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회)


제 3 장


(8)


나라를 지키는데서 급하게 제기되는 일거리를 처리한 을파소는 신심에 넘쳐있었다.

국상이 결원된 조정에서 제일 높은 관직을 차지한 자신이 벼슬길의 경험이 전혀 없어도 마음먹은대로 정사를 해나가니 재상의 일도 한집안을 이끌어나가는 가장의 일과 별다른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을파소는 진중하고 의리가 깊기로 알려진 여러명의 왕족을 중외대부부로 불러들여 고구려를 위해 동족의 나라들에 화친의 사절로 다녀올것을 부탁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나라앞에 무슨 일인들 하고싶어하던 그들은 기꺼이 응해나섰다.

하여 한날한시에 고국천왕의 령을 받은 그들은 후부여와 백제, 신라를 향해 도성을 나서게 되였다.

또 한가지 일을 해치운 을파소는 늦어 한해안에 조정을 깨끗이 쇄신하리라 마음을 먹고 더 힘껏 정사를 내밀었다.

조정을 쇄신하려면 두가지 즉 우로는 조정대신으로부터 아래로는 작은 고을의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리들의 잘못을 살피고 잘못을 범한자들에게는 엄벌을 주는 법도를 바로 되살리는것과 함께 경당을 다닌 사람들속에서 문무를 갖춘 인재들을 찾아내여 소가나 대가출신들로는 무능하고 욕심많은 관리들을 대신하게 하고 평민출신으로는 관속을 시키는것이였다.

인재등용이자 정사를 바로잡는 길이기에 결국 이 조치는 부국강병의 초석을 다지는 일이라고 할수 있었다.

임금에게 아뢰여 인재를 널리 등용하자면 그에 앞서 각 관청들을 료해하고 내쫓을 대상들을 바로 선정해야 했다.

그래서 을파소는 여러 관청들에 나가 관리들을 료해하는 일을 벌려놓았다.

그러나 을파소는 이러한 처사가 조정대신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마치도 어깨를 겯고 기다린듯 모든 관청들에서 을파소의 분부를 거역해나섰다.

지어는 을파소가 맡은 관청에서까지 부하들이 그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들이 반박해나서는 리유는 중외대부는 아래에 국법을 시달하고 그 법의 집행을 추진하고 역모를 시도하는자들을 잡아내는것이 전례인데 무엇때문에 모든 관청, 모든 고을들의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떼고붙이는 일에 간참하려드는가 하는 그것이였다.

을파소는 그들의 반박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국상이 결원된 이때 임금으로부터 조정의 쇄신을 위임받은 중외대부가 임금에게 인재를 직접 천거하는 일을 맡아 행한다는걸 그렇게도 모른단 말인가.

그러나 실은 을파소가 조정에서 제일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있기는 하지만 임금이 그에게 그런 권한까지는 주지 않은것이다.

을파소가 임금에게 인재를 천거하는 일은 자신의 일감이라고 말해주었지만 부하들은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부하들마저 이 꼴이니 다른 관청들은 더 말할것이 없었다.

관리들을 떼고붙이는 관청에서는 《중외대부가 인물차지인줄 아는가?》라고 삿대질을 하면서 을파소가 인재등용이란 말도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격분한 마음을 달래며 이리 뛰여다니고 저리 뛰여다니면서 대가들을 설복하던 을파소는 한달만에 두손을 들고 나앉았다.

이제 더는 열정같은것을 그에게서 찾아볼수 없었다.

수척해진 그의 얼굴에는 오로지 절망의 그림자만이 진하게 어려있었다.

중외대부부로 끼식마저 날라다먹으며 그리도 애를 썼던 을파소는 처소로 돌아와 하루종일 밖에 나오지 않았다.

집뒤의 자그마한 후원을 거닐며 한숨짓는 을파소의 얼굴은 중병든 사람마냥 누렇게 떠있었다.

《아, 나를 가리켜 시골농부라 한단 말이지.…》

요즘 많은 대가들이 을파소의 앞에서까지 시골농부라고 내놓고 야유하는 정도였다.

그 말은 정사의 리치도 모르는 무식한 시골늙은이가 무슨 중외대부냐 하는 조소였다.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물론 임금에게 도움을 청하면 반기를 든자를 한명 떼여버릴수 있을것이였다.

하지만 어떻게 일일이 임금에게 구원을 청하여 막아나서는자들을 모조리 갈아치울수 있단 말인가.

을파소의 입에서 개탄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상이란 명색뿐 이런 허수아비가 어데 있겠는가.》

내가 왜 이 꼴이 되였을가.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을파소로선 그쯤한 원인을 밝히기란 어렵지 않았다.

사실상 이 을파소가 임금에게 아뢰여 관리들을 떼고붙이는 일을 맡아한다면 권세잡은 벼슬아치들이 손해를 볼것이다.

나라에서 주는 국록만으로 살아가려는 관리는 너무 적고 다수는 남의것을 빼앗아 배를 불리는자들이라 피를 물고 반기를 들수밖에 없다.

대대로 부귀를 누려오는 그들이 그 좋은 권세를 내놓겠다고 할리 있는가?

그런데로부터 그것들이 모두 한동아리가 되여 완력사나운 골받이를 하는것이였다.

악한자는 죽이고 착한자는 살릴수 있는 그런 권한을 임금에게서 부여받지 못했으니 국상의 다음가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한들 불복하는자들을 전혀 다스릴수 없는것이였다.

을파소의 입에서 또다시 한탄이 흘러나왔다.

《이런 처지에서는 조정의 쇄신이 한갖 그림의 떡이로구나.》

온 조정이 반기를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형편에서 을파소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바람앞의 등불은 꺼지기마련이고 위태로운 곳에서는 몸을 피하라 했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을파소는 이제 더는 자기의 힘으로 백관을 다스릴수 없으며 남들의 더 큰 웃음거리를 사기 전에 도성을 떠나는것이 임금을 위해서도 상책임을 깨달았다.

드디여 락향하리라 결심을 세운 을파소는 볼에 칼맞은 자리가 있는 인우를 불렀다.

《너도 집으로 가고싶겠지? 나도 그렇다. 그러니 우리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는게다.》

을파소의 고충을 잘 아는 인우가 허리를 굽석이며 기뻐했다.

《당장 돌아가면 좋겠소이다.》

《좋아, 그럼 입궐했다가 오겠으니 떠날 차비를 해두거라.》

을파소는 기뻐하는 인우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대궐을 향해 처소를 나섰다.

마침 임금이 침전앞의 화원을 돌아보고있었다.

한무릎을 꿇으며 문안인사를 올린 을파소는 절절하게 말하였다.

《이 늙은게 무능하여 중외대부를 감당할수 없나이다. 다른 사람을 쓰시고 이 늙은걸 집으로 내려가도록 허락해주시오이다.》

아무런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임금의 심상한 태도에 을파소는 숨이 좀 나갔다.

농사나 짓던 촌늙은이를 재상으로 내세워준 임금의 은총에 보답을 못하고 가자니 마음이 무거웠는데 대범하게 리해해주니 정말 고마왔다.

그러나 어렸을 때 겪은 심한 고생으로 병에 든 임금을 두고가자니 걸음이 떨어질것 같지 않았다.

나라가 흥하려면 군주가 현명해야 하고 현명한 군주의 무병장수는 나라의 복이라 하였는데 임금이 병들었으니 걱정이 산같았다.

을파소를 굽어보는 임금의 마음은 허전하였다.

임금은 이 한달동안 조정의 쇄신을 위해 을파소가 어떻게 애를 썼는지 잘 알고있었다.

지금껏 을파소처럼 나라일을 하려 침식마저 일터로 옮기고 애쓴 신하를 보지 못하였었다.

《할말이 있으면 하오.》

을파소는 할말을 생각해냈다.

《패전지장에게 무슨 할 소리가 있으랴만… 신의 집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한말씀 올리겠소이다.

류리명왕때 신의 조상이 나라를 지키고 조정의 쇄신에 기여할수 있은것은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보다 임금님의 믿음이 컸기때문이라 하오이다. 신나라의 대군이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류리명왕께서는 신의 조상에게 보검과 함께 군률을 어긴자의 목을 먼저 치고 후에 임금에게 보고하는 선참후계의 특권을 주었고 그래서 그가 전군을 통솔하여 적군을 쳐이길수 있었소이다. 또 신의 조상에게 정사를 바로잡으라는 중임을 맡길 때에도 그가 조정대신일지라도 국법을 어기고 민심을 어지럽히는자는 즉석에서 처형할수 있는 권한을 주셨소이다.

신하들의 됨됨을 헤아려보고 믿음이 가는 신하에게 큰 일감을 맡기면서 그 누구에게도 구애되지 않는 위엄을 부여해준 여기에 류리명왕의 뛰여난 덕망이 있는것이오이다.

재주가 뛰여난 신하를 구해서 임금님의 위엄을 빌려주신다면 대왕님은 부국강병의 뜻을 이룰수 있을가 하나이다. 부디 룡체를 돌보시옵소서.》

큰절을 드린 을파소가 물러가려 하자 임금이 한손을 쳐들었다.

《가만!》

임금은 을파소가 하려 한 모든 일이 부국강병을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치임을 잘 알고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을파소를 떠밀어주지 않은것은 조정의 쇄신을 바라지 않는 대가들의 움직임을 좀더 알고싶었기때문이였다.

그러했기에 임금은 을파소를 반대한 주범이 다름아닌 동생 발기와 국구 우소라는것을 알아낸것이였다.

나라에서 거물이라고 할수 있는 그들이 한사코 을파소의 앞을 막고있었으니 아무리 애를 쓴들 그가 한걸음도 나갈수 없었던것이다.

이제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았으니 을파소가 더는 앉아뭉개지 않을것이다.

조정을 통솔하는 손탁이 별것이랴. 나라를 위하려는 충정과 국운을 일신시킬수 있는 남다른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마땅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막강한 권한을 주어야 하리로다.

《래일모레 어전회의를 열것이니 공이 꼭 참가해야겠소.》

임금의 생각을 알수 없는 을파소는 한숨을 내쉬였다.

한시가 지긋지긋한데 돌아갈 길이 지체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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