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 5 장


5


공원에는 어느덧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김해옥은 공원걸상의 맨끝에 몸을 돌리고 앉아있었다. 자꾸만 경철에게서 멀리 떨어져앉으려고 하다나니 그는 걸상의 맨끝에 떨어질듯 가까스로 앉아있었다. 경철이 산판에서 있은 일을 사죄했을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버린 자기의 눈을 보지 못하게 하느라고 고개마저 돌려버렸다. 경철의 조용한 목소리가 울렸다.

《해옥동무! 난 어제 동무의 아버지가 내놓은 재단프레스수자조종화안을 보았소. 지배인동지는 나에게 그 프로그람을 짜라고 과업을 주었소.》

그 안을 찾아내고 무던히도 기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경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알고보니 아버지에게 그걸 제일먼저 귀띔한건 동무라고 하더구만, 그리고 동무는 대학에서 장치제작을 전문으로 배웠구. 그래서 난 재단프레스수자조종화에서 동무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소.》

장치개발이 없는 프로그람개발이란 불가능하다. 처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억눌린듯 한 목소리로 떠뜸떠뜸 말했다.

《날 그 일에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장치제작전문가는 많습니다. 그런데 전 갓 배치를 받다나니 몹시 바쁩니다.》

이번에 김해옥은 희망대로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일하던 신발기계공장에 배치를 받았다. 한경철은 랭기와 질시를 풍기는듯 한 처녀의 얼굴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들사이에 거북하고 시름겨운 침묵이 흘렀다.

이때 예닐곱살쯤 돼보이는 아이가 그들쪽으로 걸어왔다. 저쯤에 바투 다가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그 애의 부모들인듯 한 남녀가 보였다. 그 애는 주춤주춤 다가와서는 손에 들고있던 나무가지로 해옥의 구두를 툭툭 쳤다. 그때 저쪽의자에 앉아있던 그 애의 어머니가 노래라도 부르는듯 한 목소리로 애를 찾았다.

《예혁이! 여기로 오라요. 방해하면 안돼요!》

아이는 제꺽 일어서 어머니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알만 한듯 그리고 선언하는듯 종알거렸다.

《신랑, 색시!》

그 순간 두사람은 흠칫 놀랐다. 아이는 멀어져가며 자기의 발견을 확인하듯 다시금 즐겁게 되뇌였다.

《신랑, 색시!》

그 순간 해옥은 질겁을 한듯 공원걸상우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찌나 세차게 일어섰는지 쇠걸상이 흔들거렸다. 경철도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그는 활딱 붉어진 처녀의 얼굴을 보았다. 처녀는 어찌할바를 몰라하듯 그리고 성이라도 내듯 일어선채 한경철을 외면했다. 그 바람에 공연히 얼굴이 후끈해난 경철도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멍하니 서있었다. 그들의 머리우에서 저녁보금자리에 깃들이기 시작하는 이름모를 새들이 저들의 언어로 재빠르고도 의미심장하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제화직장 수지운동신흐름선의 사방압착기앞에는 사람들이 어둑해진 얼굴로 서있었다. 로보트의 팔같은 여러개의 팔을 쳐들고 멎어버린 사방압착기는 마치 숨이 죽어 너부러진 괴물같아보였다.

그것은 공장이 처음 겪는 고장이 아니였다. 수입해들여온 수지운동신설비들은 웬일인지 일정한 기간이 흐르면 고장원인도 알수 없게 동작을 멈추군 한다. 사람들은 회사측에서 설비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어떤 특수한 기술을 첨부한것이라고들 말하군 했다. 그렇게 고장이 나버린 사방압착기가 공장에는 두대나 더 있었다.

조만해서는 얼굴빛이 흐려지지 않는 조인섭마저 한쪽켠에 주저앉은채 담배만 피웠다.

그러나 김윤화는 흥분한 얼굴이였다. 사방압착기와 앞골기를 비롯한 특수설비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운명적인 시각에 문득 고장이 나버린 사방압착기는 김윤화를 강철민이 제기한 수리안쪽으로 떠밀어버렸던것이였다. 《절반짜리 국산화》라고 하던 시당부부장의 말이 자꾸만 귀전에 울려오기는 했으나 김윤화는 현실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고 자기를 납득시키려 애썼다.

김윤화는 기사장 김세천을 현장으로 불렀다. 고장난 사방압착기앞에서 김세천에게 자기의 생각을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기사장동지, 물론 주문안은 지금이든 앞으로든 우리가 꼭 가야 할 길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과 질을 담보할수 없는 조건에서 당분간은 보다 현실적인 길을 택해야 한다고 전 생각합니다.》

김세천에게는 팔을 뻗치고 숨을 죽인 사방압착기가 김윤화의 말보다 훨씬 더 명백하고 절박하게 현실을 말해주는것 같았다. 그들사이에 오래도록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들은 약속이나 한것처럼 천천히 걸어 현장을 빠져나와 외등불빛이 비쳐지는 구내길을 거닐었다.

문득 김윤화가 가까이에 있는 애어린 나무를 허리를 구부리고 들여다보았다. 잎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나무에 매달린 명찰표가 먼 불빛속에 희끗거렸다. 그 명찰표를 들여다보며 김윤화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사장동지, 이 나무를 누가 심었는지 압니까?》

《?!》

《이 나무들은 강철민동무가 심은 나무들입니다.》

《!》

《강철민동문 말입니다, 나무를 심을 때 자기 아버지와 돌아간 어머니이름으로 두그루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명찰표도 그렇게 달구요. 뭐 아직 어린 동무이니 그 심리가 단순할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렇게 이 공장을 사랑합니다. 그는 이 공장에서 아버지와 돌아간 어머니앞에 떳떳하겠다는겁니다. 이 나무들을 보면 그 동무가 자주 재구를 저지르긴 해도 마음이 깨끗하고 공장을 사랑하는 성실한 동무라는걸 알수 있습니다.》

김세천은 왜서인지 부끄러워졌다. 자기는 강철민이 나무를 심었는지 안 심었는지조차 모르고있는것이다. 두사람은 그 나무에 커다란 의미가 깃들어있기라도 한듯 눈여겨 살피며 서있었다. 김윤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장동지, 난 일이 잘 안되거나 속상할 때면 이 나무들을 돌아보군 합니다. 이 매 나무마다에는 심은 사람들의 꿈이 깃들어있구 기쁨과 슬픔, 장점과 약점들이 있습니다. 이 나무들을 보면 그게 다 떠오르지요 뭐. 그래서 그걸 생각하면서 한바퀴 쭉 돌고나면 마음도 풀리구 방도도 떠오르군 하더군요. 기사장동지, 우리 먼데 갈것없이 바로 이 종업원들의 꿈과 재능을 선택합시다.》

김세천은 김윤화의 얼굴을 처음이라도 보듯 바라보았다.

인간을 믿고 사랑하는데도 힘이 필요하다. 사랑하는데 차별을 두지 않으며 배반이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할수 있는 인간은 분명 강한 인간이다. 이 녀인에게는 철부지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강철민이에게도 공장의 운명을 맡길만 한 힘이 있다. 물론 아직은 그것이 자기공장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협소한것이라고 해도 이 순간 김세천은 녀인의 힘이 어려있는 선택을 거부할 명분도, 용기도 없었다. 김세천은 자기를 바라보는 김윤화의 시선앞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배인동무의 결심을 지지하겠습니다.》

《기사장동지!》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mypeople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