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제 3 장


2


무승부로 끝난 외국원정팀과의 축구경기, 안도감보다는 실망감과 거부감이 흐르던 경기장… 이기리라던 기대가 허물어진 응원자들의 심리는 패배감과도 비슷했다. 서운하여 돌아가는 관람자들을 보며 온통 땀에 뜬 축구선수들도 얼굴을 들지 못했다. 경기장 잔디밭우에 퍼더버리고앉은 선수들중에는 오늘 경기에서 두번이나 득점의 기회를 놓쳐버린 9번선수도 보였다.

한경철은 그가 참가하는 축구경기들을 즐겨 보군 한다. 그 9번선수는 다름아닌 리혜성이였던것이다. 오늘도 그는 리혜성의 경기를 보자고 굳이 경기장에 왔다. 하지만 지금 경철은 삼키기 힘든 쓰거운 덩어리를 모지름을 써서 삼키며 리혜성을 바라보고있었다. 이즈음 그의 경기활동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비여가는 관람석 한가운데 그린듯이 서있는 처녀의 뒤모습이 보였다. 대학생복을 입은 그 처녀는 온몸으로 절박하고도 안타까운 기운을 풍기며 경기장바닥의 선수들을 지켜보고있었다.

경기장바닥에 주저앉았던 선수들이 일어서서 나가고있었다. 그러나 리혜성만은 고개를 떨어뜨린채 아직도 나무등걸마냥 시커멓게 앉아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아흔들며 무엇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리혜성은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나간듯 흔드는대로 몸을 맡긴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처녀는 바로 그 리혜성을 지켜보고있었다.

경철은 그 처녀가 자기처럼 리혜성을 알며 응원한 사람들중의 하나일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무슨 예감에서였는지 처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경철은 물기가 어린듯 한 크고 시원한 두눈을 보았으며 그 눈가에 불시에 어리는 반가운 빛을 보았다.

처녀는 무심결에 그런것처럼 경철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보내기까지 했다. 경철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녀가 혹시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보냈는가 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뒤나 옆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경기장을 나가느라고 법석이고있었다.

한경철은 그만 당황해졌다. 자기가 지금 처녀가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있으며 다분히 무례하게 처신하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였다. 처녀도 그것을 느꼈는지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출입구쪽으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처녀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한경철은 굳어진듯 서있었다. 자기를 스쳐지나간 처녀의 눈빛에서 그는 망각해버린 자기의 어제날을 띠여본듯 한 느낌이였다.

다시금 처녀의 모습을 찾았으나 이미 그는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서있던 한경철은 리혜성을 만나고 가리라고 생각하고 관람석을 빠져나와 선수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앞에서 한경철은 방금전에 보았던 그 처녀가 리혜성과 함께 서있는것을 보았다. 리혜성의 풀기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위안하려들지 말아. 난 이미 해가 서쪽에 걸렸어. 선수생활의 황혼기야. 차라리 그럴바엔 일찌감치 어느 중학교 체육교원으로나 가겠다. 후비들이나 키우고말겠어.》

처녀의 온몸이 눈에 띄게 들먹거리는것이 보였다.

《오빠, 그래선 안돼요! 오빠를 응원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 오빠처럼 허무해하고 실망해할 일이 무섭지 않나요?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분의 몫까지 합쳐서 세계적인 선수가 되겠다고 맹세한 오빠가 아니나요? 숱한 사람들을 울리면서 시작한 선수생활을 그렇게 허무하게 끝내려 하나요?》

리혜성은 칼끝에라도 찔리운듯 부르르 몸을 떨었고 한경철도 놀라서 굳어졌다.

《오빠! 자기가 받던 그 열렬한 박수와 응원을 너무 쉽게 저버리지 말아줘요. 그걸 가지구있을 땐 고생도 락이지만 그것이 없으면 설사 꿀물에 밥을 말아먹는다구 해도 행복하지 못할거예요. 인간은 희망이 있는 동안 행복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오빤 지금 그 소중한 희망을 버리려고 하고있어요.》

리혜성은 고개를 푹 떨군채 움직이지 못했다. 한경철도 굳어진듯 서있었다. 여름날의 시원한 바람과도 같은것이, 봄날의 진한 꽃향기와도 같은것이 한경철의 가슴속으로 흘러드는듯 했다.

저 처녀는 도대체 누구일가?

머리를 떨구고 서있던 리혜성이 무엇이라고 중언부언하는것 같더니 선수대기실로 들어갔다. 처녀는 박아세운듯 서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떨구더니 저쪽으로 멀어져갔다. 한경철은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도 알고있는 그 처녀가 리혜성과 가까운 처녀일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리혜성이 들어간 선수대기실을 바라보다가 만나지 않고 돌아섰다.

그날 저녁 한경철은 자기 집에 아버지의 사진과 함께 보관되여있는 사기인형을 들고 리혜성을 다시 찾아갔다. 그 사기인형은 리혜성이 중학시절 축구구락부로 떠나며 한경철의 집에 찾아와 아버지의 사진앞에 말없이 놓고 간 인형이였다.

한경철은 선수단 숙소앞의 공원의자에 앉아있는 리혜성을 찾아냈고 몇마디의 짧은 이야기끝에 말없이 그 사기인형을 내밀었다. 리혜성은 그 사기인형을 들여다보았다. 온몸이 사기인형에 빨려들어간듯 꼼짝없이 앉아있었다. 어금이를 지그시 깨물어 뚜렷한 각을 이룬 체육인의 억세보이는 턱이 눈에 띄게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꼭 그렇게 떳떳치 못한 마무리를 해야 합니까? 아버진… 우리 아버진 미래의 축구선수를 위해 자기의 목숨마저 바쳤습니다!》

《경철이!》

끝내 사기인형우에 굵다란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져내렸다.…

바로 그때의 그 처녀이다. 리혜성은 그 처녀가 자기의 먼 친척이며 집에 찾아왔다가 자기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다음은 다시 만난적이 없는 처녀. 그런데 그 처녀를 오늘 공장에서 다시 만난것이다.

처녀는 누구이며 무슨 일로 공장에 온것일가?

그 순간 설비부원 최현민은 불안하고 두려운 심정을 못이겨 끝내 한경철과 만났던 자리로 다시 되돌아오고있었다. 사실 한경철앞에서 고무바닥운동화흐름선을 수지운동신흐름선으로 바꾸는데서 제기될수 있는 복잡하고 불합리한 점들을 자꾸 물었지만 최현민은 그 안이 그중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안이라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다름아닌 자기가 그 안을 지배인에게 제기하려 하기때문이였다.

사실 최현민은 김세천기사장이 자기 사업을 그만두려 하고있으며 후임으로 자기를 지목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다만 지배인이 아직 대답을 하지 않고있다는것도 알고있었다. 최현민은 지배인에게 자기의 실력을 보여주고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누구보다도 고무바닥운동화를 수지운동신으로 바꾸기 위한 문제를 피가 나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그도 고무바닥운동화흐름선을 수지운동신흐름선으로 개조할 생각을 해냈던것이였다. 거기에 필요한 건조구간이나 급랭구간 그리고 그 모든것을 자동조종하는 종합조종반은 공장에서 만들자는것이였다. 그 종합조종반에 들어가는 프로그람과 전자장치들을 만들어낼 사람이 공장에 자기밖에 없다는것을 그는 잘 알고있었다. 하긴 그렇게 장담하고나설만큼 그는 지식과 기술이 뛰여난 사람이였다.

그는 늘 누군가가 자기를 앞서나가는듯 한 불안과 위구를 안고 실력을 높이기 위하여 코피를 쏟으며 밤을 패는 사람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코피를 쏟으며 공부를 해도 누가 알세라, 볼세라 신경을 쓰고 자기 사업과 생활에 열쇠를 꼭꼭 채워둔다. 열쇠이야기가 나왔으니말이지 그는 자기가 쓰는 콤퓨터에도 가장 고급한 암호를 채우고 안해에게조차도 그 암호를 대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그는 떠들썩 소문을 내면서 배우는 강철민이나 자기 지식을 남에게 잘 넘겨주는 한경철과 차이난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넣듯이 머리속에 지식을 보는대로 척척 집어넣는 타고난 수재라고 생각하는것이였다. 하지만 그는 수재라기보다는 남보다 앞서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는 노력가일따름이였다. 그리고 때로 노력만으로 보충할수 없는 자기의 실력을 무엇인가 다른것으로 메꾸기도 하는 령리한 사람인것이였다.

최현민은 자기가 생각해낸 안을 뜻밖에도 공장에 금방 온 햇내기에 불과한 한경철도 해낸것이 왜서인지 불쾌해지고 잘 믿어지지 않아졌다. 뭘 알긴 알고 그런 생각을 해냈는가 하는 의문도 갈마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 안이 가지고있는 불합리하고도 위험한 점들에 대해 열을 올려가며 물었던것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돌아서니 웬일인지 부끄러워지고 두려워졌다.

만약 한경철이 자기의 안을 포기하고 나는 그 안을 제출한다면 이거야말로 손자밥 채먹고 천정 쳐다보는 할아버지만큼이나 황당하고 부끄러운노릇이 아닌가? 더우기 상대는 철부지라고밖에 볼수 없는 햇내기가 아닌가? 최현민은 어이가 없어지는 심정이였다.

두뇌의 회전이 자신도 통제하기 힘들게 빠른데 비해선 속대가 약하고 무른 축인 최현민은 한경철을 다시 만나 자기도 그 안을 생각하고있었다는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서 한경철에게로 향했다.

저쯤 사무청사앞에서 처녀와 인사를 나누고 헤여지는 한경철의 모습이 보였다. 최현민은 거기로 다가갔다. 한경철은 다소 멍청해진 얼굴로 멀어져가는 처녀의 뒤모습을 바라보고있었다. 최현민은 넌지시 시까슬렀다.

《미인을 보니 아무 생각도 안 나는 모양이구만.》

한경철은 최현민을 바라보았다. 긴장해지고 조급해진 눈길로 물었다.

《설비부원동진 저 처녀가 누군지 압니까?》

《아니, 그럼 누군지도 모르고 인사를 했단 말이야?》

《저… 그건 좀…》

《아, 우리 김세천기사장동지 딸이 아닌가. 이번에 대학을 졸업하는…》

한경철은 아연해진듯 숨을 멈추고 굳어졌다. 넋없이 멀어져가는 처녀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최현민은 쓰겁게 웃고말았다. 한경철이 고운 처녀를 보면 련애를 걸기 좋아하는 단순하고 혈기방장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번에 한경철이 자기가 데리고있는 설계원처녀에게 실없는 말을 걸어 처녀를 놀래운것은 최현민을 몹시도 불쾌하게 만들었다.

《처녀들 속깨나 태우겠어요. 남자가 얼마나 잘났나요? 말하는걸 봐두 그래, 가정래력을 봐두 처녀들이 가슴이 뛰지요 뭐. 저 사람이 말을 시키니 오늘 하루 내 마음이 자꾸 불안해지구 싱숭생숭했어요. 다시 찾아오면 큰일날것 같아요. 설비부원동지, 말 좀 해주십시오, 나에게 약혼자가 있다는걸.》

최현민은 남녀사이의 륜리문제에서는 흰종이에 한줄 글을 써넣은것처럼 명백하고 단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하긴 그자신이 그렇게 살았다. 그는 첫 련애를 조건없이 그리고 빠르게 결혼으로 이어간 사람이였고 안해에게 무한히 충실한 남편이였다. 그러한 그가 보건대 한경철은 처녀문제에서 지나치리만치 무절제한 청년이였다. 인격이 높지 못한 인간이라면 그것은 지식이 높지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한것이다. 멀어져가는 기사장의 딸을 얼없이 바라보고있는 한경철을 지켜보며 최현민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프렸다. 그리고 한경철에게 모든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려던 생각을 버리고 돌아서고말았다. 걸어가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던 그는 자기의 안을 지배인에게가 아니라 기사장 김세천에게 제출하리라 생각했다. 한경철이 자기 안을 지배인에게 제출한다고 해도 지배인이 김세천기사장이 제출하는 자기의 안에 우선권을 부여하리라고 생각했으며 자기를 아끼는 김세천기사장도 자기의 안을 내세워주리라고 생각했던것이였다.

자기밖에 모르는 리기적인 인간들의 사고는 언제나 자기자신의 리해관계에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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