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 회)


제 4 장 책임한계


7


일이 끝났지만 하경옥은 퇴근할수 없었다. 또다시 누모르안에 의한 합성약물자료를 하나하나 확증하고 분석하는데 달라붙었던것이다.

밑줄을 긋고 종이를 끼워놓고 또 페지를 접어놓기도 하고… 많은 시간이 들었다. 환자들을 치료하고 중환자까지 돌보고나면 잠간 눈을 붙일 시간도 없다. 일단 결심한 일이면 끝까지 해내고야마는 이악한 성미여서 사람들도 그에게 혀를 내두르군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정신없이 필요한 자료를 옮겨베끼던 하경옥은 문득 쓰던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굳어졌다. 누군가의 주의깊은 눈길을, 자기에게서 떠나지 않는 류다른 시선을 온몸으로 느꼈던것이다.

숨을 죽이고 까딱하지 않았다. 누굴가? 나를 지켜보는 저 눈빛은?… 머리를 들었다. 순간 칼끝처럼 부딪친 두사람의 눈길.

《?!》

《!》

권일학이였다. 문을 열고 그대로 선채 까딱 않고 서있는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듯 했다. 잠시 그대로 서있던 권일학이 아무말없이 조용히 돌아섰다. 이어 문닫기는 소리.…

하경옥은 그가 나간 출입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기술부원장이 아까부터 그렇게 자기를 지켜보고있었다는것을 깨달았던것이다. 그 주의깊은 눈빛, 지어 심각해보이기까지 한 그 눈길.…

그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하경옥은 알수 없었다. 어째서 말없이 그냥 나갔는지도, 무엇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였는지도 알수 없었다. 혹시 앞서 자기를 찾아왔던 그 녀인, 아이를 낳지 못해 남편과 갈라지겠다고 하던 선우금숙의 눈물겨운 부탁을 두고 그렇게 괴로와하고있는것은 아닌지.

마음이 번거로와진 하경옥은 실험자료들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외출복을 갈아입고 산원정문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조용한 거리에는 소리없이 내리는 보슬비만이 사람들의 모든 기쁨과 슬픔, 고뇌를 잠재우며 끝없이 대지를 적시고있었다.…

하경옥은 퍼그나 밤이 깊어서야 집에 들어섰다. 어머니도 잠들고 동생들도 꿈나라에 간지 오래다.

그때까지 딸을 기다리고있던 년로한 아버지가 가방을 받아주며 부엌에 내려섰다.

《너무 늦었구나. 시장하겠는데 어서 저녁부터 먹어라. 내 이제 곧 차려주마.》

《괜찮아요. 아버지, 제 손으로 차려먹지요 뭐.》

《가만 있거라. 하루종일 환자들을 치료하느라고 힘들었겠는데.…》

하경옥은 더 만류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늘 앓는 어머니를 간호하고 장난꾸러기 동생들을 돌보느라고 애쓰던 그 딸이 기특하여 잔등을 두드려주던 아버지, 젊었을 맨 중앙기관의 어느 한 부장으로서 사람들의 존경도 받았고 말년에는 지방으로 내려감으로써 딸에게 실련의 아픔도 주었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하경옥은 한생 고지식하고 정직했던 아버지를 여전히 존경했다.

아버지 역시 대바르고 동정심이 많은 딸을 어렸을 때부터 무척 아끼고 사랑해주었었다. 그렇게 사랑해온 딸이여서인지 아버지는 지금도 늘 밤늦게 들어오군 하는 딸의 밥시중드는것을 하나의 기쁨으로 여기고있는것이다.

하경옥이 밥술을 들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진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지요?》

《그건 무슨 소리냐? 새삼스레…》

《내 보기에 어머니는 한생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왔거던요. 그렇지요? 아버지.》

고집스럽게 묻는 딸의 물음에 아버지는 심상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너의 어머니가 앓고있었기때문이지. 환자야 돌봐주어야 한다는걸 너도 잘 알지 않니.》

《그래도 아버지는 언제한번 어머니에 대해서 불평한적이 없지 않아요? 한생 리해한다는건 쉬운 일도 아닌데…》

찬그릇을 담아주던 아버지가 눈가에 잔주름을 지으며 이상한 눈길로 딸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걸 모를리 없겠는데… 언젠가도 누가 그런걸 물은 사람이 있었지. 너의 어머니같이 늘 앓는 녀성을 리해하는것은 곧 자기희생이 아닌가고.… 아마 상대방을 위해서 고달픈것을 참는다는거겠지. 하지만 난 달리 생각한다. 그런 리해란 또 하나의 사랑이라고 말이다.》

하경옥은 밥술을 뜰 생각은 않고 아버지의 말을 되받아 외웠다.

《리해란 또 하나의 사랑이다.…》

《그래, 부부간에도 리해라는 사랑이 없다면 한생을 살아가기가 힘들단다. 간혹 어떤 남자들은 결혼하게 되면 안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것을 응당한것으로 여기고 또 그것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내 보기에 그건 안해에 대한 하대지 도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녀성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있니? 아이를 낳고 살림살이를 꾸리고 또 사회생활에서 한몫 맡아하고… 노래에도 나오지 않느냐? 녀성들이 없으면 생활의 한구석이 빈다고… 이런 안해들을 도와주고 동등하게 대해줄 때만이 진정한 사랑이 지속되는것이지.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깃들면 그 누구도 불행해지는 사람이 없을게다. 난 네가 녀성들에게 사랑과 행복을 주는 산원의사라는것을 그 어느 직업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생 사랑으로 살아오신 아버지, 어느 한 예술극장의 제1바이올린수였던 어머니를 아버지는 그렇게 한생 사랑해오신것이다.

문득 아픔에 흐느껴울던 선우금숙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 녀인의 남편도 아버지처럼 안해를 사랑해주었으면!…

그때 하경옥은 다음날 선우금숙이 또다시 기술부원장을 찾아가 리혼근거를 확증하는 증명문건을 요구하였다는것을, 권일학이 끝내 그 문건에 수표하지 않았다는것을 알수 없었다. 그리고 권일학이 선우금숙이 두고간 눈물에 젖은 그 문건을 탁상 한복판에 그대로 놓은채 체외수정연구사였던 위인섭을 찾아갔다는것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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