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 회)

 

제 12 장

 

1

 

날이 어두워지니 공원밖이 도리여 소란해지는 반면에 공원안은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탑골공원은 텅 비여 불 한점 없고 인적 하나 없다. 우중충한 탑과 전각과 종각과 나무들이 어두운 하늘을 떠이고 괴물처럼 서있을뿐이다. 이렇게 공원이 으쓸하다나니 남의 눈을 피하는 남녀의 밀회장소로도 되지 않는것 같다.

그런데 거부기비석옆의 으슥한 긴걸상에 한 사나이가 점도록 혼자 앉아있었다. 거부기비석은 이름뿐이고 거부기등우에 세워있던 비석은 그 비문을 조선사람이 읽어서는 안된다 하여 왜놈들이 자빠뜨리고 지금은 거부기만 뎅그러니 남아있다. 사나이는 어둠속에서 그 돌거부기처럼 무겁게 앉아있었다.

이윽고 키가 훤칠한 사나이가 어둠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돌처럼 무겁게 앉아있던 중키의 사나이가 벌떡 일어섰다.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경찰이 나타날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경계하던 둘은 곧 알아보았다.

《기봉이 아닌가?》

《아, 형우!》

둘은 안도의 숨을 쉬며 서로 손을 으스러지게 잡았다.

《기봉이, 오래 기다렸나?》

《두해동안이나.》

《하하하, 여기서 나를 기다리는 몇분사이에도 가슴이 바질바질 탔겠는데 두해동안이면 가슴이 온통 재로 덮였겠네.》

《암중모색의 나날이였지. <동아일보 장춘지국장 상경>이라는 신문기사를 춘향이 한양 간 리도령소식 기다리듯 했구먼.》

남의 눈을 피하는 그들의 상봉이였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일상다반사에 그치는것이였다.

《고생했네. 그런데 그때 안도에서 데려온 부인은 무고한가?》

《한동안 녕변에 계신 어머니에게 맡겨두었다가 올해초에 서울로 데려왔네. 어머니는 당장 집을 떠날수 없어 아직 녕변에 계시는데 일간 모셔오겠네. 》

《파란많은 자네 가정도 이제는 안착돼야겠는데. 아버지의 낯도 모르고 자란 아들도 이제는 서너살이 되겠지. …》

형우가 불쑥 말을 끊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저벅저벅 발걸음소리가 들렸던것이다. 형우가 소곤거렸다.

《밤에는 이런데가 더 위험하네. 경찰의 주목을 끌수 있거던. 빨리 나가세. 》

둘은 공원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종로야시장은 이 시각이 한창이다. 대낮같이 밝힌 무수한 등불아래 서울바닥의 로점상이란 로점상은 다 모여앉은것 같다. 하루밤을 위하여 번개같이 꾸린 각양각색의 가설매대들이 종로1정목에서 3정목까지 잇닿아있다. 상품이 범람하고 사람이 홍수를 이룬다. 전통적인 종로야시장에도 어느덧 《오뎅》, 《뎀뿌라》, 《우동》이라고 써붙인 풍을 드리운 큼직한 밀차가 끼여들어 외풍이 자리를 잡았다.

둘은 인파를 헤치고 걸어갔다. 최형우는 날아갈듯 한 신사복차림이였고 최기봉은 조선옷차림에 빡빡 깎은 머리를 감추려는듯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있었다. 종로3정목 네거리에 이른 그들은 단성사앞에 있는 중국료리집 동양루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일없을가?》 하고 최기봉이 주저했다.

《등잔불밑이 어둡다고 이런 번화한데가 도리여 안전해.》 하고 최형우가 떠들썩한 료리집으로 들어갔다.

《장쾌.》 하고 그가 손벽을 쳐서 부르자 중국인급사가 얼른 달려와서 갑삭거리며 절을 했다.

《조용한 방이 있는가?》

《예, 있습니다. 자, 이리로…》

그리하여 둘은 2층의 조용한 방으로 안내되였다. 문을 꽉 닫으니 바깥의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탕수욕, 스이교즈 같은 구미가 동하는 료리와 빼주를 차려놓고도 둘은 한동안 저를 들념도 않고 덤덤히 앉아있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중대한 이야기가 가슴속에 서리는듯 서뿔리 입도 열지 않았다. 이윽고 최기봉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가 이렇게 갑자기 나온것을 보면 무슨 중대소식을 가지고 나온것 같은데…》

《옳네.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조직선을 따라 국내에 있는 동지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전달할 과업을 받고 나왔다네.》하고 최형우도 나직이 대답했다.

최기봉은 긴장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래동안 목마르게 기다렸던가. 온갖 정황에서 혼자 걸어가야 하는 적구에서는 그이의 가르침을 떠나서는 어두운 밤 등불없이 길을 걷는듯 했던것이다.

최형우가 말을 이었다.

《지난 5월에 무송현 동강에서 열린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에서는 남호두회의의 결정을 구현하여 드디여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를 창립했네.》

그리고 그는 조끼단추를 끄르고 와이샤쯔안에 깊숙이 손을 넣어 두둠한 봉투 하나를 꺼내여 최기봉에게 주며 말을 이었다.

《이안에 조국광복회강령규약과 창립선언이 들어있네. 그리고 장군님께서 천명하신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서 지켜야 할 행동준칙을 자세히 적혀져있네. 보면 알거네.

단지 강조할것은 조국광복회의 범민족적인 성격을 잊어서는 안된다는거야. 반일구국항쟁에 모든 반일력량을 집결시키는것이 조국광복회의 리념이네. 여기서는 민족주의자도, 반일적인 민족자본가도 례외로 될수 없네. 특히 오늘 우리 나라에서 민족주의자와의 통일전선은 필수불가결의 조건이야. 장군님께서 자네를 서울에 파견하신것도 이미 그때부터 서울의 민족주의자, 지식인과의 통일전선활동을 념두에 두셨던 거네.》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 관한 김일성장군님의 사상을 직접 전달받은 최기봉은 몹시 흥분했다. 간난신고를 다한 두해동안을 되새겨보듯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동안 나는 곧추 갈 지름길을 멀리 에둘러간것 같군. 이젠 됐네. 그동안 조직에 결속할 절의 중들도, 성대 법문학부와 예과의 학생들도 조국광복회조직에 망라시키겠네. 조선어학회에는 아예 들어앉을 생각이야. 어학회의 민족주의학자들속에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리기 위해 어학회의 심부름군노릇이라도 할 결심이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과의 사업이 실지는 조련치 않을거네. 지난 시기 민족의식이 없이 행동한 <공산주의자>에 대한 불감이 그들에게 굳어져있으니까.》

《물방울도 오랜 세월이면 바위를 뚫는다고 하지 않나.》

《자네의 철석같은 의지에 나는 감탄할뿐이야. 그래, 이젠 아예 환속했나?》

《환속이고 뭐고 있나. 이제라도 목에 념주를 걸고 손에 목탁을 들고 바랑만 지면 여전히 동냥중이지. 필요하다면 다시 동냥중이 되여 김삿갓처럼 팔도를 떠돌아다닐판이지. 왜놈경찰이 아직 이 동냥중의 정체를 모르니 다행이 아닌가.

이 최기봉이 결코 잡히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동냥중노릇을 하면서라도 서울에 조국광복회조직망을 뻐젓이 꾸려놓겠네.》

최형우가 생각이 깊어지는듯 한 표정을 하고 말을 이었다.

《자네 아까 어학회에 들어앉겠다고 말했지. 그렇네, 어학회는 우리의 주요활동대상이네. 오늘 어학회만큼 반일에서 철저하고 투쟁목표가 명확한 민족주의단체는 없네. 그래서 사회적인 지지성원을 받고있지. 어학회학자들의 활동을 적극 떠밀어주고 왜적의 혹심한 탄압에 좌절되지 않도록 신심과 용기를 주어야 하네. 그들의 학술활동이 민족주의자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거던. 그들의 학술활동이 학술에만 그치는게 아니라 민족을 지키는 싸움의 일익을 담당하고있기때문이지.

어학회를 전취하자면 누구보다도 먼저 리극로박사와 손잡아야 하네. 그는 견식이 넓고 사상이 매우 진취적이여서 우리와 능히 손잡을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네.》

《이번에 자네는 리박사를 만나지 않겠나?》

《만나겠네. 만나서 조국광복회에로 부르시는 장군님의 말씀을 전달하겠네.》

할말을 다 했는지 둘은 잠시 침묵했다. 그제서야 최형우는 생각난듯 술병을 들어 두잔에 술을 따랐다.

둘은 소리나게 잔을 찧었다. 그리고 헤여졌다. 이 짧은 상봉을 위하여 최형우는 수천리의 길을 오며 온갖 위험을 무릅써야 했고 최기봉은 우글거리는 적들속에서 그동안 간난신고하며 꾸린 조직들도 꾸리고 투쟁의 활무대를 넓혀나갔던것이다.

그러나 그 상봉의 보람은 컸다. 최형우는 동강에서 싹튼 혁명의 씨앗을 다른데도 아닌 서울에다 심어놓았고 최기봉은 조국광복회조직건설과 전민항쟁로선의 방향타를 잡고 망망대해에 새 출발을 하게 된것이다.

나라가 해방되는 날 그들이 다시 만나서 이날의 상봉에 대하여 회포를 나눌수 있겠는지 모르지만 바로 그날을 위하여 그들은 오늘의 슬픔과 괴로움을 짓씹으며 살며 싸우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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