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1 장

9


북계병마도감 련장행수 근달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철덕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여러해세월 별로 멎어본적없이 세찬 열기를 뿜으며 사는 재미를 안겨주던 철덕이 지금은 죽어가고있었다.

넓은 련장칸에 우뚝 솟은 철덕앞에서 풀무질소리, 타령소리, 우스개소리로 흥성이며 한겨울의 맵짠 대소한추위속에서도 웃통을 벗어던진 장공인들이 후더운 김을 뿜으며 놋쇠물을 받아내지 않았던가. 그 하루하루들은 장공인들에게 있어서 세상에 으뜸가는 병기를 만들어낸다는 긍지로 하여 크나큰 자부를 가지게 하였다. 철덕이자 병기도감이고 철덕이자 서경의 자랑이라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 철덕에는 또한 옛사람들의 자취가 력력히 어려있다.

어렸을적에 아버지들 하는 말을 들으니 고려건국과 더불어 서경에 선참으로 지은것은 병기를 만들어내는 병마도감이라고 하였다. 다시는 오랑캐들이 옛 평양을 짓밟지 못하게 하자면서 그때 사람들이 철덕을 선참 쌓았다는데 그것이 덜컥 멎었으니 이거야말로 변이다 아니할수 없는것이다. 서경의 장공인들이 벼려준 룡천검을 차고 오랑캐의 진중으로 들어가 적장의 코대를 보기 좋게 꺾어놓은 서희장군이 지하에서 철덕이 멎을걸 알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개경에 올라간 박원작이 이 사실을 알면 또 뭐라고 할가. 하긴 그 사람이야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몸이니 여기에 무슨 상관이 있으랴만.

하지만 근달의 눈에는 그의 모습이 자꾸만 비껴들었다.

《아, 백두여신 경개연고라―》하는 탄식소리가 근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백발이 될 때까지 교제를 해도 초면처럼 서먹서먹한 사귐이 있고 길가의 수레그늘아래서 한번 얘기를 나누었을뿐인데도 오랜 지기인듯 여겨지는 사귐이 있다는 그 말뜻을 조용히 음미하는 근달의 눈에는 박원작의 모습에 이어 남권부의 거만한 얼굴이 안겨왔다.

요즘 남권부가 놀아대는 꼴이 여간 심상치 않은것이다.

박원작이 개경으로 올라간 그 다음날에 남권부가 병마도감의 주인행세를 하며 제일먼저 찾아간 곳은 염초장이였다.

그는 염초장행수 돌석이를 죄인처럼 몰아대며 어서 화약의 비방을 써내라고 호통쳤다.

돌석이 화약의 비방은 아무한테나 내놓을수 없다고 하자 남권부는 시퍼렇게 독이 올라가지고 이제 새 주인이 될 사람앞에서 무슨 불손한 대답질이냐고 야단을 쳤다.

돌석은 남권부앞에 조금도 숙어들지 않았다.

《소감나리!》하고 소감이란 말에 힘을 주며 돌석은 말을 이었다.

《우린 나라의 령이 없이는 그 누구에게도 화약의 비방을 대줄수 없소이다.》

이것이 돌석의 대답이였다.

약이 머리꼭두까지 오른 남권부는 그 밸풀이로 행수들을 몽땅 불러놓고 돌석이 자기의 분부를 공손히 받아들일 때까지 병마도감의 문을 닫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래도 돌석이 굽어들지 않자 련장칸에 놋쇠를 내주지 않았다.

하여 철덕이 숨지고만것이였다.

박원작이 어째서 그따위 너절한 사람을 학우라고 데려왔는지…

덕이 있고 학식이 깊으면서 재주도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벗을 가려보는 눈까지 밝은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라는 사람의 발등을 서슴없이 밟는 남권부가 병마도감사로 된다면 병마도감은 망하고말것이다.

근달이 숨진 철덕을 슬픈 눈길로 바라보고있는데 방금 들이닥친 장공인들이 그를 둘러쌌다.

《행수어른, 뭘 생각하오이까?》

근달로인은 장공인들속에서 그중 나많은 번기를 알아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대답을 피한 근달은 웬일인지 얼굴에 웃음이 실린듯한 번기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던졌다. 울어도 씨원치 않을 때 무엇이 좋다고 애녀석들처럼 들떠있는지… 이 사람이 과연 련장칸에서 제일 똑똑한 장공인이 맞단 말인가.

련장칸에서 머리가 좋은 장공인이 누구냐고 한다면 그 사람은 물론 번기일것이다. 셈속이 밝고 재간도 좋아서 뢰등석포를 부어내는 거푸집을 빚는데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나이도 이제는 마흔고개여서 인생풍파도 어지간히 겪은이였다. 그래서 오른팔로 여기고 장차 행수자리를 그에게 넘겨주려고 마음먹은 근달인것이다.

근달의 눈총에서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번기는 여전히 웃음을 담고 소매속에서 종이말이를 꺼냈다.

《행수어른, 이걸 좀 보아주소이다.》

근달은 번기가 펼쳐든 종이말이를 의아히 바라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그게 뭔데?》

《예, 생각나는대로 이름을 붙였는데 불막대기란 뜻에서 화장이라는 병기올시다.》

근달은 어이가 없어 빈입을 다셨다. 이거야말로 초상집을 찾아와 혼사말을 건네는 격이 아닌가. 그렇다고 젊은이들을 꾸중하기는 싫었다. 가뜩이나 병마도감이 숨진듯 침울해있는데 제기분에 큰소리까지 칠게 있는가.

하여간 젊은것들의 수고가 깃들어있을터인데 그걸 보고 좋다 나쁘다 훈시야 못해주랴.

근달은 마지 못해 종이말이에 눈그루를 박았다. 참말 막대기같기도 하고 지팽이같기도 한것이 그려져있었다.

번기가 그림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낫자루만큼 굵은데 놋쇠로 붓자는것입니다. 길이는 한자남짓하오이다. 뢰등석포처럼 맨뒤에는 화약통이고 그앞에 격목통, 그앞으로는 불화살을 넣고 쏠수 있게 구멍을 뚫었소이다. 화약통의 뒤로는 반뼘길이의 나무손잡이를 끼울수 있게 하자는것입니다.》

호기심이 동한 근달은 신기한 그림에 말려들어갔다.

《음… 거 그럴듯해. 수질노처럼 참대로 만들지 않고 뢰등석포처럼 놋쇠로 만들면 든든할게야. 불화살을 넣고 쏜단 말이지. 그런데 불화살이 꽤 견딜가?》

근달의 얼굴에 그늘이 비끼자 번기는 조바심이 났다.

《행수어른, 수질노와 달리 화장은 화약을 터뜨려서 불화살을 날리기때문에 보통 화살대를 쓰면 안되오이다.》

근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단 말이야. 나무화살대는 안되겠어.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건가?》

《그래서 화장에서 쏘는 불화살은 화살대뒤에 쇠띠를 둘러주자는것이오이다.》

번기의 말에 근달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들었다.

《음… 그럴듯해. 살대뒤에 쇠띠를 둘러주면 화약이 터지는 힘에 견딜수 있을거야. 좋아, 이것으로 불화살을 쏘면 더 멀리로 화살을 날릴수도 있고 그 힘도 대단할거야.》

《그렇소이다. 그래서 보통 쇠활촉이 아니라 보다 무겁고 큰 쇠활촉을 달아주자는것이오이다.》

근달은 번기의 등을 철썩 때렸다.

《아주 좋아. 그러면 쇠갑옷을 입은 적도 다 잡을수 있겠어. 헌데 누가 이걸 궁냥해냈나?》

번기는 그중 키가 작아보이는 장공인을 앞으로 떠밀었다.

《능산이 네가?!…》

근달은 믿어지지 않았다. 능산이 키가 작고 약해보여서보다 련장칸에 들어온지가 얼마 안돼서였다. 오랜 장공인들도 생각하지 못한것을 풋내기가 해내다니…

《허― 내 눈이 어두워졌나보군. 능산이 이 사람, 어떻게 이런 궁냥을 다 했나?》

쑥스러운지 뒤더수기를 긁적대며 능산이 어줍게 입을 열었다.

《불화살을 날리는 수질구궁노를 보느라니… 뢰등석포처럼 화약을 터쳐 불화살을 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났소이다. 누구나 손에 들고다니면서 불화살을 쏘면 팔우노에서 쏘아대는 불화살 못지 않게 그 위력이 세찰게 아니겠소이까.》

《녀석두, 기특하다. 기특해!…》

만족해하던 근달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번기가 그의 심중을 짐작하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능산이를 개경으로 보내야 할것 같소이다. 병마도감사님을 꼭 만나뵙겠다는데…》

《병마도감사님을?》

《어쩌겠소이까. 소감나리가 놋쇠를 내주지 않으니 병마도감사님을 찾아가 이 사정을 알리자는것이오이다.》

근달은 놀랍기만 하였다.

사람은 어려운 때 알아볼수 있다더니 여느때는 눈에 잘 띄우지도 않던 장공인들이 숨죽은 철덕앞에서는 모두가 손발벗고 나서 자기의 뚜렷한 몫을 찾으려고 하는것이다.

번기의 다음말에 근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행수어른! 저희들끼리 의논을 좀 했는데… 병마소감이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까짓것 우리자체로 철덕을 살려내자는것이오이다. 우리부터가 놋그릇, 놋수저 같은 놋기물을 내온다면 서경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것입니다.》

《이 사람들아!…》

근달은 와락 장공인들을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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