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제 2 장


(9)


《고국천왕때에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 등이 모두 왕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독차지하고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하므로 백성들이 그들을 원망하고 분개해하였다.

왕이 성을 내여 그들을 죽이려 하니 좌가려 등이 반역을 도모하는지라 이들을 죽이고 여당들은 귀양을 보내였다.》(《삼국사기》권제45 렬전 제5)


의신의 집에서 돌아온 그날부터 을파소는 도성으로 올라갈 차비를 서둘렀다.

지금은 한창 봄철이라 어데 가나 백성들은 식량이 부족하다.

오죽했으면 봄친척은 꿈에 볼가봐 무섭다는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이런 형편에서 무전려행의 풍습이 있다 한들 남들에게 페를 끼쳐서는 안된다.

이런 생각으로 을파소가 로자를 마련하고있는데 도성에서 란리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좌물촌에도 짜했다.

도성소식은 시골 가서 들으랬다고 국내성에서 생긴 큰 사변은 날개가 돋친듯 전국에 전해지는것이 정해진 리치였다.

그 소문에 을파소는 연나부것들이 반란을 일으켰음을 짐작했다.

연나부것들이 들고일어나는 날이자 멸망당하는 날임을 확신하고있던 을파소는 급히 도성행을 하리라 결심했다.

차라리 잘된셈이였다.

정말로 연나부가 란리를 일으키고 망했다면 틀림없이 안류가 조정대신으로 되였을것이라 그에게 도움을 청하면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을 손쉽게 빼낼것이였다.

래일은 집을 떠나기로 생각한 을파소는 아침부터 뜨락에서 짚신을 삼는 일을 벌려놓았다.

아무리 말을 빌려타고 간다 해도 짚신 몇컬레는 가져가야 할것이였다.

요즘은 한창 애벌김매기철이라 열살을 넘는 손자애들까지도 다 밭일을 나가고 륙손이만이 을파소의 말벗이 되여주었다.

을파소는 축축히 적셔놓은 삼껍질로 신바닥을 엮기 시작했다. 여섯줄로 날을 늘이고 날사이로 굵게 꼰 삼끈을 밀어넣으며 신바닥을 촘촘히 엮어나가느라니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돋았다.

륙손이가 얼른 수건을 가져다 을파소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을파소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여러모로 보아 기특도 하고 령리하기도 한 륙손이였다.

두벌자식은 덮어놓고 곱다고 하지만 륙손이는 곱게만 노니 칭찬이 모자랄 지경이였다.

《내 네 신도 곱게 삼아주마.》

륙손이 고개를 저었다.

《내건 아직 해지지 않았소이다. 할아버지, 나도 데리고갈수 없나이까?》

《너를?!…》

《세상을 구경하고싶소이다.》

륙손이의 간절한 기대가 실린 눈길을 보느라니 그를 데리고가는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냐, 데리고가마.》

륙손이 손벽을 치며 환성을 올렸다.

《우리 할아버지가 제일이다.》

너무 좋아 어쩔줄 몰라하는 륙손이를 껴안아주는데 문득 웬 사나이의 웅글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있소?》

륙손이 대꾸했다.

《누구시나요?》

《할아버지 있느냐?》

귀에 선 목소리에 을파소가 일어섰다.

어느새 삽짝문을 활 열어제낀 륙손이가 마당에 서있는 낯선 사람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절풍을 쓰고 칼을 찬 처려근지를 알아본 을파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려근지가 나를?! … 이거야말로 무슨 큰일이 생겼다는것이 아닌가.

삽짝문을 나선 을파소는 처려근지에게 절을 하였다.

《제가 을파소오이다. 루추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시오이다.》

키가 크고 잘생긴 사나이가 먼저 삽짝문안으로 들어서는걸 보니 그가 더 높은 관리인것 같았다.

그뒤로 처려근지가 따랐다.

두사람만이 뜨락에 들어오고 나머지 사람들은 삽짝문밖에 진을 치듯 서있었다.

뜨락에 들어선 을파소는 낯선 관리의 차림새를 눈더듬하였다.

놀라운것은 은장식의 허리띠를 찬 처려근지와 달리 낯선 관리의 허리에서는 시누런 금빛이 번쩍이였다. 금허리띠를 띤것이였다.

금허리띠에 매단 숫돌주머니도 금장식을 한 가죽주머니였다. 뿐더러 머리에는 높은 급의 무관들이 쓰는 붉은 책까지 쓰고있었다.

차림새를 보아 보통 큰 벼슬아치가 아니였다.

그런데 그에게 대뜸 마음이 끌리는것은 듬직한 몸가짐과 용모때문이였다.

둥글넙적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하나같이 사내답게 잘생기고 특히 반달모양의 두눈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있었다.

을파소는 이렇게 생긴 사람은 대개 정직하고 의로운것으로 여기고있었다.

그의 점잖은 행동거지에는 위엄 또한 어려있었다.

반대로 이마가 생기다만것 같고 광대뼈가 툭 두드러진 처려근지의 두눈은 먹을것을 노리고 졸라대는 수돼지의 눈과 같았다.

이렇게 막 생긴자는 대개 심술궂고 미욱하며 탐욕이 사납다고 을파소는 여기였다.

아니나다를가 처려근지가 호령조로 말했다.

《조정에서 이 집 주인을 불러들이라는 령이 내렸으니 당장 떠나야겠다.》

아닌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너무도 뜻밖의 일에 놀란 을파소는 말뚝처럼 굳어졌다.

대체 무슨 까닭으로?! …

이윽고 마음을 다잡은 을파소는 금허리띠를 찬 관리에게 말했다.

《하나 물어도 되겠소이까?》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어르신은 도성에서 내려오신가본데 도성에 란리가 일어났다는것이 사실이오이까?》

대바람에 처려근지가 성을 내며 소리쳤다.

《감히 뉘앞이라고? 백성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것이지 무슨 잔말인가 말이다. 당장 떠날 차비를 해가지고 나와.》

지난해 관가걸음을 할 때 얼굴이나 익힌 처려근지가 벼슬아치랍시고 나이가 우인 사람에게까지 반말질이라 을파소는 화가 벌컥 났다.

재주라고는 제살궁리를 하는것밖에 모르는 저런것한테 집에서까지 수모를 당해야 한단 말인가.

토방에 걸터앉은 을파소는 처려근지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성이 난 그의 입에서는 이전과 달리 걸죽한 욕설이 터져나왔다.

《너 이놈, 날 똑똑히 보아라. 이 집이 그래 어떤 집인지 네놈이 모른단 말이냐? 개도 터세를 한다고 했다. 네따위가 나라에 얼마만큼 좋은 일을 했기에 또 네놈의 조상들이 우리 겨레를 위해 어떤 업적을 남기였기에 큰소리냐? 백성이 뭐 어쨌다구? 아는것이란 사람을 업신여기는것밖에 모르는 네놈이 관모를 썼다고 꼴사납게 으시대는걸 보니 야 이놈아, 애들도 웃겠다.》

그만에야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은 처려근지의 얼굴이 수수떡처럼 되고말았다. 조정에서 내려온 웃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만 앞세우던 나머지 앞뒤를 재지 않고 놀아댄 불찰을 알아차린것이였다.

오로지 권세를 부리는것밖에는 도무지 례의를 모르는 처려근지와 같은자에게는 존대의 말이 통하지 않는것이다.

이런자들에게는 단 한가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게 즉석에서 그것도 되게 면박을 안겨야 한다는것을 을파소는 잘 알고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처려근지를 움쩍 못하게 눌러놓은 을파소는 잠시 생각했다.

조정에서 농사나 짓는 늙은이를 왜 부를가.

갈피를 잡을수 없었지만 명백한것은 호락호락 끌려가서는 안된다는 그것이였다.

을파소는 금허리띠를 띤 관리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젊은 어른, 나로 말하면 한생 열손가락이 닳도록 땅이나 만지는 농군이오이다. 그런즉 나는 나라에 터럭만큼도 해되는짓을 한게 없으니 어찌 죄인처럼 끌려가겠소? 억지다짐으로 날 붙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마소이다. 도대체 조정에 무슨 일이 생기였기에 날 부른다는거요?》

을파소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관리는 속이 뒤틀려 씩씩거렸다.

그렇다고 강박할수는 더욱 없었다. 상관에게서 령을 받을 때 을파소를 잘 데려오라고만 하였지 다른 말은 없었던것이다.

금허리띠를 찬 이 사람의 이름은 고우루이고 왕궁호위를 통솔하는 중리도독의 막하장수로서 관직은 중리부도독이다.

고우루만큼 요사이 도성의 형편에 밝은 사람도 많지 않을것이였다.

열흘전 4월초 임금이 국내성의 왕궁으로 돌아앉기 바쁘게 바로 이때라고 타산한 연나부것들이 반란을 일으키였다.

그것들이 어중이떠중이 수천명을 긁어모아가지고 궁성을 에워싸려 할 때 바로 이때를 기다려온 철기군이 즉시 반격을 들이댔다.

그 어떤 강포한 외적도 격파할수 있는 정예군이 고구려의 철기군이다.

천하으뜸인 철기군앞에 반란군은 그 즉시 무릎을 꿇고말았다.

그와 동시에 임금의 여러 동생들이 거느린 경군이 연나부로 쳐들어가 반란의 주범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이로써 그렇게도 말썽많던 연나부는 끝장나고말았다.

임금은 즉시 새 조정을 내오기 위해 도처에서 사람들을 불러들이였다.

바로 그 일감이 고우루에게 맡겨졌다.

임금이 중리도독에게 어떤 사람들을 불러들이라는 령을 내리면 그 령이 곧 고우루에게 전해지고 고우루는 지체없이 군사들을 보내여 그들을 불러들이였다.

임금에게 불리워간 사람들에게는 두 길중의 하나가 놓여있는바 반란자들과 인연이 있는자는 형장으로 끌려나가고 그렇지 않은자에게는 관직이 차례졌다.

임금을 내놓고 그들에게 어떤 운명이 차례지겠는지는 누구도 미리 알수 없었다.

사흘전 중리도독은 고우루에게 직접 서압록고을에 내려가 을파소를 데려오라는 령을 내렸다.

을파소의 차후운명을 예측할수는 없어도 여느 사람들과 달리 궁중의 장수가 직접 데려오라고 하니 그가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라는것만은 짐작되였다.

그래서 근 천리길을 냅다 말을 달려온 고우루는 관가를 통해 을파소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알아보니 을파소가 옛적의 명재상 을소의 후손이라는것도 놀라왔고 구려경당을 나온 식자가 한생 농사를 짓고있다는것도 놀라왔다.

당당한 명문가의 자손이고 아는것도 많은 선비가 무엇때문에 벼슬길과 담을 쌓고 농사군이 되였을가.

그보다 놀라운것은 을파소가 작인들을 해친 동생을 그것도 친동생을 가법에 따라 처형했다는 그것이였다.

세상에 보통사람으로서 악을 미워하여 제 친동생을 죽인 전례가 있단 말인가.

도저히 리해되지 않는 인물이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지금 이렇게 당자를 만나고보니 리해되는바가 없지 않았다.

비록 초가집이긴 해도 사람들의 깐진 손길이 속속이 미쳐있고 집주인은 위엄이 있었다.

추녀 낮은 집에 인물이 있다더니… 이 늙은이를 건드렸다가는 처려근지처럼 코가 납작하게 망신을 당할것이다.

고우루는 을파소의 엄한 눈길을 읽으며 그가 탐욕스러운 연나부것들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정직한 사람임을 확신했다.

그러니 이 사람을 불러들이는것은 벌이 아니라 급히 쓰려 해서일것이다.

고우루는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나이든 어른에게 뭘 숨기겠소이까. 역적들의 란동은 그날로 평정됐고 지금 나라에서는 지은 죄와 세운 공을 헤아려 사람들을 대해주고있소이다. 솔직히 난 로인장을 부른 까닭을 모르오이다.

하오나 로인장에게 해되는 일은 없을듯 하니 아무런 의심 마시고 저와 함께 가시오이다.

타고갈 말도 가지고왔으니 차비를 하고 나오소이다.》

고우루를 지켜보던 을파소는 그가 결코 얼림수나 쓸 간사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겉보기가 속보기라고 고우루의 언행에는 처려근지와 달리 진중하고 진심이 어려있었다.

마음이 가라앉은 을파소는 방에 들어가 채롱에서 나들이옷을 꺼내였다.

나들이옷이래야 흔히 농사군들이 입는 베옷이였다.

을파소는 통을 좁게 만든 바지부터 갈아입었다.

통이 좁은 이런 바지를 궁고라고 하는데 부자들이 입는 통이 넓은 대구고와 달리 행동에 편리하였다.

이어 왼섶저고리로 갈아입고 허리에 띠를 두르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덧저고리를 걸치였다.

저고리 역시 팔소매가 넓은 부자들의것과 달리 소매가 좁았다.

옷섶을 바로 여미고 덧저고리를 입은 허리에 또 띠를 띤 을파소는 머리의 외상투를 매만지면서 꼼꼼하게 상투에 끈을 동여맸다.

그리고 검은색머리수건을 썼다.

사실 귀족인 을파소는 마땅히 비단으로 지은 통넓은 바지며 소매가 넓은 저고리와 덧저고리를 입고 가죽으로 만든 띠를 허리에 띠고 머리에는 적어도 절풍이라고 하는 쓰개를 써야 했다.

그러나 한생 농사로 늙다보니 자기를 보통농사군으로 치부해버리였고 또한 요즘의 집살림형편으로는 그런 값비싼 옷차림을 할수 없었던것이다.

옷을 갈아입은 을파소가 뜨락으로 나오니 륙손이 울상이 되여 팔에 매달렸다.

《할아버지, 이 사람들을 따라가지 마소이다. 예, 할아버지?》

을파소는 눈물이 가랑가랑한 륙손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 일 없으니 마음 놓아라.》

을파소를 마뜩지 않게 노려보던 처려근지가 륙손이를 떠밀며 재촉했다.

《너무 지체했소.》

마당에 나서니 군사들이 을파소에게 타고갈 말을 가져다주었다. 얼룩말이였다.

얼룩말에 올라앉은 을파소는 울고있는 륙손이에게 소리쳤다.

《얘야, 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곧 돌아온다고 알려라.》

말을 탄 군사들이 을파소를 에워싸고 그뒤로 역시 말을 탄 고우루와 처려근지가 따랐다.

그들이 마을을 벗어나 고을로 향하는 큰길에 들어섰는데 《서시오!―》하고 웨치며 말을 급히 몰아오는 두사람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는 을파소는 그들을 첫눈에 알아보았다.

을파소는 칼을 뽑아드는 군사들에게 일렀다.

《저 사람들은 우리 마을사람들일세. 아마도 날 바래주려고 따라오는것 같네.》

을파소가 말을 세우니 일행모두도 멈춰섰다.

곧 인우와 정우가 들이닥쳤다.

키가 좀더 큰 사나이가 정우이고 볼에 칼에 찔린 흉터가 나있는 사나이는 인우였다.

말에서 뛰여내린 그들이 을파소앞에 꿇어엎드렸다.

《주인님, 륙손이에게서 다 들었소이다. 저희들이 시중을 들며 주인님을 모시고가겠으니 허락해주시오이다.》

을파소는 자기를 부모처럼 따르는 이들의 마음을 돌려세울수 없음을 느끼였다.

처려근지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이 상놈들이 무례하게도 갈길을 지체시킨단 말이야? 당장 물러가지 않으면 목을 칠테다.》

을파소는 꼴사납게 놀아대는 처려근지를 못 본척하고 고우루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나와 외적을 치는 전장에서 인연을 맺었소이다. 함께 가도록 허락해주오.》

이제는 을파소에게 호감을 품은 고우루는 처려근지에게 엄하게 일렀다.

《공은 자중하오. 난 저 두사람이 로인님을 시중들게 하는게 좋다고 보오.》

그 한마디에 처려근지는 삽살개처럼 싹싹해졌다.

《장군의 분부가 지당하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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