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 회)


제 4 장 불타는 지향


7


해마다 6월이면 출판물보급원들은 하반년 출판물예약사업으로 눈코뜰새없이 뛰여다녀야 한다.

직장, 작업반별로 신문과 잡지를 비롯한 정기간행물의 수요를 장악하고 예약금을 받아들이고 또 통신원들에게 넘겨줄 송달문건도 작성해야 하였다. 공장, 기업소의 보급원들은 공장도서실 사서를 겸임하고있기때문에 새로 나온 도서도 신속히 보급하는 한편 독자들에게 책도 빌려주고 또 받아들이기도 하느라 종일 뛰여다니였다.

오늘도 차수정은 출판물예약금을 받아들인 다음 군보급소에 나갔다오느라 점심식사마저 잊고 뛰여다녔다.

생산직장에 새로 온 젊은 기사가 잡지 《축산기술》과 《기술혁신》을 더 요구했기때문이였다.

공장의 기술자들을 위해 책 한권이라도 더 배정받으려고 뛰여다니는 차수정을 보고 군출판물보급소 일군들은 탄복을 금치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요구한대로 잡지의 부수를 더 늘여주었다.

송달문건까지 작성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수정의 온몸은 나른했다. 한두시간 푹 쉬고나면 기운이 생길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내로 예약금을 총화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금 공장도서실로 걸음을 돌렸다.

도서실에 들어선 그는 예약금계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 때 딸랑딸랑 방울같은 전화종소리가 울려왔다.

《보급원입니다. 말씀하세요.》

그는 눈길을 계산서에 박은채 상대방에게 말했다.

문득 귀전에서 송영숙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전에 보급소에 갔댔다지? 찾아가니 네가 없더구나. 바쁘겠지?… 아무리 바빠두 여기에 좀 와야겠어. 지금은 내가 방을 비울수 없어서 그런다. 기다리겠으니 빨리 와!》

송영숙은 이렇게 말하고는 제켠에서 먼저 송수화기를 놓았다.

성난것 같기도 하고 어떤 슬픔에 잠긴것 같은 그의 목소리를 음미해보며 수정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무슨 일일가?… 어머니가 갑자기 앓아누운게 아닐가? 그렇다면 빨리 집에 가보라고 할텐데…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차수정은 의문을 안고 도서실을 나섰다.

송영숙은 방에 혼자 있었다.

《왜 갑자기 호출령을 내렸니? 무슨 일이라두 생겼니, 응?》

수정은 송영숙의 얼굴색부터 살피며 물었다.

다음순간 우뚝 굳어졌다. 원망과 노기가 담겨진 송영숙의 큰 눈이 자기를 쏘아보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의 눈가에 적의까지 담겨진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성이 난것을 처음 본 수정은 그만 당황해지기까지 했다.

《자! 이것 봐!》

송영숙은 책 한권을 그앞에 던져주었다.

수정은 자기앞에 던져진 책을 내려다보았다. 한달전에 나온 잡지 《생물학》이였다. 오래된 책처럼 보풀이 일고 표지의 웃부분에 자기의 필체로 씌여진 《리병우》라는 이름을 보고서야 그는 이 잡지때문에 그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응?》

송영숙은 대뜸 따지듯 물었다.

수정은 그만 무안하여 입술을 실그러뜨리며 눈길을 떨구었다.

《난 네가 지금껏 자기의 본신임무만은 훌륭하게 수행한다고 믿었어. 그런데 이게 뭐야? 뭣때문에 잡지를 예약한 사람에게 직접 가져다주지 않구 이렇게 휴지장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게 하는거니? 응?》

《…》

《그래 보급원의 임무가 뭐니?… 그리구 새책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심정을 네가 모른단 말이야? 어쩌면 이렇게까지 무책임한가 말이다.》

송영숙의 어조는 여전히 노기에 차있었다.

수정은 다시금 입술을 실그러뜨리며 그냥 눈길을 떨구었다.

사실 수정은 리병우수의사가 예약한 도서가 나오면 그를 만나지 않고 종금직장장이나 다른 사람에게 주면서 전해달라고 맡기군 했었다.

그런데 전번에는 누구에게 주었던지 아예 생각나지 않았다. 책임적으로 전달하지 않은게 분명했다.

(하필 이 책이 영숙의 눈에 띄울건 뭐람…)

차수정은 속으로 운수나쁘게 되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송영숙의 앞에 자기의 무책임성을 사죄하고싶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리병우와는 더 맞서고싶지 않았기때문이였다.

그의 속생각을 꿰뚫어본 송영숙은 안타깝게 말했다.

《나두 네 심정을 모르는게 아니야. 하지만 수의사야 우리 공장이 떠받들어야 할 기술자가 아니야? 더우기 넌 리병우수의사가 지금 무엇을 연구하는지 잘 알구있겠지?》

《…》

잠시 말을 끊었던 송영숙은 창문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난 오늘 종금직장 알생산에 대해 알아보려구 거기에 나갔다가 직장경비실에서 딩굴고있는 이 책을 보았어. 누구도 받았다는 사람이 없더구나. 그래서 이름이 씌여진대로 수의사를 찾아갔어. 실험과 연구에 열중하고있을 수의사를 말이야. 그런데 수의산 시험호동에 없더구나.

관리공들에게 물으니 부업밭에서 보았다지 않겠니? 다시 부업밭에 나가보니 수의산 풋배추구럭지를 들구 집으로 가더구나.

직장장 하는 말이 봄순이가 요즘은 바빠해서 수의사가 때식을 하면서 집짐승까지 돌보느라 연구시간도 내기 힘들어한다더구나.

수정아! 넌 그래 생각되는게 없니?》

안타까움에 젖어있는 그의 말에서 수정은 욱 치미는 반발심을 느끼였다.

그는 보풀이 난 잡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말대루 책보급을 무책임하게 한건 내 잘못이야. 거기에 대해선 할말이 없어. 하지만… 그 사람의 연구시간과 집살림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니? 응?》

그의 반발심은 눅잦혀졌던 송영숙의 노기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창문쪽을 향해 서있던 그는 수정에게로 홱 돌아섰다.

《관계없다구? 아니! 수의사의 생활은 우리모두와 관계되는 일이야. 왜냐면 그 사람은 지금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공장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낮과 밤이 따로없이 자기의 피와 땀을 다 바쳐가며 연구를 하기때문이야. 그런데 관계없다구?…》

《…》

《그래 넌 이 땅을 위해 무얼 바쳤니? 낳아주구 키워준 이 땅을 위해 무얼 바쳤는가 말이야. 나라에선 그 어려웠던 고난의 시기에두 우릴 가금전문가로 키워주었어. 그런데 넌 지금 오직 너 하나, 자기만을 위해 살구있지?》

송영숙은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준절히 말했다. 높뛰는 심장의 박동으로 그의 풍만한 가슴은 더욱더 부풀어올랐다.

무섭게 성을 내며 무섭게 다그어대는 그앞에서 차수정은 할말을 찾지 못했다. 얼마후에야 한풀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옳아! 네 말대루 난 이 땅에 조금두 바친게 없어. 하지만… 사랑과 정은 총칼로써도 어쩌지 못한다는걸 너두 모르진 않겠지? 그러니 이젠 수의사문제를 더 강요하지 마!》

《아니! 난 더 강요해야겠어.》

송영숙의 두눈에서는 강렬한 빛이 발산되였다.

《왜냐하면 그건 어느 누구의 개인생활에 한한게 아니라 공민의 의무이기때문이야.

우린 지금껏 애국자들이 흘린 피와 땀의 대가로 살아왔어.

그러나 한생 그 혜택속에서만 살수 없지 않아? 공민이라면 누구나 이 땅을 위해 자기의 피와 땀도 바쳐야 하지 않겠니?

난 절대로 너와 한 기술자의 운명을 강건너 불보듯 하지 못하겠어.》

송영숙의 목소리는 여전히 맵짜고 절절했다.

그의 말에 수정은 다시 발끈 성을 냈다.

《그럼 좋아! 나야 원래 매집이 좋은 녀자니 실컷 때리구 찔러봐! 실컷!》

그는 야멸차게 뇌까린 다음 홱 돌아섰다.

도서실로 돌아온 그는 오래동안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송영숙의 방을 나섰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뭇매질을 당한 가슴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는듯 그냥 쓰리고 아팠다.

아픔이 클수록 송영숙에 대한 원망과 노여움은 점점 커갔다.

(흥! 남한테 말하기야 쉽지. 하지만 내 마음을 제가 알게 뭐야?… 달라졌어! 자기 행복에 도취돼서 남의 슬픔을 몰라.… 아무렴 남의 불행이 제 고뿔만 할가? 나한텐 동무가 없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앉아있던 그는 어슬어슬 땅거미가 질무렵에야 몸을 일으켰다. 분한 생각에 배고픈 생각도 없었다.

노상 묵은 밥에 한두끼 건느는것쯤은 보통이였다. 지금은 그저 모든 슬픔을 다 잊고 그냥 자고싶었다.

기다리는 사람도, 반겨맞는 사람도 없는 집에 들어가선 뭘하랴.

빈 집에 들어가 아침에 지었던 밥이나 한술 먹고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밖을 나서던 수정은 누군가 자기 앞으로 곧추 다가서는통에 깜짝 놀랐다.

《누구예요?》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몸매다부진 웬 청년이 꾸벅 인사를 하며 한발자국 다가섰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사실은… 퇴근한줄 알구 집에 찾아갔더니 문이 걸려있어서…》

청년은 몹시 쭈빗거렸다.

차수정은 마음속으로 어느 열성독자가 책때문에 찾아왔으리라고 생각했다. 요즈음엔 집에까지 찾아와 도서를 예약하거나 주문하는 독자들의 수가 더 늘어났다. 그때마다 자기 사업에 대한 긍지와 기쁨을 더 크게 느끼는 그였다.

(정보산업시대인 오늘 보급원은 과학자, 기술자들의 당당한 길동무가 돼야 해.)

하지만 송영숙에게서 아픈 말을 들은 지금은 모든것이 시답지 않았고 밤중에 찾아온 이 독자도 별로 반갑지 않았다.

《그래 무슨 책을 예약하려 그래요?》

흥심없는 그의 물음에 청년은 뒤더수기를 긁었다.

《전… 책때문에 온게 아닙니다.》

《?!》

《전 보급원동지한테 봄순동무에 대한 말을 하자구 왔습니다.》

청년의 입에서 봄순의 이름이 나오자 차수정의 신경은 날카로와졌다.

(오늘은 종일 수의사와 그 집일때문에 머리아픈 날이구나.…)

수정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그었다.

《동문 누구예요? 동문 자기 소개도 할줄 모르나요?》

차수정의 깔끄러운 어조에 몸매 다부지고 두눈이 억실한 그 청년은 종금직장 수리공 진철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수리공 진철이?…)

누군가에게서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여전히 랭랭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봄순이 말을 나한테 하겠다는거예요? 내가 봄순이와 무슨 상관이게요?》

부러 랭정하고 매몰차게 내뱉는 그의 말은 인화성이 강한 청년의 가슴에 불을 지펴주었다. 지금껏 머뭇거리던 그답지 않게 허리를 쭉 펴고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보급원동진 잘 모를수 있지만 저와 봄순동문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전 그 동무의 아버지와 한직장에서 일하면서 봄순동무가 효성이 지극하구 또 성실한 동무라는걸 알구 결혼하려구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문 요즘 결혼할수 없다면서 나를 피해다닙니다. 사연을 물어보니 혼자 사는 아버지를 두고는 시집가지 않겠다는겁니다.

그런데 나에게도 영예군인인 우리 부모님들을 모셔야 할 의무가 있단말입니다. 그래서…》

청년은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격한듯 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보급원동지를 만나 이 사연을 털어놓구 도움을 받자고 생각했던겁니다.》

《…》

《보급원동지!》

청년의 눈빛에 애원이 비끼기 시작했다.

《저와 봄순동무의 앞날은 보급원동지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리구… 봄순동무의 아버진 참 좋은분입니다. 전 수의사동지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분은 오직 연구사업과 일밖에 모르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한동안 갑자르며 서있던 청년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처음처럼 꾸벅 인사하고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수정은 서있던 자리에 뿌리가 내린듯 오래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쩐지 자기자신도, 어둠속으로 사라진 그 청년도 모두 가엾게 생각되였다. 그는 맥없이 주저앉아 별많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만에야 그는 쓸쓸한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던 그는 류다른 온기를 느끼였다. 부엌에서는 구수한 냄새까지 풍겨왔다.

부엌에 들어선 그는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밥가마안에는 그가 좋아하는 만두국에 당콩밥이 따끈따끈하게 들어있었다. 부뚜막우엔 갓나물김치와 버섯볶음도 먹음직하게 놓여있었다. 가뭇없이 사라졌던 식욕이 부쩍 동해났다. 점심식사마저 건는데다가 이제는 늦은 저녁이였다.

(경아 할머니가 왔댔구나!)

문춘실이 이따금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찾아오군 하던 일이 떠올랐다.

문득 친어머니의 따스한 정이 사무치도록 안겨와 눈앞이 뿌잇해졌다. 눈을 슴뻑이며 수저를 찾던 수정은 보온병옆에 놓인 종이장을 띄여보았다.

송영숙의 아담한 글씨가 눈가에 확 안겨들었다.

《수정아! 아픈 네 마음에 매질을 한 나를 용서해라.

그러나 내 마음을 리해하리라 믿는다.

수정아! 아무리 바빠도 식사시간은 꼭 지켜라. 홀몸에 앓으면 어쩌겠니? 그리고 난 진정으로 너의 행복을 바란다.

너를 기다리다가 생산지휘가 바빠서 그냥 간다. 영숙》

수정의 눈앞은 뿌잇하게 흐려졌다. 이윽고 눈가에 고여올랐던 맑은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송영숙의 필체가 씌여진 하얀 종이장우에 꽃무늬가 점점이 새겨지기 시작하였다.

수정은 점점 더 세차게 북받치는 우정에 겨워 종이장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송영숙이 앞에 있기라도 하는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동무라면서 날 계속 울리기만 하누나.… 흥! 이게 다 고양이 쥐생각이지 뭐야?… 고양이 쥐생각이구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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