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제 2 장


(6)


안류가 을파소의 집에서 머무르고있는지도 어느덧 한달이라는 나날이 흘렀다.

이날도 신새벽에 깨여난 을파소는 부시럭소리가 날세라 조심히 일어나앉았다.

겨릅등을 켜고싶었지만 고단하게 자고있는 안류가 념려되여 그만두고말았다.

을파소는 어둠속에서 코를 골며 자는 안류를 굽어보았다.

선비라는 사람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한달이나 제일 고된 가을걷이에 꼬바기 시달렸으니 오죽이나 피곤하겠는가.

지내보니 안류는 연나부때문에 날로 나라의 정사가 어지러워지는것을 누구보다도 걱정하고 누구보다도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사람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같은 늙은이를 만나자고 이 먼곳에까지 찾아와 세상을 대하는 나의 마음을 알려 애쓰겠는가.

한편 안류도 잠에서 깨여났지만 을파소가 조금이나마 쉬길 바래서 자는체 하고있었다.

예견했던것보다 이 집에서 너무 많은 기일을 지체하고있는것이 안타까왔다.

지금쯤 우소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있겠는데…

그러나 기일이 지체되였다 하더래도 얻은 소득은 적지 않았다.

안류가 뜻을 같이할 인재를 얻기 위해 사방으로 뛰여다니는것은 연나부를 몰아내고 조정을 쇄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엄청난 큰일을 해내자면 우소와 같은 큰인물을 내세워야 했다. 그래서 우소를 내세운것이였고 그가 힘을 다 내도록 부추기는것이였다.

이제 연나부를 몰아내면 우소가 국상이 될수도 있다. 설사 임금의 가시아버지인 국구라고 해서 국상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그는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라도 안류를 힘껏 떠밀어줄것이였다.

우소의 힘을 빌어 이 안류가 조정대신이 된다면 바로잡을게 오죽이나 많겠는가.

그 많은 일을 몇사람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진실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을 한명이라도 찾아내려 이 먼고장에까지 온것인데 부릴 사람이 아닌 스승으로 섬길만 한 을파소를 사귀게 되였으니 이것이 제일 큰 소득이였다.

안류는 자기를 비둘기라고 한다면 을파소는 봉황에 비길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달음에 우소에게 달려가 시골에 봉황이 있다고 알리는것도 좋지만 한시라도 을파소의 곁에 있으면서 더 많은 의견을 나누고 더 많이 깨우치는것이 리득이였다.

이제 을파소를 우소에게 소개하고 그가 을파소를 임금께 천거하여 중히 써준다면 보통사람들은 엄두도 낼수 없는 대단한 큰일을 해낼수 있을것이였다.

학식도 넓고 판단도 결단도 비할바없이 뛰여나고 청렴강직한 이런 사람이 고구려에 있다는것은 복이 아닐수 없는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안류는 오늘 나는 우소의 부하로서 을파소를 도성으로 데려가려 왔다는것을 알리리라 마음먹었다.

아침상을 물린 을파소가 먼저 말을 건넸다.

《오늘은 나와 함께 산열매를 따러 가세.》

안류는 쾌히 따라나섰다.

커다란 다래끼를 하나씩 든 그들은 둥실한 야산으로 향했다.

야산은 온통 찔광이나무천지였다. 한길짜리도 있고 두세길되는 큰 나무도 있는데 한결같이 빨갛게 익은 열매가 가지가 휘도록 달려있었다.

앞에서 찔광이나무사이로 길을 내여가던 을파소가 산중턱에서 멈춰섰다.

그의 앞에 굉장히 큰 찔광이나무가 서있었다.

밑둥의 둘레가 한아름이 넘고 몇길 잘되는 나무는 마치도 이 숲의 제왕같았다.

그 나무는 제왕구실을 하려는듯 열매가 더 크고 새빨갰다.

을파소는 손에 닿는 찔광이나무가지를 휘여잡으며 말했다.

《오늘 따자고 하는 산열매가 바로 이 아가위일세. 아가위를 찔광이라고도 한다네.》

산열매라기에 달달한 다래나 머루라고 생각했던 안류는 어이가 없었다.

《하필 돌덩이같이 굳고 시큼떱덜한 이런걸 따자고 하오이까?》

을파소는 밤알만큼 큰 찔광이를 따며 말했다.

《자네 부친께서 속탈로 고생한다고 하질 않았나?》

을파소는 찔광이를 안류가 멘 다래끼에 던져넣으며 말했다.

《이게 바로 자네 부친의 속탈에 좋은 약일세. 먹은것이 잘 내려가지 않거나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좋은 약일세.》

을파소는 손을 들어 사방을 가리켰다.

《보다싶이 우리 고장은 산마다 온통 아가위나무일세.》

안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제 보니 이 고장에서처럼 발길 닿는 곳마다 찔광이나무가 무리지은 고장은 없는것 같았다.

《예로부터 우리 고장은 산양이 많은지라 산양골이라지만 보다 유명한것은 바로 저 아가위천이란 말일세.》

을파소는 개울을 가리켰다.

《저 아가위천의 푸른 물은 압록강으로 흘러든다네. 자네 안 다녀본 고장이 없겠지만 아가위천이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거네. 이것만 보아도 우리 고장에 아가위나무가 얼마나 많은지 알수 있을거네. 자, 이젠 따보지 않겠나?》

안류는 난생처음 찔광이열매를 따는 재미에 아이처럼 기뻐하였다.

밤알만큼 굵은 찔광이열매를 움켜잡고 따는 멋이란 흐뭇하기도 하고 이상야릇도 하여 그동안 쌓인 피로가 쑥 가셔지는듯싶었다.

인차 두개의 다래끼에 찔광이가 가득 찼다.

을파소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안류의 팔을 건드렸다.

《우리 좀 쉬다가 가세.》

그늘좋은 풀섶에 앉은 을파소의 몸이 굳어졌다.

맞은켠 야산에 하얗게 붙은 사람들을 보았기때문이다.

《저 사람들이 묘를 쓰는게 아닌가?》

맞은켠 야산에서 사람들이 묘를 만들고있는것을 알아본 안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 굉장히 큰 무덤을 만들고있소이다.》

불과 몇백보밖에 안되는 맞은켠 산에다 땅을 파고 시체를 묻었는지 커다란 봉분을 쌓느라 사람들이 역사질을 하고있었다. 어림짐작으로도 백여명이 돼보였다.

을파소는 부지중 부르짖었다.

《아, 그렇지. 며칠전 이전 처려근지가 죽었는데 바로 저 산에다 묘를 쓴다고 하였었네.》

처려근지란 고을의 큰 어른이란 뜻으로서 고을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을파소는 건너편을 쏘아보며 말했다.

《죽은 처려근지로 말하면 지독하게 심보가 고약하고 악착한자였네.》

을파소의 곁에 앉은 안류는 궁금증이 나서 물었다.

《그자가 어떻게 굴었기에 그처럼 미워하시오이까?》

《세상에 벼슬하는 사람치고 제 욕심을 차리지 않는자 없다지만 죽은 처려근지만큼 제살궁리에 지독한자는 쉽지 않을거네.》

을파소의 숨결이 높아졌다.

《아, 글쎄 이 고을에 처려근지로 부임되여온지 한해만에 수백마지기의 땅을 차지했으니 이 하나를 놓고보더라도 놈이 얼마나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가지였는지 알만 하지 않는가.

처려근지 몇해만에는 고을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부자가 되였지. 더러운 놈.》

을파소는 앞산을 가리켰다.

《자네 저 요란한 무덤을 보면서 생각되는게 없나?》

불의의 질문에 안류는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난 저 무덤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드누만. 나라에 쌓은 공이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제살궁리만 하다가 죽은자가 아무리 요란한 무덤에 묻히였다 한들 누가 쳐다보기나 할텐가. 세월이 흐른 뒤 그때의 사람들은 그런자들의 무덤에 침을 뱉을걸세.》 하더니 을파소는 화제를 바꾸었다.

《난 자네가 연나부것들을 몰아낼 생각으로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구하러 다닌다고 짐작하네. 내 짐작이 틀렸나?》

안류는 진속을 터놓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선배님의 보는 눈은 참… 옳소이다. 사실 난 연나부것들을 몰아내고 조정을 쇄신할 마음으로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찾아다니고있소이다.》

을파소는 벙글 웃었다.

《난 자네뒤에 권세가 이만저만 아닌 큰 인물이 있다고 짐작하네. 그래, 자네들의 힘으로 연나부를 이길수 있겠나?》

안류는 주먹을 꽉 움켜쥐였다.

《이길수 있소이다.》

을파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연나부는 어느때건 들고일어날걸세. 임금이 앞으로도 나라를 해치는 연나부것들을 그냥 제 욕심이나 부리라고 내버려두지는 않을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정을 쥐락펴락하려드는 그자들이 절대로 가만있자 안할걸세.

나라는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저밖에 모르는 탐욕의 무리가 갈길이란 그 길뿐이니까. 그러나 내 알기에는 우리 고구려의 력대 임금들의 수중에는 세상에서 제일 용맹하고 강한 철기군이 있네.

그리고 지금의 임금님이 어려서 숱한 고생을 겪어보아 아래형편에도 밝고 이미전에 연나부것들을 꺼려 왕후까지도 제나부에서 맞아들였다는데 앞으로 두고보라구, 연나부가 들고일어나는 날이자 그것들의 목숨이 임금님의 손에 끝장나는 날이라는것을…》

안류도 그것을 모르는바는 아니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선손을 써서 연나부를 제거하려 하는것은 우소를 내세우려 하기때문이였다. 우소가 나라의 화근을 짓뭉개버린 공을 세운다면 얼마든지 국상으로 될것이였다.

우소는 연나부를 제거하면 문무백관을 떼고붙이는 권한을 안류에게 주도록 임금께 상주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렇게만 되면 임금을 받들어 조정을 쇄신하고 국력을 일떠세우려는 뜻을 실현할수 있을것이였다.

조정의 쇄신도 국력을 일신시키는것도 다 충의지사들의 한결같은 뜻이니 그런 사람들을 천거하면 될것이였다.

을파소는 안류의 손을 그러잡았다.

《이 사람, 이제 반드시 나라에서 자네같은 사람을 중히 써줄 날이 올걸세. 그러니 임금님이 어련히 알아하실 연나부를 몰아내는 일에 괜히 끼여들지 말고 한명이라도 젊은 인재를 찾아두게.

자네가 성쌓고 남은 돌같은 나를 찾아온것은 헛일일세. 한 십년만 젊었어도 이 기회에 나도 소리치며 벼슬길에 나서보는건데… 그러나 이젠 늦었어. 그러니 다시는 나같은 늙은이를 찾아다니지 말게.

난 자네가 임금님을 도와 우리 고구려를 보다 강대한 나라로 일떠세우는데 한몫 하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네.》

안류는 할말이 없었다.

이 사람은 확실히 나보다 멀리 내다보는구나, 이런 사람이 나라에 크게 소용되는데…

을파소가 산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이젠 내려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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