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 2 장


(7)


도성에서 북쪽으로 치우쳐있는 제나부에도 연나부에처럼 붉은 기와를 떠인 큰집이 있었다.

뜨락에 금잉어가 굼니는 련못도 있고 그곁에 앵무새, 공작새, 흰꿩과 같은 진귀한 새들을 가두어 기르는 새우리도 있는 이 집에서 우소가 살고있었다.

온화하고 따스한 기운이 떠도는 이 집의 밀실에서는 지금 우소가 뜨아한 눈길로 안류를 바라보고있었다.

평상에 걸터앉은 우소는 이목구비 지어는 턱수염조차도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조정에서 단연 첫손가락에 꼽히우는 미남자인데 지금은 얼굴이 어찌나 흐려있던지 리속을 다투느라 열을 올리는 늙은 장사군처럼 보이였다.

그앞에 올방자를 틀고있는 안류는 어려워하는 기색이 별로 없었다.

하긴 이 두사람은 나이도 동갑이고 아주 오래전부터 막역한 친구사이였으니 밀실에서까지 상하간의 딱딱한 틀을 차릴것은 없었다.

우소에게 있어서 안류는 친구이기 전에 은인이였다.

안류를 떠나서 이 집의 오늘과 같은 날은 생각지 못할것이였다.

이십여년전 어린 딸을 둔 우소는 그 애가 커서 후궁의 주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단지 딸애가 곱게 생기고 령리하기에 글이나 깨우쳐줄 생각으로 초면의 안류를 찾아갔었다. 이왕이면 성현이라 이름높은 학산의 수제자 안류에게 딸의 공부를 맡기고싶었기때문이였다.

안류는 명사중의 명사라 할만 한 사람이였다.

그의 슬하에서 몇해동안 글을 배운 딸이 시골에서 봉황이 났다는 소문을 낸것이였다.

딸이 학식은 물론 례의범절과 재색을 겸비한 요조숙녀라 소문이 나서 뜻밖에도 임금을 사위로 맞는 복을 지닐수 있었던것이다.

그러니 우소에게는 안류가 은인중의 은인인것이였다.

그런 까닭에 우소는 아무리 국구이고 제나부를 통솔하고있었지만 안류에게는 언제나 깍듯한 공대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반대로 학식도 견문도 비할바없이 넓은 안류가 우소를 웃사람으로 공대하는것은 국구라는 점을 중시하기때문이였다. 연나부의 세상을 끝장내는 그날에 국구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없게 될것이라 조정을 쇄신하는데 그의 이름을 크게 빌려쓸수 있을것이였다.

《음… 그렇게도 을파소가 뛰여났단 말이지? …》

벌써 몇번째 곱씹는 질문에 안류는 얼굴을 붉히였다.

장황하다고 할만치 을파소의 됨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우소에게는 그 말이 곧이들리지 않는것 같았다.

하긴 이 먼곳에 앉아가지고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을 남의 말이나 들어가지고는 믿어지지 않을것이였다.

하지만 이미 을파소를 스승으로 여긴 안류에게는 우소의 곱씹는 질문이 스승을 깎아내리는것 같아 저으기 불쾌했다.

함께 손잡고 큰일을 맡아줄수 있는 큰 인물을 찾아낸 기쁜 소식을 한시바삐 알리려 피곤도 풀지 못하고 왔는데 너무하지 않는가.

안류는 어제 저녁 집으로 돌아와 지쳐 쓰러지다보니 아침에야 겨우 깨여 일어났다.

집에 돌아가거들랑 만사를 제쳐놓고 아가위로 약을 지어 아버님께 드리라고 그만큼 일러준 을파소의 당부도 뒤로 밀어놓고 우소부터 찾아온 안류였다.

은근히 치미는 불만을 누르며 안류는 입을 열었다.

《국구께서 그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는것은 곧 나를 믿지 않겠다는것이나 같소이다.》

그제서야 우소는 손을 내저었다.

《아아, 오해말게. 안공이 믿는다면 나도 믿어야지.》

안류는 힘을 주어 말했다.

《재삼 말씀올리오만 을파소는 당대의 호걸이라 허술히 보면 안되오이다. 그 사람은 초야에 묻혀있는 룡이라 나같은건 도저히 미칠바가 아니니 나라를 위해 그를 크게 써야 하오이다.》

우소는 딱한 기색이였다.

《안공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뛰여난 인재가 틀림없는데 나이가 많은것이 흠일세. 늙은이에게 무거운 짐수레를 메우면 얼마나 끌텐가?》

안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고 하는 말씀이오이다. 그 사람의 집은 대대로 장수하는 집으로서 부친도 조부도 증조부도 다 일흔살을 넘어살았소이다. 아, 명림답부는 거의 백살의 몸으로 국상이 되셨는데 뭐 나이를 탓하겠소이까?》

우소는 게면쩍게 웃으며 변명조로 말했다.

《명림답부야 세상에 둘도 없이 뛰여난 기인이 아닌가. 하여간 그 사람이 나이는 많아도 정정하다니 꼭 써주겠네.》

우소는 안류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앞으로 을파소에게 어느 고을을 맡겨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제나부의 대가들이 종들까지도 모두 거느리고 들고일어날 차비가 되여있은즉 언제쯤 연나부를 들이치는게 좋겠나?》

연나부것들을 짓부시는것은 임금이 알아할것이니 괜히 그런 일에 끼여들지 말고 바른 정사에 한몫 할 젊은 인재들을 찾아내라던 을파소의 당부를 잊지 않고있는 안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제 옷자락을 움켜쥔 우소가 이를 갈며 말했다.

《각을 떠서 매밥을 만들어도 시원치 않을 연나부것들을 살려두고있자니 치가 떨려 견딜수 없네.》

우소가 이다지도 격분해하는데는 사연이 있었다.

우소가 애젊었을 때였다.

재물이라면 나라의것이라도 제집으로 끌어들이는데 이골이 난 연나부것들은 다른 부의 귀족들도 가리지 않았다.

우소에게는 할아버지때부터 물려오는 해마다 수백근의 은을 캐는 은점이 있었다.

그 은점의 덕으로 우소네는 잘살아왔다.

그런데 연나부것들이 은점의 땅을 제땅이라고 문서를 꾸며내여 하루아침에 그것을 빼앗아가지였다.

우소의 아버지가 좌가려를 찾아가 리치를 따지며 은점을 돌려달라고 말했지만 되찾지 못하였다.

조정을 틀어쥔 좌가려네의 결심이자 곧 법이였으니 귀족일지라도 세력이 없으면 그것들에게 짓밟히지 않을수 없었다.

이에 얼마나 화가 났으면 우소의 아버지가 졸도하여 죽기까지 했겠는가.

세월이 흘러 우소의 딸이 후궁의 주인으로 되자 좌가려가 잘못했다면서 은점을 돌려주었으나 그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우소로서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연나부것들을 용서할수 없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조정에서 연나부의 독판치기로 제나부는 뒤자리를 차지하지 않을수 없었고 땅세라든가 부세 등을 연나부것들보다 더 많이 바쳐야 했으며 길을 가다가도 그들을 만나면 길을 비켜주어야 하고 그를 어기면 벌을 당해야 했다.

그러니 우소로서는 분이 날만도 하였다.

복수심으로 두눈을 부릅뜬 우소의 얼굴이 푸르딩딩해졌다.

《연나부 이놈들, 지금껏 나라의 법이 실행되지 않은것은 조정의 꼭두에 올라앉은 네놈들이 법을 어기였기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곧 네놈들의 단 재미도 끝장이 날게다.》

우소는 연나부가 하루빨리 망하도록 룡신에게 매일이라도 빌고싶었다.

우소가 하늘처럼 숭상하는 신은 룡신이였다.

고구려에서는 하늘신과 시조신은 말할것도 없고 사람의 머리에 소의 몸뚱아리를 가진 농사신, 야장신 등 여러 신을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중에는 박달겨레가 태고적부터 숭상해오는 룡신도 있었다.

사람마다 어느 신을 더 숭상하는가 하는것은 나름대로였으니 우소는 하늘신과 시조신외에 룡신을 독실하게 섬기고있었다.

그가 룡신을 그토록 믿는것은 가문의 풍습때문이였다.

까마득한 옛적부터 귀족가문인 우씨네는 사당앞에 황소만 한 돌룡신을 만들어놓고 무슨 소원이 생기면 그앞에 꿇어엎드려 비는것이 관례로 되여있었다.

우소의 조상들이 집마당에 만들어놓은 돌룡신의 생김새는 뱀대가리에 뱀이마, 사슴뿔에 토끼눈 그리고 물고기비늘로 덮인 구렝이배에 매발톱이 달린 범의 발을 가진 룡이였다.

룡신에게 넋을 맡긴 우소는 아침마다 꼭꼭 룡신앞에 엎드려 그날의 일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데 그 정상이 자못 지성스러웠다.

이윽고 안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런 중대한 결심은 오로지 우공만이 직접 내려야 할줄로 아오이다.》

안류의 속마음을 알리 없는 우소는 벙글 웃었다.

《공은 언제 봐야 겸손하거던. 하긴 그래.》

연나부가 들고일어나면 임금이 제나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짓뭉개버릴수 있다는것을 잘 알면서도 우소가 한사코 먼저 거사를 하려 하는데는 바로 이 기회에 으뜸가는 공을 세우려는 음흉한 타산이 있기때문이였다.

고구려에서 가장 전투력이 강한 철기군은 예로부터 임금의 친솔하에 두고있었다.

게다가 요즘 임금은 경군의 여러 부대들을 림시로 자기의 동생들이 거느리게 하였다.

반란을 꾀하는 좌가려의 심복들중에 변방의 군사를 통솔하는 장수가 몇명 있었다.

허나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군사를 끌고온다면 그날로 크게 소문이 날것이고 설사 그것들이 도성으로 쳐들어온다고 해도 경군을 당할수 없었다.

이것을 알면서도 우소는 선손을 써서 연나부를 치려 하는것이였다.

연나부에는 우소의 눈과 귀가 박혀있었다. 바로 그들을 통해서 좌가려네가 꾸미는 역모를 다는 알수 없었지만 하여간 머지않아 반란을 일으킬것임은 똑똑히 알고있는 우소였다.

요즘 좌가려네가 잠잠해있다는데 이런 때 온 제나부뿐아니라 제나부출신의 장수들이 거느린 군사들까지 불의에 내몬다면 얼마든지 연나부를 요정낼것이였다. 그렇게만 되면 태묘와 사직을 지켜낸 특등공신으로 조정을 틀어쥘수 있을것이였다.

우소에게는 쉰살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터득한 그 무슨 리치라는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적수에게 주먹을 휘두르기 전에 그 주먹을 다시한번 들여다보라는것이였다.

이 리치에는 세상을 살아가자면 매사에 머리부터 쓰고 묘한 계책으로 상대를 눌러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있었다.

우소는 연나부처럼 미욱한짓은 하지 않을 생각이였다.

꼬리털이 탐스러워야 가죽이 좋아보인다고 손발이 되여줄 부하들을 될수록이면 탐욕을 꺼리는 청렴한 사람들로 쓸것이였다.

말똥도 모르고 마의노릇을 한다는 말처럼 좌가려나 어비류는 정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도적놈들로 수족을 두었기에 그것들이 제 살 일에만 돌아치면서 정사를 어지럽히였고 결국은 임금의 눈밖에 날수밖에 없었던것이다.

이윽고 우소는 방문을 바라보며 손벽을 쳤다.

그러기를 기다렸다는듯 곱살하게 생긴 시비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은은한 향내를 풍기며 아름다운 꽃문양을 수놓은 비단옷을 입은 시비가 들어서니 삽시에 방안이 환해지는듯싶었다.

시비는 나부시 절을 하며 물었다.

《음식상을 들여와도 되겠나이까?》

우소는 말없이 눈을 끔뻑했다.

화려한 치마를 찰찰 끌며 밖으로 나갔던 시비가 곧 음식상을 들고 들어왔다.

시비가 내려놓은 음식상을 굽어보던 안류는 무척 놀라왔다.

자배기에는 누런 잉어를 끓인 금잉어탕이 가득하였다.

금잉어는 우소가 제 살점마냥 아끼는 물고기였다.

우소가 재미나게 즐기는 취미의 하나가 넓은 뜨락을 차지한 잉어못에서 꼬리를 치며 굼니는 금잉어를 구경하는것이였다.

그것을 어찌나 즐기는지 어떤 날에는 한나절이나 잉어못에 붙어있었다.

하기에 지금껏 잉어못에서 잡은 금잉어를 누구한테도 대접한적이 없었다.

꿇어앉은 시비가 안류에게 아뢰였다.

《금잉어탕이 특별히 몸보신에 좋다하시며 주인어른께서 어르신을 위해 오늘 잉어못에서 금잉어를 잡도록 하시였나이다.》

아직은 우소가 남에게 금잉어탕을 대접하지 않았음을 잘 알고있는 안류로서는 그 말에 감동되지 않을수 없었다.

시비가 옥술잔에 맑은 술을 찰랑찰랑 부어놓고 나가니 우소가 웃으며 말했다.

《그저 나의 자그마한 성의로 알고 들게.》

안류는 우소의 앞에 놓인 자배기를 가리켰다.

《원, 국구어른도 참. 이 귀한걸 다…》

《사람나고 이런것도 있는게 아니겠나. 자, 어서 들게.》

두사람은 곧 수저를 놀리였다.

금잉어탕을 맛있게 드는 안류를 곁눈질하며 우소는 못내 흡족해하였다.

뛰여난 인재는 얻기도 힘들고 얻는다 해도 써먹기 어렵다지만 그것은 머리를 쓸줄 모르는 우둔한자들이 하는 소리이다.

믿음을 앞세운 인정에는 녹아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머리를 잘 쓰기만 하면 아무리 기개있는 호걸일지라도 팔다리처럼 부릴수 있는것이다.

강아지도 닷새면 주인을 안다는데 인정에 녹아난 사람은 반드시 인정을 안겨준 사람을 위해 죽기마련이다.

그런즉 안류와 같은 사람들로 조정을 꾸리면 그들이 어찌 나를 위해 뛰지 않겠는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런게 정사의 묘술이렷다.…

술기운이 오른 두사람은 곧 말이 많아졌다.

술이 들어가면 얼굴이 하얘지는 우소는 반대로 얼굴이 시뻘개지는 안류에게 말했다.

《안공에 대한 왕후마마의 기대가 크오. 왕후마마께서 나에게 귀띔하기를 공은 중외대부감이라고 하셨소.》

왕후라는 소리에 안류는 가슴을 들먹이였다.

뜻을 가진 선비에게 있어서 제일 큰 재산은 손때묻혀 키운 제자인것이다.

우소가 욕심많은 사람인줄 알면서도 그와 그냥 상종하는것은 벼슬에 미련이 있기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왕후와의 인연을 중시하기때문이였다.

총명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우왕후와 손을 잡고있으면 어느때건 조정일에 나설수 있게 될것이였다.

《고맙소이다.》

안류는 기쁨에 겨워 한껏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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