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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108(2019)년 8월 22일

평양시간


(제 21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8


시험호동을 나선 송영숙은 또다시 무대우에서 멋진 연기를 마치고 휴계실에 들어선 배우의 심정이였다.

벌써 두번째 연기였다. 처음 공장에 와서 뜻밖에도 정의성을 만났을 때 지배인이며 청년직장장 그리고 그곳 관리공앞에서의 연기였고 오늘은 서정옥이와 리봄순앞에서의 연기였다.

그 연기는 사소한 실수나 어색한것이란 조금도 없는 세련되고 성공한 연기였다. 그러나 돌이켜볼수록 송영숙의 마음은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무대》에는 두사람이 나섰는데 자기만이 열심히 연기를 하였을뿐 정의성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송영숙을 비웃고 조롱하는듯 하였다.

(나는 왜 사람들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숨기는가? 기사장의 체면때문에? 하다면 나에겐 정동무에 대한 좋은 감정뿐인가?…)

어느덧 그의 걸음은 새끼오리입사준비로 들썩한 새끼오리호동으로 향해졌다.

새끼오리에게 줄 첫 먹이를 조리하는 관리공들의 경쾌한 칼도마소리와 록음기에서 울리는 흥겨운 음악으로 호동안은 명절분위기였다.

잠시후 누군가 《새끼오리가 온다!》하고 소리쳤다.

관리공들과 수리공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알깨우기직장쪽에서 달려오는 자동차를 바라보았다. 자동차가 호동앞에 멎어서자 모두가 새끼오리가 바글바글한 상자들을 내리여 호동안으로 들여갔다.

알에서 까나와 처음으로 푸른 하늘을 보며 호동에 실려온 병아리들은 어리둥절 놀랍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지 《좋구나! 삐용삐용…》, 《참, 좋지! 삐용삐용…》하면서 자기들의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

바닥이 따끈따끈한 호동안에 수천마리의 병아리를 들여놓은 관리공들은 첫 먹이를 뿌려주었다. 노란 털이 포시시한 대가리며 몸뚱이에 무엇인가 떨어지자 병아리들은 조건반사를 일으키며 뾰조롬한 주둥이로 그것을 쪼아먹었다.

맛있는 먹이를 처음으로 먹어본 병아리들은 또다시 《맛있다! 뿅뿅…》, 《더 먹자! 뿅뿅…》하며 청고운 노래를 합창하였다.

명절분위기로 흥성거리는 호동안의 분위기는 송영숙의 생각을 가금과의 인연을 맺게 해준 머나먼 그 시절로 이끌어갔다.

어느 한 전연구분대 군의의 막내딸로 태여난 송영숙은 어릴 때부터 집짐승들을 무척 고와하였다.

아버지의 학구적이고도 진취적인 성격에 북관녀인인 어머니의 강한 승벽심과 열정적인 성격을 다같이 물려받은 어린 계집애는 남달리 고집이 센데다가 꿈도 많았다.

그에게는 처녀시절 유치원교양원이였던 어머니가 발풍금을 타며 들려주는 《도레미… 형제》들의 색갈고운 음악보다 돼지며 닭, 오리와 누렁이의 울음소리가 더 좋았다.

점점 커갈수록 그에게는 맛있는 닭알과 오리알을 낳는 가금들의 세계가 더더욱 신기하기만 하였다.

(한입에 쏙 들어가는 닭알이 아니라 사과나 배처럼 큰 알을 낳게 할수는 없을가?… 하루에 한알이 아니라 아침에도 저녁에도 계속 알을 낳는 그런 닭은 정말 없을가?…)

남다른 꿈과 포부를 안고 자라난 소녀는 학교를 졸업한 다음 부모가 바라는 음악대학이 아니라 수의축산대학으로 떠났다.

그는 희망대로 가금학부에 당당히 자기의 이름을 올렸다.

대학교정에서 처녀의 꿈은 더욱 커갔다.

《가금의 성장촉진제!》

생산성과 알낳이률을 높일수 있는 성장촉진제는 그가 대학시절부터 연구를 거듭하여온것이였다.

송영숙은 3대혁명소조생활을 시작한 그 다음해에 이 성장촉진제를 완성하고 현실에 도입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고 드디여 론문으로 발표하였다.

그런데 한 연구사청년으로부터 래일이 없는 구세기의 론문으로 락인되여 기각당하게 될줄이야.…

처음 송영숙은 절벽에 이마를 쪼은듯 눈앞이 아뜩해졌다. 그다음엔 분노 그리고 수치감…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연구사청년의 론거를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리고 오늘의 시대적인 높이에 올라서서 과학과 기술을 대하는 청년의 학구적인 자세와 함께 그의 명석한 두뇌와 랭철한 판단력앞에 무력해지는 자신을 느끼였다.

사람은 결코 부드럽고 따뜻한 말에서만 신뢰를 느끼는것이 아니라 가혹하고 무자비한 말에서도 신뢰를 느끼는 법이다.

송영숙의 마음속에서는 점차 그 청년에 대한 존경심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주 만나 학구적인 이야기를 나누군 하였다. 《전자시계》로 불리우는 그와 함께 래일의 축산업과 가금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고 새 책을 주고받으며 독후감도 토로했다.

지내볼수록 정의성은 시대를 보는 눈이 높았고 리상도 꿈도 많은 청년이였다. 취미며 습관도 모두 훌륭하였고 매혹적이였다.

송영숙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전자시계》와 친숙해졌고 떨어질수 없는 사이가 되였음을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정의성이 뜻밖에도 그가 있는 알깨우기직장으로 찾아왔다.

《래일은 일요일인데 우리 같이 바다가에 놀러가지 않겠소?》

《바다가에요?》

송영숙의 큰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였다.

규칙적이고 정돈된 생활을 추구하던 정의성이 정해진 독서시간에 찾아온것도 놀라운 일이였지만 그가 내놓은 제안 또한 놀라운것이였다. 유희나 오락과는 등을 돌리고 독서와 실습, 실험밖에 모르던 이 《전자시계》가 갑자기 꺼꾸로 돌기 시작하였나?

깜짝 놀라서 쳐다보는 처녀앞에서 총각은 매혹적인 손동작으로 멋지게 앞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동무가 싫다면 할수 없지요. 그리구 바쁘다면야…》

그제야 송영숙의 눈동자가 반짝이였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끄떡이였다.

《바쁜건 사실이예요. 하지만 제때에 휴식하는 사람이 많은 일을 한댔어요. 좋아요! 가자요!》

처녀는 정열적으로 호응해나섰다. 자기들 두사람의 일요일계획이 수정을 노엽힐수 있다고 생각한것은 그후였다.

《흥! 날 쏙 빼놓구 너희 둘만 바다에 간다는거지? 알만 해!》

수정은 팩해서 돌아앉았다.

송영숙은 속상해서 그만 울상이 되였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떨어질줄 모르던 그를 무슨 말로 리해시켜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였다.

《다음엔 꼭같이 가자꾸나. 그 동무의 오토바이는 2인용이 아니니? 그러니 어떻게…》

하지만 수정은 어거지 센 아이처럼 홱홱 머리를 내저었다.

《됐어! 됐어! 이젠 알만 해!》

그러나 다음날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이것저것 음식감을 마련해주었다. 하면서도 그냥 톨톨거리며 눈을 할기죽거렸다.

정작 정의성이 찾아왔을 때는 언제 그랬던가싶었다. 그는 제법 막내딸의 나들이를 바래주는 친정어머니처럼 바다에서 지켜야 할 주의사항에 대하여 차근차근 강조하면서 그들을 바래주었다.

《영숙아! 정동무 허릴 꼭 안아라. 절대 놓으면 안돼!》

그들이 탄 오토바이는 바다를 향하여 질풍같이 내달렸다.

바다가의 하루는 참으로 즐거웠다.

그들은 아이들처럼 동심에 잠겨 흰 파도를 따라 뛰여다니기도 하고 해당화 곱게 피여난 백사장에 나란히 앉아 푸른 물결 춤추는 바다를 바라보며 노래도 불렀다.

바다가에 노을이 피여날무렵 그들은 조개를 넣은 어죽도 끓였다. 솔나무그늘아래서 모락모락 피여오르던 하얀 연기…

《난 앞으로도 영숙동무가 해주는 식사를 하고싶구만.》

송영숙이 떠주는 따끈따끈한 어죽을 받으며 정의성이 의미있는 눈길로 말했다. 그 말에 처녀는 쑥스러운 웃음만 머금었다.

《영숙동문 앞으로 소조생활을 마치면 어떻게 할 결심이요?》

식사를 마치고 모래불에 나란히 앉았을 때 정의성이 물었다.

《나야 가금학을 배웠으니 그저 그 부문에서 일해야지요.》

《그래 동문 연구소에 가려는거요?》

그는 진지한 눈길로 물었다.

그의 물음을 들으며 송영숙은 그가 바다가로 온것이 바로 이런 문제를 토의하고싶어서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연구소엔 가지 않겠어요. 연구를 해두 현실에서 하자는거예요. 요즈음엔 닭공장에 아예 남을 생각도 해본답니다.》

《닭공장에?》

정의성은 어지간히 놀란듯 처녀를 한동안 건너다보았다. 그는 잠시 자기 생각에 잠겨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해서야 감심한 어조로 말했다.

《동문 확실히 현실적이면서 현명한 생각을 하였소. 그리구… 동무가 닭공장에 남겠다니 나도 아예 여기에 남고싶은 생각이 나는구만. 그땐 날 받아주겠소?》

그의 물음에 송영숙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참! 받구 안 받구야 기업소에서 하는 일 아니나요?》

처녀의 령리하고 기지있는 대답에 정의성은 머리를 젖히고 하하 큰소리로 웃었다. 잠시후 그는 다시 정색해졌다.

《영숙동무! 우리 약속합시다. 나라의 가금업발전을 위한 길에 영원한 길동무가 되자는걸 말이요. 어떻소?》

송영숙의 눈은 다감한 빛이 어려 유난히 반짝이였다.

처녀는 크게 머리를 끄덕이였다.

《좋아요! 난 찬성이예요!》

《그럼 약속하기요, 자!》

정의성은 오른손을 쑥 내밀었다.

처녀는 주저없이 손을 내밀고 그와 손을 맞잡았다.

그의 크고 그윽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정의성은 은근히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오래동안 놓지 않았다. 청년의 손은 억세고 뜨거웠다.

송영숙은 어쩐지 그의 눈을 마주보기가 두려웠다. 그는 자기의 손을 비틀어뽑았다. 그리고는 실컷 다투고난것처럼 시무룩한 얼굴로 약간 돌아앉았다.…

《그래 사랑을 약속했니?… 안했니?… 그럼 어떻게 했니? 응?》

그날 저녁 차수정은 꺼리낌없이 꼬치꼬치 캐여물었다.

송영숙은 곱게 흘겨보았다.

《너두 참!… 그 동문 그저 가금학을 위한 길에 영원한 길동무가 되자고만 했어. 그다음엔 정말이야, 아무것두 없었어.》

그의 대답에 수정은 우스워죽겠노라면서 배를 그러안고 돌아갔다.

《호호… 그런 약속이 아니면 뭐가 또 필요해? 응? 결국 너두 맞도장을 찍었다는거지?》

그는 또다시 까륵까륵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윽고 그는 두손벽을 짝소리나게 마주쳤다.

《난 찬성이야! 너흰 앞으로 큐리부부가 될거야.》

(큐리부부!)

송영숙은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그의 가슴은 세차게 울렁거렸다. 처녀는 큰 날개를 퍼덕이며 가금학의 푸른 하늘을 향해 더 높이, 더 빨리, 더 힘차게 날으고싶었다. 노래를 불러도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목이 쉬도록 부르고싶었다. 일을 해도 온몸을 불태우며 값있고 보람찬 일을 더 많이 하고싶었다.

진정 사랑은 무궁무진한 힘과 무쇠도 단숨에 녹여버릴 열을 그리고 하늘을 날으는 지혜가 샘솟게 하는 원동력이였다.

바다가에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송영숙은 당분간 덮어버렸던 실험일지를 다시 펼치였다. 그는 동물성성장촉진제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고 대담하게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를 만들어내리라 마음다졌다.

(무독성과 효과성이 높고 원료원천이 풍부한 약재들로 가금의 성장을 촉진시킬수 있는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를 기어이 만들어내리라!…)

며칠후 송영숙은 정의성에게 자기의 결심을 터놓았다.

《난 래일부터 한달가량 약초채취에 나가려구 해요. 우리 나라에 흔한 고려약재들로 새로운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를 만들 결심이거던요. 제 생각이 어때요?》

처녀는 눈동자를 빛내며 총각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자기 결심의 가치를 알고싶었던것이다.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라… 좋구만! 괜찮아!》

정의성은 탄복에 겨운 얼굴로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열렬한 지지를 받은 송영숙은 그만 너무 기뻐 아이처럼 손벽치며 깡충깡충 뛰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윽고 그는 언제부터 품고있던 생각을 터놓았다.

《의성동무! 우리 함께 공동연구를 하는게 어때요?》

송영숙은 열정적인 눈빛으로 물었다.

청맑은 그 목소리에서 《우리》는 자못 친근하게 울렸다.

《공동연구?!》

뜻밖의 물음에 정의성의 눈은 커졌다.

그를 바라보며 송영숙은 들놀이라도 약속하듯 즐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 두사람의 지혜를 합친다면 하나의 크고 훌륭한 열매를 딸게 아니나요?》

처녀의 눈빛에서는 마를줄 모르는 열정과 창조의 샘이 마냥 솟구쳐오르고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더없이 열렬하고 정답게 울렸다.

강렬한 호소와 절절한 기대가 담겨진 그 눈빛앞에서 정의성은 잠시 머뭇거리였다.

《나야 이미 하고있는 연구가 있어서…》

그는 말끝을 여물구지 못했다. 잠시후 그는 이렇게 물었다.

《영숙동무! 먼길 가는 사람에겐 조급성이 금물이 아닐가? 난 동무가 지나친 정열로 온몸을 순간에 불태워버릴가봐 근심이요.》

그의 말은 따뜻하면서도 충고적이였다.

송영숙의 마음은 어쩐지 서운했다. 하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근심마세요. 쉬염쉬염 걸어갈테니까요.》

그는 방그스름히 웃으며 즐겁게 말했다. 그리고 못다한 말을 그 누군가의 시조로 대신했다.


나비야 청산가자

벌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날 저물면

꽃에서 자고 가자

꽃이 푸대접하면

잎에서 자고 가자


다음날 송영숙은 혼자서 약초채취를 떠났다.

그리고 계획대로 한달만에 많은 약초를 이고지고 돌아왔다.

다음날부터 그는 낮과 밤이 따로없이 새로운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를 만들기 위한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였다.

처녀의 방 창문가에서는 새벽에도 불빛이 흘러나왔다.

드디여 3년간의 소조생활도 끝나가고있었다.

송영숙은 일군들과의 담화에서 공장에 그냥 남겠다는 결심을 그대로 터놓았다. 그의 결심은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그무렵 정의성의 연구조도 당분간 철수하여 연구소에 들어가게 되였다.

닭공장을 떠나기 전날 정의성은 송영숙을 만나 도소재지에 있는 집에 들렸다가 인츰 돌아오겠다고 말하였다.

차수정이 호수가마을의 고향으로 떠나는 날 송영숙이도 언니의 집으로 갔다.

아버지가 전사한 후에도 몇년동안 군부대마을에서 살던 어머니는 년로보장나이가 되여서야 그곳을 떠나 갓 결혼한 맏딸네 집으로 이사해 갔었다.

송영숙이 닭공장에 그냥 남겠다는 결심을 말하자 어머니와 언니는 이왕 가금업과 인연을 맺었으니 끝까지 거기에 충실하라고 고무해주었다.

《아버지도 말씀하시지 않았니? 우리 나라 가금업의 기둥감이 되라고. 난 네가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리라구 믿어.》

송영숙이 공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 언니 송은숙은 이렇게 말했다.

휴가를 마치고 공장에 돌아온 송영숙은 수정이와 함께 생활하던 호실에 그냥 있으면서 현장기사로 일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밤대로 성장촉진제연구를 계속하였다.

그가 언니의 집에서 돌아온지 며칠 지나서 수정에게서 편지가 날아왔다. 오리공장 기능공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게 되였다는 소식이였다.

송영숙은 그밤으로 회답편지를 써서 보내였다.

그러나 정의성에게서는 통 무소식이였다.

(아마 이번 걸음에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하구 이곳에 보금자리를 펼 준비까지 하느라 늦어지겠지.…)

송영숙은 금시라도 정의성의 오토바이소리가 들려올것만 같아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의성의 리지적인 얼굴과 넓은 이마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멋지게 손빗질하던 그의 모습을 울렁이는 마음을 안고 그려보았다. 그는 가끔 수정이 하던 말을 상기해보았다.

《큐리부부!》

송영숙은 오래지 않아 수정이와 함께 생활하던 이 합숙방이 정의성과 자기 두사람을 위한 연구실이 되고 생활의 보금자리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며 울렁이는 가슴앞에 두손을 모아잡았다.

…큐리부부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이 크지 않은 방을 살림방 겸 연구실로 꾸리고 밤새도록 연구도 하고 진지한 과학이야기도 나누게 되리라.

일생동안 가난과 싸우면서 과학에 충실하였던 큐리부부…

자기들이 찾아낸 첫 원소에 어머니조국의 이름을 달아준 그들… 손님들의 방문으로 연구시간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손님용의자를 들어낸 그들부부…

(음식만들기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두 물리학자는 가스곤로의 불꽃크기를 잘 계산해서 밥이 타거나 설지 않도록 하였다지?

그러나 난 우리 두사람의 건강을 위해서 료리시간에 더 품을 넣을테야. 그리고 상점에도 함께 가서 신선한 남새랑 산나물도 사오고 또 그 동무가 좋아하는 물고기도 사오고…

높은 령마루를 향해 질주하는 사람은 자기의 건강과 식생활에 절대로 무관심해서는 안된다구 생각해.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으니까. 그대신 연구에 더 박차를 가할테야.… 우리의 가금업을 위해서, 내 나라의 가금업을 위해서.…)

송영숙은 이런 생각도 하였다.

(큐리부부는 결혼선물로 받은 두대의 자전거를 타고 모험많은 신혼려행을 했다지? 그러나 우린 오토바이를 타고 언니네 집에도 가고 동무들도 찾아갈테야. 호수가마을 수정이네 집에도 가고… 그리고 솔잎 푸른백사장에서 또다시 섭죽도 끓일테야. 하지만 우린 곧 돌아와야 해. 어서빨리 돌아와서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연구도 해야 하니까.

우리의 힘과 우리의 지혜로 번영해갈 우리의 앞날은 얼마나 아름다울가?…)

그의 공상은 끝이 없었다.

(《마리! 당신과 함께 보낸 일생은 줄거웠소.…》 삐에르가 큐리부인의 손을 잡고 말했다지?

먼 후날 그 동무도 나의 손을 다정히 잡으며 이렇게 말할거야.

《동무와 함께 보낸 인생은 참으로 행복하였소.…》라고 말이야. 아! 그러면 나는…)

송영숙은 행복에 대한 소중한 꿈을 안고 정의성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시간과 약속을 생명처럼 여기던 《전자시계》가 영영 고장난게 아닐가? 혹시 앓지는 않는지, 아니면…)

처녀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현장기사로 일한지 몇달이 되던 어느날, 송영숙은 가금공학연구소에 출장을 가게 되였다. 그곳 연구소에 배치받은 동창생에게서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과 시약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동무와 함께 실버들 춤추는 대동강기슭에서 산보도 하고 인민대학습당에서 도서열람도 하면서 평양구경까지 하고난 그는 며칠만에야 연구소를 떠났다.

동창생이 꾸려준 자료들과 시약을 배낭과 가방에 한가득 지고들고 역에 나온 송영숙의 마음은 즐거웠다.

그날 아침 그가 탄 급행렬차는 동해연선을 따라 정시로 내달렸다.

려행길에 오른 손님들은 얼굴곱고 명랑한 처녀와 길동무가 된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손님들이 낮잠을 청하고있을 때 옆자리에 앉은 나이지숙한 녀인이 송영숙에게 과일을 꺼내놓으며 말을 건늬였다.

《처년 닭공장에서 일한다지? 그럼 거기서 연구사업을 하던 정의성이라는 청년을 알겠구만?》

진하게 화장을 한 도시풍의 녀인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낯모를 녀인에게서 뜻밖에 정의성의 이름을 들은 송영숙은 일순 놀라며 굳어졌다.

다음순간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들으니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웃음어린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녀인은 호기심이 가득찬 눈길로 그 청년이 어떤가고 다시 물었다.

송영숙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달아올랐다.

(이 녀인이 혹시 의성동무의 형수가 아닐가?…)

녀인의 눈길이 자기를 지켜보고있다는것을 느낀 송영숙은 차창밖을 내다보며 재능도 있고 열정도 있는 좋은 청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녀인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여났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진 않았다니까.》

이윽고 녀인은 흥그러워진 기분으로 속마음을 터놓았다.

《사실은 그 총각을 우리 사위루 삼자구 해요. 나한테 무역회사 경리원을 하는 외동딸이 있는데 아들삼아 사위삼아 데리구 살자는거요.》

《?!》

《총각네 부모들과는 오래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사인데 총각두 우리 딸을 무척 마음들어하는것 같아요.》

순간 송영숙은 눈앞이 아뜩해옴을 느끼였다. 눈앞마저 캄캄해졌다.

《그… 래요?》

그는 가까스로 이렇게 물었다.

제 기분에 들뜬 녀인은 활짝 웃으며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우리 집은 연구소에서 그닥 멀지 않아요. 올가을엔 잔치를 하려구 하는데 그땐 처녀두 놀러오라요. 아무렴 잘 아는 사인데 뭐라나요?》

녀인의 말에 송영숙은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윽고 그는 피곤이 몰린듯 의자등받이에 기대여 눈을 감았다. 왈칵 울음이 솟구치는것을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결혼… 결혼식… 아!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지금껏 소식 한장 보내지 않았구나. 난 그런줄도 모르고…)

송영숙은 뼈가 부서지는듯 한 아픔을 참으려고 모지름을 썼다. 그러나 인츰 머리를 저었다.

(아니야! 의성동문 그렇게 쉽게 약속을 저버릴 사람이 아니야!…)

그때로부터 몇달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온종일 현장에서 일하다가 합숙에 돌아오니 뜻밖에도 언니가 와있었다.

《언니!》

송영숙은 너무 기뻐 언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못했다. 마음이 괴롭고 쓸쓸할 때 언니가 찾아온것이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구역인민병원 의사로 일하면서 얼마전에 경공업대학을 졸업하고 편직공장 기사로 일하는 한 청년과 결혼한 송은숙은 동생의 마음을 살뜰히 위로해주었다. 그날 밤 그는 가방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여 동생에게 내보였다. 양복차림의 젊은 청년이 사진속에서 올려다보고있었다.

《언니! 이 사람은 누군데?…》

송영숙은 얼른 사진을 내려놓으며 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언니는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참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수산관리국에서 부원으로 일하는 총각이야. 너의 아저씨가 잘 아는 사람의 동생인데 집안도 괜찮구 또 앞으로 크게 발전할 청년이더구나. 그래서 너와 맞세우자고 하는데… 어때?》

그제야 언니가 기별없이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였다.

그는 사진을 언니앞에 쑥 밀어놓았다.

송은숙의 얼굴엔 일순 서운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이윽고 유순한 눈매로 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영숙아! 너 아직 정의성이를 기다리는건 아닐테지? 응?》

언니의 물음에 송영숙은 대답대신 눈길을 떨구었다.

송은숙은 사진을 가방에 넣으며 차근히 말을 이었다.

《내 이 말은 하지 말자고 했는데… 사실 난 너를 위해 정의성이네 연구소에 몇번이나 찾아갔더랬어. 헌데 문제는 네가 기다릴만 한 사람이 못된다는거야.… 그 사람은 인츰 잔치를 한다더구나.》

잠시후 정의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수산관리국 청년과 혼사를 맺는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우리야 중학교를 졸업하구선 늘쌍 헤여져살았는데 이제부터라도 모여살자꾸나,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여기가 아니면 연구를 못하겠니? 이번 걸음에 나와 함께 떠나자꾸나.》

언니의 권고는 살뜰하고도 절절했다.

그러나 송영숙은 고집스럽게 머리를 저었다. 그는 천연바위에 자기의 말마디를 정으로 새겨넣듯 또박또박 말했다.

《언니! 난 그 누구와의 사랑때문에 여기 남은게 아니야. 그건 나의 리상이였구… 또… 내 인생의 목표였기때문이야.》

그의 말은 길지 않았다.

다음날 그는 서운한 마음을 안고 떠나는 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날 리해해줘. 난 앞으로두 절대 후회하지 않을거야.…》

언니를 바래우고 들어온 다음에야 그는 합숙방 침대우에 몸을 던지고 오래동안 흐느꼈다. 배반당한 괴로움으로 가슴은 찢기고 터진듯 아팠다.

꺼질줄 모르는 증오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것은 그 다음날부터였다.

그날부터 처녀의 얼굴에서 웃음은 영영 사라져버렸다. 명랑하고 발랄하던 처녀는 하루밤새 생각많은 녀인으로 변하였고 그의 크고 정기도는 눈에서는 록록치 않는 빛발이 번뜩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오로지 사업과 연구밖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정의성에게서 소식이 날아온것은 그가 공장을 떠난지 반년이 가까와오던 어느날이였다.

공장접수원녀인에게서 그의 편지를 받아드는 순간부터 송영숙의 가슴은 무섭게 높뛰기 시작하였다. 그 편지가 채칵채칵 예리한 초침소리를 울리는 시한탄처럼 느껴졌던것이다.

합숙방에 들어온 송영숙은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영숙동무! 그동안 잘있었소? 동무는 오늘도 잊을수 없는 그 닭공장에서 현장기사로 일하겠지요?

동무가 애타게 기다리고있는줄 너무도 잘 알면서도 좋은 소식을 보낼수 없어서 하루 또 하루 미루다가 오늘에야 펜을 들었습니다.

그때 동무와 헤여져 연구소에 올라오니 나에게는 이미 다른 연구과제가 정해져있더군요.

사실 난 동무와의 약속을 지켜 닭공장으로 다시 내려가겠다고 일군들을 찾아다니며 몇번이나 졸랐습니다. 하지만 모든것이 뜻대로 되지 않더구만요. 괴로운 일은 그것뿐이 아니였습니다.…

더 큰 난관은 우리 집에서도 기다리고있었소. 다름아니라 부모님들이 한 처녀를 며느리감으로 정해놓고 나를 기다리고있었던겁니다.

나는 무섭게 항의하였소. 며칠동안 동창생들의 집과 또 맏형네 집을 오가면서 집에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지요.…

얼마후에야 나는 영숙동무와 나자신을 위해 우리 서로 헤여지는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습니다. 생활 그자체가 곧 전투인 오늘 한가정에도 사수가 있으면 부사수가 필요하다는것을 비로소 느끼게 되였던겁니다.…

영숙동무! 〈큐리부부〉는 한갖 리상입니다.… 나는 가금학계의 거목이 되려는 우리 두사람에겐 반드시 헌신적인 부사수, 다시말해서 헌신적인 방조자가 필요하다는것을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송영숙은 잠시 편지에서 눈길을 떼였다. 또다시 가슴이 와짝 저려들며 비틀리운듯 아파났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그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금 편지의 글줄을 더듬어나갔다.

《나는 확신합니다. 동무의 총명한 두뇌와 열렬한 탐구심은 한생토록 나라의 가금업발전에 바쳐지게 되리라는것을, 세상을 놀래울 연구성과로 학계의 찬연한 별이 되리라는것을.…

가금학에 한생을 바치려는 나의 결심 또한 변함이 없습니다.…

영숙동무, 우리 비록 한가정을 이루지 못해도 벌써 그 시절에 약속한대로 나라의 가금업발전을 위한 길을 끝까지 걸어갑시다. 동무의 사업과 생활에서…》

편지는 떨어져 발치에서 딩굴었다.

(배반자!… 배반자…)

송영숙은 편지를 내려다보며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두볼로는 뜨거운것이 줄줄 흘러내리고있었다.…

(그러니 그때… 부모들이 내세운 처녀가 바로 정옥이란 말인가.…)

송영숙은 곧 머리를 저었다. 그런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에 와서 그렇다한들 또 어떻단 말인가. 다만 정의성이 바라던대로 훌륭한 방조자를 만난것만은 사실이였다. 성실하고 알뜰한 서정옥이야말로 헌신적인 방조자가 아니겠는가.…

송영숙은 새끼오리를 싣고온 자동차의 경적소리를 듣고 생각에서 깨여났다. 그는 자동차가 멎어선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마음다졌다.

(이제는 더이상 지나간 일을 생각지 말자! 저 멀리 흘러간 어제가 아니라 래일을 위해 더 열심히, 더 즐겁게 살자!…)

그의 생각을 긍정하듯 새끼오리의 울음소리가 즐겁게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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