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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4일

평양시간


(제 43 회)


제 4 장 불타는 지향


8


리병우는 점심시간에 차수정의 집으로 떠났다.

기사장의 곡진한 당부대로 수정과 다시 가정을 합쳐야겠다고 굳게굳게 마음다진 리병우였다.

벌써 몇번이나 집에 찾아와 생활적인 애로를 풀어주고 털단백질먹이연구에서 성공하도록 힘을 주고 지혜를 합쳐준 송영숙기사장의 지극한 마음을 봐서라도 수정을 찾아가는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며칠전에도 집에 찾아와 김치도 담그어주고 방인화편에 부식물감도 보내주며 이모저모로 마음써준 기사장이다.

언젠가는 봄순이에게 새 구두도 안겨주면서 친언니의 정을 부어주고 그의 생활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살펴주기도 했다.

리병우에게는 기사장의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수의사동지! 수의사동지도 남자지요? 동지가 먼저 수정이를 찾아가보세요. 아마 그 애 마음도 달라질거예요.…

수정인 참 좋은 동무예요. 나와 친형제나 다름없답니다. 겉보기엔 매정하구 깔끔하지만 마음은 결곡하구 또 티없이 깨끗하지요. 이름처럼 수정같이 맑은 동무예요. 로동에도 성실하구요. 난 수정일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마 그만한 녀성도 쉽지 않을거예요.

래일이라도 꼭 찾아가보세요. 봄순이를 위해서라도 말이예요. 자존심때문에 그러나요? 아이참! 자존심이 무슨 필요예요?

내가 지금껏 살아보니 부부간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사이엔 자존심이 독약이더군요. 자존심과 리기주의는 사랑의 빛갈을 흐리게 한댔어요.…》

그는 매번 이렇게 따뜻이 권고했다.

몇번 지내보니 기사장은 인정이 남다른데다가 정열적이면서도 무한히 허심한 녀성이였다. 기사장의 진정을 느낄수록 그의 당부를 거역하는것이 죄되는 일처럼 생각되였다.

리병우는 드디여 수정을 만나리라 결심을 굳히게 되였다.

하지만 수정의 집이 가까와질수록 발걸음은 점점 떠지였다. 리병우는 기사장의 당부대로 딸자식의 행복을 위해 이보다 더 험한 길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기자신을 고무하였다.

용기를 가다듬으며 걸음을 옮기는 그의 눈앞에는 봄순이와 진철이의 얼굴도 떠올랐다.

아버지를 홀로 두고 시집을 안 가겠다는 봄순의 말이 결코 빈소리가 아님을 깨달은 진철은 요즈음 우울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심드렁해지다못해 멍청해지기까지 했다. 볼이 훌쭉해지고 양기를 잃은채 땅만 내려다보고 다녔다. 묻는 말에도 왕청같은 대답만 했다.

총각의 정상이 이러하니 봄순이도 요즈음엔 종금직장으로 오는걸 꺼려했다. 그의 마음고생도 여간아닌지 그 밝던 얼굴도 점점 어두워졌다.

다른 처녀라면 남편될 사람과 함께 아들겸 사위겸 친정부모를 모시고 살수 있지만 진철이의 경우는 달랐다. 영예군인부부의 외아들인 진철에게는 량부모를 모셔야 할 의무가 있었다.

리병우는 딸자식과 진철의 가슴에 상처를 남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용기를 가다듬고 걸음을 다우쳤다.

어느덧 수정의 집앞에 이르렀다.

그는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안고 주저주저하며 마당에 들어섰다. 그런데 출입문에는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점심시간인데 어딜 갔을가?…)

리병우는 엉거주춤 문앞에 서있었다.

《보급원을 만나자구요?》

불쑥 말을 건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다보니 옆집녀인의 갱핏한 얼굴이 줄에 널려있는 빨래들짬으로 내다보였다.

자기 집 마당에 빨래를 널면서 수정이네 집 마당가로 들어서는 리병우를 빤히 지켜보고있던 그 녀인은 갤쭉한 턱을 쳐들며 호기심 많은 눈으로 말을 건늬였다.

리병우는 끄덕이는지 가로 젓는지 분명치 않게 머리를 주억거렸다.

《아침에 자전거타구 나가던데요? 이제 오겠지요 뭐.》

녀인은 눈을 반짝이며 그냥 쳐다보았다.

그 눈길앞에서 리병우의 마음은 더욱더 당황해지고 불안하기까지 하였다. 괜히 찾아왔다는 후회감까지 생겨났다.

집안에서 누군가 찾는 소리가 들려서야 옆집녀인의 얼굴은 빨래짬사이로 사라졌다. 그만에야 리병우는 후 한숨을 내그었다. 녀인들앞에 서면 몸도 마음도 다같이 과다지는 그였다.

리병우는 자물쇠가 걸린 출입문을 쳐다보며 어깨를 푹 떨구었다.

(일이 안될 징조구나.…)

더이상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이때 째릉째릉하며 자전거종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눈길을 돌려보니 수정이 소로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오는것이 보였다. 또다시 가슴이 후두두 뛰였다.

(이제야 오는구나. 날보구 뭐라구 할가?…)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자전거는 마당에 들어섰다.

《어떻게 왔어요?》

수정은 자전거에서 내리며 깔끄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하더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전거바구니에서 책을 꺼내였다.

《아유, 덥다!》

그는 책을 꺼내다말고 총총걸음으로 문앞에 다가가 자물쇠를 잘칵- 소리내며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탕탕탕 소리를 내며 아래웃방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그는 부엌으로 내려와 물 한바가지를 떠가지고 소리내여 마시였다.

리병우는 엉거주춤 마당가에 서서 수정을 쳐다보며 이 무더운 날 군출판물보급소에서 새 도서를 받아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탈탈탈 끌신을 끌고 다시 마당가로 나온 수정은 자전거바구니에서 책을 한권두권 꺼내들며 할끔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때문에 왔어요, 예?》

그의 물음에 리병우는 입안의 침이 바짝 말라드는것을 느끼였다.

《도서주문때문에 그러는가요?》

차수정은 다시 물었다. 그는 리병우가 결코 그 일때문에 온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그냥 아닌보살하였다.

《지난해 예약했던 신문과 잡지는 이번에도 그냥 보도록 하겠어요. 그럼 되겠지요? 예?》

태연하게 묻고 말하는 그앞에서 리병우는 너무도 면구스러워 빠질빠질 진땀만 흘렸다.

(제길… 뭣때문에 왔다는걸 잘 알면서두 저런다니까.…)

그는 바지주머니를 더듬어 담배곽을 찾아쥔 다음 토방에 걸터앉았다.

그러는새 수정은 책을 한아름 안고 또다시 집안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그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리병우는 아래웃방문이 활짝 열려진것을 보고 들어갈가하며 엉뎅이를 들썩했다가 용기가 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부엌에서는 물소리와 그릇 부시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리병우는 수정이 지금 한창 점심을 먹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밉긴 미운게구나. 날 밖에 두고 혼자 밥을 먹는걸 보니… 할수 없지. 미운 사람과는 죽어두 못산다는데…)

그는 한숨을 내그으며 움쭉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될것 같다고 생각한 그는 스적스적 대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수정의 목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빨리 들어와 점심식사를 하세요.》

《?!》

리병우는 눈을 꺼벅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유! 빨리 들어오지 않구 뭘해요? 배고파 죽겠는데…》

차수정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였다. 그러나 별로 랭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딴사람에게 하는 말인가 하여 주위를 두릿거리던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아래방엔 밥상이 놓여있었다. 수저를 들고 밥상앞에 앉아있던 수정은 집안에 들어서는 리병우를 힐끔힐끔 가로보더니 제먼저 수저를 들었다.

리병우는 주눅이 든 얼굴로 겨우 밥상앞에 다가앉았다.

빨간 실고추와 동그란 파잎이 동동 뜨는 오이랭국을 보니 어쩐지 목이 꺽 메여왔다. 그러거나말거나 수정은 례사롭게 찬그릇을 밀어놓아주면서 부지런히 밥을 먹었다.

리병우는 오이랭국을 한술 떴다. 향기롭고 시원한 랭국이 식도를 거쳐 온몸에 퍼지면서 기운을 부쩍 돋구어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그는 격전장에 나선것만치나 비장한 얼굴로 힘겹게 말꼭지를 떼였다.

《내가 당신을 잘 대해주지 못했소. 본래 못난 놈이니 리해해주오. 기사장의 당부도 그렇구… 어떻든 기사장 말대루 이제라도 다시 살림을 합치는것이 어떤지… 오늘이라도…》

끙끙 갑자르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가던 그는 수정이 할끔 가로보는 바람에 자라목이 되고말았다.

《아이참! 기사장이 나와 무슨 상관이예요? 됐어요! 그런 말은 듣고싶지도 않으니 어서 식사나 하세요. 난 바빠서 빨리 나가야 해요.》

수정은 눈살을 찌프리며 말했다.

어깨가 오그러든 리병우는 하는수없이 밥술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는 입소리를 죽여가며 조심스럽게 수저를 놀리였다. 그러나 밥그릇을 절반쯤 내고는 밥상에서 물러앉았다.

《왜요? 왜 마저 들지 않구?》

수정이 밥사발과 리병우를 번갈아보며 마뜩지 않은 투로 물었다.

리병우는 그저 머리만 저었다. 그는 무슨 말이든 더 할가 하다가 이번에도 무자비하게 언권을 뺏기리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내 혼자서는 안되겠어. 래일이라도 봄순이 큰에미와 다시 오든지…)

문득 기사장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머리를 저었다.

(바쁜 기사장한테 그런 수고까지 시키면 안되지.…)

그는 잘 먹었다는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린 다음 움쭉 몸을 일으켰다.

리병우는 그때 차수정이 문가에 서서 마당을 나서는 자기의 뒤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고있는줄 모르고있었다.

흰 반소매샤쯔의 등뒤가 약간 들리운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던 수정은 얼른 뛰여나가 옷자락을 반듯이 당겨줄가 하다가 머리를 저었다.

(사람이 어쩌면 저리도 못났을가?…)

그는 리병우의 뒤모습을 흘겨보았다. 그의 모습이 대문밖으로 사라진 다음에야 수정은 점심상을 거두었다. 리병우가 절반쯤 남긴 밥그릇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은 아릿해졌다.

(식사를 다 하라고 왜 따뜻이 말하지 못했을가… 그냥 따벌처럼 쏘아주고 고양이처럼 허벼줄줄만 알구 인정스러운데라군 꼬물만큼도 없으니 누군들 나를 좋아하겠어. 분명 영숙이가 보내서 왔을텐데…

이번에도 수의사를 랭대해서 보낸걸 영숙이가 알면 또 섭섭해할테지? 힘들게 찾아온 사람인데… 난 못된년이야, 못된년이구 말구.…)

그는 자기자신이 막 저주스러웠다. 서글퍼지는 마음으로 그릇을 가시던 수정은 그 누군가의 독촉이라도 받은것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방안으로 들어간 그는 이불장뒤쪽에서 보자기를 끄집어내여 방가운데 쭉 펴놓았다. 그다음 옷장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옷가지들을 보자기우에 훌훌 내던지였다.

옷가지들을 크게 꿍져놓은 다음에는 이불이며 그릇가지들도 서둘러 꾸려놓았다. 삽시에 온 방안은 이사가는 집처럼 어수선했다.

한동안 오락가락하며 짐을 다 꾸려놓은 수정은 방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느닷없이 왈칵 설음이 북받쳐올랐다. 그는 이불보따리에 엎드려 어깨를 떨었다. 까닭없는 설음에 실컷 울고난 그는 흑흑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수의사랑 집식구들 모두다 불쌍하게 해주지 않을테야. 그리구… 그리구 다시는 그 집에서 나오지 않겠어. 아무리 미워해두 죽을 때까지 그 집에서 살테야. 수의사가 하는 일도 힘껏 돕고…》

그날 저녁 리병우는 실험에 열중하다가 늦어서야 퇴근길에 올랐다.

별로 집에 가고싶지 않아 슬렁슬렁 직장을 나섰다. 낮에 방인화를 만나려고 가공직장 정문앞에까지 갔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돌아선 그였다.

수정을 만나보니 방인화와 함께 찾아간다고 해도 마음을 돌릴것 같지 않았다. 더우기 방인화가 입에 보풀이 일도록 찾아가보라고 말할 때 나 죽었소 하고 제 생각만 하던 자기가 아닌가.

그러다가 지금처럼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움쭉 일어나 제켠에서 함께 가자고 부탁하기가 면구스러웠다.

하면서도 기사장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래일쯤엔 기사장이 또 찾아올텐데 뭐라구 할가.…)

집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는 본처를 원망하였다.

(먼저 가더라도 봄순이를 시집보내고나 갈것이지… 나에게 이런 길을 걷게 하다니… 봄순인 또 얼마나 불쌍하고…)

어느덧 집마당에 들어선 그는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부엌창문가에 불빛이 환하고 칼도마소리까지 들리는걸 보니 오늘은 봄순이가 먼저 들어와 저녁을 짓는 모양이였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출입문을 열었다.

다음순간 리병우는 깜짝 놀랐다. 그는 문가에서 우뚝 굳어졌다. 뜻밖에도 차수정이 부엌에 앉아있었던것이다. 집을 헛갈려 또다시 그의 집에 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분명 자기 집이였다.

그는 문손잡이를 잡은채 들어가야 할지 나가야 할지 몰라 그냥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였다.

수정이 되려 제편에서 눈을 흘겼다.

《왜 그러구 섰어요? 빨리 들어오지 않구?…》

수정의 재촉을 받고서야 리병우는 어정어정 방안에 들어섰다.

그는 한켠에 쌓인 짐보따리들을 보고 모든것을 짐작하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앉아야 할지 서있어야 할지 몰라 또다시 서성서성하였다.

이때 수정이 방안으로 들어오며 샤쯔를 벗으라고 말했다.

리병우가 머뭇거리자 어렵지 않게 다가서서 그의 웃단추까지 벗기기 시작했다. 하면서도 잔뜩 골살을 찌프리며 흘겨보는것이였다.

《아유! 이 냄새! 퀴퀴한게 어디… 언제봐야 이 모양이라니까.》

그는 꼭 장난꾸러기 아들애를 꾸짖듯 하였다.

사실 리병우의 옷에서는 늘쌍 오리털과 땀내가 섞인 불쾌한 냄새가 났고 목깃에는 기름때가 반질거렸다. 봄순이가 제아무리 알뜰하게 빨래하고 자주 옷을 갈아입혔어도 오리털냄새와 시약냄새가 몸에 배인데다가 덜퉁한 습관때문에 그는 항상 불결하였다.

리병우의 샤쯔를 벗겨든 수정은 씽 부엌으로 내려갔다. 수도가에 앉아 빨래를 하면서도 무슨 불만이 그리도 많은지 그냥 혀를 찼다.

《옷을 좀 깨끗이 입구 다니라요. 남들이 뭐라구 하겠어요? 음…》

그의 말과 행동에는 곰살스러운데가 조금도 없었다.

리병우는 방안에 서서 수정을 기웃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저 녀자는 원래 자기의 사랑과 정을 저런 식으로 표현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시뭇이 웃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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