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3 장

(9)


이제는 여생을 손자들을 키우는데 바치리라 마음먹은 을파소는 도성에서의 한시가 석달만큼이나 길고 지루했다.

지루한 도성살이가 끝나게 될 이 아침 을파소는 어전회의가 진행될 대궐을 향해 처소를 나섰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나는 탐욕의 무리와 오늘로써 영 결별이라고 생각하니 더러운 오물구뎅이에서 뛰쳐나오는 기분이였다.

대궐문앞에 이르니 파수병들이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아직은 조정에서 제일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있으니 그럴것이였다.

그러나 대궐출입도 오늘로써 끝장이라 그동안 안면을 익힌 파수군들과도 영리별일것이였다.

대궐의 정전에 들어선 을파소는 남볼세라 허리를 굽히고 백관의 맨 뒤자리의, 그것도 어둑시근한 곳에 가섰다.

좀 있어 이 을파소의 파직이 공개되고 새 사람이 중외대부로 임명될것이라 조정반렬의 앞자리를 차지하는것이 부끄럽기때문이였다.

인차 임금을 맞는 례식이 진행되였다.

룡상에 걸터앉은 임금의 눈길이 여느때와 달리 엄엄하였다. 엄엄한 임금의 눈길이 와닿을 때마다 아첨기를 지은자들이 와뜰와뜰 놀랐다.

이윽고 임금이 정전이 떠나갈듯 입을 열었다. 노성이였다.

《예로부터 조정의 정사가 바르면 나라가 흥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면 망한다고 했다. 오늘의 어지러워진 정사가 뉘탓인지는 그대들도 모르지 않을것이다.

짐은 늦게나마 잘못된 정사를 바로잡자는것이다.》

임금은 허리에 찼던 보검을 뽑아 상우에 올려놓았다.

《그가 누구든 짐이 바른 정사를 펼치는데 방해가 된다면 결단코 이 칼이 용서하지 않을것이다.》

임금의 눈에서 불꽃같은것이 이는것을 본 신하들은 자라목이 되여버렸다.

지금처럼 임금이 진노한 때가 있었다면 연나부의 반란무리를 짓뭉개버리라는 어명을 내릴 때뿐이였다.

그러니 신하들이 겁에 질려 할만도 하였다.

보검을 지팽이삼아 짚고선 임금은 겁에 질린 신하들을 굽어보았다.

그는 지금 옛적에 어떤 나라의 임금이 간신들의 판인 조정을 바로잡기 위해 제일 못된 두목을 잡아 끓는 가마에서 삶아죽이는 형벌에 처했다는 일화를 생각하고있었다.

그 나라에서는 간신의 두목을 삶아죽이였더니 그날로 조정의 정사도 바로잡고 나라의 기강도 섰다고 한다.

고구려가 강해질수만 있다면 그런 형벌인들 어찌 꺼리랴.

조정을 다시 꾸릴 잡도리를 단단히 하고나선 임금은 큰소리로 웨치였다.

《짐은 이 자리에서 파직시킬 사람은 파직시키고 새로 등용할 사람은 등용시키자고 한다.》

눈길을 들어 장내에서 을파소를 더듬어찾던 임금의 목소리가 좀 낮아졌다.

《을파소를 중외대부의 직에서 파직시키노라.》

순간 겁에 질려있던 신하들이 환호성을 터치였다.

임금의 엄한 기세에 눌려 기가 죽었던자들이 시골농부를 몰아냈다는 쾌감에 서로서로 쳐다보며 실눈이 되여 웃었다.

을파소는 막상 파직을 당하고보니 너무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었다.

임금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였다.

《조용들 하라.》

장내는 곧 쥐죽은듯 잠잠해졌다.

《현명한 군주는 현명한 신하를 쓰는 법이다. 오늘 이 시각부터 짐이 등용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뒤소리를 하거나 그의 분부에 불복하는자는 그 즉시 엄벌에 처하겠노라.》

을파소를 떼버렸다고 환성을 지르던자들이 또다시 겁에 질려 숨도 크게 쉬지 못하였다.

《자고로 나라의 병권은 나라에서 으뜸가는 장수, 병법에도 밝고 지략도 뛰여나고 무술에도 능할뿐더러 남달리 충의로운 장수에게 맡기였다.》

백관은 일제히 목을 빼들고 임금을 쳐다보았다.

그럼 명림답부가 세상을 떠난 후 지금껏 비워두었던 지내외병마사의 군직을 회복시킨다는것일가.

지내외병마사는 경군과 지방군을 전부 통솔하는 최고의 군직이였다.

그렇다면 어느 부의 어느 사람이 지내외병마사로 되는것일가?…

임금은 서쪽의 변방에 나가있는 우거에게 지내외병마사의 다음가는 지내외병마부사의 군직을 주고싶었다.

지내외병마부사는 지내외병마사의 휘하에서 나라의 군사관계의 일을 맡아보는 군직의 거물이였다.

임금은 이전에 좌가려의 패당에게 지내외병마부사의 군직을 맡기였으나 그들의 됨됨을 내다보고 경군은 물론 지방군까지도 함부로 움직일수 없게 엄하게 단속하였었다.

그래서 연나부것들이 맥을 추지 못한것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례대로 전군을 통솔하는 지내외병마사와 함께 그를 받드는 지내외병마부사도 다시 내올 결심이였다.

우거장군이 지내외병마부사로서 적임자였지만 서쪽변방의 장수로 나가있으니 그를 쓸수 없었다.

조정정사가 심히 어지러워진 이때 그 무엇보다도 나라의 대문을 지키는 일을 가장 중요한 국사로 여겨 그를 변방에 내보내야 한다고 제기한 을파소의 주장이 지극히 옳기때문이였다.

그럼 누구에게 지내외병마부사의 중임을 맡겨야 한단 말인가.

이 문제를 붙안고 그동안 고심을 한 임금이였다.

큰 소가 나가면 작은 소가 밭을 간다고 장수들속에 우거와 견줄만 한 인재가 없는것은 아니였다.

그 사람은 임금이 다년간 몸가까이에 두고 충분히 검토한 젊은 장수였다.

《짐은 중리부도독 고우루를 지내외병마부사로 봉하노라.》

모멸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던 을파소가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아, 이야말로 탄복할만 한 일이 아닌가.

을파소도 고우루를 장수로서 큰일을 감당할 인재로 보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도성으로 올라오는 길에 정에 끌려서라기보다는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기때문이였다.

고우루가 출중한 장수임을 알면서도 그에게 그런 큰 군직을 주지 못한것은 조정대신들의 반대가 너무 심했기때문이였다.

물론 을파소가 고우루야말로 전군을 통솔할만 한 장수라고 임금에게 상주하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이 일제히 반기를 드니 임금도 그들의 반대를 무시할수 없었던것이였다.

임금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다음 중외대부를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하는것이다.》

숨을 죽인 문무백관은 손에 땀을 쥐였다.

그 자리에 누가 올라앉는가에 따라 그가 속한 부가 조정에서 독판치기를 할수 있기때문이였다.

더 많은 리속을 챙길수 있는 가장 요긴한 관직이 이 한순간에 결정되는것으로 하여 그들은 잠시도 임금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을파소도 몹시 긴장해서 임금을 쳐다보았다.

과연 어떤 사람이 중외대부로 되겠는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임금은 고심이 많았다.

이틀동안 임금은 밤잠도 잊고 4부의 모든 대가들을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됨됨과 재주를 따져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호감을 가지고 대했지만 을파소보다 난 인물은 없었다. 자기를 위한 욕심에서는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이지만 나라를 위하려는 마음이나 학식, 인품에서는 을파소의 발뒤꿈치에도 따라서지 못하는자들뿐이였다.

아니, 전혀 인물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중외대부감으로 적중한 사람이 한명 있었으니 그도 임금이 오랜 기간 파악한 인재였다.

《짐은 안류를 다시금 중외대부로 봉하노라.》

을파소는 너무 기뻐 눈물이 핑 돌았다.

형법을 맡아보던 안류 그 사람이 중외대부로 되였으니 아주 잘됐어.

안류도 고우루도 다 도성에 태를 묻은 대가집 자손들이니 터도 있고 세력도 있다. 그러니 나와 달리 기운을 크게 쓸것이다.

아, 그래서 임금이 그 두사람을 크게 등용하는것을 보여주려고 나의 귀향길을 지체시키였구나.

임금의 깊은 마음에 감동된 을파소는 가슴을 쭉 펴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구를 찾는것인지 임금이 장내를 눈빗질하고있었다.

인차 임금의 목소리가 장내를 흔들었다.

《다들 명심해 듣거라. 우리 고구려는 부왕대에 이르러 처음 보는 문무백관을 모두 통솔하여 오로지 임금에게만 복종하고 만인을 다스리는 국상의 관직을 새로 내왔노라.

고구려의 국상은 이웃나라들의 승상보다 권한도 중임도 크다. 국상은 임금의 스승으로서 검을 차고 신을 신은채 궁궐로 들어올수 있으며 짐을 만날 때 자기의 이름을 고하지 않아도 되는 특전을 지니고있노라.

뿐더러 국상에게는 선참후계의 특권이 있으며 인재를 등용하고 파직시킬수 있으며 법을 어긴자, 반역을 꾀하는자를 즉석에서 목을 칠수 있다. 설사 종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국상에게는 전군을 통솔하는 지내외병마사의 군직이 부여되여있다.

하기에 국상으로는 아무나 될수 있는게 아니다. 누구보다도 나라를 아끼는 사람이여야 하며 만조백관이 거울로 삼을수 있는 자질이 뛰여난 사람만이 될수 있노라.

그래서 짐은 초대국상이였던 명림답부만 한 뛰여난 인재가 없다면 국상의 자리를 비워두는 한이 있어도 인재가 아닌자는 쓰지 않은것이다. 그러나 오늘 국상의 자리를 더는 비워두지 않게 되였노라.》

잠잠하던 장내가 술렁거렸다.

그렇다면 갑자기 명림답부만 한 큰 인물이 나타났다는것인가.

신하들은 서로 쳐다보며 어리벙벙해하였다.

을파소도 마찬가지였다.

정녕 이 나라에 큰 인물이 있다는걸 왜 몰랐을가. 혹시 구려경당의 학루는 아닌지?!… 학루라면 얼마든지 국상의 직분을 감당할것이다.

나라에서 손꼽히는 학식에 오랜 기간 인재를 키운 학루가 조정에 나서면 임금이 만시름을 놓게 될것이다.

《으험―》

임금의 기척소리에 술렁이던 장내는 조용해졌다.

《어떤 사람이 국상으로 될수 있는가?》

임금의 질문에 대가들은 저를 불러낼것 같아 목을 움츠렸다.

제 리속을 타산하는 일에서라면 누구보다도 촉기의 후각이 예민하지만 그런 질문에는 하루종일 세워놓아도 옳은 대답을 내지 못할 위인들인것이다.

《국록이면 만족해하고 오로지 몸과 마음을 다해 나라일을 해제끼려 애쓰는 그런 충신이 5부에 있다면 나서라.》

임금의 눈길과 마주칠가 겁이 나서 고개를 떨구는 대가들을 굽어보며 임금이 고개를 저었다.

《과연 없노라. 연나부에도 관나부에도 환나부에도 제나부에도 과루부에도 말이다. 하다면 나라에도 없단 말인가? 아니, 있노라.》

두손에 힘을 주어 보검을 틀어잡은 임금은 기백에 넘쳐있었다.

《류리명왕시기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 출장입상이라고 전장에 나가면 군정에 밝은 명장이고 조정에 들어오면 민정에 밝은 명재상이였다.

그 재상에게는 남다른 뜻이 있었으니 자기는 몸이 고달프다 할지라도 바로 나라가 무사하고 나라가 부강하면 그만이라는 그것, 자기의 몸이 나라를 고이는 주추돌이 되면 그만이라는 그것이였다.》

임금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을파소는 어리둥절해졌다.

임금이 말하는 류리명왕때의 명재상이 어쩜 나의 조상과 비슷할가.

《옛말에 샘이 나오는 곳에서 금이 나오고 좋은 고장에서 훌륭한 사람이 나온다 하였다. 뿐더러 명재상의 가문에서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나온다 하였노라.

명재상이 돌아간 후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조세도 바치고 군역도 지고 부역에도 나갔다. 그의 한 후손은 세상리치를 통달하고 조정을 쇄신할수 있는 궁냥도 자질도 있은즉 국상의 권한을 주면 짐을 도와 능히 부국강병에 이바지할수 있을것이다.》

임금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진작 크게 믿고 써준 그에게 국상을 주었더라면 헛수고를 하지 않았을것이다.

임금은 장내가 떠나갈듯 찌렁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서압록고을사람 을파소인줄 알리노라. 짐은 을파소에게 좌물촌을 식읍으로 하사하며 더불어 국상으로 봉하노라.》

임금은 겁에 질려 몸을 떠는 대가들을 쓰겁게 굽어보았다.

원쑤처럼 미워하던 사람이 제일 큰 권세를 가진 국상이 되였으니 그들이 겁에 질릴만도 하였다.

이윽고 임금은 을파소를 바라보며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짐은 국상에게 보검을 하사하노라. 자, 국상은 이앞으로 나오시오.》

임금의 분부가 떨어지기 바쁘게 내시들이 다가와 을파소를 부축하였다.

을파소는 처음부터 임금의 분부를 받은 내시들이 문곁에서 자기를 지켜보고있었음을 알리 없었다.

내시들에게 부축되여 임금의 앞으로 가는 을파소는 도무지 제발을 움직여가는것 같지 않았다.

이게 취중일가?…

얼나간듯 비칠거리는 을파소를 미덥게 지켜보던 임금이 입을 열었다.

《다들 새겨듣거라. 이 한달동안 국상을 업신여긴자들은 스스로 국상부를 찾아가 죄를 빌지어다. 알겠는고?》

신하들은 일제히 꿇어엎드렸다.

《알겠소이다.》

임금이 허리에 보검까지 채워주니 을파소는 이제 더는 자신의 목숨이 자기의것이 아닌, 오로지 나라를 받들어 헌신하다가 죽는 길뿐임을 절감하였다.


《임금이 말했다. 〈귀한자나 천한자나 할것없이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일족을 멸하리라.〉

을파소가 물러나와서 말했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은퇴하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것은 선비로서 떳떳한 노릇이다. 이제 임금께서 나를 중히 써주시니 어찌 다시 전일과 같이 은퇴할것을 생각하랴.〉》

(《삼국사기》 권제45 렬전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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