙게 여겨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 목숨이 그의 손에 쥐여져있는듯한 생각이 갈마들며 속이 불안해짐을 어쩌지 못했다. 이거 주객이 전도되는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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