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회)

 

제 1 장

 

(2)


이윽고 을파소는 나직이 말했다.

《막내야, 너도 우리 가문의 가훈이 무엇인지 잘 알게다.》

가훈이란 한집안에서 자식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대대로 전해오는 훈계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 가문에는 대대로 전해오는 가훈이 있다. 〈나라를 위하려면 탐욕부터 없애야 한다.〉 바로 이것이다. 이 가훈은 우리 가문의 한 조상께서 자손들에게 남기신 가훈이다. 넌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을파소는 지금이야말로 집안의 가훈으로 온 식솔을 다시한번 각성시킬수 있는 시기적절한 때라고 생각하였다.

을파소에게는 고구려 7대임금인 류리명왕때 조정대신을 한 을소라는 조상이 있었다.

남달리 학식도 견문도 넓고 덕행도 높으며 청렴결백하기로 소문난 을소는 그때문에 류리명왕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가 고구려의 국력을 다지는데 기여를 하였다.

국력을 떨치는 바른 정사에 심신을 다 바친 그가 늙어서 집으로 돌아올 때 가지고온것이란 타고다니던 말 한필에 입고있는 옷이 전부였다.

집에 돌아온 을소는 돌아갈 때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자손들에게 《나라를 위하려면 탐욕부터 없애야 한다.》라고 부탁을 남기였다.

이 말이 곧 을씨가문의 가훈으로 되였던것이다.

그때부터 을씨가문의 사람들은 어데 가 살든 집에 조상이 남긴 그 부탁을 글로 써붙이고 재물과 권세를 탐내지 않고 정직하게 살기 위해 애써왔다.

을소구는 얼굴이 시뻘개가지고 목청을 돋구었다.

《난 가문의 그 가훈에도 의견이 있소이다. 난 오늘날 그게 정녕 옳은것인지 판단을 바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이다. 내 말을 막지 말고 들어주소이다.

다 아다싶이 우리 가문이 이 고장에 온지도 벌써 몇대째 등뼈가 휘도록 농사를 짓고있지만 부유해지기는커녕 밥술마저 넉넉히 뜨지 못하오이다. 농사에 밝은 맏형님네는 그래도 좀 나은편이오이다. 4촌, 6촌들속에는 봄에 벌써 농량이 떨어지는 집이 허다하오이다. 그보다 참을수 없는건 우리 가문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난한탓에 부자들과 관속들에게 업수임을 당하고있는것이오이다.》

그 말에 을파소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을씨가문에서 을소구를 내놓고 밥술이나 먹는 집은 을파소네뿐이였다.

살림이 어렵다보니 가난하면 그러하듯 관가나 부자들의 수모를 면할수 없고 잡다한 빚독촉에 욕을 보는 집들이 허다했다.

권세와 재물이 없으면 그게 곧 죄인이라 수모를 받는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을소구가 침방울을 튕기며 열변을 토했다.

《재상까지 나온 우리 가문이 왜 이 꼴로 되였소이까. 그게 뉘탓이오이까? 난 우리 집사람들이 부실하다거나 게으르기때문에 이런 고생을 한다면 이다지도 밸이 나지 않겠소이다. 우리보다 잘났다거나 아는것도 없고 이웃에게조차 좋은 일을 해본적 없는것들이 재물덕으로 한자리씩 차지하고 가난뱅이들을 짓밟고있단 말이오이다. 그러니 우리 집안도 무슨 수를 써서 부자도 되고 권세도 잡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 말에 을파소는 한숨을 내뿜었다.

어이하여 세상은 저놈의 말대로 이 꼴이 되였을가.

개국공신의 후손일지라도 재물과 권세가 없으면 부자들에게 괄세를 당해야 하는게 요즘의 세상이다.

권세가 없으면서도 을파소가 밥술이나 뜰수 있은것은 남달리 뛰여나고 사람들속에 신망도 있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을파소만 쓰러지면 그의 자식들도 부자들에게 짓밟힐것은 정해진 리치였다.

을소구는 한숨을 내뿜는 을파소에게 눈을 흘기며 부르짖었다.

《맏형님이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것은 큰 잘못이였소이다. 부모님이 맏형님만은 졸본의 이름난 경당에까지 보내여 문무를 닦게 하였는데 그런데도 맏형님은 굳이 농사군이 되고말았소이다. 그래 이것이 바른 처사라 할수 있소이까?》

을파소는 할말이 없었다.

을파소가 귀족가문임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것은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기때문이였다.

경당을 나온 애젊은 시절 을파소는 태조대왕을 밀어내고 임금이 되여 가혹한 정사를 일삼던 차대왕에 대한 환멸로 벼슬길에 등을 돌려대였다.

그다음 차대왕을 몰아낸 명림답부가 신대왕을 받들어세운 그때에는 나라의 정사가 바로잡혔는데 나같은게 무슨 도움을 주랴 하는 생각으로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명림답부가 돌아가고 정사가 또다시 어지러워지자 이번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당초에 경당에 다니며 문무를 애써 배웠던것이 무엇때문이였던가.

그것은 문무를 닦아가지고 국력을 떨치는데 기여하고싶어서가 아니였던가.

그런데 나라의 정사가 저렇다고 등을 돌려대고 이렇다고 외면했으니 그게 무슨 남아대장부라 하겠는가.

그래서 뒤늦게나마 벼슬에 마음을 두고보니 이게 무슨 꼴인가.

이미 심신이 쇠진해버린 늙은 몸이였다.

한번 지나간 젊음은 다시 되찾을수 없기에 황혼기에 이른 을파소는 후회가 막심하였다.

진작 벼슬길에 나섰더라면 지금쯤은 조정에서 한몫 할수도 있었겠는데…

후회와 더불어 요즘 시국형편에 눈과 귀를 밝히며 나라일에 근심하고있는 을파소였다.

《나라를 위하려면 탐욕부터 없애야 한다는 말은 벼슬길에 나선 사람에게는 맞겠는지 모르겠지만… 벼슬길에 나선 경우 국록이면 그럭저럭 밥술을 먹을것이 아니겠소이까. 까놓고 말해서 사람은 누구나 잘 먹고 잘 입고 잘살려 하오이다. 그래 사람이 잘살려 하는게 잘못이오이까?》

을소구의 말에 을파소는 눈길을 떨구었다.

사실로 말해서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사람이 잘살려 하는건 죄가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잘사는가 하는것이 문제이다. 제 뼈심을 들여 일한 덕으로 잘산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탓하겠는가.

제힘을 바쳐 일하지 않으면서도 권세를 휘두르고 권모술수로써 남의 재물을 빼앗아 호의호식하는자들은 세상의 원망을 사게 된다.

바로 그런자들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생겨나는것이고 인심도 어지러워지는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자들을 가리켜 진짜도적이라고 하는것이다.

탐욕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재물을 탐내는 욕심만이 아니라 남의것을 빼앗아 저만 잘살려고 하는 천하의 못된 심보이다.

그 더러운 탐욕이 도적을 낳는것이기에 천하가 소란스러워지는것이며 그때문에 내란도 일어나는것이다.

그래서 탐욕을 버리라고 조상께서 그런 가훈을 내놓은것이리라.

을파소의 마음을 알리 없는 을소구는 계속 목청을 돋구었다.

《어이하여 맏형님은 부자가 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다는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소이까. 맏형님은 그래 어리석은 가훈이란걸 붙안고 온 집안을 부자들의 종으로 내맡기자는것이 아니오이까?

더 늦기 전에 맏형님은 옳은 결심을 내려야 하오이다. 어리석은 가훈을 뜯어고치지 않다가는 우리 가문이 망할수 있소이다.》

을파소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사람은 누구나 빈손으로 태여났다가 빈손으로 죽기마련이다.

결국 사람은 재물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하여 태여나는것이 아니라 태를 묻은 땅을 살기 좋은 땅으로 가꾸기 위해 태여나는것이 아니랴.

을파소의 속마음을 알리 없는 을소구가 기세를 올리며 뇌까려댔다.

《난 지금 당장 우리 가문의 가훈을 〈남에게 짓밟히지 않으려거든 권세와 재물을 따르라.〉라는 말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오이다.

가난한자는 부자에게 먹히우는것이 세상리치이니 꼭 이렇게 해야 하오이다.》

을파소는 너무도 억이 막혀 을소구를 지켜보기만 하였다.

저놈의 눈은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세상을 먹고 먹히우는것으로만 보는것일가.

을소구의 입에서는 게거품이 부글부글 끓고있었다.

《사실 내가 기를 쓰고 부자가 된것은 다 우리 집안을 위해서였소이다. 재물만 있으면 하치않은 놈도 큰 어른이 될수 있는 세상에서 난 크게 일어나 조정대신의 벼슬을 사자는것이오이다. 내가 조정대신이 되면 어렵게 사는 우리 집안사람들이 그날로 잘살게 될것이오이다.》

그 순간 을파소는 새로운것이 깨달아졌다.

너를 살려두기에는 너무 늦었어. 본래부터 마음보가 삐뚤어진 네놈에게는 안타깝게 일러주는것이 소용없다는걸 내 너무도 몰랐구나. 진작 가시나무로 매를 치고 또 치였더라도 네놈은 사람질을 할수 없었어.

가난한 사람들이 더는 네놈때문에 해를 입지 않게 하려면 가문의 수치일지라도 죽여야 한다. 용단을 내린 을파소가 소리쳤다.

《닥쳐라. 그래도 난 네가 지은 죄를 반성하도록 매나 몇대 치려고 했다만 이제 보니 널 살려두어서는 안되겠다.》

얼굴이 새파래진 을소구가 악의에 차서 씨벌였다.

《그러니 날 죽이겠다 그거요? 어림도 없소이다. 나에게는 가법을 물리칠 힘이 있소이다, 힘이!》

격노한 을파소는 형구곁에 서있는 종들을 가리켰다.

《너희들 듣거라. 악독한 저놈을 묶어다 목을 쳐라.》

종들이 달려와 악담을 퍼붓는 을소구를 결박하여 형틀로 끌고갔다.

을파소의 맏아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아버님, 고정하시오이다. 아버님은 돌아가신 어머님의 유언을 잊으면 안되오이다.》

을파소는 혀를 꽉 깨물었다.

어찌 눈에 흙이 들어간다고 어진 안해의 당부를 잊을수 있단 말인가.

10여년전 오랜 병으로 쓰러진 안해는 운명직전에 을파소의 손을 잡고 막내동생을 잘 돌봐주라는 부탁을 남기였다.

어진 안해에게 있어서 자기의 젖을 먹여키운 을소구는 친아들과도 같은 존재였던것이다.

안해의 유언을 지켜줄수만 있다면…

을파소는 형틀에 묶여있는 을소구를 노려보며 잠시 생각했다.

오늘뿐아니라 단군성왕시기의 법으로 비추어보아도 저놈은 죽어 마땅하다.

그때의 법에 어떻게 되여있더라. 살인자는 즉시 목을 치며 사람을 상하게 한자는 많은 곡식으로 배상시키며 남의 재물을 훔친자는 그 사람의 종으로 만들거나 막대한 돈을 물어야 한다고 되여있지 않는가.

오늘의 법에도 사람을 죽이고 겁탈한자는 참형에 처하라고 하였으니…

이미 내린 령을 절대로 되돌릴수 없노라 속으로 부르짖은 을파소는 소리쳤다.

《탐욕스러운자는 재물로 하여 죽고 권세를 뽐내는자는 권세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하였다. 탐욕스러운 신하가 또 탐욕을 말리려드는 임금에게 반드시 반기를 든다는것은 아낙네들도 아는것이다.

너같은 놈이 조정대신이 된다면 역적이 되여 우로는 임금을 욕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해칠것이다.

내 방금 깨달은것이 있다. 그것은 너같이 탐학무도한 놈은 반드시 가문의 법도와 조상을 짓밟고 반역질을 한다는것이다. 그러니 집안의 화근, 나라의 화근을 어찌 살려둘수 있단 말이냐. 목을 쳐라.》

을파소가 아무리 노했기로서니 설마 친자식과도 같은 동생의 목을 치기야 하랴 하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자리를 차고 일어섰을 때에는 이미 그의 분부가 실행된 뒤였다.

형틀에는 목이 떨어진 시체만이 묶여있었다.

무섭게 두눈을 치뜬 을파소는 웅성대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듣거라. 조상들이 정해놓은 가문의 법에는 나라에 불충하고 집안에 화를 끌어들이는자는 죽이라고 하였다.

오늘 나는 가문의 법대로 장차 나라와 집안에 원쑤가 될 놈의 목을 쳤다. 앞으로도 그가 누구든 저놈처럼 나라에 불충하고 가문에 불효한 자가 또 나오면 서슴없이 목을 치겠으니 그리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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