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 회)


제 5 장 사랑의 힘


7


《영숙아! 영숙아!》

수정은 앞서걷는 송영숙을 소리쳐 불렀다. 했으나 송영숙은 한번 뒤를 돌아보며 빙긋이 웃고는 그냥 산비탈로 올라갔다.

아름드리나무등걸에 발이 걸채이고 풀덤불이 우거진 산길은 험하기 그지없다.

(왜 하필 이런델 왔을가?…)

수정은 앞서가는 송영숙을 원망스럽게 흘겨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를 불렀다.

《영숙아! 같이 가자!》

하지만 아예 들은척 하지 않고 그냥 산으로 오르기만 하는 영숙이…

수정은 너무도 힘들어 풀썩 앉아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뽀얀 안개발이 펼쳐지면서 송영숙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수정은 덜컥 겁이 났다.

《영숙아!- 영숙아!-》

그는 또다시 손나팔을 불며 찾고 또 찾았다.

한동안 여기저기 헤매다가 보니 눈앞이 탁 트이면서 드넓은 꽃밭이 나타났다. 송영숙은 그 꽃밭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오가면서 한송이 두송이 꽃을 꺾고있었다.

《야! 장미꽃!》

수정은 아름다운 빨간 장미꽃을 보고 환성을 질렀다.

그는 송영숙에게 다가갔다.

《너 여기서 혼자 꽃을 꺾댔니?》

그런데 송영숙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다.

《너 왜 그러니? 고운 꽃을 꺾으면서 왜 울어, 응?》

그러자 송영숙은 눈굽을 닦으며 말했다.

《내가 이 꽃을 꺾으려구 얼마나 애썼는지 아니? 벌써 몇년째 이 산판을 헤맸단다. 넌 다 모르지?》

수정은 송영숙의 몸을 살펴보았다. 얼굴이 창백하고 몸도 쇠약했다.

《그러니 이 꽃밭을 찾느라 몸이 이 지경이 됐단 말이야?》

수정이 묻자 그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수정은 송영숙이 꺾은 꽃송이들을 만져보았다. 그런데 그의 손이 닿자마자 꽃송이들은 가루처럼 부서지는것이였다.

《영숙아! 이게 왜 이럴가? 왜 다치면 이렇게 다 부서질가? 이건 꽃이 아니구나. 다 버려! 어서!》

그러나 송영숙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야, 이건 귀중한거야. 절대로 버리면 안돼.》

송영숙은 부서진 꽃송이들을 손바닥에 주어담았다.

하는수없이 수정이도 꽃송이들을 손바닥에 주어담기 시작했다.

한동안 오락가락하다가 살펴보니 또다시 송영숙이 없어졌다. 수정은 목놓아 불렀다.

《영숙아! 영숙아!》

그런데 이번에는 목소리가 나가지 않는다.…

목이 터져라 부르며 태질하던 수정은 남편이 자기를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깨여나보니 꿈이였다.

(무슨 꿈이 이럴가?…)

수정은 다시 자려고 눈을 감았으나 꿈에서 본 송영숙의 수척해진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라 잠들수 없었다.

문득 며칠전에 만났을 때 보았던 송영숙의 상한 얼굴이 생각났다.

(혹시 영숙이가 앓아누운게 아니야?…)

수정은 자기가 살림을 꾸린 다음에는 송영숙이네 집에 발걸음이 떠졌다는것을 깨달았다.

(오늘은 잊지 말고 꼭 찾아가야겠어. 경아 할머니가 몹시 섭섭해할거야. 영숙이한테 다른 일이 없어야겠는데…)

그날 아침 문춘실은 문가에 서서 출근하는 딸의 뒤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머리수건을 눌러쓴 딸의 모습은 그의 눈뿌리를 아프게 찔러주었다.

(머리칼이 빠지는건 무슨 병일가?… 젊은 나이에 무슨 몹쓸병에 걸려서 머리칼이 다 빠질가?… 재귀열때도 머리칼이 빠진다고 하던데…)

그는 딸대신 진료소에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두 손녀를 탁아소와 유치원에 데려다준 문춘실은 그길로 진료소에 찾아갔다. 진료소에는 간호원처녀 혼자 있었다. 의사선생은 약품을 받아오려고 군의약품관리소에 갔다는것이다.

문춘실은 그냥 돌아설수 없었다.

《간호원! 내 하나 좀 묻자구. 지금두 재귀열이란게 있나?》

그의 물음에 처녀간호원은 호호 소리내여 웃었다.

《할머니, 재귀열이란건 발진티브스나 장티브스를 달리 부르는 말인데 지금은 그런 병이 아예 없어졌어요.》

《그럼 머리칼이 몽땅 빠지는건 무슨 병이요?》

《글쎄… 탈모현상도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던데…》

간호원처녀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환자의 호소 한마디를 듣고도 진단을 척척 내리고 치료해주지 못하는 자기가 미안한지 얼굴까지 붉혔다.

《저녁에 의사선생님이 오면 물어보세요. 난 잘 모르겠어요.》

문춘실은 뭔가 또 물으려다가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저녁 차수정이 찾아왔다. 자기가 만든 남새빵을 경아와 은아에게 주려고 찾아온것이다.

수정을 본 문춘실은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내 지금 봄순 에밀 찾아가려던 참이였네.》

그는 당장 울음을 터뜨릴것 같은 얼굴이였다.

수정의 가슴은 그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왜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큰엄마 왔다고 깡충거리는 아이들을 무릎에 앉힌 그는 다우쳐물었다.

문춘실은 움쭉 일어나 웃방에 올라가더니 종이꾸레미를 가지고 내려왔다. 종이에 쌓여있는 머리카락을 내려다본 수정은 영문을 몰라 눈길을 들었다.

《이게 아에미 머리칼일세. 오늘 아침에 이렇게 다 빠지지 않겠나?》

《?!》

수정은 깜짝 놀라며 문춘실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문득 새벽에 꿈에서 보았던 송영숙의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 떠올랐다.

차수정은 문춘실에게 송영숙이 언제 퇴근하는가고 물었다.

《매일 자정이 지나서야 들어오네. 거 무슨 첨가제연구를 돕는다구 저러질 않겠나?》

《첨가제연구를 돕는다구요?》

수정이 되묻자 문춘실은 아이처럼 머리를 끄덕끄덕하였다.

수정의 생각은 예민해졌다. 언제인가 송영숙이 하던 말이 상기되였다. 자기가 지금껏 연구하던것을 정의성에게 넘겨주고 첨가제를 완성시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겠다던 그의 말이 쟁쟁히 들려오는것 같았다.

결국 정의성의 첨가제연구를 돕기 위해 자기의 몸을 깡그리 혹사시키는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밤늦도록 어디에 가있대요?》

수정은 눈길을 들었다.

《글쎄 어드멘지… 매일 밤 전화는 오더라만…》

문춘실은 또다시 울상을 지었다.

이때 수정의 무릎에 앉아 동생과 발장난을 하던 경아가 《난 알아. 엄마있는데…》하였다.

《정말 엄마있는델 알아?》

수정은 아이의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경아는 머리를 까딱까딱했다. 하더니 냉큼 일어나 뽀르르 전화기앞으로 다가가 오동통한 손으로 번호를 눌렀다.

아버지가 전화하는것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전화번호를 수자로가 아니라 수자판의 음향과 순서로 기억하고있는 령리한 경아였다.

신호음이 울리다가 상대편이 송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나자 그 애는 채롱채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우리 집에 큰엄마 왔다.》

분명 송영숙이 전화를 받았음을 깨달은 수정은 경아가 들고있는 송수화기를 나꾸어채듯 하였다. 그는 대바람 큰소리로 물었다.

《영숙아! 너 지금 어디 있니. 응?… 운수직장안에?…》

수정은 더 말하지 않고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튕겨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내 가보구 오겠어요.》

문춘실이 뒤따라 일어설 때 수정은 이미 문밖을 나서고있었다.

큰길에 나선 수정은 운수직장으로 내달렸다.

어느새 그는 운수직장앞에 이르렀다. 경비실안으로 쑥 들어선 그는 다짜고짜 기사장이 어디 있는가고 물었다.

늙수그레한 경비원은 웬일인지 성난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기사장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경비실에서 나온 수정은 불빛이 비치는 창고쪽으로 총총걸음을 놓았다. 온 겨울과 봄내, 여름내 이곳에서 밤을 새웠을 송영숙의 수고가 헤아려져 가슴이 저려들었다.

(지금껏 그가 하는 일도 모르고있었으니 난 정말 한심해. 그러면서도 무슨 동무라고…)

실험실앞에 이른 그는 인기척도 없이 열려진 문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때 수건을 눌러쓴 송영숙은 창문쪽에 그린듯이 앉아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있었다. 수정은 성난듯 큰소리로 불렀다.

《영숙아!》

그의 부름에 송영숙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가엔 맑은것이 함초롬히 고여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손에 쥔것을 내보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정아! 이걸 봐! 이게 뭔지 아니? 베타인이야. 오리의 먹성을 높이는 베타인 말이야.》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속에 웃음을 지어보였다.

수정은 그가 내보이는 하얀색의 결정체가루엔 눈길을 주지 않고 야속함과 원망어린 눈길로 말없이 쏘아보기만 하였다.

이윽고 성난 얼굴로 다가서며 와락 머리수건을 벗기였다.

머리카락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머리가 눈굽을 쿡 찌르며 안겨들었다.

《영숙아!》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수정의 눈가에도 맑은것이 고여올랐다.

《수정아!》

두 녀인은 그만에야 와락 부둥켜안았다.

그들은 한동안 기쁨과 우정에 겨워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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