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제 3 장


36


8. 15명절날 오전에 학교기숙사정문앞에 승용차한대가 와서 멈추어섰다. 농업상이 보낸 빈 승용차였다.

운전사 종팔이가 접수원에게 녀학생 박미순이를 찾아달라고 하였다.

졸업시험도 다 치고 배치를 기다리며 시간이 많아 시내에 있는 이모네 집에 놀려가려고 준비하고있던 미순이는 접수로 나왔다.

어디선가 본것 같은 젊은이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눈꼬리가 처진 울상인 그가 점잖게 인사를 했다. 미순이는 머뭇거리며 답례했다.

《안녕하세요.》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글쎄 낯이 익은데…》

《농업상동지의 전용승용차운전사 유종팔이라고 합니다. 언젠가 상동지가 보낸 물건들을 싣고왔댔지요. 그때 소개도 했었고…》

미순이는 반가와하면서도 왜 또 왔을가 하는 의문이 실린 눈으로 승용차운전사를 보았다.

《기억납니다.》

《그런데 말이요. 나는 오늘이 명절날인데도 휴식을 못하고 차를 몰아야 하는 신셉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간부들의 차를 모는 운전사는 팔자가 늘어졌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 간부들이 휴식일에나 명절날에 쉬는줄 압니까?

그러니까 그들에게 붙어다니는 운전사도 쉬지 못하지요.》

미순이는 우정 가긍한척 하면서 불쌍한 흉내를 내는 운전사의 장광설이 재미나서 제지시킬 생각이 없었다.

운전사의 말은 과장되기도 하고 자기식으로 윤색되기도 했지만 그의 《연설》을 쥐여짜놓고 보면 미순이를 차에 태워가지고 집으로 데려오라는것이였다.

《외출복을 입고 속히 행차해주기를 바랍니다.》

유종팔이가 승용차를 가리켰다.

《번쩍거리는 차가 아까부터 기다리고있습니다.》

미순이는 결심이 내려졌다.

《저는 갈수 없습니다.》

《그래요?》

종팔이의 눈섭이 치솟았다.

《오늘은 명절날이여서 친척집에 가려고 계획했으니까요.

그리고 저같은 녀학생이 어떻게 큰 간부의 집에 갈수 있겠어요? 우선 부끄럽고 그리고 격에 어울리지도 않지요.》

《그렇다?》

종팔이는 락심하는것 같았다.

《저를 불러주는건 고맙지만 갈수 없었다고 전해주세요.》

《그렇다면 하나 물어봅시다. 저… 미순동무,

내가 알건대 미순동무는 상동지의 추천에 의해서 전문학교에 왔고 상동지가 친아버지처럼 돌봐주는것 같은데 〈딸〉과 함께 명절을 쇠자고 하는 성의를 물리치면 그것이 옳은 도리일가요?》

종팔이는 과연 솜씨있게 정통을 찔렀다. 미순이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딸〉이 얼마나 보고싶었으면 이 종팔이가 데려오지 못하면 당장 해임시키겠다고까지 엄하게 말했겠습니까?》

미순이는 가쁜숨만 쉴뿐이였다.

《물론 명절날이니 친척집에 가는것도 의의가 있고 더 자유롭고 더 즐거울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그러한 유혹을 물리치고 의무에 복종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것입니다.

비록 옹색하고 차렷해야 하는 엄엄한 장소에 간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 사람은 변호사처럼 말을 잘하는구나. 정말 어쩔수 없게 론리적으로 납득시키고있어!

어쨌든 이 사람 말이 옳아.)

미순이가 이렇게 생각하고있는데 종팔이는 녀학생이 아직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는가 하여 공격을 계속 했다.

《그럼 기숙사호실에 들어가 동무들에게 물어봅시다. 내 말이 옳은가그른가 판단을 내려달라고 합시다.》

그는 상이라고 하는 《큰 산》을 등지고있었음으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아니, 됐어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좀 기다리세요.

내 가서 동무들에게 량해를 구하고 외출복을 입고 나오겠습니다.》

종팔이는 외국영화에 나오는 신사처럼 정중하게 머리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미순이는 난생 처음 승용차를 타고 시내를 달려 농업상의 집에 갔다. 전실에서 실내복을 입은 나이든 녀인이 미순이를 반갑게 맞이하여 의자에 앉도록 했다.

미순이는 녀인이 농업상의 부인임을 알수 있었다.

부인은 얼음보숭이가 담긴 접시를 다반에 놓아가지고 들어와 미순이가 앉은 의자곁의 탁자우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탁자옆의 다른 의자에 앉으며 접시에서 차숟가락을 들어 미순의 손에 쥐여주며 같이 먹자고 했다.

《나는 이 얼음보숭이를 좋아해. 더운 여름에는 이것 이상 없어.

자 처녀도 어서 들어요.》

《고맙습니다.》

미순이는 얼음보숭이를 작은 숟가락으로 조금 떠서 입에 넣었다. 청량음료점에서 먹던것과 맛이 같았다.

아마 청량음료점에서 사온듯 싶었다.

《집이 순안 농촌마을에 있다지?》

부인이 물었다.

《네.》

《부모님들은 젊으신가?》

《아닙니다. 쉰살이 넘었습니다.》

《자식은 처녀말고 또 누가 있나?》

《저 혼잡니다.》 미순은 미소를 지었다.

부인이 미소짓는 처녀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처녀는 아름답게 핀 한송이 꽃같았던것이다.

《그러니 외동딸이로군. 부모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했겠지.》

《아버지는 그랬지만 어머니는 귀애하면서도 욕을 할적에는 무섭게 했습니다.》

《평안도에서는 어머니를 오마니하고 부르지. 그런데서 아마 자식을 하나 키우는데 오만자루의 품이 든다는 말이 나왔겠지.》

이런 이야기들을 하며 얼음보숭이를 먹는중에 미순이는 객실을 살펴보았다.

제일 눈길을 끄는것은 피아노였다. 운전사 종팔이가 피아노를 치며 즐기도록 해야 하겠다는 상의 말을 자기식으로 인용한것이 아주 엉터리는 아니였다.

벽에는 꽃을 그린 정물화와 푸른 파도우를 나는 갈매기를 그린 유화가 걸려있었다.

《좀 기다리면 령감이 들어온다구. 점심시간이니까.

나더러 처녀가 심심해하지 않게 잘 돌봐주며 기다리게 하라고 했어. 꼭 할말이 있대.…

나는 점심상을 차려야 하겠는데, 처녀는 피아노칠줄 아는가?》

미순이는 손풍금은 잘 탔지만 피아노의 건반은 아직 눌러보지 못했다.

미순이의 대답을 듣고 부인은 《손풍금을 탈줄 알면 피아노도 친다구. 원리는 같으니까. 그럼 그 사이에 피아노를 치며 시간을 보내라구.》하고 말했다.

《아니, 저도 같이 부엌일을…》

부인을 따라 미순이도 일어섰다.

《이러지 마오. 별로 하는것두 없다구.》

부인이 극력 말리였다.

미순이는 하는수 없이 피아노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씌우개천을 벗기고 번들번들하는 진한 밤색의 피아노를 처음으로 쓰다듬어보고 뚜껑을 열었다. 하얀 건반을 손가락으로 누르니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바로 그때 집마당에 승용차가 들어와 멈추어서는 소리가 울렸다. 미순이는 뚜껑을 재빨리 닫고 돌아섰다.

연한 닭알색 여름양복을 입고 흰 중절모를 쓴 농업상이 현관문을 열며 전실로 들어왔다.

《미순이가 와있구만. 오래 기다렸나?》

상의 표정은 덤덤했으나 목소리에서는 반가움이 느껴졌다. 그는 쉽게 감동되거나 표정의 변화가 다양한 사람이 아니였다.

《좀전에 왔습니다.》

《음, 앉소.》

한룡택은 모자를 벗으며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잠시후 실내옷으로 갈아입고 세면장으로 가서 푸푸거리며 땀에 젖은 얼굴과 가슴과 뒤잔등을 씻었다.

부인이 찬물을 끼얹어주고 물기를 닦으라고 수건을 내주었다.

시원하게 씻고난 상은 다시 전실로 나와 미순이에게 어째서 서있기만 하는가고 하면서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선풍기가 돌고있어 한결 서늘했다.

그사이에 음식들이 상우에 차려졌다. 한룡택은 미순이를 자기옆의 걸상에 앉히였다.

《미순이, 그간 공부하느라 수고했다.

전문학교에 붙여놓고 한번도 가보지 못했고 집에도 졸업하게 되여서야 이렇듯 초청했으니 욕을 했겠지.》

《아닙니다. 저는 저를 전문학교에 보내주신것만 해도 과분하게 여기고있습니다.》

미순이가 어려워하며 대답했다.

《오늘이 명절인데 뭐 차린게 없구나.》

《저녁에 명절을 쇱시다.》

부인이 말했다.

《미순이도 저녁때까지 있으라구.》

《아닙니다. 저는 가야 합니다.》

《그래 시험은 잘 쳤나?》

한룡택이 물었다. 그는 벌써 술기운이 돌아 얼굴이 붉어졌다.

《그저…》

《허, 내 알아보니 전과목 5점이더라.

미순이, 내가 오늘 너를 부른것은 배치지가 확정되였기때문에 알려주자는것이다. 그리고 내 언제 너를 또 보겠니?

그래 원화마을에서 한번 보았을뿐이여서 오늘 다시 한번 만나보고싶어서 데려오라구 했다.》

《고맙습니다.》

《어서 들어라.》

《예, 먹습니다.》

부인이 국수는 좀 있다 들여온다고 했다.

《내가 무슨 자랑은 아닌데 너를 평남도농촌경리위원회에 배치하기로 했다.》

한룡택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평양에서 살아봐라.》

미순이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이것은 상상밖의 소식이였다.

《고맙습니다. 상동지! 그러나 저에게는 너무 과분합니다.》

한룡택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네 마음은 알만 하다. 그러나 너의 장래발전을 위해 농전졸업생으로서는 가장 좋은 자리에 앉혀주는것이다.》

《저는 사실 그런 배치까지는…》

《아, 됐다. 나는 이제부터 휴식을 좀 해야 오후 일정을 보장할수 있다. 명절날이여서 행사들이 있기도 하거니와 나는 늘 일이 바빠서 편하게 쉬게 되지 않는구나.

일할줄 모르는 사람이 휴식도 못하고 늘 바삐 뛴다는데 내가 그 꼴이다.

나에게 나라의 농업을 맡겨주신 수상님의 믿음은 크신데 내가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고있다.

나는 어떤 때는 내가 과연 농업상을 계속할수 있을가 하는 위구심에 잠기군 한다. 허허… 내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나.》

《아닙니다. 큰일을 하시는데 왜 걱정이 없으시겠습니까.》

《허허… 네가 나를 위안하는구나. 그럼 나는 먼저 일어서겠다.

미순이, 우리 집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말고 식사를 많이 해라. 기숙사식사야 뻔하지.…

나는 아들도 딸도 없다. 해방전 서울에서 아들은 굶어죽고 사랑하는 딸은 왜놈들이 불속에 던져죽였다. 그래서 너를 딸처럼 생각하는거다.

원화협동조합에서 너를 보는 첫 순간에 〈내 딸이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치더구나. 그래 너를 농전에 넣어준거다.》

그는 눈빛이 흐려지고있었다.

《배치지에 가서 일을 잘하거라. 그리고 이 집에 자주 들려다구.

오늘 와주어서 고맙다.》

그는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자기 방으로 갔다.

그를 자리에 눕히고 돌아오는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해있었다. 미순이도 눈굽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식사를 하며 미순이는 부인으로부터 왜정때에 일가친척이 참화를 겪었던 일이며 어린 딸을 중국인 로인부부에게 맡기고 팔로군에 들어가 싸우던 일,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며 행복하게 살던 일 등 가정사를 들었다.

나중에 부인이 지금 부러운것이 없는데 자식이 없어 몹시 적적하다고 하면서 그래서 양딸을 두고싶다고 했더니 령감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원화마을에 갔다가 미순이를 본 후 마음에 들어 전문학교에도 보내주고 오늘 집에도 불러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부인은 자기도 령감도 미순이를 양딸처럼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순이는 붉어지는 얼굴을 숙이며 《저는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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