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회)


제 1 장

13


오늘은 남권부가 두문불출하고 집안에 들어박혀있는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그는 박원작이 종전대로 북계병마도감사가 되여 서경으로 다시 내려온다는 공문서를 받은 날부터 집안에 들어앉아 화술만 퍼마시고있었다.

오라는 딸은 안오고 외통눈의 사위만 온다더니 리자연에게 병마도감의 주인이 될수 있게 힘써달라고 써보낸 글월의 답장은 안오고 생벼락이 떨어진것이였다.

억이 막혔다.

그 공문서를 받고 남권부는 눈앞이 아뜩했다. 고양이도 낯이 있다는데 박원작이 다시 내려오면 그와 어떻게 얼굴을 맞댈수 있단 말인가.

박원작이 어진 사람이라고 하여도 철덕의 불을 죽이게 했고 장공인들을 박대한걸 알면 가만있자고 하지 않을것이다. 약빠른 고양이 앞을 못본다고 리자연의 힘을 입어 병마도감사로 될 욕심은 내면서도 혹시 박원작이 다시 올줄은 왜 생각하지 못했던가.

남권부가 우거지상이 되여가지고 신세타령을 하고있는데 누군가 대문을 두드려댔다.

사냥을 하겠다고 산판에 갔던 조득국이 온게다. 그래도 조득국이 이 남권부를 잊지 않고 찾아주는구나.

이런 생각에서 하인을 제쳐놓고 대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뜻밖에도 생면부지의 키가 작달만한 녀석인데 쥐상판같은 얼굴에서 두눈이 반들거렸다.

《이 집이 병마도감에서 소감벼슬을 지내는 남공댁이 옳소이까?》

기껏 소감이라는 새삼스러운 소리에 남권부가 울화가 뻗쳐났지만 가까스로 누르고 《내가 소감일세.》하니 쥐상판녀석이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었다.

《례빈성에서 보내는 글월을 가지고왔소이다.》

례빈성이라면 리자연의 동생 리자봉을 말하는게 아닌가.

남권부는 급히 쥐상판의 녀석을 건너방으로 이끌었다. 그 녀석이 품에서 꺼내준 봉서에는 리자봉이 써보낸 글이 있었다.

봉서를 뜯고 글을 꺼내읽던 남권부는 제 눈을 의심할 지경이였다.

이런걸 가리켜 희소식이라 할것이다. 이는 속절없이 묻혀버릴번 한 몸에 따스한 봄볕이 비쳐든 격이니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는가부다.

남권부는 불과 몇줄밖에 안되는 글을 한식경이 되도록 읽고 또 읽었다.

이젠 살았다. 암, 리자연이 아무리 하늘꼭대기같은 자리에 올라앉았다 해도 젊었을적의 정이야 잊을수 없지.

남권부는 다시금 리자봉이 써보낸 글줄을 더듬었다.

《우리 형님은 남공을 잊지 않고있소. 공이 화약의 비방을 통달하게 되면 즉시 군기감의 주인자리로 승급시키겠다는거요. 군기감에다 염초장을 내오겠다는것이 형님의 뜻임을 명심해야 하겠소.

나라를 위해 하루빨리 군기감에 큰 염초장을 차릴수 있도록 공은 분발해야겠소. 이 글을 가지고가는 사람이 공을 도와줄거요.》

그러니 리자연에게 써보낸 글월을 그가 받아보았다는것이로구나.

글줄을 읽어내릴수록 짙은 먹장구름이 걷혀지고 맑은 하늘이 펼쳐지는듯 싶었다.

이젠 할바를 찾았다. 군기감에도 염초장을 내와야 하고 거기서도 《신기한 병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것이 국익에도 맞고 리자연의 총애도 받을수 있는것이니 어찌 물불을 가리랴. 기어이 화약의 비방을 걷어쥘테다.

남권부가 돌석이를 주물러댔어도 화약의 비방을 아직껏 뽑아내지 못한 아쉬움에 이를 갈고있는데 분내를 물씬 풍기며 마씨가 들어왔다.

《이보라구요. 점심상을 다 차려놓은지가 언제인데 그냥 버틸셈이세요?》

그제야 남권부는 점심때가 되였다는것을 깨닫고 쥐상판의 녀석을 가리켰다.

《이봐, 개경손님인데 알고 지내라구.》

그리고는 《개경손님》에게 일렀다.

《자, 우리 안방으로 건너가서 점심을 나눕세.》

남권부는 《개경손님》을 뒤에 달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잘 차린 음식상을 가운데 놓고 앉자 마씨가 차잔에 주전자를 기울였다.

《〈개경손님〉, 이건 인삼차라는거예요. 먼길에 고생하셨겠는데 이 차를 마시면 피로가 쭉 풀릴거예요.》

마씨가 내민 차잔을 받아둔 《개경손님》이 반들거리는 두눈에 웃음을 머금었다.

《마님, 인삼을 먹으면 기를 보해서 정욕을 북받치게 한다는데 외지에서 이런걸 받아 마셨다가 일을 칠가 두렵소이다.》

《아이, 〈개경손님〉은 말씀을 재미나게 하시는군요. 개경엔 맨 미녀들인데 인삼차를 장복하면서 재미를 보시면 좀 좋아요.》

《고맙소이다.》

김이 몰몰 나는 인삼차를 홀딱홀딱 마시고난 《개경손님》이 고개를 갑삭이며 말했다.

《소감나리, 전 군기감에서 쇠를 수태 녹여보았소이다. 그러니 병마도감의 련장에 한자리 얻어주소이다.》

남권부는 눈이 둥그래졌다.

《행수자릴 말이요?》

《아니올시다. 그저 장공인이면 되오이다.》

《장공인으로?》

《옛 성현들이 이르시기를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는게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소인은 본래 천한 쟁인바치출신이라 근본으로 되돌아가는거야 당연한 일이지요.》

《고견일세. 근본을 잊으면야 안되지. 어참, 그대의 성함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구먼.》

《개경손님》이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소인이 먼저 아뢰야 하는건데… 이름은 심국종이고 나이는 서른살이오이다.》

《좋아, 헌데 꼭 철덕앞에서 막일을 해야 하겠나?》

심국종의 쥐상판에 야릇한 웃음이 연하게 비꼈다.

꼭 철덕앞에서 막일을 해야 하겠는가고? 염초장에 터를 잡으면야 더 좋지. 허나 거긴 남권부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니 그림의 떡같은 자리다.

《난 사실 군기감에서 리속(아전)을 하던 사람이올시다.》

심국종의 말은 사실이였다.

몇해전까지 리자봉의 집에서 사환질을 하던 심국종은 그의 줄을 타고 군기감에 들어가 아전노릇을 하였다. 주로 병기고의 일을 맡아보면서 화약과 수질노, 지어는 뢰등석포까지 리자봉이 주라고 하는 장사군들에게 빼돌려주었다.

그것이 다른 나라 장사군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렸다는것을 심국종은 모르지 않았다.

전국의 군사들에게 병쟁기를 만들어주어야 하는 개경군기감에서는 화약과 《신기한 병기》들을 북계병마도감에서 받아다 경군에 넘겨주고있었다.

바로 경군에게 가닿아야 할 그것들의 일부가 다른 나라 장사군들의 손에 들어갔으니 리자봉은 죽을 죄를 진셈이다.

심국종은 서경으로 오기 착 전에 더 많은 화약과 《신기한 병기》들을 빼냈다.

10여년전에 몇번 찾아왔던바 있는 해지는 나라 대식국의 장사배가 벽란나루에 닻을 내렸다. 보나개라는 큰 장사군이 탄 배인데 동방나라들에서 보기 힘든 진귀한 보물들을 한가득 실어온것이였다.

날아가는 돈도 그 냄새를 맡는다는 리자봉이 어찌 보나개를 모른다고 하랴.

보나개는 전란에 시달리는 자기 나라에 소용되는 물건은 인삼이나 비단이 아니라 위력한 병기라면서 그런걸 달라고 리자봉에게 졸라댔다.

풍랑 사나운 바다를 헤가르며 머나먼 동방의 나라 고려를 찾아온것은 귀국이 천하대국인 거란을 물리쳤기때문이요 바로 그렇기때문에 고려에는 남다른 병쟁기가 있으리라는것이 보나개의 지론이였다.

리자봉은 서슴없이 보나개의 청을 받아물었다. 하여 적지 않은 량의 화약과 《신기한 병기》들이 대식국의 배에 실리게 되였다.

허나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불과 몇명뿐이였다. 만일 이 사실을 발설하는 날이면 그는 귀신몰래 죽음을 당할것이다.

심국종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소감나리! 소인걱정은 말고 련장에 넣어주기만 하소이다. 이건 다 지중추원사님의 뜻이오니… 거기서도 나리를 도울수 있소이다.》

《좋소. 지금껏 외토리신세였는데 리공이 보내준 자네가 곁에 있으니 내 뭘 두려워하겠소.》

남권부는 배심이 든든해짐을 느꼈다.

처음에는 까무잡잡한 쥐상판따위나 보낸걸 보면 리자봉의 수완도 알만하다 했는데 작자가 노리는 품이 여간내기가 아니다. 심국종과 배짱이 맞겠다기보다는 그의 덕깨나 입을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기분이 흥그러워졌다.

《그런데 임자 거처지는 어쩔셈인가? 내가 마련해줄가?》

《그건 소인이 알아서 하겠으니 념려마소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나리는 소인을 모르는척 해야 하오이다.》

남권부는 심국종의 꿍꿍이속을 알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자, 이젠 술을 들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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