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3 장


(2)


을파소는 집을 나선지 사흘째되는 날 아침 도성으로 가는 길에서 제일 높은 고개인 조골령을 넘어 동압록고을에 들어섰다.

그의 기분은 집을 나설 때와 전혀 달랐다. 뭐니뭐니해도 일행을 거느린 고우루가 마음에 드니 마치 나들이를 나선 기분이였다.

관복쟁이들이 다 고우루처럼 정직하고 대가 바른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서압록고을의 처려근지처럼 한고을에서 살아도 정이 들기는커녕 그자의 낯짝은 보기만 해도 이가 갈렸다.

반대로 고우루는 지낼수록 마음도 끌리고 정도 통했다.

그게 무엇때문인가. 한마디로 그의 마음이 깨끗하고 그가 나라를 안고살기때문이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단정할수 있는가.

첫 대면에 벌써 늙은이를 헤아려 말대접부터 공손하고 끼식도 잠자리도 차별없이 함께 하고 자기의 래력도 숨김없이 들려주고…

뿐더러 그의 말에서는 언제나 나라위한 마음이 엿보였다.

그에게 나라위한 마음이 간절하지 않다면 우거장군이 벼슬길에서 밀려난것을 애타하지 않았을것이였다.

우거장군은 이태전 후한의 요청으로 수만명의 고구려군을 거느리고 부산적을 쳐이긴 로장군이다.

이 싸움으로 우거장군의 이름이 자자해지자 그전부터 청렴하고 대바른 그를 미워하던 연나부것들은 나라를 위해 큰공을 세웠으니 이제는 쉬라고 집으로 들여보냈다.

그것도 부족하여 우거장군과 함께 출전하였던 연인장군에게는 무능하다는 오명을 씌워 군사와 인연이 없는 관직으로 돌려놓았다.

기실 그것은 병법에 밝은 그들이 군권을 쥐고있는 경우 저들의 반란에 장애가 될수 있기때문이였다.

령길을 내려 산골짜기의 개울을 몇개 건느니 둥근해가 머리우로 치달아오르고있었다.

을파소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고우루가 길가의 마을을 가리켰다. 마을로 통하는 길옆의 야산에서는 양무리가 풀을 뜯고있었다.

《여기가 어데오이까? 내려올 때 급히 오다보니 모든게 생소하오이다.》

을파소는 벙긋 웃었다.

애젊은 시절 배움의 뜻을 품고 구려경당으로 이어진 이 길을 오르내린 을파소로서는 오랜만에 가는 이 길이 감회롭기 그지없었다.

감회로운 기분에 혈기왕성한 고우루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군의 젊음이 부럽소이다. 아직 마흔살이라니 얼마나 많은 일을 할수 있소이까.》

동문서답이였지만 고우루는 유쾌하게 웃었다.

《고맙소이다. 나에게도 아버님이 계신다면 무엇보다 효도를 잘해보겠소이다.》

고우루의 눈가에 어린 물기를 본 을파소는 마음이 서글퍼졌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란 고우루라고 하더니 아버지가 그리운 모양이였다.

문득 고우루가 말을 멈춰세웠다.

《여기서 좀 쉬여가는것이 어떻소이까. 마침 개울이라 물도 마시고…》

《그게 좋겠소이다.》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그들이 말에서 내려서자 일행모두도 말에서 뛰여내렸다.

이윽고 개울물을 떠마신 을파소는 길가의 풀섶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을파소가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우리 고장에 아가위나무가 흔하다면 이 고장에서는 보다싶이 뽕나무가 흔하오이다.》

길가에도 개울뚝에도 산에도 온통 뽕나무임을 알아본 고우루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 많은걸 다 사람들이 심은것이오이까?》

《저건 다 저절로 자라는 뽕나무이오이다. 그래서 이 마을을 가리켜 뽕골이라 하오이다.》

을파소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젊었을 때에는 신새벽에 말을 타고나서면 이튿날 저녁에는 도성에 들어서군 하였소이다.》

을파소가 말을 타려 하자 고우루가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

《가만, 등자가 어데 갔소이까?》

그 말에 을파소의 얼굴이 벌개졌다.

등자가 어데 갔는가고?!… 첫날 로상에서 잃어버리였다.

그날은 정신이 어찌나 번거로운지 등자가 떨어지는줄도 몰랐다.

을파소는 뒤더수기를 긁적이며 말했다.

《늙으면 부실해진다더니 그만 잃어버렸소이다.》

대범한 성미그대로 고우루는 자기 말의 고삐를 을파소의 손에 들려주었다.

《원참, 등자를 잃었으면 진작 말할것이지 돌창길에 오죽 말타기 힘들었겠소이까.》

막무가내로 떠밀치는 고우루를 당할수 없어 을파소는 백마우에 올라앉고말았다.

날래게 얼룩말을 탄 고우루가 소리쳤다.

《떠나자.》

선두에서 백마를 타고가는 을파소는 늙은이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고우루의 마음에 두눈을 슴벅이였다.

을파소의 마음을 엿본 고우루가 웃으며 말했다.

《등자없이 말을 타는 멋도 괜찮소이다. 참, 등자를 우리 고구려에서 제일먼저 만들었다는게 사실이오이까?》

을파소도 웃었다.

《사실이오이다. 저 중원에 신나라가 섰을 때 그것들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온적이 있었소이다. 그때 전장에서 쓰러진 아버지의 원쑤를 갚으려 나온 어린 총각이 있었소이다. 그 총각이 남달리 말을 잘 타면서 적을 버이군 하였는데 그만 어느 한 싸움에서 잘못되였소이다. 고구려군의 승리로 싸움이 끝난 후 보니 총각이 타던 말에 이상한 마구가 있더라는것이오이다. 그게 바로 등자였지요. 그제서야 군사들은 그 애가 남달리 말을 잘 타던 비결을 알았소이다. 나라의 원쑤, 아비의 원쑤를 갚을 마음이 얼마나 불같았으면 세상에 없는 등자까지 만들어가지고 나왔겠소이까.》

고우루의 목에서 울대뼈가 오르내리는것을 보며 을파소는 그의 됨됨을 다시한번 느낄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감동될줄 아는 사람만이 의로운 일을 할수 있는게 아니겠는가.

고우루를 더욱 믿게 되니 요즘 내내 무겁게 짓누르고있는 마음속의 고충을 그의 도움으로 털어버리고싶었다.

《장군어른, 나에게 근심거리가 하나 있는데 좀 풀어주겠소이까?》

고우루의 얼굴에 반색해하는 기색이 확연하였다.

《어서 말씀하소이다.》

《저… 이건 공사는 아니고 사사이오이다.》

《나쁜자의 공사는 사사로운 일이요 좋은 사람의 사사는 공사라는 말도 있으니 마음놓소이다.》

을파소는 자기때문에 우황을 가지고 도성에 갔다가 억울하게 옥에 갇힌 바호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고우루의 얼굴이 분개로 이그러지고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로인님, 제 도성에 올라가는 즉시 그 일을 바로잡겠소이다.》

도성이라는 말에 을파소는 부지중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우루의 말을 들어보면 도성에서 나쁜 일이 기다리고있지는 않는듯 싶은데 도대체 이 늙은 농군을 불러다 무슨 좋은것을 보여주려고 하는것일가.

나라를 위해 아무런 공도 없는 사람에게 그럴리는 없겠고…

동압록고을의 거리에 들어선 을파소의 일행은 큰 기와집마당에 모여들어 웅성이는 사람들을 볼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여 을파소도 고우루도 말에서 내리였다.

웅성이는 사람들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선 을파소는 만삭의 녀인과 맞다들리였다.

해진 옷을 입은 녀인인데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 녀인을 부축하면서 서로 끌어당기는 모습에 의문이 든 을파소가 한 로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이까?》

로파가 성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 숨이나 크게 쉬겠소이까. 이 아낙네는 저 기와집에서 종살이를 했다우. 남정네는 주인놈을 따라 사냥에 나갔다가 곰에 치워 죽고… 그런데도 주인놈은 제집의 말이 망아지를 낳게 되였는데 종년이 아이를 낳으면 부정을 탄다고 나가라는것이우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이 아낙네를 서로 제집으로 데려가겠다고 이러질 않수. 지난해는 제집에서 소여물콩을 집어먹었다고 어린 종을 때려죽였다우. 그 아이로 말하면 작인집자식으로 이 집 주인의 빚단련에 부모가 병들어 죽으니 그래서 이 집에 끌려와 종살이를 한거라우.》

생때같은 아이를 때려죽였다는 말에 을파소는 숨이 꺽 막히였다.

을파소가 주먹을 틀어쥐는데 그의 손목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고우루였다.

《로인장은 이 일에 참견마시오이다.》

사람들을 헤치고나간 고우루는 군사들에게 기와집의 주인을 묶어오라고 소리쳤다.

기와집의 대문을 박차고 들어간 군사들이 인차 피둥피둥 살찐 남정을 끌고나왔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묶여나온 주인놈은 얼마나 기겁했던지 벌벌 떨뿐이였다.

고우루가 그놈에게 만삭이 된 녀인을 가리켰다.

《네놈이 집에서 부리던 저 녀인을 쫓아냈다는게 사실이냐?》

겁에 질린 주인놈은 목이 꽉 잠긴탓에 고개를 끄덕이였다.

고우루가 성이 나서 꾸짖었다.

《이놈아, 아이밴 녀인을 박대하면 하늘이 노한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네놈은 아이밴 녀인을 박대하다못해 쫓아내느냐? 그리고 또 빚값으로 끌어온 작인집 어린 자식이 여물콩을 먹었다고 때려죽였다는데 이건 살인이다, 살인!》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대였지만 서슬 푸른 고우루의 기세에 혼맹이가 빠진 주인놈은 쩔쩔맸다.

《이놈아, 나라법에 살인자는 리유불문하고 죽이게 되여있다. 그러니 네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

당장 목을 칠것만 같은 고우루의 기상에 낯짝이 새까매진 주인놈은 기겁하여 쓰러지고말았다.

고우루는 휘하의 군교에게 일렀다.

《자네가 직접 이놈을 관가에 끌고가서 이놈이 지은 죄를 따지고 국법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조정에서 이 고을 처려근지를 결단코 가만두지 않을거라고 이르게.》

군교는 즉시 얼죽음이 된 주인놈을 말에 처싣고 관가로 떠났다.

살인자에게 마땅한 벌을 주도록 령을 내리는 고우루의 단호한 처사에 을파소는 격정이 북받쳤다.

나라법을 한치의 드팀도 없이 받들려 하는 저런 사람이 나라의 기둥이 아닌가.

저런 사람이 조정을 차지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 안류 그 사람을 만나면 고우루를 크게 써줄것을 당부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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