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회)

 

제 17 장

 

3

 

일제에 의한 주요언론지의 페간으로 하여 리윤재는 1941년에 그리스도신보사 주필로 일하였다.

그리스도신보사 주필실이다. 아침해빛이 동쪽으로 향한 창문들에 환한 빛을 뿌리고있다. 그러나 창유리마다에 방공대책이라고 반지를 오려 ×자로 붙여놓아 환한 유리창이 마치 감옥의 철창처럼 불쾌한 느낌을 준다.

방공호를 파라, 등화관제를 하라, 방공훈련이다 하고 백성들을 달달 볶는 왜놈들의 무모하고 유치한 전쟁광증의 소산이다.

리윤재가 이 방의 주인으로 들어앉은지 벌써 석달이 지났다.

그 석달 남짓한 동안은 리윤재에게 평탄한 나날이 아니였다. 그가 그리스도신보사에 들어오면서 제일먼저 결심한것은 신문의 철자법을 조선어학회의 맞춤법통일안대로 개혁하자는것이였다.

성경식철자법을 완고하게 고집하고있는 그리스도교계, 그중에서도 수십만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하고있는 《그리스도신보》의 철자법을 개혁하는것은 철자법통일선상에서 극히 의의가 큰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리윤재가 단행하려고 결심한 《그리스도신보》의 철자법개혁은 처음부터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물론 《그리스도신보》도 대세의 흐름에 전혀 무관심할수는 없어 총독부의 교과서식철자법이 나오자 그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종전에 고집하던 성경식철자법에서는 일보전진했으나 조선어학회의 맞춤법통일안은 완전히 외면하고있었다.

그것은 완고한 신문사지도부의 철자법에 대한 몰리해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신문의 철자법을 맞춤법통일안대로 개혁하자면 막대한 활자를 새로 주조해야 하며 따라서 큰 비용이 든다는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조선어학회의 맞춤법통일안이 나오자 제일먼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동아일보》가 그것을 시행하는데 6년세월에 7만원의 돈을 들여 포인트식 새 활자를 주조했다는 사실만으로써도 신문의 새 철자법도입의 어려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조차 마지막까지 여러가지 리유로 ㅎ받침은 끝내 도입하지 못하고말았다.

리윤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신문의 철자법개혁만은 양보할수 없었다. 오늘 말과 글의 통일은 민족의 얼을 지키는 길임을 력설했고 사내에서 맞춤법통일안강의를 거듭했다. 우리 글에 대한 그의 불같은 사랑과 철자법통일에 바치는 그의 헌신적노력과 사심없는 그의 인품은 완고한 사람들조차 그를 존경하지 않을수 없게 했다. 편집부 국장 허월을 비롯한 혁신적인 청년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철자법개혁이 소극적으로나마 진행되였다.

그리하여 리윤재가 취임한지 석달이 지난 오늘에는 신문에서 된시웃(ㅅㄱ, ㅅㄷ따위)이 우선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만 해도 신문의 면모를 다르게 하는 일보전진이였고 앞으로 신문의 철자법을 전면 개혁할수 있는 토대로 되였다.

장애는 그뿐이 아니였다. 리윤재는 어제 총독부 도서과에 불리워갔었다. 도서과장 쓰쓰이는 제비꼬리같은 코수염을 빈약하게 기른 장년이였는데 관료풍이 머리끝까지 밴듯 한 인물이였다. 그는 흰 무명솜두루마기를 투박하게 입은 리윤재를 아니꼬운듯 쏘아보며 첫마디부터 위협적이였다.

《당신은 <그리스도신보>를 회색지로 만들자는게 아니요?》

리윤재는 무슨 소리냐는듯 그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쓰쓰이는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총독부의 시정방침은 철두철미 <국체명징>과 <내선일체>요. <천황>페하를 높이 받들어모시고 <대동아공영권>을 수립하기 위한 성전에 황공하옵게도 <천황>페하의 적자로서 반도인도 동참해야 하오. 이 방침을 떠난 어떤 언론도 우리는 허용하지 않소.》

리윤재는 누구에게나 겸손한 사람이였지만 자기의 운명을 아무때나 좌지우지할수 있는 이 총독부관리앞에서는 조금도 겸손하지 않았다.

《우리 신문이 총독부 시정방침에 어긋나는 글을 실은게 있다면 지적해주시오.》

쓰쓰이는 위협에도 수그러들지 않는 리윤재를 아니꼬운듯 가시돋힌 눈으로 쏘아보며 부르짖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신보>에서 <내선일체>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본 일이 없소. 오늘 신궁참배는 <내선일체>의 구체적인 표현이요. 이것을 그리스도교인들이 가장 완강하게 거부하고있는데도 당신네 신문은 이 점에서 총독부에 협조하려는 글 한건 실은 일이 없소.》

이것은 사실이였다. 사실에 대해서야 변명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수도 없었다. 이 무지막지한 파시스트분자에게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것도 그는 잘 알고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잘못을 고치겠다고 용서를 빌지 않는 이 불손한 조선인을 보고 쓰쓰이는 화가 치밀었다. 그는 책상을 손바닥으로 치며 소리쳤다.

《전쟁이요. 비상시국이요. 이 시국에 순응하지 않는건 무엇이든 우리는 문질러버릴것이요. 알겠소?》

이 무서운 위협에도 리윤재는 끝내 침묵으로 저항하며 쓰쓰이의 방에서 나와버렸다.

이튿날 아침에 신문사에 나와서도 그는 쓰쓰이의 위협을 되새기고있었다. 그자의 말대로 한다면 신문을 어용화할수밖에 없고 현재처럼 계속 버틴다면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처럼 강제페간당할수 있다. 그럴바에야 자기가 신문사에서 떠나는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진퇴량난의 궁지에 빠져 생각을 곱씹고있는데 허월이 신문편성안을 가지고 들어왔다.

리윤재는 신문편성안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종교에 관한 기사가 훨씬 줄어들고 대중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기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아져서 대중계몽지로서의 체격이 차차 갖추어져가고있음이 첫눈에 알렸다.

이윽고 허월이 물었다.

《어제 도서과에 가셨다가 무슨 지적이라도 받았습니까?》

리윤재는 그제서야 편성안에서 고개를 들고 어이없다는듯이 말했다.

《쓰쓰이라는자가 <그리스도신보>를 어용신문으로 만들 잡도리를 하고있더군.》

자초지종을 듣고난 허월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쓰쓰이의 위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있었기때문이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그가 불쑥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부득이 위장하는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약한 짐승이 환경에 따라 털빛을 바꾼다고 해서 다른 짐승으로 바뀌는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말에 리윤재의 침울한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어리였다.

《허군, 안국동교회 목사 김우현이 보내온 글을 아직도 가지고있소? 제목이 뭐드라? 오라, <신궁참배와 우리의 신앙>이지?》

《예, 하도 너절한 글이여서 휴지통에 처넣을가 하다가 그냥 두었는데 어디 처박혀있을겁니다.》

《됐소. 그걸 위장용으로 씁시다. 그 글에서 앞머리를 떼고 뒤부분을 깎아버리면 죽도 밥도 아닌 글이 되고마오. 아무리 왜놈이 취모멱자(털을 불어 흠집을 찾아낸다는 뜻)하기 좋아하기로 이런 글의 마술을 어떻게 알아차리겠소.》

리윤재가 크고 실한 이를 드러내고 웃는 바람에 허월도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편성안에 더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별로 없소. 그런데 오늘 새벽에 왜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불의공격한 사건은 왜 기사로 싣지 않았소? 시사신문은 아니지만 이런걸 놓쳐서는 안될것 같군. 선전포고도 없는 강도적인 전쟁이라는것을 시사할수 있지 않을가?》

사실 그러했다. 오늘 즉 12월 8일 새벽에 야마모도 이소로꾸가 지휘하는 일본련합함대가 진주만에 정박중인 미태평양함대를 선전포고도 없이 불의에 기습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가장 강도적이고 야수적인 방법으로 인류사상 최대의 세계대전에 뛰여들었던것이다.

허월이 새로운 정보를 이야기할 때 언제나 그렇듯이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죽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이 진주만사건이 있기 전에 주미일본대사 노무라가 워싱톤에서 미국측과 끈질긴 교섭을 벌렸다고 합니다. 중국본토점령에 대한 일본의 권리와 정당성을 인정하라, 동남아시아에 손을 뻗치려는 일본에 장애를 조성하지 말라, 미국은 어째서 일본에 대한 석유와 철강류의 수출을 중단하는가, 그것을 원상회복하라, 노무라가 내놓은 일본정부의 요구는 이러한것이였습니다. 일본의 이런 독선적인 요구를 미국대통령 루즈벨트가 일축해버렸답니다. 미국이 무엇때문에 제 바지를 벗어 남에게 입혀주겠습니까. 그러자 갓 수상이 된 도죠가 그놈의 장기인 면도칼을 들고 (도죠의 별명이 <가미소리> 즉 면도칼이다.) 강도질에 나선겁니다.》

《싸우라지. 실컷 싸우다가 망하라지. 이번 전쟁은 왜놈에게 있어서 자살행위요. 이건 틀림없소.》 하고 리윤재가 속대사를 털어놓았다.

쾌활하던 허월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이런 사건에 대한 평가도 견해도 허용하지 않는 이런 신문이 무슨 여론의 공기입니까. 여론부재사회처럼 암담하고 비참한건 없을것 같습니다.》

리윤재도 과연 그렇다고 생각했다. 지금 지독한 사전검열로 신문의 허울은 있으나 사회여론은 없다. 신문은 사전검열과는 눈치놀음을 하고 독자와는 숨박곡질을 한다. 이게 무슨 신문인가! 군국주의가 온 나라를 누런색으로 물들인 조건에서 국민의 지향을 반영하는 여론은 있어서 안되였다. 사회에서 옳고그름을 가르는 여론이 없으니 류언비어만이 횡행했다.

모든것이 비밀로 숨겨져있는 세상에서 사실이건 거짓이건 새여나온 비밀은 날개가 돋친듯 퍼졌다. 말세의 조짐이다.

리윤재는 방에서 나가는 허월을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책상 한구석에 무드기 쌓여있는 원고를 끄당겨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문기척소리도 없이 출입문이 배시시 열리고 얼굴만 나타나 두리번거리더니 《아, 계셨군요. 주필선생, 안녕하십니까?》 하고 한 사나이가 반색을 하며 방안에 들어섰다. 안국동교회 목사 김우현이였다.

리윤재는 반갑지 않은 손이였지만 응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김우현은 이마가 훌렁 벗겨진 큰 대머리에 비해서는 너무도 하관이 빨라 어딘지 경망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목소리는 듣기 좋은 고음이고 말도 노래하듯 한다.

《전쟁이 또 일어났다지요?》 하고 그가 물었다. 그리고 그 대답도 스스로 했다.

《나라간의 관계도 꼭 아이놀음 같아서 쩍하면 전쟁이군요. 허나 어쨌든 일본이 이겨야 할텐데. 우리는 어차피 일본에 붙어살기마련이니까요.》

《어째서?》 하고 불쑥 나가려는 물음을 그는 꿀꺽 삼켜버렸다. 친일목사로서 안국동교회의 울타리를 따라 사꾸라를 심은것도 김우현이였고 경찰이 신궁참배를 거부하는 교인들을 수다히 검거할 때 동료목사들을 밀고한것도 그라는것을 알고있었기때문이다.

그런데 김우현이 무엇을 바라서 이런 친일주구로 되였을가 하고 리윤재는 생각했다. 권력에 대한 굴종이다. 그는 힘을 휘두르는자에게는 누구에게나 굴종을 했다. 왜놈들은 말할것도 없고 교회신자들가운데서도 세력있고 돈이 있는자에게는 아첨을 했다.

이런 박쥐같은 인간을 상대로 시간을 허비하는것이 아까와 그는 자르듯이 말했다.

《김목사의 글은 편집국에 넘어갔으니 일간 나갈겁니다. 지면상관계로 다소 줄였으니 미리 량해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부러 찾아오신 용건은 무엇인지?》

김우현이 얼굴에 희색을 띠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지면상관계로 줄이는거야 불가피하지요. 내가 찾아온건 오는 주일에 우리 교회에서 <황군>을 위한 기도회를 가지겠는데 취재할 기자를 보내주실수 없겠습니까?》

《지금 신문사의 일손이 모자라 딱히 약속은 못하겠는데 그 기도회는 상부의 지시로 합니까?》

김우현은 무슨 소리냐는듯 도리여 리윤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거야 국민의 응당한 도리지요.》

(뭐, 국민의 도리?)

리윤재는 치밀어오르는 격분을 누를수가 없었다. 그는 김우현을 거의 쫓다싶이 내보내고는 분이 삭지 않아 《개같은 놈, 박쥐같은 놈!》 하고 혼자 욕설을 퍼부으며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게 그놈의 진심인가, 가식인가 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따져보았지만 알길이 없었다. 이런 인간이 계속 나오는 세상이 통탄스럽기만 했다.

그는 오후에도 달달 볶이우듯이 바쁘게 지냈다. 찾아오는 손님을 만나야지, 신문교정지를 첫 글자부터 마지막글자까지 읽어야지, 그리고도 창이 어두워질 때까지 원고를 다 읽지 못하여 집에 가지고 가서 마저 읽으려고 원고뭉치를 책보에 주섬주섬 싸는데 뜻밖에도 신명균이 찾아왔다. 그는 요즘 어학회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아 정말 오래간만에 만난것이다.

그는 덤덤히 앉았다가 부시시 일어서며 한마디 했을뿐이다.

《환산, 옛친구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싶어 들렸을뿐이요. 그럼 난 가겠소.》

어딘지 이상했다. 가난은 해도 옷차림만은 단정히 하던 그가 구겨진 두루마기를 후줄근하게 걸치고있었다.

《같이 갑시다. 나도 퇴근하려던 참이요.》 하고 리윤재는 원고보따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그를 따라나섰다.

밖은 이미 어두웠고 맵짠 바람이 불었다. 둘은 이런 추운 겨울에도 목도리, 장갑, 귀걸이 같은 방한구를 쓰지 않는것이 신통히도 비슷했다. 그것은 비단 가난때문만은 아닌것 같았다. 모든 역경에 엇서는 심리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둘은 한참 묵묵히 걸어갔다. 종로거리에 나서니 여기는 딴세상이다. 전쟁도 추운 날씨도 아랑곳없이 대낮같이 불을 켠 야시장은 《싸구려》소리와 붐비는 사람들로 법석을 이루고있었다. 모든것이 궁핍한 세월에 돈만 있으면 여기서 못 구할것이 없다. 여기에 어린 학생들을 울리는 운동화도 있지만 그 비싼 《야미》값에 어머니들은 한숨만 쉰다. 정상적인 생계유지를 파탄시키는 《야미》시장의 풍성함과 물가고는 전쟁이 몰아온 물자고갈의 리면을 보여주는것 같다.

《어서 갑시다.》 하고 신명균이 이 허세같은 소란속에서 빨리 빠져나가고싶은듯 걸음을 재촉했다.

종로3정목 단성사앞에 나오니 귀가 메게 《미영격멸!》을 웨치는 노래가 들려왔다. 단성사의 외등에 비친 커다란 포스터에도 《미영격멸!》이라고 씌여있다. 어디서나 미영격멸로 부글부글 끓는것 같다.

단성사앞 중국료리집 동양루앞에서 리윤재는 걸음을 멈추었다.

《저녁이나 한끼 나누고 갑시다.》

리윤재가 5전짜리 호떡 하나 사먹을 돈이 없어 흔히 점심을 굶군 한다는것을 잘 아는 신명균이 도리여 놀라운듯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오늘 월급을 탔소. 하루야 부자지.》 하고 리윤재가 주저하는 신명균의 팔을 잡아끌었다.

급사가 그들을 2층의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짜장면 한그릇씩 하고 한홉들이 빼주병을 날라왔다. 신명균이 술병을 들자 리윤재는 자기앞의 술잔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내 강권하지는 않겠소.》 하고 신명균이 혼자 마시기 시작했다. 목을 태울듯 한 독한 술을 석잔 거퍼 들자 취기가 돌면서 그의 입에서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다.

《환산, 세상이 어째 이 모양이요. 온 세계가 전쟁으로 미쳐날뛰니 성한 사람도 미칠 지경이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큰 놈들 싸움에 불쌍한 조선이 애꿎게도 숨막혀 죽을것 같소. 이 전쟁에서 왜놈이 망한다 해도 어느 놈을 믿겠소. 미국을 하느님처럼 믿는 사람들을 나는 우습게 여기오. 포츠머스강화조약으로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떠맡긴게 사실은 미국이였소. 조선은 불행한 나라요. 일본, 중국, 아라사(로씨야)강대국사이에 끼여 렬강들의 각축전의 마당으로 된게 어찌 이 나라의 력사에 그치겠소. 이 세계대전자체가 렬강들의 세력권확장을 위한 개싸움이 아니요? 이 개싸움에서 어부지리를 보자는 사람이 어리석소. 남을 위해서 피를 흘리는 나라가 어디 있소. 왜놈은 명치유신후 거의 한세기동안 침략과 전쟁으로 손에 피칠갑을 하며 조선을 먹고 만주를 삼키고 중국대륙을 타고앉으면서도 <대동아공영권>을 위하여, 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성전을 한다고 떠들고있소. 그런데 일본이 쉽게 망할가?》

연거퍼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신명균은 좀 취한듯 말이 길어졌다. 리윤재는 묵묵히 듣고있었다.

《일본이 망하기 전에 말도 성도 빼앗긴 조선사람은 산송장이 될거요.

미나미가 뭐랬소. 과거에 불온한 독립운동을 해온자, 총독부에 협력을 거부해온자, 지방에서 명망이 높은자, 그들에겐 총독부시책에 무조건 협력하겠다는 서약서를 받으라, 서약서를 망설이는 놈들을 무조건 검거하라. … 그래서 올해 2월에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이 공포되고 이어서 <개정치안유지법>이란 아직 세계력사가 모르는 무시무시한 악법이 나왔소. 이 중세기도 무색케 할 조선땅에서는 숨쉴 자리도 없소. 우리야 이미 감옥에 한다리를 들여놓고있는셈이지. 나는 다가오는 위기를 시시각각으로 느끼오. 그런데 환산은 이 소름끼치는 현실을 락관할수 있소? 환산의 락천성이 부럽지만 나는 그렇게 안되는구려.》

리윤재는 드디여 한마디 했다.

《락천성이란 래일에 대한 믿음인데 그것이 없이야 이 지옥에서 어떻게 단 하루인들 살아갈수 있겠소. 오늘을 견디지 못하면 래일도 우리에게 미소를 던지지 않을거요. 순간을 잘 참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요. 이것은 발자끄의 말인데 어느 성현의 말보다도 의미심장한 말이요.》

그때 고개를 수굿하고있던 신명균이 창백한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쳐들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늘은 내 어머니의 고희(70살을 말함)날이요. 그런데 이 불효자식은 어머니에게 상 하나 차려드리지 못했소. 나는 이 가난이 지긋지긋하고 더는 참기가 어렵소.》

극한에 이른 생활이 그의 생각을 극단에로 이끌어가고있음을 리윤재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잠자코 조끼주머니에 손을 넣어 월급봉투를 꺼내여 신명균앞에 밀어놓으며 말했다.

《약소하지만 이걸로 소박한 상이라도 차려드립시다. 고희잔치야 미룰수도 있지 않소. 나도 가서 자당에게 약주 한잔 따라올리겠소.》

《차라리 등에 무거운 짐을 졌으면 졌지 이런 마음의 부담을 나는 더욱 견디지 못하오.》 하고 신명균이 벌떡 일어섰다.

밖에 나오니 칠흑같이 어두웠다. 새파랗게 얼었던 별조차 검은구름에 덮여버린것이다. 헐벗은 가로수가 구차한 삶을 푸념하듯 울부짖는것 같다. 모든것이 궁핍한 세상에서 밤에 늘어가는것은 술취한 사람들뿐이다.

둘은 동대문까지 말 한마디 없이 걸어갔다. 여기서 하나는 신설동으로, 하나는 기동차정거장으로 헤여져가야 했다. 헤여질 때 리윤재는 신명균의 손을 잡으며 그의 손에 말없이 월급봉투를 쥐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잠시 가다가 돌아보니 신명균이 그 자리에 그냥 굳어진듯 서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리윤재가 신문사에 출근해서야 신명균이 어제 밤에 자택에서 자결했다는 기별을 받았다. 신명균은 죽음으로써 왜적과 치욕스러운 세상에 항거했다. 너무도 외로운 항거였다. 그런데 어째서 자기는 그 외로운 마음에 힘을 주고 의지할데를 일깨워주지 못했는가! 구원의 손길이 지척에 있지 않았는가. 이렇게 리윤재는 마음속에 비분을 끓이며 자기자신을 아프게 매질하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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