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제 1 장

11


경상골의 집에서 매돌을 돌리는 해연의 마음은 기쁘기도 하고 한편 섭섭하기도 하였다.

이제 개경으로 간 박원작이 군기감으로 전직되면 곧 이사짐을 실으러 내려올것이다. 이제부터는 온 집안이 함께 모여 웃음속에 살것이니 이 얼마나 기쁘고 다행한 일인가.

그러면서도 나서자란 서경땅을 아주 떠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묵직해졌다.

바늘따라 실 간다고 녀인의 운명이란 사내에게 매여지게 되는 법이니 좋고 말고가 있으랴만…

아래목에서 잠을 자던 영준이 깨여났다. 점심밥술을 놓기 바쁘게 잠에 곯아떨어졌던 애였다.

《엄마, 뭘하나?》

세살난 아이치고 잠투정을 할줄 모르니 저 아이는 참 유별난 애다.

《엄만 일한단다.》

해연은 아이를 안아 무릎에 앉히며 그의 손에 메밀 몇알을 쥐여주었다.

《엄만 이걸 망에 타갠단다.》

잠기가 어려 두눈이 불그스레한 영준이 고사리같은 손에 쥐여진 메밀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게 뭐나?》

《메밀이라는거다.》

아이가 꼬치꼬치 캐여물었다.

《메밀이란건 뭐나?》

《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랭면을 만드는 낟알이란다.》

《랭면?…》

말도 류창하고 제법 자기 마음을 음조에 담을줄 아는 영준이 대견하여 해연은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서경랭면이 아니였다면 오늘의 이 집안이 없을런지도 모른다. 바로 그 서경랭면이 박원작의 호감을 샀기에 해연이 이 집에 뿌리를 내리게 된것이 아닌가.

이 집에 처음 찾아왔을 때를 더듬어보느라면 자연 회심의 미소가 피여오르기도 하고 그때 제정신이 아니였지 하는 망측한 생각도 없지 않아 제풀에 얼굴을 붉히군 하는 해연이였다.

가락맞게 빙빙 도는 매돌에 실려 어느덧 그의 생각은 팔우노의 첫 위력사격을 목격한 기쁨으로 온 서경장안이 물끓듯 들레이던 8년전의 어느날로 거슬러올랐다. 그날저녁 해연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경상골을 찾아왔다. 이 집을 찾아오는 결단을 내리기가 그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달포전에 해연은 병마도감에서 외적을 호되게 족칠수 있는 《신기한 병기》들을 만든다는 가슴이 트이는 소문을 듣게 되였다.

그 말이 선뜻 믿어지지 않아 병마도감을 조용히 찾아가보니 뜬 소문은 아닌것 같았다. 장공인들이 별스럽게 생긴 병기를 쓰다듬으며 성수가 나서 일하고있었던것이다.

어떻게 해야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원쑤를 갚을수 있을가 하고 늘 마음을 써오던 해연은 드디여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가증스러운 원쑤들에게 불벼락을 들씌울 《신기한 병기》를 많이 만들어 군사들에게 보내주는것이 곧 아버지의 원쑤를 열백배로 갚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알아보니 녀인은 병마도감에 받아주지 않는다는것이였다.

그렇다고 남복을 하고 들어갈수도 없는 일이고…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며칠을 지냈는데 이런 소문이 귀에 닿았다.

《신기한 병기》를 만드는 중임을 맡은 사람은 개경에서 온 병마도감사인데 상처하여 홀로 경상골에 산다는것이였다.

늘 바삐 돌아가는 병마도감사인데 집에서 시중드는 사람은 기껏해서 늙은 녀인 하나뿐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였을 때 해연의 가슴은 이름못할 련민의 불길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라법대로 하면 병마도감사에게는 4명의 시중군이 따라다녀야 했다. 허나 새로 온 병마도감사는 어찌나 청렴하고 검박한지 말구종도 없고 개경에서 데리고온 늙은 시비에게 집안일을 맡겨두고있다는것이다.

《세상에 별난 량반도 다 있군. 다른 량반들같으면 하나라도 더 많은 시중군을 달고다니지 못해 안달아하겠는데…》하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정말 그런 량반도 있을가?

호기심이 동한 해연은 병마도감을 나드는 박원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후렁후렁한 검은 관복을 걸친 박원작은 여위고 지친 기색이였다. 안해를 잃은 그가 몹시도 불쌍해보였다. 문득 저 량반의 집시중을 내가 맡으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차 허거픈 웃음이 나갔다. 새파란 처녀의 몸으로 그것도 홀아비의 시중을 든다는게 어디 됨즉이나 한 일인가.…

그러나 팔우노의 위력한 사격을 본 그날 해연의 마음은 달라졌다.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는 인재를 돌봐주는 일이 아버지의 원쑤를 갚는 길이고 의로운 장거로 된다는 생각이 무섭게 머리를 들었던것이다. 그 올곧은 하나의 생각으로 해연은 무작정 박원작을 찾아 집문을 나섰다.

박원작이 해연의 성의를 뿌리치고 돌아가라 했을 때 처녀의 순정을 무시당한 야속함으로 하여 눈물까지 흘렸었다. 돌아가란다고 해서 제발로 물러가는 그런 숙맥은 또 어데 있담!

모진 마음을 먹은 해연은 시비의 방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날밝기 바쁘게 부엌일을 걷어안았다.

그 아침에 해연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였다.

글쎄 높지 않게 담은 밥그릇을 반도 허물지 못하고 밥상에서 물러나는 박원작을 목격한것이였다.

늙은 시비는 한탄조로 병마도감사의 입이 어찌나 밭은지 그 식성을 도저히 맞추지 못하겠다고 중얼댔으나 해연의 생각은 거기에 그칠수 없었다.

큰일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밥을 축내지 못하고서야 어찌 몸이 견딜수 있으랴. 혹시 병마도감사가 타지에 와서 물이 맞지 않는건 아닌지? 여름이니 그럴수 있을것이다. 이런 땐 그저 시원한 음식이 제일인데…

해연은 곧 그럴듯한 생각이 떠올라 흥부동의 자기 집으로 잰걸음을 놓았다.

병마도감사에게 메밀국수를 대접하고싶다고 제잡담 이야기하는 해연의 말에 어머니는 눈을 흡뜨며 펄쩍 놀랐다.

《이것아, 넌 랑자(처녀)의 몸으로 어쩌자고 그 집에 갔댔느냐?!》

해연은 박원작에게 마음이 푹 쏠려 자기를 영 잊고있었다는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동정심이 이렇게 급작스레 련정으로 번져질줄은 자기로서도 정말 놀라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없이는 한시도 못살것 같은 심정이였다. 박원작에게는 부모의 허락을 받고 왔노라 빈말을 한 생각이 나며 얼굴이 뜨거웠지만 마음을 다잡고 어머니에게 자기 진정을 그대로 터놓았다.

어머니는 성이 올라 방바닥을 내리쳤다.

《이 철없는것아, 그러다 너 신세도 망치고 동네흉도 도맡아 걷어안고싶어 그러냐? 그 사람을 싹 잊어버려라. 다시는 그 집에 못갈줄 알아라!》

《어머니! 홀몸으로 외지에 와서 외적을 쳐부시는 〈신기한 병기〉를 만드노라 고생하는분을 돕는 일인데 제가 뭐라고 신세를 망치고말고가 있겠어요. 그분이 더 많은 병기를 만들게 할수만 있다면 소녀는 동네흉이 아니라 온 서경이 흉을 본대도 그것을 달게 여기겠나이다.》…

그날저녁, 박원작이 받은 밥상우에는 오이랭국에 닭알꾸미로 고명을 얹은 메밀국수가 올라있었다.

메밀국수가 생전 처음인 박원작은 밥상을 들고 들어간 늙은 시비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음식인가?…》

《서경랑자가 지은 음식인데 쇤네도 어떤 맛인줄은 모르겠사옵니다.》

처음엔 슬슬 맛만 보던 박원작은 이내 수저를 부지런히 움직이더니 인차 국물까지 말끔히 마셔버렸다.

《히야, 거참 별맛이로군.》

해연이 부엌에서 조막만해진 마음을 달래고있는데 시비가 다가와 박원작이 찾는다고 귀띔했다.

방에 조심히 들어가니 박원작이 만족한 웃음을 한가득 짓고앉아 칭찬을 아끼지 않는것이였다.

《정말 잘 먹었네. 오래간만에 이런 맛을 보네. 이 고마움을 어떻게 상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만.》

해연은 그 순간 자기를 바라보는 박원작의 눈길이 이전과는 퍽 다름을 감촉했다. 딱히 찍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련인의 육감으로만 감득할수 있는 사내의 정이 그윽히 스며있는 눈길이였다.

《헌데 이건 무엇으로 만든 음식인가?》

해연은 박원작의 마주보는 눈길에 몸이 쫄아드는것 같았다. 간신히 용기를 내여 입을 열었다.

《저… 메밀가루로 빚은 국수라는건데 우리네 서경별식인줄 아오이다.》

《아, 이 땅에 그런 음식도 있었는가?》

해연은 감탄을 금치 못해하는 박원작에게 언제인가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메밀이란 곡식은 근래에 와서 심는건데… 발해유민들이 압록강을 건너오면서 서경에 들여다 퍼쳤다고 하오이다.

수십년전에 우리 서경의 어떤 주막집에서 메밀국수를 처음 만들어냈다는데 오늘은 그게 서경별식으로 되였나이다.

더우기 찬국에 만 랭면은 여름철 특식으로 소문났소이다.》

《정말 기이한 음식이로군. 내 입엔 랭면이 꼭 맞는것 같아.》

그때부터 박원작의 밥상우에는 랭면이 자주 오르군 하였다.

랭면으로 밥맛을 되찾은 박원작의 얼굴에 점차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랭면은 박원작에게 서경처녀에 대한 애틋한 정을 낳게 한 사연깊은 귀물이였다.

《엄마! 이거!―》

영준이 메밀을 한줌 움켜쥐여 매돌아가리에 넣는 바람에 기분좋은 추억에서 깨여난 해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였다.

박원작에게 메밀가루를 꾸려보내지 못한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태전에 개경집을 찾아갔을 때 메밀국수를 차려올렸더니 시어머니도 무척 좋아하였다.

죽화도 그게 별맛이라며 곱배기를 청하지 않았던가.

아, 옷을 지어보낼 생각을 하면서도 그걸 깜박 잊다니…

《자, 그럼 메밀을 타개볼가요?》

영준을 무릎에 앉힌채 매돌을 다시 돌리는데 밖에서 《부인님 계시오이까?》하는 부름소리가 들렸다.

《누구오이까?》

《제올시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돌석이 들어와 절을 차렸다.

《염초장행수가 어떻게?!》

해연은 반색하며 돌석을 이끌었다.

《어서 앉게. 어서!》

《예.》

돌석은 영준이를 번쩍 안아들더니 익살을 부렸다.

《메밀가루를 내는게 아닌가요? 소인이 먹을 복이 있다니까. 영준아! 우리 쩡한 동치미국물에 말은 국수를 배꼽이 웃도록 실컷 먹어보자꾸나. 그렇지?》

《응!》

돌석이 익살을 부렸지만 해연은 한편으로 기분이 언짢아졌다. 돌석을 보느라니 병마도감에 망조가 들었다는 소문이 생각키워서였다. 행여 헛소문이겠지 하는 기대를 안고 어제 병마도감에 나가보았으나 웬걸, 그렇게 기쁨으로 들끓고 흥성거리던 련장칸에까지 철덕이 숨져버리고 괴괴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만나는 장공인들마다 초상난 집 사람들처럼 우울해있어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어쩜 이럴수 있는가. 남권부를 찾아가 무슨 마련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물으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부인, 주인없는 집꼴이라 그러하니 나도 어쩌는수가 없소이다. 조정에서 새 주인을 내려보낼 때까지는 그런대로 보내는 수지요.》

꼭 남의 일처럼 말하는 남권부에게 무슨 말을 더 할수 있었단 말인가.…

《부인님! 제 이 집에 희소식을 가져왔소이다. 그게 어떤 반가운 소식인지 한번 알아맞춰보겠소이까?》

해연은 매돌을 계속 돌리며 미심쩍은 어조로 되물었다.

《우리 집에 무슨 반가운 소식이 있겠나?》

《나, 이거라구야…

에라, 그럼 공짜로 알려주겠수다. 부인님은 이사짐을 꾸리지 않아도 되겠소이다.》

매돌을 돌리던 해연의 손이 굳어졌다.

《이사짐을 꾸리지 않아도 되다니?》

《챠, 말할 맛이 없다니까요. 영준이 아버님이 우리 병마도감사로 그냥 남아있게 되였다 그 말이우다.》

해연의 두눈에서 생기가 흘러나왔다.,

《그게 참말인가?》

《아, 그런 말도 롱으로 하겠소이까. 아침에 공문서가 왔소이다. 북계병마도감사 박공이 설을 쇠고 임지로 내려갈 때까지 소감은 지체말고 수질구궁노를 만들라는 조정의 령이 씌여진 공문서라우다.》

해연은 돌석의 말에 우선 기쁜 마음이 솟구쳤으나 차츰 서운해지는감도 없지 않았다.

언제면 한식솔이 다 모여살게 되겠는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해연은 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는감을 느꼈다.

한숨이 절로 새여나왔다. 필경 애아버지는 병마도감에서 천균노를 만들 결심을 내렸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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