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2 장 량심의 선고


10


하경옥은 어제 밤 권일학에게 자기가 뭐라고 했던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픈 마음에, 강학선에 대한 그의 랭정한 태도에 참을수 없어 자신을 걷잡지 못하고 흥분하여 그를 찾아갔었다. 회초리로 후려치듯이 사정없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하고싶던 말을 죄다 터놓았었다. 터놓지 않으면 자신이 숨막혀 죽을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마음은 오히려 더 무겁고 괴롭기만 했다. 그는 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냥 듣기만 했단 말인가. 왜서 자기를 비난하는 처녀앞에서 묵묵히 침묵만 지켰단 말인가.… 그가 단 한마디라도 자신을 변명했어도, 그런것이 아니였다고 소리쳤어도 하경옥은 이렇게까지 맥이 빠지진 않았을것이다. 인정과 의리를 외면한 권일학, 끝까지 자기 견해를 양보하지 않은 기술부원장, 이런 그를 타매한것이 과연 옳은것이였을가?…

문득 복도에서 만났던 어린 총각애가 떠올랐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자라는 권일학의 어린 아들 정철이, 인정에 주리고 사랑에 주린 그 순진한 눈동자… 놀란듯 쳐다보던 그 애의 두눈이 왜 그리도 잊혀지지 않고 이렇듯 마음을 아프게 하는것인지?…

《하선생, 뭘 그렇게 생각하고있어?》

몸매 자그마한 녀인이 새물거리며 의사실에 들어섰다. 머리를 돌려 그를 쳐다보는 하경옥의 얼굴에 어설픈 미소가 어렸다.

《실장선생이군요.…》

그는 불임증연구실 실장 홍정순이였다.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으나 자기 책임을 다하는데서는 이악하기로 소문난 녀성이였다.

《처녀가 고민하는건 의미가 있는거지.》

그가 웃으며 하는 말에 하경옥은 얼굴을 붉히였다.

《참, 실장선생두 무슨 그런 소릴…》

《아니, 녀자의 고민이 무엇인지 난 알아. 그게 어떤 남자때문이라면 그건 속을 썩여도 행복한거지.》

하경옥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홍정순은 남편없이 사는 녀자이다. 그의 남편은 군관학교 교원이였는데 학생들의 전술훈련을 지휘하던중 불의의 정황에서 터지는 수류탄을 한몸으로 덮고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남편을 잃은지 여러해가 되지만 그는 시부모들과 시동생, 시누이까지 데리고 이악하게 살림을 해나가면서도 연구사업을 놓치지 않고있다. 벌써 발명권만 해도 여러개나 되고 전시회에 나간 연구성과들은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홍정순이 계속했다.

《하선생, 내 말을 들어봐요. 지금에 와서 난 후회해요. 그이가 살아있을 때… 사실 우린 같이 있을 때가 거의 없었어요. 그인 매일같이 나가살고 난 연구사업때문에 정신이 없었구. 어느날인가 전술훈련에 나갔던 그이가 돌아오지 않았겠어요. 마침 그날은 그이 생일날이기도 했어요. 서둘러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며 부지런히 부엌에서 돌아가는데 갑자기 전화가 오지 않겠어요.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한다는거예요. 난 마음을 조였어요. 오늘같은 날에야 사정을 말하고 집에 있을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그인 그저 〈알았습니다!〉하고 대답하겠지요. 안해가 정성들여 생일상을 준비하고있는데도 말이예요. 난 간청했어요. 〈꼭 당신이 나가야 하나요? 다른 사람으로 조직해두 일없겠는데…〉

그때 그이가 뭐라 했는지 알아요? 〈당신은 참 아직 어린애구만, 군관의 안해라는게…〉

그인 나갈 차비를 하면서 나를 위로하고 리해시키려고 애썼지만 난 끝내 앵돌아지고말았어요.

〈됐어요! 이젠 당신을 더 기다리지 않겠어요!〉

헌데 그것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길이 될줄은!…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인 오지 못했어요, 그토록 기다렸지만…

그이가 희생된 다음에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게 굴었는가를 깨달았어요. 왜 그때 더는 그이를 기다리지 않겠다고 투정했는지. 그이 마음을 제일 잘 아는 내가…》

하경옥은 어느새 흠씬 젖어버린 그의 두눈을 바라보고있었다. 사랑과 후회 그리고 아픔, 진실한 사랑이란 곧 아픔이 아닐가?…

그러나 내가 권일학기술부원장에 대하여 느끼는것은 그러한 사랑의 고민과는 다른것이다. 녀자들의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인정과 의리를 모르는 한 인간에 대한 경멸이고 타매인것이다.

하경옥은 조용히 그를 쳐다보았다.

《실장선생, 녀자들의 고민이 단순히 자기만을 위해달라고 하는 그런 오해나 투정일가요? 아니, 기대했던것이 허물어지는데서 오는 실망이나 타매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홍정순이 말꼬리를 길게 끌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럴수도 있겠지. 허나 내가 말하는건 녀자의 고민이란 모두가 다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는 그거예요. 두고보세요, 내 말이 틀리나.》

홍정순은 의미있게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온 서류를 과장책상우에 놓았다.

무심히 바라보니 《동결보존방법확립에 대한 기초적연구》이라는 자료였다. 강학선과장은 지금 자리를 비우고 없지만 그가 여전히 과학평의회 성원이므로 관례대로 2산과에 실험자료를 가져왔던것이다.

《그럼 하선생,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래요.》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금 하경옥에게 의미있는 미소를 보냈다. 하경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눈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점도록 한자리에서 까딱하지 않고있었다.

맞은편벽에 걸려있는 거울에 무심히 눈길을 던졌다. 그 거울속에서는 얼굴이 부석부석해진 처녀가 시름겨운 눈빛으로 내다보고있었다. 그러니 너 하경옥이 사랑의 고민에 빠졌단 말인가. 기술부원장을 두고?… 허거프게 웃고말았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콤퓨터앞에 다가가 전자병력서를 펼쳤다.

그때였다. 해맑고 그쯘한 체격을 가진 한사람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우리 실장선생 여기 오지 않았소? 2산과에 갔다고 해서 왔는데…》

하경옥은 콤퓨터화면에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불임증연구실의 위인섭이였다.

《방금 왔다갔어요.》

《아, 그렇소?》

되돌아나가려던 위인섭이 콤퓨터화면에 펼쳐진 전자병력서에 피끗 눈길을 던지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아, 병력서를 외국어로 기입한다?!… 이건 누가 발기한거요? 이렇게 하면 외국어실력이 쑥 올라가겠구만, 응?!》

위인섭이 흥이 나서 저 혼자 계속 떠들었다.

《녀자들이란 참! 정말 이악쟁이들이라니까. 우리 실장만 봐도 그렇지. 집살림만 해도 눈코뜰새없이 바삐 돌아가야 할 처지에 밤낮 연구사업에 몰두하고있으니…》

하경옥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선생은 뭘 말하자는거예요?》

위인섭이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하선생, 우리 홍정순실장이 큰집의 맏며느리로 시부모, 시동생, 시누이 등 숱한 사람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면서도 저렇게 연구사업을 한다는게 놀랍지 않소? 옆에서 보느라면 어느 하루도 편한 날이 없어요. 하긴 뭐 나도 별로 나은게 없지. 이거 새 기술부원장때문에 막 죽을 지경이구만. 얼마나 몰아대는지…》

이번에는 하경옥이 놀란 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기술부원장선생이 뭐라구요?》

《아, 글쎄 좀 보오. 그가 세운 과제를 수행하자면 잠도 안 자고 먹지도 말아야 할텐데 그걸 어떻게 해낸단 말이요? 괜히 사람들을 못살게 들볶는다니까… 그렇게 아글타글 해야 남는게 뭐 있소? 강학선과장처럼 두들겨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경옥은 이윽토록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많은 처녀들이 반하는 위인섭. 뛰여난 언변가요, 익살군이면서도 바가지로 물을 뜨듯 아무때건 지혜를 퍼낸다고 소문이 난 그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좀 비뚤어진 사람이라고 뒤소리를 하군 했다. 이런 그가 기술부원장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시비하고있는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는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오? 혹시 나에게 의료일군의 책임이요, 헌신이요. 하는걸 또 풀이하자는게 아니요?… 아, 됐소. 인젠 그런 말에 싫증이 나오. 하선생두 권일학기술부원장이 자기 선배를 어떻게 조겨대는지 봤지요? 생명, 책임, 량심… 말이야 좋지.》

그는 비웃는듯 두어깨를 으쓱하더니 별안간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만, 내가 여기 뭣때문에 왔더라?… 그런데 실장선생은 왜 찾는다는거요? 오늘 못하면 래일 하는거지. 에- 힘이 드는구만, 그저 온통 다그어대는 사람들뿐이니… 글쎄, 이렇게 애쓰는걸 누가 알기나 한다오? 제 하나 고생이지. 그렇지 않소, 하선생?》

《난 모르겠어요.》

《챠, 오늘따라 웬일이요? 누가 하선생을 노엽히기라도 했소? 자, 됐어요. 그만하고 갑시다, 퇴근시간도 다됐는데…》

하경옥은 콤퓨터화면에로 다시 눈길을 주었다.

《먼저 가세요.》

《그만 고민하라구요. 스트레스는 건강의 첫째가는 적이거던요. 모든건 조화와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거꿀법칙대로!…》

그는 또다시 어깨를 으쓱해보이고 방에서 나갔다. 문닫기는 소리와 함께 건반우에 올려놓았던 하경옥의 손이 맥없이 내려졌다.

오늘은 웬일일가? 홍정순, 위인섭 두사람 다 나를 고민하는 처녀로 보고있다. 고민을 한다? 무엇때문에? 홍정순이 말한것처럼 그 누구때문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살창을 올리니 저녁노을이 창유리를 붉게 물들이고있었다. 긴 여름해가 지는것이다. 지는해, 지는 여름…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그었다. 왜 이렇게 허전할가? 마음이 쓸쓸했다. 그토록 부정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때없이 마음의 등불을 비추어보군 했던 그 사람, 뜨거운 정으로 이어질수도 있지 않을가 하고 기대했던 권일학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다음순간 그는 가볍게 머리를 저으며 살창을 내리였다. 아니, 그런 일은 없을것이다. 강학선과장이 그리도 장담했던 그런 일은!…

하경옥은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자기가 권일학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있다는것을, 저 스러져가는 저녁노을처럼 아득히 멀어져가고있다는것을 느끼고있었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mypeople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이전페지   다음페지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