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2 장 량심의 선고


9


갑자기 날이 흐려지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더 세차게 쏟아붓기 시작한 비는 저녁때가 되여오도록 멎지 않았다.…

똑똑똑!

쏘파에 몸을 던진채로 꼼짝 않고있던 권일학은 문두드리는 소리에 지그시 감고있던 눈을 떴다.

퇴근시간이 지났는데 누가 또 찾아왔단 말인가?… 미간을 찌프리며 쏘파에서 일어서려던 그는 신음소리와 함께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열로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가 금방 터질듯 무거웠다. 전날 찬비를 맞은것이 그만 감기로 번져진것 같았다. 열에 뜬 눈으로 탁자우를 더듬었다. 간호원이 가져다준 약봉투가 어디 있겠는데…

그때 다시 문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미처 대답할새도 없이 누군가 방에 들어섰다.

《?!》

뜻밖에도 하경옥이였다. 언제나 맑고 깨끗하던 그 처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꼭 다물려져있는 엷은 입술은 가늘게 떨리고있었다.

권일학이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요?》

늘 등불처럼 따스하던 처녀의 눈길은 차고 쌀쌀했다. 권일학은 비로소 기다려온듯 한 그 어떤 예감에 온몸이 긴장되는것을 느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면바로 바라보던 하경옥이 속삭이듯 또박또박 찍어말하기 시작했다.

《전 리해할수 없습니다. 어쩌면!… 유능한 의사인 그를… 진심을 바쳐온 제일 가까운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습니까. 저를 무시하고 모질게 탓하는것은 참을수 있지만… 강학선과장선생을 비난하고 괴롭히는것은 정말… 리해할수 없습니다.》

《?…》

권일학은 온몸이 굳어졌다. 처녀의 싸늘한 눈길이 얼굴을 찌르는듯 했다.

이어 떨리는 목소리가 곧바로 그의 가슴에 다시 날아들었다.

《선우금숙환자는 어머니가 되고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과장선생은 힘든 수술을 했던겁니다. 부원장선생도 그걸 알고계시지요? 인간적인 의무감에서 모험했다는것을 알고계시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분을 타매할수 있습니까? 그가 량심적이였다고 왜 증명하지 못합니까? 예?!…》

권일학은 책상 한끝을 바라보며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창밖의 비소리에 토막토막 끊기는 처녀의 숨찬 목소리를 가려들으려 애쓰고있을뿐이였다. 처녀의 두눈은 흥분으로 하여 그냥 떨리고있었다.

《전… 새 기술부원장을 기다려왔습니다. 남다른 인격과 지성이 갖추어진 존경할만 한분이라는 말을 들어왔고 또 그렇게 믿으려고 애썼습니다.

높은 식견과 뛰여난 실력을 지닌 그런 사람이 이렇게 얼음장같이, 수술칼처럼 차거운 인간인줄은… 몰랐습니다. 분합니다! 그런 사람을 마음속으로 굳이 믿으려 했던 제가… 어리석고 분합니다!》

권일학은 그러쥐고있는 탁자에 으스러지게 손톱을 박았다. 혀를 깨무는 신음소리, 누가 그렇게 신음했는지 알수 없다. 그였는지 하경옥이였는지…

그는 급히 손을 뻗쳐 탁자에 놓았던 약봉지를 더듬어 찾았다. 허사였다. 열에 뜬 손이 후들거렸고 머리는 금시 뜨거운 쇠고리에 죄여지는듯 했다.

하경옥이 한결 낮아진 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래도 좋아요. 하지만… 전 견딜수가 없어요! 이 마음을 털어놓지 않고서는… 정말 괴로워서 못 견디겠습니다!…》

입술을 깨문 하경옥은 그만 머리를 획 돌리더니 두손에 얼굴을 묻으며 방에서 뛰쳐나갔다. 미처 닫기지 못한 출입문이 그가 남기고간 감정의 여운인듯 빠끔히 열려진채로 흔들거렸다.

얼빠진듯 멍청히 서있던 권일학은 고열에 달아오르는 머리를 무겁게 떨구며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추위를 느끼였다. 그 처녀가 방안의 온기마저 다 걷어안고 나간것 같았다.

점차 열이 오르면서 온몸이 떨려나고 이발이 떡떡 맞쪼아졌다. 그제서야 손에 쥐고있는 약봉투를 발견한 그는 알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 소태처럼 쓰거웠다. 얼른 고뿌에 물을 부어 삼켰으나 여전히 쓴맛은 가셔지지 않았다. 다시 쏘파에 등을 기대며 모든것을 잊으려고 눈을 감았으나 경멸이 비낀 그 처녀의 검은 두눈이 오래도록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어린애의 흐느낌소리가 들려왔다. 둘러보았으나 방안에는 자기 혼자뿐이였다. 신경이 예민해진탓인지 모른다.

그러나 또다시 적막속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소리… 그것은 도란도란 하는 말소리와 함께 열려진 문짬에서 들려오고있었다. 비로소 착각이 아님을 깨달은 권일학은 출입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다음순간 말뚝처럼 그 자리에 굳어졌다. 복도 한가운데 멎어선 하경옥이 얼나간듯 정철이와 마주 서있었던것이다.

울면서 아버지를 찾아오던 그 애를 지나치다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것이였다.

《너… 정철이지?》

《?!…》

《아버지를 찾아왔니?》

《응…》

어린것이 흐느끼며 대답했다.

《할머닌 어디 가시구?》

《촌에! 막내고모한테…》

오늘 아침 막내녀동생이 있는 발전소건설장에서 전화를 걸어온 어머니는 지원물자를 넘겨주고 인차 돌아설 작정이였는데 정작 와보니 여기에도 자기 손을 기다리는 일감들이 많다고 하며 누군가 내온 재봉기에 올라앉아 밤낮으로 건설자들의 작업복들과 장갑들을 손질한다고 했다. 권일학이도 정철이를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애를 자기가 돌보겠으니 마음놓고 일이 끝날 때까지 건설자들을 도와주라고 했던것이다.

처녀는 정철이가 아무렇게나 가방에 쑤셔넣은 작은 밥곽을 바로 놓아주려다가 뚜껑이 열려있는 그것을 꺼내들었다. 먹다남은 절인 오이찬과 밥을 눈여겨보던 하경옥이 갈린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싸주었니?》

《아버지가…》

처녀가 아픈 눈길을 들며 정철이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또다시 울려고 입을 비쭉거리던 정철이가 놀란듯 하경옥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린것의 두눈이 한순간 밝게 빛났다. 티없이 깨끗한 눈동자.

《아지민… 누구나요?》

처녀는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순진한 어린것의 그 눈망울에는 눈물헤픈 이웃집녀인의 동정이 아니라 친어머니의 사랑을 바라는 어린애의 간절한 꿈이 비껴있었던것이다.

《응, 난 저…》

당황하여 떠듬거리는 하경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어린것의 두눈이 그만 실망한듯 빛을 잃었다. 이어 그 눈빛은 곧 무엇을 경계하는듯 한, 못마땅한듯 한 눈초리로 변하는것이였다.

갑자기 어린것이 하경옥을 밀어던지며 달아나려고 버둥거렸다.

《싫어, 싫어!》

하경옥이 놀란듯 물었다.

《왜 그러니, 응?》

《싫어! 아지민… 우리 엄마 아니야.》

순간 권일학은 잡고있던 문고리를 비틀었다. 눈뿌리가 아프게 죄여지며 보이지 않는 예리한 수술칼이 그의 가슴을 저며내였다.

《아버지!》

하경옥에게서 빠져나온 아들애가 그에게 달려왔다. 그제야 급히 일어난 처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더니 황황히 계단쪽으로 뛰여내려갔다.

깊어가는 밤…

쉴새없이 조잘대던 정철이도 잠든지 오랬다. 아들의 머리에 자기의 팔을 고여준 권일학이도 밀려드는 피곤에 못이겨 두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들수 없다. 래일 아침엔 부인과회진이 있지… 다음엔 수술협의회가 있구, 오후에는 과학토론회와 학술발표회에 참가해야 하고… 끝없이 엉켜도는 그 모든 생각을 쫓아버릴수가 없었다. 자야 한다, 잠들어야 해.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속으로 셈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아득히 먼곳에서 구급차의 경적소리가 울려온다. 하얀 구급차의 붉은 신호등이 빙글빙글 돌면서 그의 눈앞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빨리! 빨리!… 수술복차림인 권일학이 마주 달려간다.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 하경옥이 괴상한 가위를 들고 환자의 몸에 그것을 댄다. 어쩌자는거요?! 의아쩍게 바라보는 하경옥… 권일학은 수술칼을 쥔채 힘껏 소리친다. 그만하시오! 소리치면 칠수록 더 급하게 손을 놀리는 하경옥…

딸깍!- 스위치 넣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방에 불이 켜졌다. 땀으로 흠뻑 젖은 권일학은 소스라치며 꿈에서 깨여나 눈을 떴다. 그앞엔 구급차도 환자도 괴상한 가위를 든 하경옥도 없었다.

다만 그의 팔에 안긴 어린 아들이 쌔근쌔근 자고있을뿐이였다.

《무슨 꿈을 그렇게 꾸나? 원, 애들처럼…》

그제서야 권일학은 음식그릇을 든 림숙정당비서가 문앞에 서있는것을 알아보았다.

《비서동지가 어떻게?…》

《사람이 왔는데 앉으라는 소리도 안하나?》

다리가 아픈듯 힘겹게 걸음을 옮기며 다가온 림숙정이 제 손으로 의자를 당겨가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이젠 늙었어! 늙었다니까.… 젊었을 땐 나도 힘장수였지. 억대우같은 남자들을 단번에 둘쳐업구 뛰구… 그런데 이젠 다야.》

권일학은 팔에 안고있던 아이를 조심히 바닥에 눕히였다. 당비서가 이런 말이나 하자고 찾아온건 아니겠는데… 누구보다 강학선의 일로 왼심을 쓴 당비서이다. 그래서 현장으로 가는 그를 바래주러 나오지 않은 이 권일학이 노여웠을거고…

《참 기술부원장, 그 처녀는 왜 울렸나? 모두다 좋아하는 녀의사인데… 다신 그러지 말게. 전쟁때 우리 군의소에두 그런 녀군의가 하나 있었지. 호되구 맵짠…》

림숙정은 책상에 놓여있는 밥꾸레미를 끄당겨 자기가 들고온 여러가지 음식곽들과 함께 그앞에 놓아주었다.

《어서 들게. 그동안 내 얘기나 하나 할가.…》

잠든 아이의 이마를 쓸어주며 림숙정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1953년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날에 있은 일이였다. 전방군의소 간호장이였던 림숙정은 몇몇의 간호원들을 데리고 아직도 총폭탄이 울부짖는 무명고지로 달려갔다. 밤새 무명고지를 탈환하는 전투가 벌어진 등성이에는 아직도 불길이 스러지지 않았고 매캐한 초연이 바람에 실려오고있었다.

림숙정은 부상병들에게 붕대를 감아주며 소리쳤다.

《담가!》

위생가방을 멘 간호원들이 달려오면 부상병들을 실어주며 또 재촉하군 했다.

《자, 빨리 가요!》

자기도 부상병을 등에 업고 내달렸다. 등성이 하나를 넘어 숨이 턱에 닿아 업고온 부상병들을 전방군의소에 넘겨주고는 선자리에서 또 되돌아달려가군 했다. 벌써 몇번째인지 알수 없었다.

갑자기 고지로 치달아오르던 림숙정은 어느 한 등성이에서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포신을 구겨박고있는 적땅크옆에 죽은듯이 쓰러져있는 한 전사를 발견했던것이다.

한달음에 달려간 림숙정은 반나마 흙속에 묻혀있는 부상병을 끌어내여 반듯이 뒤집어놓았다.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불에 그슬린 애어린 전사였다.

《동무, 동무! 정신차려요!…》

대답이 없었다. 급히 가슴을 헤치고 손을 대보았다. 인젠 늦었는가?… 부상병의 창백한 얼굴이 뒤로 맥없이 젖혀졌다. 아직 솜털이 보르르한 매끈한 턱, 조금 벌려져있는 애된 입술, 처녀애처럼 맑은 살결… 림숙정은 그를 흔들며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전사의 반쯤 떠있는 두눈은 생기를 잃고 푸른 하늘을 멀거니 견주고있을뿐이였다.

림숙정은 피범벅이 된 그의 가슴에 다시 귀를 눌러대고 무엇인가 가려들으려고 애썼다. 마치 숨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기라도 하듯… 한순간 그는 전류에 닿은듯 몸을 떨었다. 그 어떤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 아직 식지 않은 피의 느낌이, 아득히 먼곳에서 울려오는듯 싶은 생의 마지막박동이 림숙정의 흉벽을 가늘게 두드렸던것이다.

《살아있구나!》

림숙정은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전사동무, 살아있어! 숨을 쉬고 있어!…

림숙정은 무작정 전사를 둘쳐업고 오던 길을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뛰면서도 그냥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참아줘, 응?… 이제 군의소에 가면 다 잘될거야, 응? 내 말을 믿으라니까!》

얼마 못 가서 온몸이 땀으로 물주머니가 되였고 목에서는 겨불내가 났다. 봄날의 메마른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갑자기 대기를 써는 앙칼진 쇠소리가 나더니 여기저기 포탄이 날아와 터졌다. 쏘구역에 들어선것이였다. 요란한 폭음에 이어 눈앞에서 불기둥이 솟구쳐오르고 뒤이어 기총탄의 몰사격이 릉선을 누볐다. 숨을 헉헉 몰아쉴 때마다 매운 연기가 목구멍으로 쓸어들었다.

또다시 솟구치는 불기둥… 림숙정은 부상병을 내던지며 그우에 몸을 덮었다. 타래치던 화염과 재개비가 그들을 휘감았다. 어떻게 다시 일어났는지 모른다. 부상병을 둘쳐업고 내달리면서 소리쳤다.

《동무, 내 말이 들려요? 들리지?… 제발 맥을 놓지 말아요. 맥을 놓으면 다시 살지 못해. 알겠어?…》

등에 업힌 전사는 한마디 대답도 없었으나 림숙정은 그의 맥박을 온몸으로 느끼고있었다. 끊임없이 잔등에 파문처럼 미쳐오는 애어린 전사의 심장의 박동… 드디여 천막을 친 전방군의소에 이르렀다. 부상병을 내려놓자 녀군의가 다가왔다.

《어떻게 된거예요?》

《치명상입니다.》

림숙정의 대답이 끝나기 바쁘게 녀군의는 부상병의 손을 잡고 맥박을 짚어보았다.

《죽은 전사를 업고왔구만요, 간호장동무.》

죽은 사람?… 순간 림숙정은 온몸의 기운이 발밑으로 빠져나가는것 같았다. 숨이 없다니… 그럼 지금껏 죽은 전사를 업고 달려왔단 말인가? 그럴수 없어, 그는 살아있었어, 숨을 쉬고있었어.…

《난 믿어지지 않아요. 틀림없이 여기 올 때까진 심장이 뛰고있었어요.》

련속 들이닥치는 다른 부상병들에게로 걸음을 옮기던 녀군의가 몸을 홱 돌렸다.

《뭐- 라구요?》

《살아있었어요, 분명 살아있었어요! 이 동문…》

녀군의의 얼굴이 차거워졌다. 이어 쟁가당! 하는 소리가 림숙정의 귀청을 때렸다. 녀군의가 손에 들고있던 핀세트와 소독가위를 오염소랭이에 던져넣었던것이다.

화가 났는가?… 림숙정은 그를 쳐다보았다. 늘 말이 없는 녀군의의 조그마하고 새까만 입술은 꼭 다물려있었다. 분명 간호장의 고집이 극도로 피곤에 몰려있는 그를 자극한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명의 부상병들을 수술해야 하는 강마르고 딱딱한 녀군의… 그는 누구와도 살뜰하게 얘기한적이 없었고 또 누구의 엄살이나 익살도 받아준적이 없었다. 하지만 선자리에서 밥을 먹고 선채로 잠드는 이 녀군의의 손은 언제나 부상병들의 피로 마를새가 없었고 잠을 자지 못해 충혈진 그의 날카로운 두눈은 늘 부상병들의 상처에서 떠나지 않군 했었다.

《비켜요.》

손을 닦고난 녀군의가 림숙정을 밀어버리며 부상병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다시 맥박을 짚어보고 깐깐하게 청진기를 대여본 다음 피젖은 상처를 헤쳐보았다. 온통 찢기고 터진 애어린 전사, 생명이 남아있다고는 도저히 믿을수 없는 처참한 상처였다.

별안간 녀군의가 낮게 소리쳤다.

《수혈준비!》

림숙정은 당황했다. 피!… 언제나 모자라는것이 피였다.

《저… 군의동지, 군의소엔 지금 피가 떨어졌습니다.》

벌써 여러 부상병들에게 수혈을 하고난 때여서 남아있는 피가 없었던것이다. 간호원들이 모여들었다. 찌르는듯 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보던 녀군의가 팔을 걷어올리며 간호원에게 내밀었다.

《어서!》

림숙정이 펄쩍 뛰며 그를 막아섰다.

《안됩니다! 군의동지, 그러지 않아도 당장 쓰러지겠는데…》

녀군의는 자기 팔을 먼저 주사기에 들이미는 림숙정에게 맵짠 눈길을 던졌다.

《나부터!… 동문 명령도 몰라요, 간호장동무!》

모두가 입술을 깨물었다. 주사기에 차오르는 피!… 생명을 깨워줄 뜨거운 피…

잠시후 녀군의를 비롯한 간호원들의 피가 생명수처럼 어린 전사의 몸에 흘러들었다. 그러나 어린 전사는 밤새도록 혼수상태에서 깨여나지 못했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고지에서는 또다시 부상병들이 실려왔다. 땀에 흠뻑 젖은 림숙정이 업어온 부상병을 내려놓고 다시 돌아서려던 때였다.

누군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정신을 차렸어요, 간호장동지!…》

림숙정은 한달음에 달려갔다. 초들초들 말라버린 어린 전사의 입술… 그 입술이 간신히 열리더니 겨우 가려들을수 있는 가냘픈 목소리가 새여나왔다.

《어-머-니!-》

어머니!… 그것은 소생의 부름이였다! 생명을 찾는 소리였다! 림숙정은 와락 전사를 그러안았다. 목이 메였다. 아득히 사라져가던 생명이 다시 깨여나 어머니를 찾고있는것이다.

어머니란 무엇인가? 생명의 근원이다. 이 세상 모든 생명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는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나락에서 헤여나올 때 처음으로 찾는것도 어머니인것이다.

또다시 부르짖는 어린 전사의 목소리.

《어머니…》

누군가 허우적거리는 전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손을 잡아준 사람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부상병의 머리맡에서 사흘밤을 꼬박 새운 그 회초리같은 녀군의였지.…》

림숙정이 이야기를 맺었다. 그러나 그 애어린 병사가 보건성 국장인 윤일이라는것은 말하지 않았다.

권일학은 이윽토록 말이 없었다. 당비서의 그 이야기가 사정없이 종아리를 치는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생명에 대한, 죽은 사람도 살리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문득 낯모를 사람처럼 쳐다보던 강학선의 거멓게 죽은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후회와 수치심으로 쓰라린 아픔에 모대기던 그 얼굴… 뒤이어 한쌍의 검푸른 눈도 떠오른다. 의혹과 놀라움이 비꼈던 하경옥의 눈빛, 그 처녀의 눈길에는 매정한 자기에 대한 원망과 실망이 어려있는듯 했다.

피와 생명, 수술칼과 인정… 진정 사랑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참다운 사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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