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제 2 장

1


마차행렬은 험하기로 소문난 동주의 절령고개를 힘겹게 넘고있었다.

박원작은 행렬의 선두에서 우중충한 좌우의 깎아지른 산들을 근심어린 눈길로 살펴보고있었다.

절령의 근처에 자비사라는 큰 절간이 있다고 해서 자비령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고개를 벌써 몇번째로 넘지만 그때마다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을 조여야 하는 험한 령이였다.

가파롭고 우불구불한 굽이가 스물인지 서른인지 알수 없이 많은데다 금시 무너져내릴듯한 아스라한 칼벼랑이 간담을 서늘케 하고 게다가 한낮에도 중소만한 호랑이들이 길을 막고 덤벼드니 어찌 한순간인들 마음을 놓을수 있으랴.

이 절령을 지날 때면 지난날 거란의 란이 떠올랐고 거란란을 생각할 때면 두주먹이 떨리고 이가 갈려진다.

그때 거란오랑캐두목 소손녕은 감히 고려에다 대고 절령의 이북땅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었다.

비겁하고 무능한 조정벼슬아치들은 제 한목숨만을 먼저 생각하면서 강한 적군은 상대를 잘 들이치나 약한 아군은 자기를 지켜내지 못한다는 고사를 꺼들어 절령이북을 거란군에게 내주자고 하였다.

만약 그때 서희장군이 없었더라면 어쩔번 하였는가.

서희장군은 분연히 애국충정의 보검을 뽑아들고 오늘날 오만한 적군의 허장성세에 굴복하여 절령이북의 광활한 령토를 내여준다면 래일은 또 송악산이북은 물론 나중엔 온 고려땅을 내놓으라고 할것이니 한치의 땅도 오랑캐에게 짓밟히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아, 좀더 일찌기 화약을 구워냈더라면 이 땅에 침노한 오랑캐무리들을 보다 더 통쾌하게 족쳤을텐데…

마부석에 앉은 절령역참의 역관지기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박원작에게 물었다.

《병마도감사님, 어느쪽길로 가시겠소이까?》

《?!…》

생각에서 깨여난 박원작은 나직이 대꾸했다.

《운봉역(서경부근의 역참)쪽으로 가면 좀 빨리 갈수 있을테니 그쪽길로 가는게 좋겠소.》

《알겠소이다.》

무사히 절령을 넘어온 마차행렬은 중화쪽으로 기세좋게 내달렸다.

개경에서 서경으로 가는 역참길은 크게 두길이 있다. 서해도의 안주(재령)를 거쳐 황주를 통해 가는 길과 절령을 넘어가는 길인데 절령을 넘는 길은 또 둘로 갈라져서 황주 아니면 중화를 지나 서경으로 들어간다.

이번에 나라에서는 박원작에게 병마도감에서 쓰라고 10여마리의 말과 여러대의 마차를 내주었다. 말들은 하나같이 살지여 털에 윤기가 찰찰 흐른다.

이전과 달리 여러대의 마차를 끌고 절령역에 들어섰더니 구면인 역관지기가 반겨맞아주었고 이어 길잡이를 자청해 맡았다.

박원작은 서경에 마침 볼 일이 있어 가야 한다는 그의 사정을 알고 쾌히 그 청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역관지기가 마부석을 차지했다.

역관지기는 채찍을 휘두르지 않고서도 말을 빨리 몰아가는 재간이 있는것 같았다.

그가 마부석에 앉은 때부터 느릿느릿 마차를 끌던 말들이 제집으로 돌아갈 때처럼 네굽에 바람을 일으켰다.

박원작은 기세좋게 달리는 말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말은 아직 동주고을을 벗어나지 못했다. 서해도에서 제일 동쪽으로 치우쳐서 교주도(오늘의 강원도)와 접경한 고을인 까닭에 동주(오늘의 서흥군, 봉산군, 연탄군의 일대)라 불리우는 이 고을은 나라의 요충지인 절령을 끼고있다.

나라의 도읍으로 직통하는 절령에는 태평시절에도 항시 백여명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있었다.

역참들은 대채로 30~45리에 자리잡고있는데 거기에는 공무행차로 가는 벼슬아치들이 지친 말을 갈아탈수 있도록 말을 기르는 마구칸들과 사람이 묵어가는 역관사가 있었다.

역관지기는 역말들을 돌보고 역관사를 거두는 일을 맡은 역졸 몇명을 거느린 역리로서 늘 볶이웠다.

이웃역참들에서 공문서가 든 가죽주머니를 역관에 보내올 때면 역관지기는 만사불구하고 그것을 넘겨받아 그날로 4~6개의 역참길을 달려 그다음 역관에 전해야 했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수시로 오고가는 벼슬아치들의 시중을 들어주는 일이다. 역참에 들려가는 벼슬아치들마다 제가 제일인듯이 기고만장해서 호통질로 법석인데 그 리유인즉 역관방이 루추하다거나 역말이 비루먹었다거나 나중에는 말대접이 공손치 못하다는것이였다. 지어는 생트집을 잡아 역졸들을 손찌검까지 하였다.

그것이 괴로와 역졸들은 얼마 못있어 무슨 구실을 대고서라도 역관을 떠나가버린다.

그런데 절령역참의 역관지기는 대대로 역참일을 달게 해온다니 그게 이상한 일이였다.

박원작은 역참문제를 잘 모른탓에 뜻밖의 고생을 당했던 8년전의 그날을 돌이켜보았다.

북계병마도감사로 전직된 그해 봄날 박원작은 한시급히 서경으로 가고싶어 부지런히 말을 때려몰았다. 개경을 떠난 이튿날 봉주고을의 도공역참에 당도하니 말은 달리는것이 아니라 벌벌 기는 정도였다. 하긴 늙은데다 여윈 말이니 2백리 넘는 길에 지칠대로 지친것이였다.

그런데 도공역에서 내주는 역말은 더 한심한 말이였다. 어찌나 말랐는지 갈비대가 아른거리고 등골은 마치 끌날같았다.

해사하게 생긴 도공역의 역관지기는 괜찮은 역말들은 이미 다른 벼슬아치들이 다 타고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정 갈 길이 바쁘다면 그 말이라도 타고 가라고 하였다.

어서 빨리 서경갈 마음뿐인 박원작은 그런대로 비루먹은 말에 올라탔다. 겨우 한고개 넘었는데 말은 벌써 쓰러질것 같이 허청거렸다.

아무리 말을 못하는 짐승이래도 사람을 믿고 사는 말인데 이러다 쓰러지면 어쩌랴.

박원작은 말에서 내려 걷지 않으면 안되였다.

박원작이 비루먹은 말을 끌고 절령역참에 들어서니 그 역참은 딴판이였다.

나많은 역관지기가 마중나와서는 박원작이가 고삐를 잡고있는 비루먹은 말을 보고 눈섭을 찡그렸다. 그는 첫눈에 그 말이 도공역의 역말인줄을 알아본것이다.

절령역의 역졸들이 하는 말이 도공역관지기는 코등에 구미여우가 살살 기여다니는 간사한자여서 벼슬품계가 낮은 관리들에겐 늙고 병든 말이나 내준다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절령역관지기는 도공역관지기와 판판 다른 사람이라는것이다. 하긴 사람이란 천태만상이니까.

박원작이 아무말도 없이 역관사앞에 서있는데 역관지기가 가슴이 쩍 버그러지고 살진데다가 기름을 바른듯 말갈기가 윤기돌고 멋스러운 백마를 끌어내오는것이였다.

벼슬품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역참에 당도하는 순서대로 좋은 말을 내여주는 이런 사람을 대바르고 선량하다 아니 할수 있겠는가.

박원작은 너무 고마와 그에게 손때묻은 장도칼을 꺼내주었다. 장도칼손잡이는 값비싼 호박으로 만든것인데 국자감을 마친 그 해를 뜻해서 산것이였다. 역관지기가 사양했지만 박원작은 굳이 그의 손에 쥐여주고야 흔연한 마음으로 말에 올랐던것이다.

그때로부터 두해가 지난 후 아직도 그 늙은 역관지기가 절령역에 남아있다는것을 안 박원작은 개경가는 길에 그에게 활을 하나 가져다주었다. 여가시간에 심심풀이 겸 사냥을 하게 하고싶었던것이다.

그후 여러번 절령을 오가면서 지내보니 역관지기는 참말 진국이였다. 추녀낮은 그의 집에는 값나갈만한 귀물은 없었어도 그는 늘 웃는 얼굴로 길손들을 맞아들이고 떠나보냈다.

알고보니 역관지기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사는 홀아비였다.…


뜰에 가득찬 달빛은 한없이 밝은 초불이요

자리에 들어오는 산그림자는 언약도 하지 않은 손님일세

더구나 솔바람 불어 거문고 울리니

이사이 밝은 풍취나 사람에게 못전할가


심산계곡을 기세좋게 빠져나가는 마차행렬을 고무해주려는듯 덜커덕거리며 굴러가는 수레바퀴소리에 가락을 맞추어 노래소리가 랑랑히 울렸다. 역관지기의 아들 일랑이의 노래소리였다.

퍽 귀에 익은 그 노래는 두달전 개경가던 길에서 절령역에 들렸을 때 역관지기의 아들인 그에게 박원작자신이 배워준 노래였다. 박원작은 마부석쪽의 일랑이부자에게로 눈길이 갔다.

얼핏 보매 역관지기는 일랑이에게 있어서 할아버지라고 해야 어울릴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그는 이제 쉰을 가까이한 사람으로서 깊은 산중의 험한 곳에서 고된 일에 부대끼며 살다보니 나이보다 훨씬 겉늙어보일뿐이였다.

일랑이 역시 정이 끌리는 아이였다. 그로 말하면 이제 14살인데 벌써부터 잡다하기 이를데없는 역참일에 막히는데가 없었다.

볼수록 정이 가는 그들부자의 모습에서 눈을 못떼며 박원작이 부지중 자리를 뒤채이는데 손에 잡히는것이 있었다. 울퉁불퉁한 베자루였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박원작은 눈물이 핑 돌았다. 개경사람들이 즐겨먹는 토란과 고수를 서경에 가져다 심어먹으라고 어머니가 손수 꾸려준 종자자루였다.

박원작은 집을 나서기에 앞서 어머니에게 서경에 가서 함께 살자는 청을 드렸다. 했더니 어머니는 사람은 늙어 제 살던 고장을 떠나면 아무리 살기좋은데라 해도 마음이 쓸쓸하여 사는 재미를 모르니 그런말말라고 잘라말했다. 기실 그것은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그랬을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남겨두고 몇해가 걸릴지 기약할수 없는 서경살이를 떠나야 하니 하직의 인사말조차 변변히 나가지 않았다.

여느때처럼 《그동안 편안히 계시오이다.》라든가 《인차 돌아오겠소이다.》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보여 오정문밖에까지 따라나와 바래워주는 어머니에게 입을 봉한 사람처럼 그저 허리굽혀 절만 차렸다.

그러는 박원작이 보기 딱했던지 죽화가 그의 팔을 잡고 《아버지, 제가 할머니를 잘 모시겠사오니 아무쪼록 여기 근심을 놓고 일에 전심해주사이다.》하고 말했다.

기특한 딸이였다. 그런 죽화를 보았더라면 해연이 얼마나 기뻐했으랴.

해연은 어떻게 지내고있는지? 아마 개경에로 옮겨갈 차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을지도 모른다.

해연의 정겨운 모습을 그려보느라니 대동강의 푸른 물이 늠실대는 아름다운 서경이 겹쳐들었다.

아, 서경! 서경이 고향처럼 정깊게 느껴지는것은 무엇때문일가. 정든 해연이 나서 자란 고향인때문만도 아니고 8년간의 추억이 깃들어있어서만도 아니다. 그것은 박달임금이 첫 도읍을 정한 조종의 땅이고 천년토록 강국의 위용을 떨쳐온 고구려사람들의 얼이 엿보이는 땅이기때문이리라.

하기에 3국통합의 원대한 뜻을 이룬 왕건태조대왕이 서경천도의 마음을 담아 이런 유훈을 남기지 않았던가.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으로 되여있으니 만대왕업의 기지라고 할수 있다. 후세의 임금들은 마땅히 춘하추동 사시절의 중간달에 서경으로 가서 백일이상 머무름으로써 왕업을 도모할지어다.》

태조대왕의 유언을 받들어 그동안 서경을 얼마나 몰라보게 일신시켰던가.

고려건국과 더불어 다시 일떠선 서경은 나라에서 두번째가는 큰 도회로 변모되였는데 다른 도회들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분사까지 있다. 개경의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본딴 관청인 분사에는 서경에 머무르는 문무관원들을 통솔하는 랑관과 정사를 펴는 관이 있고 도읍의 6부 비슷한 병부령, 납화부, 진각성, 국천부, 관택사, 도항사 등이 있다. 그리고 태조대왕이 만대왕업의 기지를 떠받들 인재를 길러내려고 건국13년(930년)에 세운 우리 나라 최초의 지방학당인 학사원도 있다. 이뿐아니라 서경에는 임금이 행차하여 들수 있는 장락궁, 관풍전 같은 궁궐들도 솟아있다.

성은 또 어떠한가. 고구려적에 있었다던 평양성을 본래대로 다시 쌓았을뿐아니라 신해년(1011년)에는 그안에 황성까지 축성했다.

그 하나하나에는 고구려와 같은 강국을 일떠세우려는 고려사람들의 굳센 의지가 어려있는것이다.

박원작은 뿌듯해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저 멀리 서경의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서경의 맑은 하늘을 바라보느라니 기어이 옛 성지에서 천하제일의 위력한 병기를 만들어내리라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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