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3


새로 만든 설비들을 들여놓은 기술준비소는 명절처럼 흥성거렸다.

아침부터 지배인과 당비서가 새 설비를 보려고 찾아왔고 설비부원과 동력부원도 싱글벙글 웃으며 들락날락하였다.

오후에는 낡은 설비들을 들어내고 새 설비를 설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기술준비소의 젊은이들은 주인들답게 새 설비를 설치하는 일에 발벗고나섰다.

《분쇄기는 저쪽으로! 천천히, 천천히… 그건 여기에 놓소.》

서정관은 오후내껏 웃옷을 벗어던지고 큰소리로 그들의 작업을 지휘하였다. 조명이 밝고 뭇시선이 집중되는 곳에서는 항상 적극적으로 뛰여다니고 목소리도 높이군 하는 그였다.

고요와 정적만 깃들던 기술준비소가 하루밤새 벌컥 뒤집혀졌다. 조심스럽게 울리던 전화종소리도 여느때없이 소리를 높이며 쉴새없이 따르릉거렸고 조심히 여닫기던 출입문들도 객주집문처럼 닫기 바쁘게 또 열리였다.

누구보다 정숙을 바라던 유상훈박사의 얼굴에도 싱긋싱긋 웃음이 떠실려 가셔질줄 몰랐다.

새 설비를 보고 누구보다 기뻐한것은 다름아닌 시험호동관리공들이였다. 정옥이와 봄순은 호동을 통채로 비워둘수 없어서 차례로 달려나왔다. 나와서는 쇠밥이 묻은 폭쇄기와 혼합기를 감개무량하여 만져보고 쓸어보고 하였다.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도록 절구질을 하던 일이 이제는 지나간 일로 된것이 목이 메도록 감격스러웠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기사장에 대한 고마움이 샘처럼 솟아올랐다.

《언니!》

리봄순은 새끼오리먹이를 주려고 소독수에 손을 씻으며 서정옥을 불렀다.

《좀전에 설비부기사장동지가 사람들앞에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기사장동진 기계에두 박사요. 간단치 않소.〉이러지 않겠나요, 호호호… 그리구 지배인동지에게 시험호동을 잘 도와줘야 첨가제연구가 빨리 성공할수 있다구 당부했대요.》

처녀의 얼굴은 그 어떤 긍지감으로 발가우리 상기되였다.

일솜씨 알뜰하고 책임성이 높아서 시험호동관리공으로 왔지만 다른 관리공들처럼 고기생산계획을 넘쳐수행해서 평가받는 일도 없이 첨가제가 성공할 때까지 그저 묵묵히 일해야만 한다고 은근히 섭섭한 마음을 품고있던 처녀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사장이 며칠에 한번씩 찾아오고 또 새 설비들까지 마련해주는것이 마치도 자기자신에 대한 높은 평가처럼 여겨졌다.

그럴수록 처녀는 일을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정옥의 마음도 봄순이 못지 않았다. 오히려 감격스럽고 고마운 마음은 그보다 몇배나 더했다.

《정말 우리 기사장동진 쉽지 않은 일군이야.》

정옥은 복스러운 얼굴에 진정을 담고 말하였다. 그는 래일이라도 기사장을 만나면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먹이운반삭도에 새끼오리먹이를 푹푹 퍼담았다.

삭도를 밀고 호동안쪽놀이장에 들어서는 정옥을 본 새끼오리들이 삐용 삐삐용 정답게 노래를 부르며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정옥은 길게 놓인 구유에 먹이를 듬뿍듬뿍 담아주면서 타이르듯 조용조용 노래를 불렀다.


우리모두 손씻고 곱게곱게 앉자요

맛있게 밥먹고 어서어서 크자요


그 노래는 탁아소보육원들이 아이들의 밥시간에 부르는 노래였다. 아들애를 키울 때 탁아소에 다니면서 배워둔 그 노래를 정옥은 오리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부르군 하였다.

천진하다할만큼 명랑발랄한 그는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즐겨 노래로 표현하군 하였다.

정의성은 새 설비가 마련된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는 안해와 봄순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도 방금전에 새 설비를 설치하는 일을 돕다가 먹이시간이 되여 들어온것이다.

그는 지금 안해와 봄순이를 바라보면서 송영숙이를 생각하였다.

그도 설비부기사장을 통하여 송영숙이 새 설비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마음쓰고 시간과 품을 들였는가를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송영숙의 수고에 대하여 안해나 봄순이처럼 그렇게까지 감사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기사장으로서 자기 사업을 하였을뿐이다. 그리고 모든것이 그의 사업성과로 되는 동시에 아래사람들의 환심까지 사게 된것이다. 결코 정의성, 나를 돕기 위한것은 아니다.…)

이것이 정의성의 생각이였다.

그는 이미 송영숙의 눈빛에서 그것을 똑똑히 읽었던것이다.

사실 송영숙은 시험호동에 자주 찾아와 그들의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업조건도 보장해주고있다. 더우기 제켠에서 첨가제연구와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고 즐겨 론쟁도 하군 하였다.

송영숙은 첨가제를 이루는 비타민이나 미량원소들을 수입제나 화학제가 아니라 원료원천이 풍부하고 국산화된 천연물이나 화합물로 되게 해야 한다면서 스스럼없이 말도 하였다.

수입첨가제에 없는 섬유소분해균을 발효시켜 항생물질을 대신하게 하면 좋을것이라는 의견도 주었다.

그때 정의성은 아이들처럼 환성을 지르고싶은 심정이기도 하였다.

그는 송영숙에 대하여 종종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기사장은 확실히 가금학에 대한 뛰여난 실력을 가지고있구나.…)

그러나 자기를 대하는 그의 눈길이며 태도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그 어떤 생각과 아퀴를 짓지 못한 복잡한 심리가 담겨진 눈빛이며 태도였다. 이 모든것을 느낄 때마다 정의성은 송영숙이 자기를 변함없이 증오하고있음을 온몸으로 깨닫군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하지 못하는 자기가 도리여 가소로운 존재처럼 생각되였다. 하지만 송영숙에게 머리를 숙이고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기사장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를 저주하고 증오할것이다. 하면서도 첨가제연구를 돕는것은 첨가제에 공장의 운명이 달려있기때문이며 기사장의 의무이기때문이다.…)

《난 그 시절을 추억하려고 찾아온게 아니예요. 다만 정기사동무가 새로운 첨가제를 만든다는걸 알구 찾아왔어요.

저의 사업상… 공장에서 진행되고있는 기술적문제에 대하여 알고싶어서 말이예요.…》

시험호동에 처음으로 찾아온 날 그는 이렇게 자기의 목적에 대하여 명백하게 언명했었다. 그리고 그 말처럼 자기의 의무에 충실하고있었다.

문득 그의 눈앞에는 3대혁명소조원시절의 송영숙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용배우처럼 키가 크고 날씬하면서도 탄력있는 걸음걸이에 크고 맑은 눈매가 인상적이던 처녀대학생의 모습이였다.

그 모습은 정의성에게 송영숙과의 첫 인연을 맺게 해준 그 시절을 불러일으켰다.

농업대학 수의축산학부를 졸업하고 연구소에 배치된 정의성은 그때 닭공장에 내려와 가금의 경골성장특성에 대한 연구를 하고있었다.

도소재지의 평범한 사무원의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어릴 때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학구심이 남달리 강하여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면서도 처녀시절부터 년로보장나이까지 어느 공장 회계원으로 일해온 어머니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아서인지 생활에서 절제가 강하면서도 타산적이였고 명예심 또한 남달랐다.

그는 가금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는 남다른 야심을 안고 연구의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무렵 닭공장에서는 공장옆 천흥천기슭에 3층짜리의 독신자 및 로동자합숙을 새로 지었었다. 아담하면서도 생활에 편리하고 설비들과 가구들도 현대적인 좋은 합숙이였다.

정의성에게 있어서 공장합숙은 침실이기 전에 학습실이였고 연구실이였다.

규칙적이고 정돈된 생활을 좋아하는 그는 자기에 대한 요구성 또한 남달리 높았다.

새벽잠이 많은 그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매일 자명종을 새벽 4시에 맞추어놓고 세면장이 아니라 천흥천가에 나가 세면을 한 다음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그에게는 대학시절부터 《전자시계》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그의 일과집행이 곧 정확한 시계였기때문이였다.

그의 방에서 문이 열리고 정확히 울리는 그의 발음처럼 규칙적인 발자국소리가 들릴 때면 합숙식당의 취사원녀인은 그때가 어김없이 새벽 4시라는것을 의심치 않았다.

흰눈같이 하얀 말쑥한 작업복을 입고 현장에 나타날 때면 사람들은 그때가 틀림없는 오전 9시반임을 알았고 저녁 7시면 항상 퇴근하려고 정문을 나서는 그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그에게는 자기의 드팀없는 일과를 방해하는 사람이 제일 싫고 귀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 《전자시계》는 종종 귀찮고 시끄러운 사람들을 만나군 하였다.

정의성이 닭공장에 내려온지 몇달이 지난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였다.

오전시간을 현장에서 보내고 합숙에 들어온 그는 일과대로 오후 첫 시간을 독서에 바치고있었다.

새로 나온 축산학도서를 열심히 읽어가던 그는 갑자기 소란스럽게 울리는 문소리를 듣고 눈길을 들었다.

《?!》

그는 미간을 찌프렸다. 한호실에서 생활하는 동무가 몇차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조심성없이 들어온다고 마음속으로 나무라면서 다시금 글줄을 더듬었다.

그러나 다시금 눈을 치떴다. 전실에서 무엇인가 왈칵 쏟아지는듯 한 소리가 들렸기때문이다.

책에서 눈길을 뗀 그는 못마땅한 마음으로 전실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위생실이 잇달린 세면장문이 《탕!》하고 바쁘게 여닫기는 소리를 듣고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리해하였다. 그런데 더욱 놀란것은 그 다음이였다.

《수정아! 나 수건 좀 가져다줘, 어서!》

(이건 또 뭐야?…)

정의성은 눈을 흡떴다. 세면장안에서 짱짱 들려오는 목소리는 한호실에서 생활하는 남동무가 아니라 뜻밖에도 누군지 모를 처녀의 목소리였다. 세탁을 하는지 물소리까지 쫙쫙 들려왔다.

그 물소리를 뚫고 또다시 청맑은 목소리가 튀여나왔다.

《수정아! 너 들었니, 못 들었니? 수건 달라는데, 어서!》

순간 정의성은 덜컥 겁이 났다. 방에서 뛰여나가려던 그는 얼른 자기의 세면수건을 뭉그려 세면장문을 향해 홱 내던졌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뒤따라 울려왔다.

《너 단단히 성났구나. 네 수건을 던져주는걸 보니… 내가 잘못했어. 도서관에 갔댔는데 사서를 만나지 못해서 오래 기다렸거던. 아마 두시간은 기다렸을거야. 그래서 빨리 오느라 땀투성이가 됐지 뭐. 하지만 네가 부탁한 책은 다 가져왔어.》

그제서야 정의성은 누군가 자기의 방을 헛갈리고 잘못 들어왔다는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때 공장에서 새로 지은 합숙은 출입문이며 방꾸밈새는 물론이고 비품들까지 꼭같아서 합숙생들이 층수를 헛갈리는 때가 드문하였다.

정의성은 세면장안의 처녀도 분명 자기의 방을 헛갈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서관과 책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하여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전실에 널려있는 책들을 기웃이 들여다보았다. 《경공업과학론문집》, 《조선수산》, 《생물학》, 《수의축산》, 《발명공보》, 《가정에서 닭기르기》…

자기도 래일 도서관에 찾아가 빌려오려던 책들이였다. 그런데 자기보다 먼저 책을 가져온 이 처녀는 누굴가? 경망스럽기 그지없는 이 처녀는?

정의성은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불안하여 서성거리기만 하였다.

자기의 방을 헛갈린 이 처녀는 군도서관에서부터 안고온 책을 전실에 내던지고 더위에 쫓기워 세면장에 뛰여든것이였다.

잠시후 물소리가 멎더니 세면장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전실에 널려져있던 책들을 차곡차곡 포개여안은 처녀가 담쑥 방안에 들어섰다.

이슬을 머금은 한떨기 꽃처럼 아름답고 청초한 처녀…

방문턱에서 처녀의 맑은 눈동자는 딱 굳어지였다.

《동문… 동문 왜… 남의 방에 들어왔어요?》

방금전까지 깔깔거리며 새처럼 재깔거리던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었다.

정의성은 그의 눈길을 외면하며 뭉틀하게 내뱉았다.

《여긴 우리 방이요, 2층 5호!》

그의 말에 처녀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딱 과다졌다.

《뭐라구요? 난… 난… 우리 방인줄 알고… 이걸 어쩌나?》

당황하여 울상이 되여버린 처녀는 어느새 문을 박차고 바람같이 사라져버렸다.

정의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열려진 출입문을 꼭 닫으며 후- 안도의 숨을 내그었다. 그리고는 귀중한 독서시간을 뭉청 뺏아간 발칙하기 그지없는 그 처녀를 마음속으로 규탄하였다.

그후 정의성은 3층 5호의 그 처녀가 수의축산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에서 3대혁명소조원생활을 하고있는 송영숙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들은 이따금 생산현장이나 합숙식당에서 만나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처녀는 얼굴이 딸기빛이 되여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차수정이라는 녀동무의 등뒤에 숨군 하였다.

어느덧 정의성이 닭공장에 내려와 연구사업을 시작한지 2년이 가까와오던 어느날이였다.

그는 연구조책임자로부터 다음날 가금전문가들과 대학교원들의 참가하에 공장에서 학위론문공개심의가 있으니 참가하라는 소식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전자시계》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공장합숙을 나서서 론문심의장소인 회의실에 들어섰다. 회의실에는 이미 공장의 기술일군들과 3대혁명소조원들 그리고 안면있는 연구사들이 와있었다.

정의성은 뒤켠쪽의자에 앉아 심의를 기다렸다.

심사성원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앉자 곧 론문심의가 시작되였다.

까만 주름치마에 눈같이 하얀 저고리를 산뜻이 입고 연탁에 나선 론문제출자를 본 정의성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다소 긴장되여 갸름한 얼굴이 발가우리 상기된 그 처녀는 다름아닌 송영숙이였다. 저 처녀가 언제 벌써 학위론문을 준비하였을가?

놀라움은 자못 컸다.

느닷없이 합숙방 전실에 뿌려졌던 도서들과 잡지들이 떠올랐다.

이윽고 장내에는 송영숙의 청아한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처녀는 크고 맑은 눈동자를 영채롭게 반짝이며 가금의 성장과 촉진에 대한 자기의 론문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동물의 간과 혈청을 주원료로 하는 동물성성장촉진제로 가금의 먹이소화률을 높이고 마리당 증체률을 120프로이상 높였습니다.…》 송영숙은 실험자료에 근거하여 론리적으로 설명하였다.

정의성은 가금의 생리적특성과 성장촉진의 필수적조건인 먹이가치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와 과학적인 실험자료에 근거한 처녀의 해설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처녀의 높은 실력과 탐구심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송영숙의 그 론문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하였다.

어느덧 처녀의 토론이 끝나고 심사원들과 참가자들속에서 질문이 오고갔다. 송영숙은 여유있는 자세로 걸그림에 그려진 실험자료와 대조표를 짚어가며 침착하게 설명하였다.

질문이 거의 잦아들무렵 정의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본 송영숙의 얼굴엔 일순 당황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기이하고 아름답지 못한 그와의 첫 대면이 상기되였으리라.

그러나 정의성은 처녀가 아니라 걸그림쪽을 보며 정확한 발음으로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저는 지금까지의 토론을 들으면서 가금생산을 위해 사색과 탐구를 이어온 론문제출자의 높은 학구정신앞에 진심으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론문에서 간과할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는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론문제출자가 오늘이 21세기라는것을 잊고 이 연구를 진행했다는겁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내에서는 약간 술렁거림이 일었다.

송영숙의 얼굴에도 긴장과 불안이 씌여져있었다.

잠시후 정의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동지들도 알고있는것처럼 오늘의 21세기는 농업뿐아니라 축산과 첨가제까지도 록색화방향으로 나가고있습니다.

그런데 이 론문은 21세기를 무시한 동물성성장촉진제에 대한것입니다. 더우기 동물의 간과 혈청은 그자체가 식료품이고 의약품의 귀중한 원료로서 원천도 제한되여있습니다.

이렇게 놓고볼 때 이 론문은 어제와 오늘은 있어도 래일이 없는 론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의성은 일어설 때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정의성의 발언과 기타 여러 의견이 종합된 결과 송영숙의 론문에는 부결이라는 답이 떨어졌다.

그때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정의성이였다.

(부결이라니? 나때문에?… 아니! 나는 그저 의견을 말했을뿐이다. 그런데…)

그는 결코 부결되는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정의성은 송영숙에 대한 죄의식으로 하여 며칠동안 마음의 안정마저 잃고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

(그 동문 지금 나를 무섭게 저주할것이다. 자기의 신성한 첫 창조물에 구세기의 딱지를 붙여놓은 나를…)

그렇다고 송영숙을 찾아가 사죄하고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때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어느날, 현장으로 나가던 그는 정문앞에 서있는 송영숙을 띄여보았다.

처녀는 눈같이 하얀 작업복의 앞자락을 헤쳐놓고 주머니에 두손을 꼭 찌른채 자기쪽을 바라보고있었다.

(드디여 나에게 항의하려고 찾아왔구나!…)

정의성은 키가 크고 몸매 날씬한 처녀를 바라보며 걸음발을 약간 늦추었다.

송영숙이 먼저 경쾌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더니 그윽한 눈매로 쳐다보았다.

《전 지금껏 동무를 만나려고 기다리고있었답니다.》

《그렇습니까?》

정의성은 따분하고 면구스러워 앞머리카락을 몇번 쓸어올렸다.

그는 처녀의 그 어떤 항변도 다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사죄해야겠다고 마음다졌다. 그런데 송영숙은…

《전번 론문심의때 좋은 의견을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난 동무에게서 많이 배웠습니다.》

《?!》

정의성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리고 진실성여부를 가늠해보려고 눈길을 들었다.

(이것이 웃음속의 칼이라는건가? 웃음속에 감추어진 복수?…)

그러나 처녀의 크고 정기도는 두눈과 청아한 목소리에 담겨져있는것은 너무도 순수한 진정이였다.

《저는 정말 동무의 말을 듣고 많은걸 생각했답니다. 명예나 발전에 현혹돼서 대학시절부터 연구해오던걸 서둘러 발표했으니까요.》

처녀는 진정으로 자기를 책망하며 얼굴을 붉히였다.

처녀의 그 진정에 정의성은 크게 감동되였다.

《하지만 동문 나를 몹시 원망했겠지요?》

처녀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처음엔 동무를 증오도 했구 또 원망도 했어요. 그러나 인츰 동무의 의견이 참으로 옳다는걸 인정했지요 뭐.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거예요.》

몇마디 말을 나누어보니 그는 무한히 허심하고도 솔직한 처녀였다.

《앞으로도 많이 배워주십시오.》

처녀는 진정으로 부탁하였다.

정의성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사실은 내가 동무에게서 많이 배워야겠더군요. 참, 좋은 책이랑 참고서를 많이 보던데 나에게도 좀 빌려줄수 없습니까?》

송영숙은 선듯 머리를 끄덕이였다.

며칠후 정의성은 처녀에게서 가금참고자료와 잡지들을 받았다.

정의성도 그에게 번역판 신간잡지 몇권을 주었다.

어느덧 정의성의 마음속에서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처녀는 지울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히기 시작하였다.…

(지금 송영숙은 어제날의 그가 아니다. 세월과 함께 그는 오늘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 역시 달라진 모습으로 그와 마주서있다.…)

오리울음소리에 생각에서 깨여난 정의성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놀이장으로 들어갔다. 후회비슷한 감정이 그의 가슴에 도랑물처럼 흘러들었다. 이윽고 그는 홱 머리를 저었다.

(아니!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나의 결심은 백번 옳았다! 그러니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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