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 회)

 

제 17 장

 

2

 

한글날기념식이 경찰에 의하여 류산된것은 리극로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 조국광복회지하조직이 움직여 마비상태에 빠졌던 어학회가 다시 활동을 개시하려 하자마자 센 타격을 받고 다시 주저앉고만것이다. 생각할수록 불쾌하고 맥이 풀리였다.

어제의 일을 통하여 리극로는 두가지 사실을 똑똑히 깨달았다. 하나는 어학회에 대한 경찰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강화되였다는것이고 또 하나는 어학회의 일부 회원들이 경찰의 탄압에 겁을 먹고 어학회에서 리탈하려는 경향을 나타낸것이다.

이 상태에서 어학회를 어떻게 끌고간단 말인가?

사전편찬원들이 다 돌아간 휑뎅그렁한 방에 혼자 남아서 리극로는 점도록 마음을 썩이고있었다.

해가 지려 하니 벌써 가을저녁의 선기가 오싹 느껴진다. 그도 돌아가려고 책상우의 원고들을 주섬주섬 거두는데 난데없이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극로는 얼른 일어서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앞에는 뜻밖에도 최형우가 빙그레 웃으며 서있었다.

《고루선생, 안녕하십니까.》

《아니, 이게 누구요! 최선생이 어떻게 이렇게… 아, 반갑습니다.》

둘은 만 4년만에 이렇게 다정하게 만났다.

최형우는 카드함이 놓여있는 긴 탁자앞에 앉더니 방안을 휘둘러보며 말했다.

《사전편찬을 계속해가시는군요.》

《어렵게 해가지요.》

그리고 리극로는 최근에 어학회에서 벌어진 일들을 대충 이야기했다.

신중히 듣고있던 최형우가 말을 받았다.

《어학회에 조국광복회지하조직이 생겼다는것은 장군님께서도 이미 알고계십니다. 그래서 이번에 또다시 조직에서는 나를 고루선생에게 파견했습니다.》

그 말에 리극로는 그동안 피로하고 불쾌했던 모든것이 씻은듯이 가시는것 같았다. 장군님께서 여전히 어학회를 잊지 않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그에게 무한한 힘을 주는것이였다.

최형우는 이야기를 하려다말고 이 방이 안전하냐고 묻듯 주위를 둘러보는것이였다.

《념려마십시오. 이 방주위는 다 비여있고 밖에서 누가 들어올려면 계단이 삐걱삐걱하며 알려준답니다.》 하고 리극로가 웃으니 최형우도 마음이 놓이는듯 웃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최형우가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지난해 8월 10일에 만주 돈화현 소할바령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김일성장군님께서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준비있게 맞이할데 대하여>라는 중대한 보고를 하셨습니다.》

그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고 벌써 상기한 리극로의 얼굴을 일별하고 말을 이었다.

장군님께서는 이 보고에서 우선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된 후 지난 10년간의 투쟁로정을 긍지높이 총화하시고 현정세를 분석하시였습니다. 유럽에서는 나치스도이췰란드와 파쑈이딸리아에 의하여 새 세계대전이 급격히 확대되고있으며 아시아에서는 일제가 침략전쟁을 계속 확대하면서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토벌>을 전례없이 강화하고있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현정세가 우리 혁명에 결정적으로 유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제는 전선이 확대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는데 따라 늘어나는 병력과 군수물자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중일전쟁을 끝내지 못한채 동남아시아로 전쟁을 확대하여 그 지역에 식민지와 리권을 가지고있는 영프세력과의 충돌을 피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전쟁을 이렇게 발광적으로 확대한 일제는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헤여날수 없는 구렁텅이에 깊숙이 빠져들어가고있으며 자신의 멸망을 스스로 초래하고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일제의 멸망의 불가피성을 론증하시고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전략적과업을 제시하시였습니다.

이 준비사업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조선혁명의 중추력량인 조선인민혁명군의 력량을 보존축적하면서 그들을 유능한 정치군사간부로 육성하는것이라고 가르치시였습니다.

이 전략적과업을 성과적으로 집행하기 위하여 대부대작전으로부터 소부대작전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군님의 보고의 간단한 요지는 이렇습니다.》

최형우는 긴 이야기를 체계정연하게 했다. 리극로는 감격해서 말했다.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들먹입니다. 왜적의 극단적인 발악으로 해빛 한점 들수 없는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 장군님의 그 말씀은 희망의 서광과 같은것입니다. 아, 최선생이 장군님의 그 고귀한 말씀을 전해주려고 그 먼길을 위험을 무릅쓰고 오셨군요.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장군님의 전사의 의무입니다. 고루선생은 소할바령회의 보고내용을 우선 어학회의 조국광복회 회원들에게 알리고 믿을만한 사람들에게 널리 이야기해주십시오. 왜놈들이 망하고 우리 나라가 독립된다는거야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일테니까요. 그럼 이젠 고루선생의 이야기를 좀 듣겠습니다.》

《녜.》 하고 리극로는 지난 4년간을 돌이켜보며 생각을 가다듬는듯 잠시 눈을 디룩거리며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어학회에 조국광복회지하조직이 생긴 후 너는 무엇을 했느냐 하고 따져보면 거머쥘건 별로 없지만 하는 일은 이전과는 판이해졌습니다.

어학회의 자매기관으로 1935년에 조직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은 돈있는 사람들의 관혼상제에 쓰는 돈을 절약하고 모아서 뜻있는 책을 출판하자고 해서 안재홍, 려운형제씨의 발기로 생긴 기관인데 별로 하는 일이 없던 이 기관을 반일적이고 량심적인 책의 출판을 적극적으로 하도록 한건 우리입니다. 지난해에는 <조선문자급 어학사>와 같은 방대한 책을 출판했습니다.

1937년에는 조선연무관을 재조직하고 조선씨름협회를 새로 내왔습니다.

우리 나라의 민속경기를 연구체계화할것을 표방하면서 실은 청장년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단련하여 일단 유사시에 반일봉기에 준비시키자는것입니다.

조선연무관의 노래를 내가 지었는데 그 한절이 이렇습니다.

 

백두산 어화어화 김대장산아

푸르른 청년전위 모두 모였네

차려라 정신차려 반일의 길에

우리를 밀어주는 백두산의 얼》

 

최형우가 얼굴에 홍조를 띠고 말했다.

《훌륭하군요. 그 가사 한구절을 듣고도 고루선생의 진심이 알립니다. 난 고루선생이 어학자인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기가 막힌 시인이군요.》

《왜놈의 압박에 저항하지 않을수 없는 이 세상에서는 시인의 격정이 일어나지 않을수 없지요.

나는 그런 반항의 격정을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마다에 불러일으키려는겁니다. 그래서 나는 <양사원>을 꾸리기로 했습니다. 정세권씨에게서 집 한채를 희사받고 리우식씨에게서 수백석지기의 땅을 얻어 이것을 밑천으로 유능하면서도 돈이 없는 젊은 학자들이 학문에 전심할수 있게 하자는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실현하는데로 이끌어가자는겁니다.》

리극로의 긴 이야기를 신중히 들은 최형우는 감동하여 말했다.

《고루선생이 하신 일의 어느 하나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군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매우 기뻐하실겁니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끝났다. 한참 입을 다물고있던 리극로가 불쑥 물었다.

《요즘 단심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이번에 만나보지 못했습니까?》

《나도 못 만났습니다. 그는 지금 어떤 산 절에 깊숙이 들어가 중들과 사업을 하고있을겁니다. 신변이 위험해졌으니까요.》

《신변의 위험이라니요?》 하고 리극로가 놀라서 물었다.

《<혜산사건>이라는게 벌어져 왜경이 장백일대의 조국광복회지하조직을 파괴하고 수많은 혁명가들을 체포처형했습니다. 그후 그 불똥이 서간도로 튀여갔고 갑산에까지 번졌습니다. 장군님의 령활한 방략으로 적지 않은 혁명조직들이 구원되였지만 왜경은 조국광복회지하조직에 대한 수사를 계속 확대해가고있으며 그 불똥이 서울에도 떨어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서울시내에 수많은 조국광복회지하조직을 꾸려놓은 최기봉동지의 신변이 위험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직은 그에게 당분간 입산하여 잠복할것을 지시했습니다.》

《네, 그래요. 부디 무사해야겠는데. 단심조차 없으니 우리 조직은 고아처럼 외롭답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는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가방에서 크지 않은 꾸레미를 꺼내여 리극로앞에 놓으며 말을 이었다.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이건 김일성장군님께서 직접 편집하신 <농우>잡지묶음과 내가 짬짬이 장군님의 혁명활동에 대하여 쓴 원고인데 좀 맡아주십시오. 경계가 삼엄한 오늘 경찰의 추적을 받으며 다니는 나로서는 건사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담에 찾으러 오겠지만 만일 못 오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세상에 내놓아주십시오.》

《그러지요.》 하고 리극로는 인찰지에 깨알같은 글씨로 쓴 원고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최형우를 쳐다보았다. 이야기할 때는 몰랐는데 그의 얼굴이 몹시 피곤해보였다.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하고 오돌진 그의 얼굴이 피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늘 위험한 길을 걸어 그런지 언제나 예리한 빛을 뿌리던 눈에 힘이 없었다.

《어디 편찮은게 아닙니까? 우리 집에 가서 좀 쉬시지요.》

《고맙습니다. 그러나 내겐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이미 창밖이 어두워졌다. 쥐죽은듯 고요한 방에 불도 안 켜고 한참 묵묵히 앉아있던 둘은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면서 헤여졌다.

그러나 그후 최형우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리극로는 다락방 천정밑에 깊숙이 감추어두었던 원고를 꺼내여 읽어보았다. 그것은 김일성장군님의 초기혁명활동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담긴 글이였다. 그는 이 글을 통하여 김일성장군님에 대하여 더욱 똑똑히 알게 되였고 그이를 따르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그때의 약속대로 최형우는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조국이 해방된 후 출판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초기혁명활동을 고증하는데서 귀중한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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