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9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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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심부를 동서로 가르며 흐르는 한강은 오랜 세월 하천정리를 하지 않아 온갖 오수와 곤충류들의 서식장으로 변해있었다.

아마도 선조들은 동북쪽으로 떨어진 강원도의 태백산줄기에서 시작하여 단양, 충주, 양평, 서울, 김포 등의 지방을 거쳐 서해의 강화만으로 흘러드는 우리 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이 강의 덕을 입어보려고 해발고가 낮은 분지모양의 이 지대에 한양이요, 한성이요 하는 이름들을 번갈아붙이면서 도읍으로 발전시켰던것이겠으나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불어나 강바닥의 감탕과 모래알들이 대안으로 마구 범람하는것만은 봉건왕조때나 일제때나 변함이 없었고 미군이 진주한 오늘날에는 오히려 더했다.

그때문에 갈대만 무성해진 하류의 습지대에서는 여름을 맞이한 온갖 벌레들이 기여나와 저마끔 자기의 먹이감을 노리고 부딪치고 때리며 처절한 싸움을 벌리고있었고 군데군데 뒤엉킨 하루살이무리들이 허공에서 윙윙 떠돌며 이 복잡한 소동에 반주를 울려주고있었다.

점점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번져가는 감탕에 묻힌 땅은 그 옛날에 있었다는 노아의 홍수가 또 한번 휩쓸어 이 모든 잡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기를 간절히 바라고있는듯 했다.

《폭풍, 오래지 않아 터지리라 폭풍이!…》하는 고리끼의 시구절을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였다.

남조선의 민주세력들중에서는 김구의 한국독립당 다음으로 명망이 있는 사회당위원장 조소앙이 감탕이 침습한 기슭을 따라 늘어진 뚝길우에 서있는 낡은 《시보레》차안에서 이 무질서한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조소앙은 해방전과 해방직후 《림정》 외무부장에 한국독립당의 부위원장으로서 김구의 가까운 측근이였는데 그 시절에 벌써 조소앙의 해박한 식견과 정치가적자질은 사람들속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여기에 남달리 큰 체구와 예순을 갓 넘긴 혈기왕성한 몸가짐, 훤칠한 풍채에 걸맞는 능란한 언변으로 하여 남조선정계와 민중속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런것으로 하여 해방직후에 남조선좌익계에서는 려운형이, 우익민족주의세력에서는 조소앙이 으뜸가는 인물로 공인되여있었다.

그때문인지 지금까지 김구와 조소앙간에는 때로 견해에서의 불일치와 정치가로서의 호상간의 미묘한 알륵도 생겨 대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소앙도 지난해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여서는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에 한몸바치기로 결심하고 김구와 함께 반미구국투쟁의 길을 걷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구가 먼저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였던것이다.

청천벽력과 같은 그 소식을 들은 조소앙은 너무도 놀랍고 믿어지지 않아 그가 살해된 경교장의 2층서재에까지 찾아올라가보았었다. 김구의 비서가 조소앙을 안내하며 그날 있은 일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었다.

김구가 사살된 그날은 일요일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괴뢰군장교로 근무하고있는 아들 김신이 38도선에서 무장충돌이 일어났다는것으로 하여 부대에 불리워나가고 없었다. 그때 《한국》군이 38도선이북의 은파산을 공격하여 차지했다는걸 보아 아마 그 전투에 동원되였던 모양이라고 조소앙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수 있었다. 아침내껏 김구는 2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독서를 하였다. 이날은 별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헌병》대에 근무하는 장교 한명이 찾아와 한시간정도 김구와 마주앉아있다가 돌아갔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거의 되였을 때 안두희가 몹시 흥분된 얼굴로 들어왔지요. 그는 그때 포탄깍지로 만든 꽃병 두개를 례물로 가지고왔는데 백범의 큰며느리인 안미생녀사는 소름이 끼친다고 하면서 당장 내다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이미 우리 비서 한사람이 안두희의 요구대로 다른 하나의 포탄깍지에 꽃을 꽂아 백범선생의 방에 가져다놓은 뒤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두희가 무엇때문에 포탄깍지로 꽃병을 대신하라고 가져왔는지 참 모를 일입니다.》

조소앙은 비서를 따라 서재에 들어가 그 포탄깍지를 보았다. 옆에 있는 비취색도자기꽃병에는 꽃이 없었다. 거기에 있던듯싶은 초롱꽃이 포탄깍지에 옮겨져있었는데 이미 시들어 죽어버린 뒤였다. 의식이 없는 꽃도 화약내가 배인 포탄깍지속에서는 살고싶지 않았던 모양이였다.

도대체 안두희가 무엇때문에 저런걸 선물로 들고왔댔는가.

《용서하십시오. 경찰들이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고 해서 별수없이 저 저주스런 〈꽃병〉을 그냥 두고있습니다.》

조소앙은 저 꽃병아닌 《꽃병》이 안두희가 김구에게 쏘아박을 총탄세례의 전주곡이 아니였던가싶었다. 아니, 그보다도 리승만이 김구를 비롯한 평화통일세력에게 주는 그 어떤 상징적표식처럼 느껴졌다. 바로 리승만은 다가오는 미래를 저 하나의 포탄깍지로 그려보이고있는것이 아닌가. 포연과 전쟁, 이것이 이 나라의 래일임을 보여주려고 한것이 아닌가.

《평소에 한독당에 소속된 군인들이 많이 드나들었으므로 선우진비서도 별로 의심을 가지지 않고 직접 안두희를 김구의 방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그후 인차 방에서 총소리가 났지요. 점심식사하러 지하실에 내려갔던 우리 비서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뛰쳐나오는데 누구인가 우에서 달려내려오며 〈야단났소. 빨리 올라오시오.〉하고 절통하게 부르짖는게 아니겠습니까.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하더군요.》

비서들이 뛰여들어갔을 때 백범 김구는 걸상에 기우뚱하니 기대고앉아 두눈을 지긋이 감고있는 상태였는데 평소에 끼군 하던 안경이 약간 삐뚤서하게 기울어져있었다. 마치 책을 보다 자리에 앉은채로 잠간 잠이 든듯 한 모습이였다. 눈물범벅이 된 비서 한명이 달려들어 김구를 잡아흔들었는데 그 순간에 김구의 입이 움지럭이며 검붉은 피덩어리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백범을 저격한 안두희는 미처 도망질을 못하고 격노한 사람들의 뭇매질에 반주검이 되여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상한것은 마치 그것을 다 알고 기다리고있었던듯 괴뢰군 《헌병》대차가 갑자기 나타나 쓰러진 안두희를 실어간것이였다.

당시에는 모두가 한절반 얼혼들이 나간 상태여서 누구도 그 일을 가지고 가타부타할 생각을 못했다.

《이 자리요?》하고 조소앙은 김구의 비서에게 고개를 돌리며 서탁과 마주한 팔걸이걸상을 가리켰다.

《네, 바로 그 자리에서 백범은 안두희의 총에 맞았습니다. 세발의 총탄이 여기, 바루 여기에…》

김구의 비서는 그때 일을 또다시 상기하자니 눈물이 왈칵 치받쳐 자기의 가슴 한쪽을 손가락으로 간신히 찔러보이고는 입을 싸쥐고 돌아섰다.

사람들은 그때 서두르며 의식을 잃은 김구를 바닥에 조심히 눕혀놓았다고 한다. 그다음 살펴보니 김구는 안두희가 쏜 세발의 흉탄을 맞았었다. 한방은 김구의 입술을 스쳐 혀를 반쯤 잘랐고 다른 한방은 상해시절 부상당했던 오른쪽가슴을 뚫었고 또 한방은 아래배를 관통하여 치명상을 입혔었다. 결국 김구는 아무런 손도 미처 쓸새없이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운명하였던것이다.

《그만하오.》

조소앙은 흐느끼고있는 김구의 비서에게 위로하듯 말하고나서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는 현관으로 들어가는 층계밑에서 한참동안 허공을 올려다보며 거칠어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에서는 김구의 방에서 보았던 죽은 초롱꽃이며 그것을 담고있던 포탄깍지가 그냥 얼른거렸다.

그는 자신을 겨우 수습하고 한국독립당 상무위원들과 함께 경교장에 꾸려놓은 김구의 빈소를 찾아갔다. 각계의 민주인사들이 그곳으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리승만의 지령을 받은 서울시장과 《헌병》사령관까지 찾아왔다.

김구의 빈소를 지켜 까딱않고 서있던 조소앙은 그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곁에 있던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이고 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인 조완구는 참지 못하고 그자들을 향해 무섭게 소리쳤다.

《이놈들, 이 살인마들! 왜 백범만 죽이느냐, 우리모두를 다 죽여라!》

서울시장과 《헌병》사령관은 자기들의 멱살이라도 거머쥘듯 한 조완구의 분노에 찬 모습앞에 어쩔바를 모르고 허둥대다가 황급히 나가버렸다. 도적이 제발 저린 격이였다. 조소앙은 그 모양들을 보며 이번 암살사건에 리승만과 그의 측근부하들이 관여한것이 분명하다는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그런데 잠시후에는 바로 그 리승만이 《국무총리》와 프란체스까까지 데리고 빈소에 나타났다.

조객들의 한가운데로 버젓이 걸어들어온 리승만은 김구의 사진앞에서 짐짓 고개를 푹 숙이고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리승만은 이어 빈소에 모인 각계 인사들앞에 무슨 연설이라도 할듯한 자세로 나섰다. 김구의 급사가 뜻밖이라느니, 《한국》은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느니 하는 그의 말이 역겹게 들려왔다. 조소앙은 침착해지려고 애써 마음을 다잡고있었으나 조완구는 이번에도 두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금시 앞으로 달려나가 리승만의 귀뺨을 후려칠 기세였다. 조소앙은 누구도 모르게 손을 뻗쳐 떨고있는 조완구의 손을 잡아주었다. 리성을 잃지 말라는 무언의 당부였다.

리승만은 그것도 모르고 마치 큰 배려나 돌려주듯이 김구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도록 하겠다고 선포하고있었다.

《백범선생과 같이 민중의 신망을 안고있는 오랜 정치활동가에게 우리는 응당한 례의를 차려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백범의 장례식을 국가적인 의식으로, 우리 대한민국의 국장으로 치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것입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백범과 더불어 이 한국의 운명을 위해 정치활동을 해온 이 리승만개인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대답이 없었다. 감사의 인사는커녕 알겠다는 무뚝뚝한 대답조차 없었다. 이것은 리승만에 대한 로골적인 불신과 분노의 표현이였다. 리승만도 그 눈치를 챈듯 했다. 《대통령》의 위신이 순식간에 땅바닥에 떨어질것 같은 우려가 든 그는 또 다른 속에 없는 소리를 몇마디 우물거리다가 시간이 바쁜척 하며 황급히 빈소에서 떠나갔다.

김구의 죽음으로 분노할대로 분노한 한국독립당 성원들은 김구암살의 책임을 감추어보려는 리승만의 얕은 수를 즉석에서 깨달았다.

조완구가 나서서 김구를 죽인자들이 《국장》을 운운하는것은 말도 안된다고 주먹을 내흔들며 부르짖었다.

《옳습니다.》

조소앙도 조완구의 그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였다. 토의끝에 결국 김구의 장례는 남북협상파의 한국독립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련맹, 조소앙의 사회당을 비롯한 80여개 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과 광범한 각계층 인사들로 무어진 국민장위원회가 주관하기로 하였다.

국민장위원회에서는 이전날 왕의 장례에 따른 9일장의 관습을 받아들여 7월 4일 국민장을 거행하기로 하고 국민장위원회 위원장일을 조소앙에게 위임하였다.

그때부터 조소앙은 김구의 빈소에서 살다싶이 하며 김구의 국민장준비에서 제기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처리하여왔다. 그로서는 김구의 죽음이 남의 일같이 여겨질수가 없었다. 김구와 함께 당리당략을 앞세우면서 평양의 조국전선결성호소에 응하지 못한것이 마음에 걸렸다. 김구나 자기가 미국과 리승만세력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껏 노력해왔으나 놈들은 끝내 김구를 제거해버린것이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총구가 이제 곧 자기에게로 돌려질것 같은 위구심도 들었다.

이래저래 기분이 흐려진 조소앙에게 이번에는 집에서 안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이 찾아와 중요한 문제로 조소앙선생과 담화를 할게 있으니 다문 1시간만이라도 시간을 내주기 바란다고 한다는것이였다. 필경 김구의 암살경위를 조사한다는 형식이라도 내외에 보여주자는것이 아니면 체포된 소장파 《국회의원》들에 대한 문제때문일것이다.

그 인물들속에는 김구의 한국독립당뿐아니라 조소앙의 사회당에 소속된 당원들도 있었던것이다. 그까짓 경찰들의 형식적인 조사를 처리하는것쯤은 별로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였다.

조소앙은 경찰이 불러서라기보다는 이런저런 생각에 시달리느라 머리가 쑤시는데다가 며칠동안 김구의 빈소를 지키면서 장의식준비를 하느라 잠을 설친 피로까지 겹쌓여 다문 한겻만이라도 쉬려고 차를 불러 자기 집이 있는 돈암동으로 향하였다. 그러다가 이 인적없는 한강변에서 맑은 공기라도 좀 마시고 가려고 차를 세우게 한것이였다. 그러나 맑은 공기는커녕 오물더미같은 강변에서 몽쳐돌아가는 하루살이 무리만 바라보다가 길다란 한숨을 내쉬고 운전사에게 차를 몰라고 일렀다.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썩은 내가 풍기는 한강변이 점점 멀어져갔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세판단에 민감하고 타고난 정치가라고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수완과 능력이 뛰여난 조소앙은 처음으로 당면한 눈앞의 일도 알수 없는 막막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집에 도착한 조소앙은 쓰고있던 중절모와 단장을 안해에게 넘겨주고는 찾아온 경찰들이 기다린다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기다리는것은 경찰들이 아니라 너무도 낯익은 사람들이였다.

《용서해주십시오. 중요한 문제를 토의해야겠기에 남들이 알가봐 경찰들이 찾는것으로 해달라고 제가 안주인님에게 부탁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은 조소앙과 자주 만나군 하는 리병우였고 그곁에서 가볍게 고개숙여 인사하는 준수한 모습의 사나이는 성시백이였다.

평양의 조국전선결성사업을 외면한것때문에 조소앙은 그들앞에 나서기가 저으기 거북스러운감도 없지 않았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리를 권하고는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물론 김구선생에 대한 저격사건때문에 왔습니다.》하고 리병우가 대답하였다.

륙척장신의 조소앙은 초물로 만든 팔걸이걸상에 저먼저 기대앉으며 뒤따라 자리에 앉는 성시백과 리병우를 매우 랭철한 눈길로 굽어보았다.

《그래 무슨 단서라도 쥔것이 있소?》

이번에도 리병우가 말없이 앉아있는 성시백을 흘끔 쳐다보고 그를 대신하여 대답해주었다.

《네, 우리가 알아본데 의하면 이번 사건의 범인인 안두희는 본명이 최준석으로서 평북 룡천군 룡하면 동산동 402번지에 적을 두고있는 월남도주자입니다. 안두희가 미국놈들의 끄나불이고 한국독립당에 들어간것이 김구선생을 제거하기 위한 사전준비의 한고리였다는것도 증명되였습니다. 리승만의 고문이고 미국무성 직원인 공화당원 니코라쓰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중에 우리 사람이 한명 있는데 그가 보내온 자료에 의하면 그 니코라쓰가 리승만과 짜고 〈국회〉 소장파를 탄압하는 동시에 백범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다고 합니다. 암살이 있기 6일전에 안두희가 국방장관 신성모와 함께 리승만의 부름을 받고 경무대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이번사건은 전적으로 리승만이 미국과 결탁하여 조작해낸것입니다. 물론…》

지금껏 입을 다물고있던 성시백이 손을 들어 무엇인가 이야기를 계속하려던 리병우를 제지시키며 입을 열었다.

《김구선생이 피살된것은 전적으로 선생의 존재가 나라의 분렬을 꾀하는 리승만과 미국의 대조선정책집행자들에게 방해가 되였기때문입니다. 아마도 백범선생이나 소앙선생은 리승만의 이와 같은 탄압을 우려하여 이번에 평양에서 진행되는 조국전선결성대회에 참가하지 못했을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승만은 백범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리승만역적패당과는 그 어떤 론리적타당성을 론하며 대상할수 없다는것을 이제는 소앙선생도 깨달았으리라고 봅니다. 이런 놈들과는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난 소앙선생이 김구선생의 죽음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았으리라고 봅니다.》

조소앙은 침착한 어조로 말하는 성시백을 피뜩 흘겨보았다. 그 역시 이번일을 통하여 여러가지로 생각되는것이 있어 일정하게 자신을 가책하고는 있었지만 정작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게 되니 국민의 인망을 모으고있다는 정치가로서의 자부심이 훼손되는것 같아 말투가 거칠어졌다.

《그러니까 이 조소앙을 비판하고 단죄하려고 오셨소그려. 혹시 그것이 평양의 뜻은 아닌지요?》

성시백보다 리병우가 참지 못하고 즉시에 반발해나섰다.

《설사 우리가 정말 그래서 왔다고 해도 소앙선생이 불쾌해하실 리유는 없다고 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남북의 정치가들이 어떤 간고한 로정을 거쳐 성사시켰던 남북협상입니까. 그런데 이번에 한국독립당이나 사회당의 원로분들은 평양에서 진행한 조국전선결성을 외면하였으니 이제 와서 그 어떤 변명을 해도 그 책임을 회피할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소앙선생 개인의 견해가 어떻든 이것은 겨레의 평화통일념원을 외면한것으로서 씻을수 없는 자기보신적인 과오입니다.》

그 마지막말에 조소앙은 불에 덴듯 흠칠했다. 메스처럼 날카로운 그 지탄에 무엇이라고 할 말이 없었다.

조소앙은 석으로 깎아만든 조각상이 되여버렸다. 감정도 언어도 없는 사람형체의 딱딱한 물건 하나가 걸상우에 놓여있는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하오. 소앙선생이 아무렴 부석 하나를 찾겠다고 바위돌을 깨뜨릴 옹졸한 정치가가 되였겠소.》

리병우를 가볍게 나무라는 성시백의 목소리는 오히려 조소앙을 더 무섭게 채찍질하였다.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깃들었다. 서로 사색하고 가책하고 상대를 파악하기 위한 맹렬한 두뇌활동만이 소리없이 진행될뿐이였다.

《그래서…》하고 조소앙은 성시백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자는건가요? 물론 나는 리병우선생의 그 지탄에는 할말이 없소. 그러니 민족을 위한 그 무엇을 론할 체면도 없다는것이겠지요? 이제 와선 민족의 리익을 저 하나의 안전을 위해 외면한 정치인이 되고말았으니 더는 이 소앙이나 백범이 떠들어댄 민족정신을 믿을수가 없다는것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는건 더 큰 잘못으로 될겁니다.》하고 성시백은 표표한 기색을 띠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시 앞에다 침을 뱉고 뛰쳐나갈것처럼 서늘한 기운을 내풍기는 그를 조소앙은 놀랍게 바라보았다.

《소앙선생도 평양방송을 들어 아실테지만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백범이 원쑤들의 흉탄에 맞아 잘못되였다는것을 아시고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 그날 진행하기로 예정되였던 조국전선결성대회마저 뒤로 미루시고 참가자들전체가 조의를 표하도록 하시였습니다. 백범이나 소앙선생이 비록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조국전선결성대회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이 하나의 사실만 가지고서도 장군님께서 너그럽게 리해하시고 여전히 믿음을 주고계신다는것을 알수 있지 않겠습니까.》

《…》

《자, 이걸 보십시오.》

성시백이 품속에서 꺼내놓은것은 평양에서 보내온 조국전선의 평화통일선언서였다. 원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서기국을 통해 특별우편으로 천여통의 선언서를 남조선의 각계층 인민들과 기관, 애국적민주인사들과 괴뢰국회, 남조선주둔 미군당국과 《유엔조선위원단》에까지 발송하였다.

그런데 이 선언서가 남조선의 광범한 대중속에 퍼져나가는것을 두려워한 리승만이 경찰과 반동단체들을 동원하여 북에서 들어오는 선언서를 모조리 압수하도록 하다나니 성시백도 몹시 힘들게 입수하였었다.

《이걸 읽어보면 우리 장군님의 민족대단결의 사상을 더 잘 알수 있고 장군님께서 조소앙선생을 비롯한 남조선의 민주인사들에 대하여 여전히 커다란 기대를 품고계신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도 그렇고 소앙선생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이 해야 할 일도 명백해지리라 봅니다.》

조소앙은 한동안 성시백이 내밀어준 선언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 선언서를 조심히 집어들고 읽기 시작할 때까지에 그의 가슴속에서는 심각한 번뇌의 소용돌이가 일어번졌다. 그러나 선언서를 다 읽고나서는 그보다 몇갑절 더 격한 파도가 일어났다.

성시백은 조소앙이 선언서의 내용들을 한자한자 따져가며 다 읽기를 인내성있게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선언서에 대하여 제가 그 어떤 설명을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한마디만은 꼭 말하고싶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조선민족내부문제는 조선민족자체가 모여앉아 허심탄회하게 론의하여 풀어나가야 한다는것을 시종일관 주장하고계시며 그를 위해 세계도 다 담을 넓은 도량을 베풀고계십니다. 장군님께서는 이전날 민족앞에 죄를 지었던 사람들도 오늘날 외세를 배격하고 통일을 념원하는 립장에 선다면 그가 누구든 다 받아들이고 함께 투쟁해나가기를 원하고계십니다. 그래서 한생 반공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온 김구선생을 숨이 진 오늘까지도 잊지 못하고계시는것이고 소앙선생도 여전히 민족앞에 떳떳한 길을 걷기 바라고계실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있습니다. 물론 장군님께서는 이전날의 공적이 어떠했든 오늘날 민족앞에 씻을수 없는 죄를 짓고 반역의 길을 기어코 걸으려는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 회계는 회계대로 명백히 하실것입니다. 언제인가 김구선생이 북의 정치가 인정선정 다 베푸는 좋은 정치라고 말한적이 있는데 그 인정선정이라는건 원쑤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대는 식의 그리스도적인 자비도 아니고 그 어떤 령도권획득에서 오는 승리자의 관용도 아닙니다. 공화국정부의 원칙, 김일성장군님의 민족구원의 원칙은 그 선언서에 그대로 깃들어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언서를 통하여 내가 찾은 진리입니다. 물론 저는 저의 생각을 소앙선생에게 강요하려고 찾아온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만하시오!》

조소앙은 끝내 울림이 좋은 그 류창한 저음으로 성시백의 말을 가로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서성거리다가 다시 제자리에 와앉았다. 그 짧은 시간에 그는 온갖 번뇌와 자가당착의 파도를 헤쳐넘는 괴로움에 모대기고있었다.

마침내 그의 의식에서 번뇌는 사라지고 파도도 지나갔다. 장막처럼 드리웠던 어둠이 사라지며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흘러들었다. 아직은 눈앞이 환히 들리는 새날은 볼수 없었으나 무성한 잡초밭사이로 뻗어나간 한가닥의 오솔길은 분간할수 있었다. 조소앙은 이제 그 길을 따라 걸음을 내짚어보기로 했다. 그것은 그의 가슴속에서 움트기 시작한 새로운 희망의 싹이였다. 그 길을 따라가면 해빛밝은 큰길이 나질지, 천길낭떠러지가 나질지는 가봐야만이 알수 있는것이다.

단 한가지 명백한것은 자기가 그 길을 보지 못하고 사방에서 번식하는 온갖 잡초들에 포위되여 동요하고 주춤했었다는 사실이였다.

《내 민족앞에 죄를 지을번 했소. 그리고 또 김일성장군님앞에서도…》하고 조소앙은 진중한 어조로 성시백의 앞에 자기의 심중을 터놓았다.

《요새 복잡한 일들을 너무도 많이 겪다나니 신경이 예민해졌던것 같소.》

조소앙은 평화통일선언서를 들고 그것을 다시한번 내리훑고나서 고개를 끄떡였다.

《좋소. 당장은 조국전선에서 내놓은 이 선언서를 지지하여 리승만의 집권욕과 전쟁도발행위를 규탄하겠소.》

《제 말을 리해해준다니 고맙습니다. 하지만 조소앙선생, 제 생각엔이 평화통일선언서는 어디까지나 평양에서 내놓은것이므로 이것을 로골적으로 지지하면서 리승만과 정면대결해서는 안될것 같습니다. 리승만이 매놓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올가미에 걸려들어 소앙선생의 사회당도 탄압을 당할수 있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백범이나 소앙선생이 조국전선결성에 선뜻 응하지 못한것도 바로 그런 후과가 빚어질가 우려되여서일수도 있다는것을 다 짐작하시고 선생들의 신변에 루가 미칠가봐 걱정하고계실것입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들의 신변을?》

《지난해 남북련석회의때 장군님께서 하신 말씀들과 이번에 조국전선결성을 통해 장군님께서 내세우신 원칙적문제들을 연구해보십시오. 그러면 저의 말이 결코 꾸며낸 거짓이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을것입니다.》

조소앙은 눈을 감고 앓음소리 비슷한것을 입술사이로 내쏟았다.

장군님께서 그렇게 너그럽게 리해해주신다니 그래도 정치가라 자처하던 자신이 부끄럽기 그지없었고 다시는 이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서게 되였다. 조소앙은 지금까지 견지해보려고 애쓰던 자존심을 집어던지고 이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성시백에게 대책을 요구했다.

《제 생각은 조소앙선생이 너무 심각해져서 지금까지의 정치활동방식을 바꿀 필요는 없다는것입니다. 문제는 방식이 아니라 목적이지요.

소앙선생이야 신축성있는 활동방식의 선구자라고 볼수 있지 않습니까.

한때 미국이 조작한 남조선〈민선의원〉의 허위성을 다 알고있으면서도 한국민주당의 김성수를 락선시키려고 우정 급작스럽게 선거에 나서서 다수의 지지표를 얻어 당선되고는 슬쩍 사퇴해버려 미국놈들을 골탕먹인적도 있지요.》

《별말을 다 하누만. 사실 그땐 장군님을 만나뵙기 전이여서 동서남북도 모르고 그저 물덤벙술덤벙한데 불과하지요.》

장군님께서는 지난해 조소앙선생도 참석했던 그 쑥섬협의회때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남조선에서의 반미투쟁을 합법적투쟁과 비합법적투쟁을 배합하여 벌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김구선생을 비롯한 〈림정〉계 인사들은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리승만의 탄압을 피하면서도 그의 단독〈정권〉을 반대하기 위해 북에서 내놓은 공화국창건을 위한 총선거운동에 불참석, 불반대의 립장을 표명하고 리승만의 단독〈정부〉수립책동에는 불참석, 반대의 태도를 보였댔지요.

이번에도 역시 공개적으로는 북의 이 평화통일선언서에 불참석, 불반대의 립장을 표명하고 미제의 북침전쟁계획을 반대하는 합법적투쟁을 계속 줄기차게 벌려나가야 할것입니다. 그러면 미군과 리승만세력이 트집을 걸어도 원칙적으로 정정당당하게 주장할수 있습니다. 즉 평양에서 결성대회를 가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남쪽의 서울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고있는 한국독립당이나 민족자주련맹, 사회당이 참가하기가 힘든것이다, 그러니 불참가한것이다, 평화통일선언서의 내용을 누가 전해준 사람도 없고 당국에서는 평양방송도 못 듣게 하며 북에서 보냈다는 편지도 모조리 압수했으니 그 내용은 알수 없으나 평화통일선언이란 말은 전쟁하자는것은 아니니 우리 남북협상파세력은 그것을 반대할 리유가 없는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역시 다르구만. 내노라 하는 정치가라 자처하는 이 조소앙이도 생각 못할 명처방이요.》

《저야 그저 장군님의 뜻을 헤아려보고 그대로 하려고 말했을뿐인걸요. 조소앙선생이 백범선생의 국민장위원장이라니 당면해서는 그 장의식을 계기로 서울시민들속에 평화통일과 남북협상정신의 정당성을 널리 선전하여 전쟁과 분렬을 꾀하는 원쑤들에게 타격을 안겨줍시다. 나도 조소앙선생을 힘껏 돕겠습니다. 우선 리승만이 공포에 떨며 한사코 밀막으려고 한 이 평화통일선언서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어 조소앙선생의 사업을 측면에서 지원하겠습니다.》

《감사하오. 선언서가 이남민중에게서 불러일으킬 반응이 어떻겠는지는 두고보아야겠지만 이 길이 갈길이라는것만은 명백하다고 보오.》

조소앙은 성시백의 두손을 모두어잡았다. 언변도 좋고 웅변력도 뛰여난 그였지만 별스럽게 석쉼해진 목소리로 《내 선생을 잊지 않겠소.》

하는 단마디 말을 쏟아놓고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상 조소앙에게는 그 말을 릉가하는 더 다른 어휘를 찾아낼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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