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회)


제 1 장

3


다음날, 여느날처럼 아침일찍 말을 달려 병마도감에 이른 박원작은 한동안 넓은 마당에 서서 감회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서로운 기운이 떠돈다 해서 서기산(해방산)이라 불리우는 아담한 야산을 배경으로 넓은 부지에 터를 잡은 병마도감은 개경군기감에 비길만큼 크고 웅장했다.

여기서는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병기도 꽝꽝 만들어낼수 있었다. 개경군기감처럼 쇠를 녹이고 단련하는 련장, 화살을 만드는 전장, 화살촉을 깎아내는 전두장, 검과 창을 벼려내는 장도장과 모장, 쇠갑옷이며 가죽갑옷을 짓는 백갑장, 피갑장, 화살통과 노살통을 만드는 노통장같은 장들이 그쯘하다. 어찌 그뿐인가. 아직은 개경군기감에 없는 염초장까지도 있었다.

염초장이야말로 서경의 자랑, 고려의 자랑이라고 소리칠만 하다.

오늘은 염초장에서 화약을 만드는 날이다. 염초장에서 장공인들이 염초를 구워내면 박원작은 그것을 가지고 직접 화약을 만들었다.

날이 밝자마자 병마도감에 나와있던 돌석이 그를 띠여보고 급히 달려와 절을 차렸다.

《병마도감사님! 밤새 편안하셨소이까?》

《아, 자넨가?》

박원작은 누런 베옷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돌석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보통키의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데 며칠전과 달리 코밑에 제법 수염이 돋아있었다.

(허― 이녀석이 언제 수염을 다 길렀나.)

스무살을 겨우 넘긴 돌석은 병마도감의 여러 행수들가운데서 나이가 제일 어리다. 련장행수 근달의 막내아들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행수들한테서 젖비린내난다고 놀림을 받군 한다. 아마 그것이 싫어 코수염을 길렀으리라.

《가자구.》

박원작은 돌석이를 뒤에 달고 염초장으로 향했다.

염초장은 다른 장들과 달리 서기산으로 치우쳐서 병마도감의 한끝에 있었다. 박원작이 북계병마도감사로 부임되여와서 새로 지은 염초장은 한길높은 담장으로 둘러쳤는데 그안에 넓은 뜨락을 가진 배집지붕의 기와집이 있다.

박원작은 화약의 비방을 엄수하려 파악이 있는 근달행수의 아들 돌석이에게 염초장을 맡기였다.

서경에 와서 제일먼저 낯을 익힌 근달은 지내보니 대가 세고 정직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돌석이도 믿음이 가는 젊은이였다.

염초장은 병마도감에서 제일 바쁜 일터의 하나다.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염초장이다보니 한해에 수만근의 화약을 만들어내야 했다. 염초장에서는 수십명의 장공인들이 허리 펴볼사이없이 온종일 힘들게 일한다.

박원작은 돌석이 열어주는 대문으로 들어섰다. 흙무지며 재무지들이 뜸으로 덮여있고 수십개의 크고 작은 독들이 널려있는 넓은 뜨락이 한눈에 안겨왔다.

뜨락을 지나 박원작은 주먹 넷을 합친것만한 자물쇠가 걸려있는 기와집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돌석이 급히 허리춤에서 장도칼만큼 큰 열쇠를 뽑아들었다.

《덤비지 말게.》

《알겠소이다.》

돌석이 열쇠를 들이밀어 철컥 자물쇠를 열었다.

박원작은 제 손으로 문고리를 쥐고 천천히 문을 당겼다. 삐꺽―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안에 들어선 박원작은 흐뭇하였다. 습기가 찰세라 불을 땐 방은 훈훈한데 벽에 기대앉힌 궤짝마다에는 염초며 버드나무숯가루가 가득하였다.

얼마나 깨끗하게 거두었는지 살림방같았다. 키큰 놈 싱겁지 않은 놈 없다는데 여느때는 싱겁기 짝이 없는 돌석이 염초장만은 늘 깐깐하게 살피고 일솜씨 또한 알뜰하기 그지없다.

《그럼 일해볼가.》

박원작의 말에 돌석이 구석에 세워둔 멍석을 안아다 바닥에 폈다.

박원작은 웃동을 벗고 되박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궤짝에서 염초부터 퍼내 멍석우에 쏟았다. 되박질을 하면서 그는 속으로 셈세기를 하였다.

염초 80되박에 버드나무숯가루를 20되박 섞은것이 박원작이 만든 화약이다. 그러고보면 화약을 만드는 일이자 염초(KNO3)를 구워내는 일이라고 말할수 있다.

염초를 얻어내자면 먼저 흙을 바로 취할줄 알아야 한다. 이를 《취토》라고 한다. 제일 좋기는 가마밑이나 온돌밑의 흙이고 그다음은 마루바닥이나 담벽밑의 흙을 취해야 한다. 흙맛을 보면 맵거나 달거나 써야 하며 짜면 습기를 빠는 흙으로서 좋지 않다.

《취토》 다음에는 《취회》라고 다북쑥재나 벼짚재를 모아들이는 일이다. 소나무재는 쓸수 없으며 잡초재나 나무재도 그닥 좋지 않다.

좋은 흙에 좋은 재가 마련되면 《교합》을 하는데 그것은 흙과 재를 각각 10말씩 고루 섞는것이다. 그다음 밑에 잔구멍들이 여러개 뚫린 독을 가져다 그안에 우물 정자로 나무를 얹고 그우에 가는 발을 편다. 그리고 교합한 흙과 재를 넣고 물을 부으면 독밑으로 물이 새여나온다. 독밑으로 흘러나온 물을 받아 가마에 넣고 끓일 때 코를 찌르는 오줌내 비슷한 냄새가 난다. 계속 불을 때여 물을 다 날려보내면 거무스름한 깡치가 남는다. 그 깡치를 맑은 물을 타서 달이고 다시 물에 타서 세번 달이면 희유스름한 가루가 되는데 그게 바로 염초다.

염초를 얻으려고 두번째 달일 때 아교를 넣으면 습기가 끼는것을 막고 나쁜 기운을 없앨수 있다.

염초를 퍼내는 박원작의 눈에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우렷이 안겨왔다.

어린시절 박원작은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랐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가살다싶이하는 아버지는 어쩌다 집에 들어와도 날이 밝기 바쁘게 다시 군기감으로 나가군 하였다. 하여 박원작은 거의나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자랐던것이다.

그가 아버지에 대해서 좀 알수 있었다고 말할수 있은 날은 그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슬픔의 날이였다.

그날은 그가 국자감에 들어간지 한해가 지난 여름날이였다. 첫 강의가 끝나고 쉬는 시간인데 산학박사(산학교원)가 찾아와 하는 말이 집에 급한 사정이 생겼으니 어서 돌아가보라는것이였다.

아침에 집을 나올 때도 아무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일가.

책을 꿍져들고 집에 돌아오니 뜨락에 낯익은 사람들이 서성댔다. 가끔 땔감도 해오고 음식감도 가져오던 군기감의 장공인들이였다.

여느때같으면 훌륭한 일을 맡아하는 아버지를 모시고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그들이 그날은 박원작을 보고 말을 걸기는 커녕 본척도 하지 않았다.

장공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둑컴컴했다.

불안한 생각이 갈마들어 허둥지둥 달려가 방문을 여니 웬 사람이 아래목에 누워있는데 그곁에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누워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병이 났을가?…)

방에 들어선 박원작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버지의 얼굴이 험상하게 터져있었던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몸부림을 치며 소리쳤다.

《아버지!― 이 어찌된 일이오이까?》

장공인들이 따라들어와 박원작을 부축했다.

《이 사람, 진정하게. 아버지는 화약을 태우는 시험을 하다가 그만… 갑자기 터지는 바람에 다치셨네.》

인차 의원이 왔다. 한참 아버지를 살피고난 의원은 한숨을 내쉬였다. 그가 약을 발라주고 또 어떤 약을 먹이였는데 아버지는 깊은 잠에 든듯 깨여나지 못하였다.

새벽녘에 피딱지가 앉은 아버지의 입술이 우물거리더니 《원작아―》하는 가냘픈 목소리가 새여나왔다. 아버지의 머리맡을 지켜 앉아있던 박원작은 정신이 펄쩍 들었다.

《아버지! 소자 예 있소이다.》

《너에게… 할 말이 있는데… 이제 어머니가 책을… 하나 줄게다. 거기… 이 아비가 하는… 일이 적혀있다. 그… 그걸 부탁한다.》

좀 있어 아버지의 몸이 서서히 굳어졌다.

《아버지!―》

아버지는 그렇게 갔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날 어머니는 책을 하나 꺼내주었다. 표제가 없는 책인데 첫장을 펼쳐보니 아버지가 쓴 글이 적혀있었다.

그 내용은 대체 이러했다.

… 여러 옛 기록을 보면 선조의 나라 고구려에는 침노하는 오랑캐들을 무리로 불태워 족칠수 있는 《신기한 병기》가 있었다고 한다. 기름을 쓰지 않고서도 적진을 불지를수 있는 고구려의 《신기한 병기》는 바로 염초라는 신기한 보배에 그 비결이 있다.

나의 부친은 경술년(1010년)에 거란오랑캐의 괴수 성종이 끌고 기여든 40만대군과의 싸움에서 잘못되였다. 그때 부친은 별장(정7품관의 무관)으로서 곽주성을 지키였다. 강승약패라고 병기가 취약하고 그마저 부족한탓에 군사들은 굴함없이 싸웠건만 성은 무너지고말았다.

아, 실로 원통하고 분한 일이 아닐수 없다. 고구려처럼 고려에도 적을 불지르는 《신기한 병기》가 있었더라면 거란오랑캐에게 그런 수치를 당할수 있었겠는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통탄할 일이로다.…

몇장을 또 번지니 이런 글이 안겨왔다.

… 항간에 남아있는 옛적 고서들을 찾아 읽고 많은 늙은이들을 만나보니 고구려의 《신기한 병기》들에 쓰인 보배의 륜곽이 어렴풋하게 잡힌다. 몇해동안 고심하여 마침내 그 보배가 다름아닌 염초라는것을 알게 되였고 이 손으로 그것을 구워낼수 있었다.…

아버지는 자기가 구워낸 염초의 비방을 또박또박 적은 다음 그에 대한 평도 써놓았다.

… 염초를 화살대에 매달아서 불태워 날리니 적진을 불지름에 있어서 실로 위력하기란 상상도 할수 없다. 허나 옥에도 티가 있다고 그 염초에도 부족함이 있었다. 염초가 더 빠르고 더 고르게 탄다면 보다 더 위력할게 아닌가. 지금의 염초는 빨리, 고르게 타지 못하여 센불과 센 힘을 얻지 못한다.

후세는 전세대보다 현명하다는 말이 있다. 후진들을 고무격려하려는 선대들의 뜻이 어려있는 명담이라 해야 할것이다. 마땅히 후세는 전세대를 앞서나가야 한다. 고구려의 선조들이 물려준 염초를 보다 더 위력해지도록 만드는것은 그 후손들의 응당한 도리일것이다.

이런 마음을 안고 몇해 고심하니 염초를 더 빨리, 더 고르게 태울수 있는 비방을 알수 있었다. 바로 흔한 숯, 더 좋기는 버드나무숯이나 오동나무숯을 가루낸 그것이 염초를 더 세게, 더 고르게 탈수 있게 하는 비결이였다.

수십수백번의 시험끝에 염초 8말과 버드나무숯가루 2말을 섞은것이 제일 위력하다는것을 밝혀냈다. 그것을 염초와 구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타는 약, 즉 화약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이였다. 아직은 입에 설지만 장차 그 말이 나라에 있어서 보배스런 이름으로 불리워질것이다.…

또 몇장을 넘기니 수질노와 팔우노, 뢰등석포들의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아버지가 실지 그런 병기들을 만들어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첫 눈에 그것들을 만들어내고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그날 비로소 박원작은 왜서 아버지가 노상 집을 나가 살다싶이했는지 알수 있었다.

그런데 납득되지 않는것은 화약과 《신기한 병기》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그 비방을 알고있는 아버지가 어이하여 화약을 태우는 시험을 또 하다가 그런 참변을 당했는가 하는것이였다.

그 의문은 썩 후날에 가서야 풀수 있었으니 아직까지는 그것이 수수께끼로밖에 될수 없었다.

자식의 제일 큰 도리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것이다.

그날 박원작은 아버지가 못다한 일을 기어이 해내리라 마음다지였다.

그러나 앞길은 가고싶은데로 열려지는것이 아니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니 생각밖에 임금을 가까이에서 섬겨야 하는 상사국의 벼슬이 맡겨졌다.

신하된자로서 조정의 분부를 공손히 받드는것이 충정일진데 어찌 거역할수 있단 말인가.

박원작은 임금을 모시는 일에 사소한 흠이 생길세라 온갖 심혈을 다 바치는 그속에서 틈을 내여 제 손으로 염초를 구워냈고 화약을 빚어 불태워보면서 《신기한 병기》를 만들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였다.…

염초를 퍼내다말고 우뚝 서서 자기 생각에 빠진 박원작을 지켜보다못해 돌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병마도감사님.》

거듭 부르는 소리에 생각에서 깨여난 박원작은 어색해하며 얼버무렸다.

《허… 이거 야단났군. 몇되박을 퍼냈는지 알수가 있나.》

《되박질이야 다시 하면 뭘하나요? 소인에게 주시오이다.》

《좋아.》

돌석이의 손에 되박을 넘겨준 박원작은 새로 만든 수질구궁노의 위력사격이 뜻대로 되였으니 이 기쁜 소식을 속히 조정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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