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회)


30


유리병밑굽만큼이나 두터운 돋보기안경을 코잔등에 올려놓고 송화가 가져온 신문을 들여다보던 최금석이 넌지시 물었다.

《창근이도 뽐프제작조에 뽑히였단 말이지?》

진달래꽃무늬가 점점이 박힌 달린옷을 입고 거울앞에서 옷매무시를 보던 송화는 창근이 소리가 나오자 금시에 시무룩해졌다.

《예.》

《창근이야 손재간이 있으니 뽑힐만도 하지. 일감을 맡겨주면 잘할거야.》

듣기가 거북한듯 송화는 입을 비죽거렸다.

창근이라면 덮어놓고 좋다 하는 아버지가 민망스러웠다.

《헌데 요새 왜 우리 집에 발길질을 안하는지 모르겠구나. 혹시 너와 무슨 일이 있은게 아니냐?》

《아니…예요. 바쁘니까 못 오겠지요 뭐.》

급해맞아 아닌보살을 하기는 하였지만 송화의 마음속에서는 이지러진 창근의 모습을 아버지앞에 터놓아야겠다는 충동이 갸웃이 고개를 쳐들었다.

어쩔가. 말을 할가 하고 망설이던 송화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창근이를 친아들이상 여기는 아버지가 그 소릴 들으면 어떻게 반응을 할지 바이 가늠을 할수가 없었기때문이였다.

십중팔구 창근을 탓하기 전에 오히려 너는 뭘하고있었느냐고 펄펄 날며 자기만 죽도록 욕을 할것이다.

송화는 뒤늦게야 부모자식간에는 한치의 간격도 없다지만 생활에선 할 말도 마음대로 못하는 때도 있음을 느끼게 되였다.

창근과 우연히 맞다든 관계라면 싫다 나쁘다고 명백히 계선을 가르련만 어릴 때부터 한뿌리에서 자란 나무처럼 뗄래야 뗄수 없는 정을 이어왔으며 거기에 형제처럼 자별하였던 아버지들의 운명까지 얽혀있었다.

세월의 흐름은 많은것을 변하게 하였지만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생명의 은인인 창근의 아버지가 영원한 모습으로 남아있었고 사위로 정한 창근에 대한 정이 맥맥히 흐르고있었다. 그 어간에 송화가 있었다.

그때문에 아버지가 창근을 싫다 하기 전에 송화 자기가 먼저 머리를 흔드는것은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그런데 어찌하랴. 창근이가 자기의 마음속에서 점점 멀어지는것을…

이제라도 갈지자걸음을 그만두고 곧은 길을 가라고 안타까이 간청도 하고 모진 말도 했건만 정을 떼자고 잡도리를 했는지 그냥 제 벨대로이다. 아이, 속상해. 이럴 땐 어쩌면 좋아.

안달복달하는 마음을 진정 못하고 집을 나선 송화는 계획한대로 시도서관으로 향하였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공장에서는 뽐프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제작조성원들에게 휴식을 주었다.

집에서 할 일이 많았지만 굳이 도서관으로 가기로 한것은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되여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송화에게 입학시험준비에 필요한 참고서들이 필요하였기때문이였다.

입학시험에서 합격되자면 직심스럽게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당장 도서관에 가서 참고서들을 빌려오라고 등을 떠민것은 정향이였다.

그 많은것을 어떻게 한꺼번에 공부하는가고 아부재기를 치는 송화를 보며 정향은 해죽해죽 웃으며 노래 《돌파하라 최첨단을》의 가사 한구절을 읊어주었다.

지식경제시대인 오늘날 떨어지면 기술의 노예되리

그 소리에 송화는 두손을 들고말았다.

지내볼수록 정향은 정이 가는 처녀였다. 도서관에서 정향이가 적어준 참고서들을 한아름 빌려 가방에 넣은 송화는 거리에 나섰다.

이제부터 정향이한테 거마리처럼 달라붙어 배울테다.

콤퓨터를 배울 때처럼…

아직은 서툴지만 처음 콤퓨터앞에 마주앉았을 때 같아서는 아버지가 비웃듯이 게발 놀리듯 건반을 두드려대는게 아무리 날구 기여도 몇달이 걸려도 배워내지 못할것 같더니 이악스레 달라붙으니 별게 아니였다.

한증탕처럼 찌물쿠는 무더위에 송화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 했다.

그늘을 찾듯 두릿거리던 송화는 길옆에 꾸려진 공원의 아지무성한 느티나무를 발견하고 한숨 돌리고 갈 생각으로 공원안으로 들어섰다.

시원하게 그늘을 던진 나무아래에는 송화를 기다리듯 긴의자가 놓여있었다.

거기에 앉으니 한결 시원하였다.

유희기구들과 체육시설을 갖춘 공원은 사람들로 흥성거리였다.

가만 앉아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속에서도 젊은이들은 배구장에서 승부를 다투느라 열을 올리고있었다.

그들을 보느라니 문득 불볕이 내리지지는 한여름 무기, 장구류를 지고 강행군을 하던 군사복무시절이 생각히웠다.

벽돌장을 깨지 못해 무더위속에서 주먹이 퉁퉁 붓고 피가 배도록 타격훈련을 하던 그때도 삼삼해졌다.

눈물과 땀이 버무려진 얼굴, 목에서 나던 쇠비린내, 손목이고 손가락이고 어디라 할것 없이 쑤셔대고 터지고 저려오는 아픔에 숟가락도 들수 없었었다.

그때 무슨 정신으로 그 힘들던 때를 이겨냈을가 하고 생각하니 지금도 긍지스럽다.

병사의 존엄과 배짱, 총대를 틀어잡은 병사는 무적의 강자가 되여야 한다는 자존심이 끓어넘쳤기에 펄펄나는 싸움군으로 자랄수 있었다.

그런 녀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녀성비행사, 녀성포병, 녀성락하산병… 군복은 온통 물주머니가 되였지만 한걸음도 물러서거나 주저앉아서는 안되였던 그때에 비하면 배구를 치는 젊은이들이 흘리는 땀은 아무것도 아닌듯 싶었다.

알락달락한 배구공이 높이 떠서 그물사이로 오가는것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송화는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다가 눈이 덩실해졌다.

언제와서 앉았는지 한쌍의 처녀총각이 옆에 사람이 있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무슨 이야기인지 달콤하게 주고받고있었다.

막 시샘이 날 정도로 꼭 붙어있었다.

눈치들도 없지. 하긴 사랑에 빠지면 장님이 된다고 했지.

뒤늦게야 송화는 눈치가 없는것이 그들이 아니라 자기라는것을 느끼고 황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참, 저들이 날 얼마나 원망할가.

도망치듯 공원 깊숙이 걸음을 옮기던 송화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뽑는다더니 자기가 그 신세가 된것 같아 절로 웃음이 나갔다.

그들이 부러웠다. 자기에게도 저런 때가 있었던가 싶었다.

있었다면 제대되여 창근과 두어번 청천강변을 거닌것이 전부였다.

그것을 굳이 산보라고 해야 하겠는지.

부지중 언젠가 창근이 했던 유혹적인 《약속》이 생각히웠다.

《좋아, 이제부터 매일 송화를 기쁘게 해주겠어. 퇴근후에는 산보도 하고 극장과 영화관에도 가고… 좋지?》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말에 나는 얼마나 기뻐하였던가.

허나 그 멋진 《약속》은 한갖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하다면 내가 바란것이 그런 감상적인 산보였던가.

아니였다. 뒤늦게라도 맡은 일에 근면하고 성실하여 집단과 동지들앞에 자신의 존엄과 자존심을 지키기를 바란것이 아니였던가.

그런데… 바닥없이 깊어지는 상념에 빠져 허둥지둥 걸음을 옮기던 송화는 돌부리에 발이 걸리는 바람에 몸중심을 잃고 비칠거리였다.

여기가 어딘가? 눈앞에 해빛을 받아 번뜩이며 흐르는 강물이 보였다.

그제야 송화는 자기가 시내와 떨어진 청천강방천우에 서있음을 의식하였다. 어마나, 내가 무슨 정신에 예까지 왔담.

타고장에 처음 온듯 얼빠진 표정으로 주위를 일별하던 송화는 갑자기 몸을 떨었다.

몇걸음앞 버드나무아래에 나란히 놓여있는 두개의 돌의자를 본것이다. 어서 오라 반기는듯 한 그것을 보느라니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부지중 여기에 와본지가 까마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여기에 창근과 나란히 앉아 사랑을 속삭이며 무지개빛처럼 아름다운 래일을 꿈꿀 때가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그런 날이 다시 있을가 생각하니 마음이 서글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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