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4


《예? 임신이라구요?》

송영숙은 까무라칠만큼 놀랐다.

공장진료소 의사 리윤옥은 동그스름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송영숙의 얼굴은 붉어졌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였다.

송영숙은 어깨를 떨구며 근심스럽게 앉아있었다.

(하필 공장에 온 첫해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당비서의 안해인 녀의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질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이럴 땐 어쩌면 좋아요, 예?》

송영숙은 구원을 청하듯 리윤옥을 올려다보았다.

리윤옥의 반달눈이 커졌다.

《어쩌다니요? 아이를 낳아 키우는거야 녀성의 본분이 아니나요?》

그는 심란해진 기사장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오래동안 군인가족생활을 하면서 의사 겸 조산원으로 수많은 병사감들을 받아내고 키워온 리윤옥이다.

그는 송영숙의 마음을 안심시켜주듯 찹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없어요. 힘은 좀 들어두 그게 우리 녀자들의 기쁨이구 자랑이 아니나요. 기사장사업을 하면서 아이를 낳아 키우려면 힘이야 들겠지요. 그래두 일없어요. 친정어머니두 계시구 또 나도 곁에 있지 않나요.》

그는 마치도 자기가 친언니의 구실을 해야 할 의무감이라도 지닌듯 스스럼없이 말하였다.

송영숙에겐 리윤옥이 고마왔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다음 이렇게저렇게 손발이 얽히우고 사업에도 지장이 될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할일은 많고많은데 어쩌면 좋담.…)

남편과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고 류산시켜버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리윤옥의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다.

우선 사람들이 자기가 임신한걸 모르게 해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송영숙은 리윤옥에게 그것을 부탁하였다.

리윤옥은 별걱정을 다 한다는듯 곱게 흘겨보았다. 그의 반달눈이 살짝 까부장해졌다. 그는 진료소에 자주 찾아와 검진도 받고 또 무리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당부했다.

송영숙은 상담실에 들어서는 낯선 환자를 보고 황황히 매무시를 바로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료소를 나선 송영숙은 사무실로 가려다가 곧장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가 집에 들어서자 터밭에서 따들인 팔따시같은 첫물오이를 씻고있던 어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일어났다.

《병원에 가봤니?》

송영숙은 찌푸둥한 얼굴로 머리만 끄떡였다.

문춘실의 얼굴은 삽시에 어두워졌다.

《선생이 뭐라던? 나쁜 병은 아니겠지?》

문춘실은 딸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서며 조심히 물었다.

송영숙의 입에서는 불쑥 투정과 신경질 섞인 대답이 튀여나왔다.

《병이면 좋게요?… 뚱딴지같이 임신이라지 않나요.》

《뭐라구? 임신이라구?》

문춘실이 북관말특유의 센 억양으로 되물었다. 다음순간 그의 얼굴에서 주름살이 싹 없어졌다. 그는 철썩 무릎을 쳤다. 그리고 싱글벙글 웃었다.

《내 이런 좋은 소식 듣자구 어제 밤 희한한 꿈을 꾸었구나.》

《난 속상해죽겠는데 어머닌 그저…》

송영숙은 민망스러운 눈길로 어머니를 흘겨보았다.

문춘실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

《뭐가 속상해?》

《한창 바쁜 때… 남들이 알면 웃을게 아니나요? 기사장이라는게…》

송영숙은 그냥 불만스러운 감정을 터놓으며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문춘실은 끌끌 혀를 차며 세면장쪽에 대고 제 생각을 말했다.

《기사장보담 더 높은 어른들두 다 자식낳이를 하면서 일해. 딴생각말구 낳기만 해라. 키우는건 내 다 하지 않으리.》

이윽고 어깨춤이라도 출듯 한 기분으로 부엌에 내려갔다. 그는 수도앞에 다가앉으며 지난밤 꿈처럼 제발 아들만 낳으라고 맘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더두 말구 제 서방처럼 잘생긴 아들만 낳아라. 그럼 내 경아 키우듯이 금이야, 옥이야 받들지 않으리.…)

문춘실은 마치 자기가 아이를 가진것만큼이나 꿈이 컸다. 몇년전까지만 하여도 딸이 처녀로 늙어버릴것만 같아 밤잠도 제대로 못 자던 그였다.

사실 문춘실은 딸이 처녀지배인으로 일하던 어느해 가을 맏딸과 함께 닭공장에 찾아갔었다.

그때 문춘실은 막내딸에게 소조생활을 하면서 앞날을 약속했다는 그 총각은 어디 갔는가고 물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어머니와 언니를 보고 기뻐서 어쩔줄 모르던 딸의 얼굴은 순간에 화석처럼 굳어졌다. 이윽고 그는 《더이상 묻지 마세요, 어머니.》하고 대답했다. 그다음 고집스럽게 입을 봉해버렸었다.

닭공장을 떠나던 날 문춘실의 마음은 천근만근으로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얼마후 키크고 잘생긴데다가 마음까지 무던한 사람을 막내사위로 맞아들이고 외손녀까지 무릎에 앉히게 되였다. 세상에 부러운것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욕심이란 끝이 없었다. 말 타면 견마잡히고싶다고 이제는 떡돌같은 외손자가 그리워졌다.

그런데 그 소원이 곧 이루어질텐데 왜 기쁘지 않으랴.

문춘실은 사위에게도 잊지 않고 그 소식을 말했다.

백상익은 싱긋 웃으며 《그런걸 괜히 어머니만 근심했군요.》하고 례사롭게 말했다.

딸에게 그가 좋아하는 산나물볶음이며 햇김치를 해주어도 몇술 뜨다가 수저를 놓군 하는것을 보고 큰 병을 만난것 같아 근심했던 문춘실이다.

송영숙은 기뻐하는 어머니와 남편을 보면서 순간이나마 류산하려고 생각했던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마음속으로 가만히 속구구를 해보았다. 해산예정일은 다음해 3월 초순이다.

(3월 초순이면 그때까지 솜옷을 입고 다닐수 있어. 그러면 남들도 잘 모를거야. 해산한 다음에는 어머니가 계시니까…)

여러가지 조건으로 보아 사업엔 별로 지장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종일 마음을 무겁게 하던 근심을 털어버린 그는 남편과 함께 텔레비죤을 보았다.

《오늘 낮에 수정이가 왔다갔다.》

그릇에 포도를 담아들고 들어온 어머니가 하는 말이였다.

《수정이가요?》

송영숙은 남편의 등너머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문춘실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리고 시름겨운 어조로 말했다.

《수정이 처지가 도무지 남같지 않다. 그 곱던 얼굴이 여위구 가무잡잡한게 온통 주근깨투성이구나. 자식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래두 그 고운 마음만은 여전하더라. 어떻게든 날 돕지 못해 썰썰거리는게… 네가 어떻게든 도와줄수 없겠니?》

《…》

송영숙은 갑자기 할 말이 없었다.

차수정은 요즘 인정이 그리울 때마다 드문히 집에 찾아와 문춘실의 앞에 외로운 심정을 터놓다가 돌아가군 했다. 이따금 경아네 탁아소에도 찾아가 간식이나 놀이감을 쥐여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경아도 수정을 보고 큰엄마라고 부르면서 몹시 따랐다.

송영숙의 눈앞에는 차수정의 초췌한 얼굴이 떠올랐다.

늙은이처럼 화장도 하지 않는데다가 몸도 잘 가꾸지 않는 그였다. 거기에 성격마저 점점 이지러들어 사람들은 그에게서 하나 둘 등을 돌려대고 멀어져갔다.

송영숙은 지금껏 수정의 운명을 동정이나 했을뿐 그가 처녀시절의 그 열정을 되찾고 공장과 사회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살며 일하도록 도와주지 못한 자신을 말없이 뉘우쳤다.

그는 수정의 가정문제에 자기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차수정은 쟁쟁한 가금전문가이다. 그가 공장을 위해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길에 가정의 행복도, 녀성의 기쁨도 찾을수 있는것이다.

송영숙은 우선 방인화부터 만나보려고 마음먹었다.

리병우수의사와 차수정이 살림을 합치도록 처음 발기한것도 그였고 지금도 그 문제때문에 걸음을 많이 걷는 방인화였다. 방인화와 마음을 합친다면 두 기술자의 운명은 달라질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다음날 송영숙은 가공직장으로 갔다.

마침 방인화는 내장물처리장에서 직장녀인들과 함께 오리간이며 심장, 내포 등을 선별하고있었다. 실한 몸에 작업복을 입은 방인화는 익달된 솜씨로 걸싸게 일하면서도 젊은 녀인들에게 잔소리를 해가며 일하는 묘리를 가르치고있었다.

송영숙이 작업장에 들어서는것을 본 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지금 내장물처리를 합니다.》

그는 기사장이 생산료해를 나온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송영숙은 녀인들과 눈인사를 나는 다음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그들과 마주앉아 일손을 같이하였다.

작업이 끝난 다음 방인화에게 조용히 밖으로 나가자고 하였다.

그들은 공원처럼 꾸려진 직장마당에 나왔다.

《요즈음에도 봄순이네 집에 자주 가보나요? 수의사와 보급원때문에 걸음을 많이 하던데…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모양새고운 정자나무그늘아래 나란히 앉았을 때 송영숙은 이렇게 말꼭지를 뗐다. 그리고 리병우수의사와 차수정과의 문제가 어떻게 돼가는가고 물었다.

방인화는 대바람 실한 팔을 홱홱 내저었다.

《내 이젠 그 문제에서 아예 손을 뗐습니다. 살다살다 그런 령감은 처음이지요. 형편없는 답답이라니까요. 그러니 보급원이 물러난것두 그럴만하지요. 처음부터 싫다는걸 억지공사로 맞세웠더니… 그 령감은 워낙 녀자를 거느릴 위인이 못돼요. 애당초 거기에 마음쓰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그는 진절머리나는듯 쓰겁게 입을 다셨다.

송영숙은 천만뜻밖의 일앞에서 굳어졌다.

리병우수의사와 보급원의 문제때문에 찾아왔다면 반갑게 생각하고 선듯 마음을 합치자고 말할줄 알았던 그였다.

다른것은 그만두고라도 남동생의 안해였던 수정에게 리병우를 소개한것만 보아도 방인화가 보통 속이 넓지 않으며 인정 또한 남다르다고 생각했던 송영숙이다.

그런데 제켠에서 왕왕 말리려드니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궁해졌다. 그렇다고 물러설수는 없었다.

《직장장생각엔 그들이 왜 갈라진것 같나요? 원인이 있겠지요?

그 원인만 알면 걸린 문제를 해결하구 다시 살림을 합치게 할수 있지 않을가요?》

송영숙은 진지한 눈빛으로 방인화를 건너다보았다.

《그야 딸때문이지요. 거기다 령감성격이 도무지 정신나지 않구요.》

방인화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송영숙은 두사람이 봄순이때문에 갈라졌다는 말을 듣고 은근히 놀랐다.

일 잘하고 수집음 잘 타는 봄순이가 두사람사이에 맞불질이라도 했단 말인가. 잘 믿어지지 않았다.

하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둘사이가 벌어진 기본원인이 당사자가 아니라 딸에게 있다는것을 알았던것이다.

그리고 봄순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이찬 처녀이니 언제든 시집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영숙이 한동안 말이 없자 방인화는 울뚝밸이 센 자기자신을 마음속으로 꾸짖으며 이제라도 리병우와 차수정이 살림을 합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제 본심을 터놓았다.

《내 우리 직장녀인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봄순이가 어느 수리공총각하구 죽자살자한다던데… 딸을 시집보내면 수의사생각두 달라지겠지요.》

방인화는 봄순이를 빨리 시집보내는것이 두사람을 위한 방책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송영숙은 머리를 저었다. 봄순이가 시집갈 때까지 기다릴수는 없었다.

《봄순이도 새어머니의 손에서 시집가면 더 좋을게 아니나요? 그리고 시집가면서도 아버지에 대해 마음을 놓구요.》

송영숙의 말에 방인화는 머리를 끄떡끄떡하였다.

송영숙은 그에게 두사람의 문제를 차요시할수 없는 자기의 심정을 터놓았다.

《난 보급원을 대학때부터 잘 알아요. 소조생활도 함께 했구요. 우린 친형제처럼 가까왔답니다. 그리구 또 보급원은 가금전문가가 아니나요? 난 정말 두사람의 문제를 강건너 불보듯 할수 없어요.》

《…》

《난 봄순이 마음도 충분히 리해해요. 어릴적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만 의지해서 살아왔을텐데 그 정까지 빼앗기는것 같아 얼마나 괴로웠겠나요? 봄순인 남달리 사랑이 그리웠을거예요. 친혈육의 따뜻한 사랑이 말이예요.》

송영숙의 말은 인정많고 우애심이 강한 방인화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다. 리병우와 봄순이를 꾸짖기만 해온 자기가 뉘우쳐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슴뻑거렸다.

이윽고 그들은 리병우와 차수정을 힘껏 돕자고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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