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제 1 장 푸른 호수


2


송영숙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점차 긴장감이 풀리면서 피로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생각은 더더욱 예민해지고 날카로와졌다.

정의성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서 춤추었다.

송영숙은 지금 무대에서 그럴듯하게 연기하던 배우가 맥풀린 걸음으로 휴계실에 들어와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공연의 전과정을 돌이켜보는듯 한 심정그대로였다.

그는 청년직장에서 정의성을 만나던 일을 돌이켜보았다.

모든것이 나무랄데 없는 연기였다. 인상도 목소리도 지어 몸가짐까지도 그럴듯 하였다. 하여 관중들을 감동시켰었다.…

그러나 돌이켜볼수록 쓰디쓴 환멸이 도랑물처럼 가슴속에 흘러들었다.

송영숙의 귀전에는 문득 정의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가금생산을 위해 높은 탐구정신을 발휘한 론문제출자앞에 진심으로 머리를 숙입니다. 오늘날 가금생산은 가금의 성장촉진을 떠나서 생각할수 없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송영숙의 론문을 부정하던 10년전 정의성의 목소리였다.

그날 정의성은 랭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저는 이 론문에서 간과할수 없는 문제점을 포착했습니다.

그것은 우선 론문제출자가 오늘이 다름아닌 21세기라는걸 잊었다는겁니다. 21세기는 농업뿐아니라 축산과 첨가제에서도 록색화방향으로 나가고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론문은 21세기를 무시한 론문, 다시말해서 어제와 오늘은 있어도 래일이 없는 론문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예리한 비수마냥 마디마디 뇌리에 박히던 말…

하지만 잊을수 없는 그날 자기의 론문을 부정하던 정의성의 그 말은 처녀대학생의 마음속에 높은 과학적안목을 가진 한 청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안겨주었다.

그후 아름답고 값높은 인생을 약속하던 그날은 또 언제였던가.

《…영숙동무! 난 한생토록 나라의 가금업발전에 자기의 모든걸 다 바치려는 동무의 그 결심을 지지하오. 그리고 동무의 영원한 길동무가 되겠소.…》

못 잊을 추억속에 새겨진 그 나날들을 더듬어보던 송영숙은 가슴 할퀴는듯 한 아픔에 못이겨 다시금 눈을 꼭 감았다.

아! 배반당한 가슴속 상처보다 더 쓰라린것이 무엇인가.…

한동안 그린듯이 앉아있던 송영숙은 조심스럽게 울리는 문기척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서둘러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책상앞으로 다가가며 조용히 응답을 하였다.

문이 열리며 생산부기사장 서정관이 들어왔다.

얼굴이 희여멀끔하고 몸가짐이 의젓한 그는 문가에 서서 정중히 인사를 하더니 자료묶음을 내밀었다.

《아침에 요구했던 년간생산실적자료입니다.》

송영숙은 그제야 생각난듯 머리를 끄덕이였다.

《직장별로 장악된 자료겠지요?》

송영숙은 문건을 받아들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직장별로 구체적으로 장악했습니다.》

서정관은 무척 공손히 대답하고는 《오늘도 현장을 돌아봤습니까?》하고 물었다.

문건을 펼쳐보던 송영숙은 눈길을 들었다.

《그래요. 헌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의 물음에 서정관은 《그런게 아니라…》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송영숙은 마음속으로 서정관이 매번 필요이상의 정중성과 관심을 가지고 자기를 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것때문에 저를 찾았던 모양이군요?》

《예, 벌써 세번째로 찾아옵니다.》

서정관의 대답이였다.

그는 방에서 나가려고 출입문가로 가다가 다시 돌아섰다.

《저… 공장합숙에서 생활하기가 불편할텐데 애로되는게 있으면 아무때나 이야기하십시오. 우리 집사람도 한번 찾아뵙겠다고 하던데요.》

그의 말에 송영숙은 빙긋이 웃음지었다.

《관심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아주머니까지 찾아올 필요는 없어요. 별로 애로되는게 없으니까요.》

《예, 그렇다면야…》

서정관도 허심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싱긋이 웃었다. 그러자 송곳이가 금빛을 띠며 반짝했다. 말할 때나 웃을 때마다 엿보이군 하는 금테씌운 송곳이였다.

송영숙은 그를 보며 지금껏 의문스럽던것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정관에게 두어발자국 다가갔다.

《참! 한가지 묻자요. 저… 기술준비소의 정의성기사 말이예요, 그 동무가 언제부터 이 공장에서 일했어요?》

《그 사람을 아십니까?》

의외로 서정관이 되물었다.

호기심이 촉발된 그의 눈길앞에서 송영숙은 약간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리고 닭공장에서 3대혁명소조생활을 할 때 거기에서 알게 되였다고 말해주었다.

서정관은 얼굴에 반가운 웃음을 담았다.

《그렇습니까? 그 사람은 저의 매부입니다. 누이동생의…》

《?!…》

《정기사가 공장에 온게 아마 5~6년은 잘됐을겝니다. 대학연구소에서 우리 공장으로 왔으니까요. 그때부터 기술준비소에서 일합니다.》

서정관은 매부 정의성에 대해 말하면서 다시금 싱긋이 웃었다. 송곳이가 또다시 반짝거렸다.

송영숙은 눈길을 떨구며 흥심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군요. 알겠어요.》

그는 돌아가보라는 뜻으로 방금전에 받아든 자료에 눈길을 주었다.

서정관은 무슨 말인가 더 할듯하더니 들어올 때처럼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송영숙은 여닫기는 문소리를 듣고서야 눈길을 들고 출입문쪽을 쳐다보았다. 생산부기사장의 출현으로 그의 마음은 더욱더 무거워졌다.

모든 생활이 그에게 괴로움을 주기 위해 계획되고 꾸며진듯 했다. 서정관의 말과 함께 정의성의 모습이 또다시 눈앞에 다가들었다.

그는 서정관과의 대면을 통하여 또 한방망이 맞은 심정이였다.

이윽고 송영숙은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더는… 이제 더는 생각지 말자. 정의성과 나는 지금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기사장이고 그는 공장의 종업원이며 또 기사일따름이다.…)

머리속에 맴돌던 불쾌한 생각을 애써 털어버린 송영숙은 책상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의자에 앉아 년간생산실적자료를 펼쳐들었다.

배합먹이직장과 종금직장들, 알깨우기직장과 청년직장이며 생산직장들과 가공직장 차례로 수자화된 자료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읽어내려갔다.

계획과 실적의 차이며 생산량과 판매량을 비교해보기도 하면서 구체적으로 따져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쪽에 놓인 콤퓨터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콤퓨터를 켜고 년간계획과 실적, 계획수행정형을 다시금 대조해보았다.

한동안 자료의 세계에 파묻혀 계획수행정형을 파악하며 콤퓨터화면을 바라보던 그의 눈앞에는 또다시 정의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상대방의 속마음을 투시해보듯 빤히 쳐다보던 서정관의 눈빛과 반짝거리던 송곳이가 기분나쁘게 되새겨졌다.

다음순간 그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든 자기자신에게 화를 내였다.

그는 소리나게 의자를 앞으로 당기고 콤퓨터화면에 눈길을 모았다.

이때 가벼운 손기척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응답소리에 뒤이어 문이 열리더니 뜻밖에도 초급당비서(당시) 김춘근이 들어왔다.

《오늘도 현장에 나갔다왔습니까?》

당일군이라기보다 마음후더분한 농사군처럼 보이는 김춘근당비서는 구레나룻이 퍼릿한 얼굴에 웃음을 담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로 물었다.

콤퓨터앞에서 일어선 송영숙은 책상앞의 의자를 권하면서 지배인과 함께 현장을 돌아보았다고 대답하였다.

김춘근당비서는 의자에 앉으며 도목장관리국에서 소집한 회의에 참가하느라고 함께 현장에 나가보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였다.

합숙생활이 불편하지 않는가고 묻던 그는 기사장이 콤퓨터능수라는 말을 들었는데 앞으로 자기에게도 배워달라고 말하였다.

《참, 세대주는 군인민위원회 계획부원이라지요?》

김춘근당비서가 송영숙을 쳐다보며 물었다.

송영숙은 빙긋이 웃었다.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던데… 집살림을 돌보면서 어린애까지 맡아키우느라 어머니가 수고많겠군요.》

당비서는 관리국에 회의갔다가 거기에서 새로 온 기사장의 가정래력에 대해 다 알게 된것 같았다.

이윽고 김춘근당비서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공장에서 해야 할 일이 적지 않으며 해결해야 할 기술적문제들도 많다고 하면서 정보산업시대의 일군으로서 어깨가 무거울거라고 하였다.

송영숙은 격식과 틀이 없고 어려움도 주지 않는 이 당비서에게 마음을 푹 의지하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닭공장에서도 그곳 당비서를 친정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하면서 지배인으로 사업해온 그였다.

김춘근당비서의 모습은 문득 닭공장 당비서의 모습으로 바뀌여졌다.

3대혁명소조생활을 마치고 공장에 뿌리내린 송영숙을 걸음걸음 이끌어주고 그의 조선로동당입당을 보증해주었던 당비서였다.

그는 송영숙의 열렬한 탐구심과 능숙한 사업실천능력을 보고 20대의 처녀를 지배인으로 내세워주었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정의성이 남긴 마음속 상처를 안고 한생 처녀로 살리라 모진 마음을 먹었던 그에게 가정을 이루도록 진심으로 권고하면서 친부모의 정을 기울여준 당비서였다.

잊을수 없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던 송영숙은 김춘근이 자리에서 일어나는것을 보고서야 자기에게로 돌아왔다.

《앞으로 사업에서나 생활에서나 걸린 문제가 제기되면 아무때건 찾아오십시오. 함께 풀어봅시다.》

김춘근당비서는 성큼성큼 큰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송영숙은 출입문이 닫기는것을 보고서도 인츰 자리에 앉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어둡고 무거웠던 마음이 김춘근당비서로 하여 얼마간 가셔지는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창문가로 다가갔다. 청사의 3층에 자리잡은 그의 방 창문가에서는 호수가기슭의 공장전경이 한눈에 안겨왔다.

송영숙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4월의 청신한 바람이 호수가쪽에서 불어왔다.

송영숙은 몸도 마음도 깨끗이 정화시켜주는 봄기운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의 숨결에는 당의 신임과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굴지의 오리고기생산기지를 한몸바쳐 떠받들고 생산과 기술을 힘있게 밀고나갈 굳은 결의가 담겨져있었다.

송영숙은 공장전경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창문가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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