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제 1 장 푸른 호수


12


《에구, 얼마나 배고프겠니? 어서 밥을 먹어라.》

송영숙이 집에 들어서자 외손녀를 끼고 아래목에 누워 풋잠에 들었던 문춘실이 일어났다. 그는 서둘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올라가 누우세요. 참, 경아 아버진 식사했나요?》

얼핏 웃방쪽을 쳐다보며 송영숙이 물었다.

《그럼! 방금까지 텔레비죤을 보다가 올라갔다.》

저녁밥이 식을세라 가마목에 놓아두었던 문춘실은 상우에 그릇들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딸이 수저를 드는것을 보고서야 방안으로 올라갔다.

송영숙은 밥상에 다가앉았다. 빨간 물이 우러난 햇김치를 보니 부쩍 식욕이 동해났다. 그러나 밥을 몇술 뜨던 그는 인츰 수저를 놓았다. 저녁시간이 퍼그나 지난 뒤여서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그였으나 정작 수저를 드니 별로 당기지 않았다.

수저를 놓고 밥상에서 물러앉고보니 문득 어머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끼마다 딸과 사위의 입맛을 돋구어주려고 무던히도 마음쓰는 어머니였다.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사업에 쫓기워 식사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식들이 제일 큰 걱정거리였다.

그래도 사위는 무슨 음식이든 가리지 않는데 딸만은 식성이 까다로와서 항상 마음을 쓰군 하였다. 고기보다 물고기를 더 좋아하고 기름기 많고 느끼한것보다 시원한 김치를 좋아하는 송영숙이지만 국수라면 천길을 뛸 정도로 싫어했다.

사실 함경남도태생인 그의 어머니는 남달리 료리를 잘하였다. 북관녀인들이 거의가 그렇듯이 승벽심이 강하고 열정적인 그들은 자기들의 성격처럼 맵고 쩡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김치를 특별히 맛있게 담그었는데 낙지며 명태, 가재미를 두고 담근 식혜나 깍두기를 한번 먹어본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 맛을 잊지 못해하였다.

지금도 어머니가 담근 햇김치는 시원하고 향기로왔다. 남새나 산나물찬을 특별히 좋아하는 딸을 위해 품들여 담근 김치였다.

송영숙은 어머니의 수고와 그 마음에 식사를 많이 하는것으로 보답하고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것이 안타까왔다.

그는 김치물을 한모금 마신 다음 밥상을 거두었다.

《왜? 좀더 먹지 않구?》

아닐세라 어머니의 주름많은 얼굴에 근심이 비끼였다.

《많이 먹었어요. 햇김치가 참 맛있더군요. 그저 김치가 제일이예요.》

송영숙은 빙긋이 웃어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억지스럽게 생각되였다.

그는 어머니가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며 조심히 웃방으로 올라갔다.

남편은 콤퓨터에 마주앉아 열심히 자료청취를 하고있었다. 문소리에 그는 눈길을 들고 안해쪽을 돌아보았다.

《이제 들어오오?》

남편의 물음에 송영숙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직 쉬지 않았군요.》하고 동문서답하였다. 안해의 말에 백상익은 싱긋 웃었다.

《〈녀왕님〉이 침상에 드시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자리에 들면 되겠소?》

계획사업으로 드바쁜 속에서도 언제나 안해의 사업을 헌신적으로 뒤받침해주고 떠밀어주면서도 웃음과 롱담으로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백상익이였다. 그 웃음과 롱담을 대하면 하루동안의 피곤이 다 가셔지고 새로운 의욕이 샘솟군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남편의 그 웃음과 롱담도 송영숙의 무거워지는 마음을 가셔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번거로와지는 마음을 더 강조해주는듯 싶었다.

《어디 편치 않은 모양이구만?》

백상익은 아예 콤퓨터를 끈 다음 옷을 갈아입는 안해를 주의깊은 눈길로 지켜보았다. 자기의 웃음과 롱담을 즐겨받아들이며 곧잘 소리내여 웃군 하던 안해가 오늘은 웬일인지 잠자코 있는것이 이상스러웠다.

그는 인츰 안해의 얼굴에 한가닥의 그늘이 비낀것을 놓치지 않았다.

웬간해서는 자기 사업의 기분을 집에서 표현하지 않던 안해였는데 오늘은 여느날과 달랐다.

《무슨 일이 있었소?》

백상익은 의자에서 내려앉으며 다시 물었다.

남편의 길쑴한 얼굴에 담겨진 사려깊은 표정을 본 송영숙은 어쩐지 자기의 속마음을 툭 터놓고싶어졌다. 방금전까지만 하여도 집식구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절대 내색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였다.

더우기 남편에게 정의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여 기분을 상하게 하고싶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결심이 물먹은 모래산처럼 허물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실내복을 갈아입고 앉은 그는 남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크고 정기어린 눈은 여느때없이 그윽하고 헤아릴수없이 깊어보였다.

안해를 바라보는 백상익의 마음은 은근히 긴장되였다. 그 어떤 운명적인 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하였다.

이윽고 송영숙은 한없는 리해력을 바라는 마음을 안고 조용히 말했다.

《여보! 내 언젠가 당신에게 말했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소조생활을 할 때 나의 론문을 부정했던 한 청년에 대해서 말이예요.》

안해의 말을 온몸이 귀가 되여 듣고있던 백상익은 꿈쩍 놀랐다.

새 직무를 맡고있는 안해여서 사업에서 제기되는 문제라든가 아니면 건강상문제려니 하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백상익은 결혼후 언제인가 안해에게서 그 청년에 대한 말을 들었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두사람을 리해하였다.

또한 일생을 처녀로 살겠다면서 모질게도 결혼을 반대하던 고집스러운 처녀지배인의 그 마음도 모두 리해했었다. 행복한 결혼생활로부터 타오른 사랑의 불길은 두사람의 마음속에서 정의성의 존재를 연기처럼 날려버렸다.

그런데 지금 안해는 제켠에서 정의성의 일을 꺼내는것이다.

안해의 모습을 얼핏 쳐다본 백상익은 계속하라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 공장 기술준비소에서 일하고있지 않겠나요? 공장에 와서 처음으로 현장을 돌아보면서야 알았지요. 난 그가 여기에 와있는줄 정말 몰랐어요.》

송영숙은 예상 못한 난감한 일에 부닥친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눈빛만은 예리하고 날카로와졌다.

안해의 모습을 지켜보던 백상익은 그만에야 싱긋 웃었다. 그는 정답게 빈정거렸다.

《그거 참 반가웠겠구만, 옛 친구를 만났으니 말이요.》

남편의 롱담에 송영숙은 꾸짖는듯 한 눈길로 약간 흘겨보았다.

이윽고 그는 남편의 기분이나 생각에 개의치 않고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지금 시험호동에서 새로운 오리먹이첨가제를 만들고있더군요. 그런데 그것이 어쩜 내가 연구하는 소금밭이끼에 의한 첨가제와 거의 같을가요? 난 처음 그걸 알구 까무라칠만큼 놀랐어요.

분하기도 하구 또 괘씸하기도 하구… 그래서 난 내가 이미 첨가제연구를 해왔다는걸 지배인과 당비서동지에게 알려주고 그 사람과 경쟁을 하려고 결심했어요.》

《경쟁을 한다?…》

백상익은 조용히 되물었다. 송영숙의 기분이 그에게 옮겨졌는지 남편의 태도며 물음도 정색해지였다.

송영숙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는 닭공장에서와 같이 지금 공장에서 생산을 높이기 위한 결정적고리는 첨가제이며 하루빨리 첨가제를 만들어내야만 높아진 고기생산계획을 수행할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의성이 지금 시험호동을 꾸려놓고 연구와 실험을 동시에 진행하고있는데 대하여 말했다.

《오늘 당비서동진 나에게…》

송영숙의 얼굴에 그늘이 비끼였다.

《그 사람의 첨가제연구와 털단백질먹이연구를 힘껏 도와주라는 당적분공을 주는게 아니겠나요? 첫 당분공이라면서 말이예요.》

《당분공을 받았단 말이지?…》

백상익의 길쑴한 얼굴에서 웃음은 이미 사라졌다. 그는 생각깊은 눈길로 안해를 쳐다보았다. 당비서앞에 정의성과의 남다른 관계에 대하여 터놓을수도 없었고 당분공을 접수하지 않을수도 없었던 그때의 안타깝고 난감한 심정이 안해의 얼굴에 그대로 담겨져있었다.

백상익은 눈길을 떨구고 아래입술을 약간 내밀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약간 밝아진 얼굴을 들고 안해를 건너다보았다.

《여보! 내 옛말이야기를 할테니 들어보겠소?》

빙긋이 웃으며 꺼내는 남편의 말에 송영숙은 그만 손맥이 풀린듯 어깨를 떨구며 원망어린 눈길로 흘겨보았다.

(무슨 또 실없는 롱담을…)

그러나 백상익은 안해의 기분이나 감정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앉음새를 고치며 청굵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이야기를 꺼내였다.

《아득히 먼 옛날… 이웃나라에 한생토록 충신으로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해온 한 늙은 재상이 있었다오.

어느날 그는 자기가 늙고 쇠진해지자 왕에게 이렇게 청을 드렸다누만.

〈전하! 나는 이젠 늙었으니 내가 하던 일을 젊은 사람이 잇도록 해주옵소서. 그러시되 부디 덕망과 재주를 겸비한 젊은이가 잇도록 해주소이다.〉

왕은 그의 간절한 청을 허락하고나서 물었다누만.…》

백상익은 마치도 자기가 목격한 일처럼 어조를 바꾸어가면서 말하였다.

송영숙은 점차 자기를 잊고 그 이야기에 끌려들어갔다.

그때 왕은 그 늙은 재상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재상은 나라의 중대사에 관여하는 중요한 사람인데 그대는 누가 적합할것 같으냐?》

왕의 물음에 재상은 한 젊은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을 들은 왕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는 당신 집안의 오랜 적수의 자손이 아니냐?》

늙은 재상은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진정을 담고 말하였다.

《그가 우리 집안의 오랜 적수의 자손인것만은 사실이오나 그 일을 훌륭히 수행할수 있는 적임자라면 그만이 아니겠나이까?》

그제야 왕은 머리를 크게 끄덕이며 찬성을 표시하였다.

늙은 재상이 지명한 젊은이는 곧 재상으로 임명되였다. 그런데 취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급병으로 죽을줄이야.… 왕은 몹시 애석해하면서 늙은 재상을 다시 불렀다.

《그대는 누가 또 재상이 될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재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한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가 적임자라고 말하였다. 왕은 또다시 놀라면서 되물었다.

《그야… 당신의 아들이 아니냐?》

늙은 재상은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다시금 진정을 말하였다.

《나라의 부강을 위한 일에 원쑤면 어떻고 또 아들이면 어떻습니까? 나라의 부강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지 말아야 할줄로 아옵니다.》

오로지 재능과 덕망만을 인재선발의 기준으로 삼고 나라의 부강과 번영을 진심으로 바라는 늙은 재상의 말에 왕은 또다시 감복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재상으로 임명한다는 령을 내리였다.…

남편의 이야기는 끝났다.

그러나 송영숙은 눈길을 떨구고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백상익은 싱긋 웃으며 안해를 건너다보았다.

《왜 아무 말 없소? 재미나면 재미난다구 말해야지.》

그러나 그는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진지한 눈길로 안해를 바라보았다.

《여보! 당신은 기사장이요. 우리 나라 축산업의 새 력사가 펼쳐진 큰 공장의 생산과 기술을 책임진 기사장이요.》

《…》

《나도 당신이 오래전부터 첨가제연구를 해왔다는걸 잘 알구있소. 당신은 낮과 밤이 따로없이 식사시간마저 잊고 연구를 해왔지. 지배인사업을 하면서도 시간을 쪼개가면서 연구하는걸 보구 난 그때 마음속으로 당신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모르오.

그런데 오늘은… 자기 개인적인 감정만 앞세우는걸 보니 어쩐지 섭섭한 생각이 드는구만.》

《…》

《기사장인 당신은 응당 그 어떤 개인적인 감정을 초월해서 첨가제연구를 힘껏 도와주고 이끌어주어야 하지 않겠소? 그가 누구든 힘과 재능을 합쳐서 보다 큰 성공의 열매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요.》

마디마디 절절한 기대와 호소가 담겨진 남편의 말에 송영숙은 천천히 눈길을 들었다.

남편의 길쑴한 얼굴은 여느때없이 심중하고 근엄해보였다. 잠시 말을 끊었던 남편은 추연한 눈길을 들고 간곡한 어조로 당부하듯 말하였다.

《여보! 난 당신이 자기의 명예나 발전보다 나라의 부강발전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일군이 되길 바라오.

조국의 부강발전속에 개인의 발전이 있는게 아니겠소.》

온몸으로 남편의 말을 새겨듣던 송영숙은 커다란 심적충격에 못이겨 숨을 헉- 들이쉬였다. 운명적인 순간이 눈앞에 닥쳐온듯 심장이 쿵쿵 높뛰였다. 이미 남편의 말은 끝났으나 귀전에서는 여전히 그의 말이 울리고있었다.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깨우쳐주는 그 말을 되새겨보던 송영숙의 눈앞에는 문득 군복입은 아버지의 모습이 우렷이 떠올랐다. 그리고 눈길이 미치지 않는 먼곳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영숙아! 세상에서 제일 성스럽구 아름다운 일은 조국을 위해 자기를 다 바치는 일이다. 이다음… 우리 나라 가금업의 기둥감이 되거라.…》

(아! 아버지!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송영숙은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불렀다.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가슴 한가득 차올랐다. 그의 눈앞은 뿌잇하게 흐려졌다. 이윽고 송영숙은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모두숨을 들이쉬였다.

그리고 아버지와 남편의 절절한 당부와 불같은 호소속에 담겨진 그 뜨겁고 숭고한 뜻을 깊이 되새겨보며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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