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제 1 장

5


오늘은 박원작이 병마도감을 일일이 돌아보는 날이다. 그는 부재중을 내놓고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닷새에 한번씩은 꼭꼭 온 병마도감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습관이 있었다.

검과 창을 벼려내는 장도장과 모장을 돌아보고 련장에 들어서니 백발의 근달이 반색하며 박원작에게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그는 놋쇠를 녹이는 철덕(용광로)을 가리키며 말했다.

《병마도감사님! 오늘도 뢰등석포 스무문은 넉넉히 부어낼수 있겠소이다.》

《아, 그렇소? 아주 좋소.》

박원작은 얼굴이 환해져서 고개를 끄덕이였다.

련장행수 근달은 몸은 비록 늙었지만 한번 한다고 하면 끝까지 해내고야마는 강의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말이라면 덮어놓고 믿는 박원작이였다.

박원작이 장공인으로서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물론 근달행수이다. 처음 서경에 왔을적에 병마도감의 실정을 속속히 알려준 사람도 근달이였고 새로 염초장을 지을 때도, 《신기한 병기》를 만들어내는 일에서도 누구보다 의지한 사람이 그였다.

병마도감에서 근달은 제일 나많은 좌상일뿐아니라 제일 오래 일한 장공인이다.

북계병마도감은 고려건국시기 옛적에 황페화되였던 서경을 일떠세울 때 선참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 시기부터 근달이네는 대대로 병마도감에서 일해왔다.

근달은 한창 젊었을적에 병마도감을 찾아온 서희장군까지 만나본 사람이다. 당시 중군사로 수만군사를 거느리고 이 땅에 침노한 거란군을 견제하던 서희장군이 병마도감을 돌아보다가 오랜 장공인인 근달의 아버지에게 장검을 하나 벼려줄수 있는가고 물었다.

《잠간만 기다려주소이다.》하고 대답한 근달의 아버지는 수십번을 단련한 좋은 강쇠를 골라내여 제꺽 장검을 벼리였다.

쇠도 자를만큼 서슬푸른 칼날이며 룡이 부각된 손잡이를 만족스레 들여다보면서 장군은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이 검은 정말 보기 드문 보검이요. 과시 룡천검이라 하겠소.》

장검을 허리에 찬 서희장군은 준마를 타고 서경을 떠나갔다.

수십만대적이 욱실거리는 적진으로 위풍당당히 들어간 서희장군은 오랑캐군의 적장 소손녕과 마주앉았다고 한다.

그때 조정에서는 벼슬아치들이 거란군의 대거침입에 겁을 먹고 항복해야 한다느니, 서경이북땅을 떼여주고 절령(자비령)을 국경으로 삼아야 한다느니 하고 갑론을박하고있었다.

서경장공인들이 벼려준 장검을 허리에 찬 서희장군은 이미 고구려의 대부분땅을 저희가 차지했으니 그 나머지땅도 마저 내놓아야 하지 않는가고 궤변을 줴치는 적장의 황당한 요구를 즉석에서 이렇게 눌러버렸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고구려의 후계국으로서 국호도 고려라 하였으며 사람들 또한 고구려의 후손들이다. 그러니 거란은 응당 압록강이북의 광활한 고구려의 옛땅을 전부 그 후손들에게 넘겨주는것이 옳은 처사가 아니겠는가.

그때 말문이 막혀버린 적장은 쩔쩔매다가 화제를 돌려 고려는 거란의 적국인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있는데 그럴 법이 어데 있는가고 우격다짐으로 걸고들었다.

서희장군은 보검을 절그럭거리며 우리 나라는 옛적부터 동방례의지국으로서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천하의 모든 나라들과 사절들을 통하고 교역을 한다, 거란도 이웃의 린방으로서 례의를 갖추어 화친을 바란다면 다른 나라들처럼 좋은 대접을 받을수 있다고 명쾌한 대답을 해주었다.

담판에서 기가 죽은 적장은 그만 패배를 자인하고 퇴군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고보면 서경성사람들이 서희장군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었다고 할수 있다.

박원작이 이런 생각을 하며 철덕에서 놋쇠물을 받아 뢰등석포를 부어내는 장공인들을 지켜보고있는데 남권부가 찾아왔다.

《박공! 웬 늙은이가 공을 꼭 만나겠다누만.》

박원작은 별로 심드렁해보이는 남권부의 표정이 의아했지만 손님이 찾아왔다는 소리에 더 개의치 않았다.

《함께 가서 만나봅세.》

련장칸앞의 넓은 마당에서 등굽은 로인이 서성대고있었다.

《저 늙은이요.》

남권부의 말에 그리로 다가가니 로인이 이쪽으로 돌아서는것이였다. 첫눈에 도사같은 체취가 느껴졌다.

박원작은 백발의 로인들에게 늘 그러했듯 두손을 모아잡고 깍듯이 절을 차렸다.

《제가 병마도감사올시다.》

례절을 차려 공손히 맞절을 하는 로인의 얼굴에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어려있었다.

《병마도감사님, 바쁘실텐데 틈을 빼앗아서 안됐소이다. 실은 〈신기한 병기〉를 만드신 어른에게 인사를 드리고 겸사해서 한가지 여쭙고싶은게 있어 찾아왔소이다.》

《로인님, 아들벌되는 사람에게 말씀을 낮춰주소이다. 우리 안에 들어가 이야길 나누는게 어떻소이까?》

박원작은 로인의 팔을 잡아 안침진 곳에 자리잡은 별관으로 이끌었다. 별관방은 언제나와 같이 깨끗하게 정돈되여있었다.

박원작에게 이끌려 따스한 아래목에 앉은 로인은 자기 소개를 하였다.

《난 올봄에 동족의 나라 고려로 넘어온 발해의 망국민인데 성은 대씨올시다.》

박원작은 보다 반가움을 금할수 없었다.

거란오랑캐에게 동족의 나라 발해가 망한지도 어언 백년이 지났지만 오늘도 발해유민들이 살 길을 찾아 끊임없이 압록강을 건너오고있다. 그들을 따뜻이 맞아들이고 근심걱정없이 잘살수 있도록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는것은 동족으로서 고려사람들의 마땅한 도리라고 할수 있다.

《고려에서는 나와 함께 온 발해유민들을 서경성에서 살도록 자리를 잡아주었소이다.

참, 병마도감사님도 십여년전에 온 거란을 쑤셔놓은 벌둥지처럼 뒤흔들어놓았던 흥료국을 알것입니다.》

그 말에 박원작은 가슴이 쓰리였다. 고려사람들치고 흥료국의 건국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것이다.

기사년(1029년), 발해유민들이 마침내 거란에게 빼앗겼던 땅을 수복하고 흥료국을 세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온 고려가 환희에 휩싸였다.

박원작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발해유민들이 세운 나라 흥료국이 한때 해동성국으로 존엄을 떨쳤던 발해처럼 흥성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동경(료양)에 도읍을 정하고 《천흥》이란 년호까지 선포한 흥료국의 임금 대연림은 발해의 건국시조 대조영의 7대손이였다. 그는 흥료국을 건국한 즉시로 형제의 나라 고려에 봉명사신단을 파하여 군사적지원을 줄것을 요청하였다.

그 소식을 접한 고려군사들과 백성들은 무려 세차례씩이나 이 땅에 기여들어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재난을 들씌운 거란오랑캐들을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갓 일어난 흥료국의 청을 들어줄것을 절절하게 바랐다. 장수들도 그들과 같은 생각이였다.

그러나 조정벼슬아치들은 발해유민들을 도와 거란과 대결하는것이 나라에 리로운지 불리한지 알수 없다면서 흥료국의 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때 박원작은 조정의 온당치 못한 처사에 분격했다. 민심이자 천심이라고 하였다. 민심은 같은 겨레의 나라 흥료국을 도와줄것을 기대하고있는데 그 민의를 외면하다니…

흥료국은 그 다음해에도 무려 세차례씩이나 임금의 형인 대연정까지 봉명사신으로 고려에 보내여 군사를 보내줄것을 간청하였으나 여전히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말공부만 하면서 그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대발해의 재건을 바라고 일떠선 청소한 흥료국은 결국 건국한 그 이듬해말에 거란군의 공격으로 무너지고말았다.

흥료국이 망했다는 불행한 소식이 전해왔을 때 박원작은 치솟는 분노를 터뜨렸다.

도대체 조정대신들한테는 동족에 대한 정이 한쪼각도 남아있지 않단 말인가!…

눈물이 글썽해서 대씨로인은 말했다.

《사실 난 흥료국왕과 8촌지간이지요. 우리 흥료국이 망한것을 여러가지로 볼수 있지만 제일 가슴아픈것은 역적들때문에 망했다는 그것이오이다. 생사를 함께 하자고 굳게 언약했던 우리 사람들이 배신할줄이야.… 아마 황룡부(지린성 농안일대)에서 대군을 거느린 황편이란 장수가 거란군을 치라는 임금의 령을 따랐더라면 흥료국은 그렇게 쉽게 망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이미 발해사람이기를 그만둔 그놈은 동족을 배반하고 거란에 가붙었소이다. 어찌 그놈뿐이겠소이까. 압록강남쪽 보주성(의주)의 장수 발해태사 하행미놈은 임금에게서 받은 밀령을 동경통군사에게 알려주고도 모자라 성안에 있던 동족군사들을 무려 800여명이나 잡아죽였소이다.…》

박원작의 불끈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대씨로인을 통하여 흥료국이 무너진 까닭을 알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고려가 적극 흥료국을 도와주었더라면 망하기까지는 않았을것이다.

조정은 흥료국을 돕자는 군사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오죽했으면 몇몇 장수들이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주성을 들이쳤겠는가.

허나 그때는 이미 흥료국이 무너지고 거란의 대군이 성에 도사리고있어 보주성의 탈환전은 실패하고말았다.

눈물에 젖은 대씨로인의 눈이 번쩍했다.

《흥료국이 망한건 전적으로 군민이 발해를 기어이 재건하겠다는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치지 못한데 있었소이다.

또한 병쟁기가 부족한데도 있소이다. 흥료국에도 〈신기한 병기〉같이 위력한 병쟁기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소이까.

창검마저 부족하여 몽둥이를 들고 강포한 거란군과 싸웠으니…》

잠시 고개를 떨구었던 대씨로인이 머리를 다시 쳐들었다.

《난 밤이면 우리 흥료국의 도성이 무너지던 무시무시한 광경이 악몽으로 되살아나군 하오이다. 거란군은 집채같은 충차들로 성문들을 들부셔댔는데 우린 그 어마어마한 괴물앞에서 너무도 무맥하였소이다. 그놈의 충차를 박살낼수 있는 병쟁기는 없는지…》

박원작은 말뒤에 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씨로인도 분명 《신기한 병기》들의 위력사격을 보았겠는데 어이하여 거란군의 충차소리를 거듭하는걸가.

남권부도 그런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우리 병마도감에서 만드는 뢰등석포로는 적의 충차를 박살낼수 있을거요.》

대씨로인은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거북스럽긴 하지만 뢰등석포로도 충차만은 안될것 같소이다. 난 그 괴물을 똑똑히 아오이다. 뒤만 내놓고 앞과 량옆 그리고 우를 다 아름드리 참나무들로 집처럼 만든 충차에는 몇개의 큰 쇠바퀴가 달려있지요. 그안에 힘쎈 장사 열댓놈이 들어가서 충차를 밀고나가는데 앞쪽엔 쑥 삐져나온 파성추라고 하는 여러발짜리 아름드리 통나무가 붙어있지요. 그끝에는 철추가 달려있소이다.

성문으로 달려드는 충차들에 기를 쓰고 돌벼락을 안겼지만 그놈은 끄떡하지 않았소이다. 그놈의 충차를 요정내지 못하여 우리의 성문들은 부서져나가고 성벽도 무너졌소이다.》

박원작은 숨쉬기가 괴로왔다. 대씨로인의 말대로 적의 충차가 그리도 든든한 괴물이라면 뢰등석포로는 박살내기 힘들것이다. 불화살로도 어려울것이다. 아름드리 통나무를 뒤집어썼다니 괴물이 불타는 동안이면 그놈은 제 볼장을 다 보고야말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든 《신기한 병기》들에도 큰 부족점이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성을 무너뜨리려 덤벼드는 적의 오만한 충차를 보기 좋게 답새길수 있는 병기가 아직 없다면 답답한 일이 아닐수 없다.…

대씨로인은 안색이 흐려진 박원작의 손을 조심히 감싸쥐였다.

《병마도감사님은 혹시 천균노라는 말을 들으신적 있소이까?》

박원작은 귀설은 소리에 어리둥절해졌다.

대답을 못하는 박원작을 보며 대씨로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건 전설같은 소리긴 한데… 어렸을적에 난 할아버지한테서 이런 소리를 가끔 듣군 했소이다. 고구려때 선조들은 귀신같은 병기를 만들어 오랑캐들을 다스렸는데 그중에는 천균노라는 대포까지 있었다고 했지요. 한균을 서른근이라고 하니 천균이면 무려 3만근(18t)이 아니오이까. 천균노가 울부짖으면 오랑캐들은 혼비백산하여 삼십륙계 줄행랑을 놓았다고 하오이다.》

박원작은 속으로 웃었다. 3만근이나 되는 요란한 대포가 고구려때 있었다는게 꿈같은 말이 아닐수 없다. 그런 거물이 진짜 있었다면 아버지가 모를리 없다.

아버지는 책에다 쓰기를 고구려때에는 염초에 숯을 섞어쓸줄 몰랐다고, 그때 조상들은 염초 하나를 가지고 적진을 불지르는 불화살을 만들어썼다고 했다.

오늘날의 화약보다 위력이 약한 염초를 가지고 뢰등석포라면 몰라라 천균이나 되는 대포까지 쏘았다는건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다. 게다가 천균노란 이름도 괴이쩍다.

노라는건 길죽한 나무틀에 얹힌 굽은 활인 쇠뇌를 의미하는 말이다.

아마도 옛적에 선조들은 수백근짜리 큰 쇠뇌를 보고 무거운 활이라는 뜻에서 천균노라고 불렀을것이다.

박원작의 얼굴에서 반신반의하는 기색을 엿본 대씨로인은 절절하게 말했다.

《병마도감사님! 고구려때에 천균노가 있었다는게 사실인가 사실이 아닌가가 화제거린게 아니라 그런 병기를 고려는 만들어가져야 한다는것이 화제거리로 되여야 한다고 생각하오이다. 소인은 병마도감사어른이 마음만 먹으면 천균노도 능히 만들수 있다고 보오이다. 천균노이면 적의 그 어떤 충차일지라도 단박에 묵사발낼수 있을것이니 그런 병기까지 가진다면 고려는 천하를 제압할수 있을것이 아니겠소이까.》

박원작은 심중해졌다. 듣고보니 천균노라는 병기에 대해 웃어넘길 일이 못되였다.

대씨로인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바쁜 병마도감사님을 오래 지체시킨것 같소이다.》

박원작이 함께 점심을 나누자고 하였지만 대씨로인은 굳이 사양하며 별관문을 나섰다.

박원작이 대씨로인을 정문앞에까지 따라나가 바래워주고났을 때 남권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이 늙으면 망녕이 든다더니 저 늙은이가 바로 그렇군. 괜한 말공부질이나 하려 여길 찾아오다니…》

박원작은 그 말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남공! 건 너무 야박한 소리같구만.》

남권부는 짜증이 나서 목청을 돋구었다.

《그럼 박공은 미친것 같은 저 늙은이의 말이 곧이 들린단 말이요? 잠꼬대같은 그 소리를?》

《남공, 너무 그러지 마오. 저 로인의 말에는 일리가 있소. 보다 더 큰 화포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그 마음이 얼마나 장한거요.》

남권부는 허거픈 웃음을 치며 물었다.

《박공은 그래 늙은이의 말 한마디를 듣고 천균노인지 뭔지 하는걸 만들어보겠다는거요?》

박원작은 정색해서 대꾸했다.

《남공은 내 말을 오해하는것 같소. 우린 나라가 흥성할 때에도 외적이 쳐들어올수 있다는걸 언제나 잊지 말고 미리 방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그 격언을 잊지 말아야 하오. 대씨로인의 말에는 바로 그런 뜻이 담겨져있단 말이요.》

《아, 그렇다면야…》

멋적게 웃어넘기는 남권부를 바라보는 박원작의 생각은 그 순간도 착잡하였다.

정말 천균노라는 대포가 옛적에 있었단 말인가? 그런 병기라면 능히 적의 충차를 마음대로 족칠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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